소설리스트

105화 (105/131)

***

신년제 전날 밤까지 루비아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자신이 불태워 버린 유언장의 필체처럼 담담하게 신년제에 참석할 준비를 마쳤다.

***

신년제가 열리는 날, 아침.

제국은, 적어도 아쉴레앙 공작저는 조금은 무겁고 눅눅한 분위기 속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루이먼드는 일찍 일어나 목욕하고, 오늘을 위해 준비한 예복을 갖춰 입었다.

누군가를 추모하듯 차분한 검은색 바탕에 금박, 백합 문양의 금단추를 단 재킷과 바지. 북부의 설원을 상징하듯 풍성한 하얀색 모피는 어깨에 둘렀다.

그리고 자잘한 백합을 한 움큼 묶어 만든 부토니에를 가슴에 꽂았다.

부토니에의 끝에는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만 한 단검이 묶여 있었다. 그 단검 부분이 포켓 속으로 쑥 들어가 사라졌다.

고작 두 마디짜리 단검.

숙련된 암살자라면 모를까, 칼질이라고는 접시 위 스테이크를 썰 때 말고는 해 본 적 없는 사람이 들고 휘둘러 봤자, 누굴 죽이긴커녕 작은 상처 하나 낼 수도 없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황제 앞에서 휘두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정도 단검으로도 사람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죽일 수 있었다. 황제 말고, 황제에게 이걸 휘두른 사람을.

이걸 들고 황제에게 덤벼든다면, 황제의 양편에 서 있는 두 공작 중 누구라도 몸이 먼저 반응하여 미숙한 암살자의 목을 뎅겅 잘라 버릴 테니까.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런 죽음이면, 충분했다.

루이먼드는 거울 속에 비친, 파리한 안색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거울 속, 은발에 검은 눈을 가진 사내가 루이먼드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넌 다시 비아를 만날 수 있어.

만약, 네게 아홉 번째가 없다 해도 무슨 상관이겠어? 어차피 이 세상엔 비아가 없는데.

“그래, 맞아.”

루이먼드는 거울 속 사내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여덟 번의 삶 만에 처음으로, 죽음이 기대되었다. 기다려졌다.

루이먼드는 그 죽음을 맞이하고자, 자신이 최고로 아름답게 꾸민 황궁으로 갔다.

신년제는 보통 한 해가 끝나는 시점, 혹은 새해가 시작하는 날에 열린다.

하지만 제국의 신년제는 달랐다.

제국의 신년제는 겨울이 되기 전, 늦가을에 열렸다. 옛 아덴 왕국이나 아직 명맥을 유지하는 주변 왕국들이 추수제를 여는 시점이었다.

어째서 신년제를 이때 여는 것일까?

제국의 역사가 시작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았건만, 누구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학자의 집 출신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정복 전쟁을 시작할 때 썼던 전략에서 유래했다는 것이었다.

새벽 전쟁 후 칼레나는 바로 인근 왕국들을 정복해 나갈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신년제를 치른 후 정복 전쟁을 시작할 거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굳이 예배당에 찾아가서 신께 맹세를 드리기까지 했다.

첩자를 통해 거짓 정보를 전달받은 이웃 왕국들은 신년제가 열리는 새해까지는 못 해도 반년 이상 남았으니, 천천히 전쟁에 대비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안심했다.

그리고 늦가을, 인근 왕국들이 모두 방심했을 때 칼레나가 움직였다.

칼레나는 추수제 대신 신년제를 올리고는 바로 인근 왕국들을 쳐들어갔다. 신년제를 하긴 했으니, 신께 바친 맹세를 어긴 것은 아니었다.

미처 전쟁 준비를 하지 못한 이웃 왕국들은 손쉽게 무너졌다.

역사의 연속성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황제가 이 기만책을 기념하고자 계속 신년제를 가을에 여는 거라고 주장했다.

역사의 의외성을 중시하고, 일상의 사소한 행동이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거라고 믿는 학자들은 내무국장의 과로로 인한 오류설을 주장했다.

아덴 왕국을 무너뜨리자마자 바로 정복 전쟁이 시작되는 바람에 행정 업무에 과부하가 걸렸다. 당연히 신임 내무국장은 격무에 시달렸고, 그러던 어느 날.

내무국장은 졸다가 추수제 준비 서류를 신년제라고 작성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내무국장만큼이나 피곤에 찌들어 있던 관리들은 벌써 신년제 할 때가 되었나 보다 생각하며 서류에 적힌 대로 신년제를 준비했고, 그래서 추수제 대신 신년제가 열렸다.

내무국장을 총애하는 황제는 그 실수를 재미있어해서, 이후 계속 신년제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환경이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황제가 동부 출신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드넓은 밀밭을 자랑하는 동부는 신년제보다 추수제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어느 지역에서는 신년제를 안 지내고, 추수제를 두 배 더 크게 지내기도 한다던데.

동부의 관습에 익숙한 황제가 생명이 죽는 겨울 말고 수확의 계절인 가을을 한 해의 끝, 그리고 시작으로 두고 싶어 한 건 아닐까?

여러 설이 분분한 가운데, 제국은 아무튼 가을이 끝날 즈음마다 신년제를 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신년제에 세 공작이 모두 참석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쉴레앙 공작이 늘 이러저러한 이유로 수도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제국의 큰 행사인 신년제 때마다 자리를 비우는 이유는 왜 신년제가 가을에 열리는지에 대한 이유와 달리 분명했다.

정복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국경선을 순회하며 반란 세력들을 정리하기 위해. 마수와 범죄자들이 들끓는 북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황제와 제국의 백성, 귀족들은 누구나 그 이유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올해도 아쉴레앙 공작은 제국의 신년제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황제도 귀족도 백성도, 그녀의 부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황궁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평민과 귀족들은 아쉴레앙 공작이 죽었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쉴레앙 공작이 죽었다는데 슬퍼해야 하나?’

‘언제부터, 얼마나 슬퍼해야 하는 거지?’

‘북부의 괴물 공작이 정말로 죽었다고?’

백성은 우왕좌왕했다. 귀족들은 검은 드레스와 정장, 베일을 꺼내 들고, 이것을 입고 신년제에 가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발표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드러내 놓고 아쉴레앙 공작의 죽음을 슬퍼하지 못했다.

귀족들은 황제의 눈치를 보며 화려한 보석을 삼가고, 어두운색의 드레스와 정장을 입었다.

귀족들의 차분한 차림새와 달리, 신년제 연회가 열리는 황궁의 홀은 그 어떤 신년제보다 화려하고 우아했고, 파격적으로 아름다웠다.

최근 유행하는, 앞으로 유행할 게 분명한 세련된 장식들이 어느 것 하나 튀지 않고 절묘하게 어울리며 연회장을 장식했다.

세 공작을 상징하는 은장 백합과, 검은 튤립, 철십자 장미가 연회장 곳곳에 놓였다.

황제가 앉는 상석에는 황금을 부어 만든 의자를 놓았다. 의자엔 드래곤의 가죽을 자수정과 다이아몬드 장식으로 고정했다.

문에서 상석까지 깐 융단은 피처럼 붉은 공단이었다.

그 화려한 연회장에서 단연 돋보이는 최고의 장식은, 은발 흑안의 미남자, 루이먼드였다.

그는 더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청초하고 처연했다.

길게 흘러내리는 찬란한 은발은 한때는 그가 아덴 왕의 핏줄이었다는 증명이었으나 이제는 그가 은장 백합을 가문의 문장으로 삼는 아쉴레앙 공작가의 사람이라는 징표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온통 백합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크라바트를 고정한 핀, 재킷에 달린 단추마다 은장 백합이 새겨져 있었다. 부토니에마저 백합을 엮어 만든 것이었다.

나쁜 말로 하면 발악, 애써 좋은 말로 포장하면 간절함이 느껴졌다.

떠난 주인을 그리워하며 주인의 체취가 묻은 옷을 끌고 와 웅크리고 잠든 대형견 같아 보였다.

그가 이 연회장을 아름답게 꾸민 당사자라는 것. 이 연회장에서 가장 빛나는 장식이 그라는 것. 그리고 그가 죽었는지도 모를, 아쉴레앙 공작의 부군이라는 것.

어떤 이유 때문에라도 그는 이번 신년제 최고의 관심사였다.

그를 쳐다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 번만 쳐다본 사람도 없었다.

아예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를 한 번만 훑어보고 고개를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연회장 안에는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였다. 그의 미모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그와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고 친분이 있는 사람도, 생판 모르는 남도, 모두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지 못했다.

“아쉴레앙 공작 부부가 꽤 금슬이 좋았다던데.”

“그러게요, 폐하께서 반대했는데도 공작이 결혼을 강행했다지요? 그래서 폐하와 아쉴레앙 공작 간에 사이가 꽤나 안 좋아졌다고…….”

“확실히 저 정도 미모라면, 폐하의 진노를 사더라도, 한번 품어 봄 직하네요.”

“저 슬픔에 젖은 얼굴을 보세요. 하아, 내가 열 살만 젊었다면 용기를 내어 위로해 주었을 텐데.”

아내를 잃고 슬픔에 잠긴 미인을 희롱하는 질 낮은 목소리가 더러 본인에게까지 닿았다. 하지만 어떤 말도 내리깐 속눈썹조차 들어 올리지 못했다.

어떤 소리를 들어도, 어떤 노골적인 시선이 저를 훑어도, 루이먼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연회장에 놓인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 같던 루이먼드를 움직인 건 황제와 두 공작이 도착했다는 시종의 외침이었다.

황제와 두 공작, 카드릭과 루단테가 입장했다. 귀족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비켜서서 길을 만들고 고개를 숙였다.

보라색 망토를 두른 칼레나는 타고난 지배자였다. 뒤따르는 카드릭과 루단테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해 보였으나, 칼레나는 두 사람의 존재감마저 아울렀다.

연회장의 귀족들은 잠시나마 루이먼드의 미모를 잊고, 칼레나를 우러러보았다.

어떤 귀족들은 감히 칼레나에게서, 또 두 공작에게서 슬픈 기색을 찾고자 시도했다. 그 모습을 통해 정말 아쉴레앙 공작이 죽은 게 맞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칼레나도, 카드릭과 루단테도, 전혀 그런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칼레나는 언제나처럼 여유롭고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고, 카드릭과 루단테는 굳은 얼굴,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뒤따랐다.

“지독하네요. 하나뿐인 언니가 어떻게 되었……”

“쉿!”

“두 공작도 여전하군. 역시, 소문일 뿐인 건가? 하긴, 정말 아쉴레앙 공작이 잘못되었다면 이렇게 태연하게 신년제를 열었을 리 없지.”

“그럼 아쉴레앙 공작 부군은 뭐야?”

“원래 좀 우울해 보이는 미인 아니었던가?”

아쉴레앙 공작이 죽었을 거라 확신한 귀족도, 긴가민가했던 귀족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수군댔다.

평소 헛소리를 지껄이는 귀족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가볍게 비꼬며 무안을 주었던 칼레나가 그들을 그냥 지나쳤다.

늘 근엄한 표정을 짓는 카드릭이지만, 오늘 그의 얼굴은 유독 더 차가웠다. 다른 귀족들을 깔보며 비웃던 루단테 역시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변화를 알아채는 귀족들은 거의 없었다. 다들 그냥, 신년제의 진중한 분위기에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것뿐이라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생각한 소수의 귀족 중엔 루이먼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루이먼드는 점점 가까워져 오는 황제를 보며, 이전에 단둘이 만났을 땐 보지 못했던 창백한 분노를 읽어 냈다.

칼레나는 감히 제 속내를 들여다보려 하는 루이먼드를 발견하고는, 그의 앞에 섰다.

수군대던 소리가 단번에 사그라들었다. 연회장에 가득 찬 귀족들의 눈과 귀가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훌륭해.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겠어.”

황제가 연회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루이먼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겨우 대답했다.

그토록 바랐던 한마디였다. 황제의 인정을 받았건만, 루이먼드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루비아나와 같은 색, 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녹색 눈을 마주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그 녹색 눈이 자신의 검은 눈과 비슷한 감정으로 일렁이고 있는 걸 봐야 하는 게 고통이었다.

“…….”

“…….”

두 사람은 짧은 순간, 서로가 같은 감정, 같은 상심을 경험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칼레나는 꼴 보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

루이먼드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신년제를 준비하며 여러 번 칼레나에 대한 감정이 바뀌었다. 루비아나가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신년제를 강행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용서할 수 없었다.

‘비아가 당신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데.’

나쁜 동생, 못된 폐하라며 투덜대면서도 얼굴엔 늘 웃음이 가득했다. 하나뿐인 동생을 향한 숨길 수 없는 애정.

그걸 아무 대가 없이 받아먹는 칼레나가 부러웠다. 그런 언니를 도구처럼 이용하는 칼레나가 미웠다.

제일 위험한 북부에 보내고, 툭하면 서류를 마차째로 보내 밤늦게까지 일하게 하고, 끝내는 죽게 만들었지 않은가?

루이먼드는 아직도 루비아나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황궁에 다녀와서는 말에서 내려 저택 안으로 들어갈 틈도 없이 훌쩍 떠났다. 동생이자 황제인 칼레나의 명령을, 그렇게나 절대적으로 따랐다.

그 대가는 죽음이었다. 추모조차 받지 못하는 죽음.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살아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신년제를 준비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이곳에서 신년제가 아니라 추모식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살아 있길 바라나, 죽음이라도 영예롭게 추모되길 바라는 마음.

칼레나는 그 마음을 황제답게 짓밟았다. 루비아나를 사지로 보내 죽였으면서, 루비아나의 시체를 찾아 장례식을 치를 생각도 하지 않고 신년제를 강행했다.

루이먼드는 그런 황제가, 루비아나의 동생이 미치도록 이해되면서도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다.

어쩌면 황제는 지금 황제가 된 이래 가장 황제다운, 하지만 황제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북부의 수호자. 제국의 건국 공신. 황제의 하나뿐인 언니. 제국의 굳건한 세 수호자 중 하나.

루비아나의 빈자리는 이제 막 건국한 제국을 휘청이게 만들기 충분하다.

그녀의 빈자리를 메꿀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기까지 공언하지 않는 것.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

지극히 정치적인 행보였다.

하지만 정말 정치적인 계산뿐인 걸까?

어쩌면 황제는 루이먼드처럼 하나뿐인 언니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루이먼드가 간절히 바랐듯 루비아나가 신년제 때 갑자기 툭 나타나길 바라는 게 아닐까?

‘아, 이번엔 진짜 죽을 뻔했지 뭐야. 설마 내가 진짜 죽은 줄 알았던 건 아니지? 하긴, 그랬으면 신년제를 안 열고 내 장례식을 열었겠지.’

이렇게 말하며 하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길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이해와 원망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상처가 남겠네.”

수그린 머리 위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했다. 하마터면 손으로 목을 감쌀 뻔했다.

최대한 크라바트를 높게 둘러맸건만, 상처를 완전히 가리지는 못한 듯했다.

칼레나의 시선이 오래도록 목에 난 상처에 머물렀다. 루이먼드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살짝 비꼈다.

“언니가 못 왔으니, 대신 내 곁에 서면 어떨까?”

칼레나가 물었다. 제안인 것처럼 들리지만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영광입니다.”

루이먼드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새삼 황제가 자신을 루비아나의 남편으로, 아쉴레앙 공작 부군으로 인정해 주는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는 듯, 가슴에 손을 얹고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손끝에, 부토니에에 숨겨 놓은 단검의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바라던 죽음이 가까이에 왔다. 루이먼드는 눈동자만 굴려 카드릭과 루단테의 허리춤에 검이 매여 있는지 확인하고는 작게 웃었다.

칼레나가 단상 위에 올라 드래곤 가죽으로 덮인 황금 보좌에 앉아 귀족들을 내려다보았다. 두 공작과 루이먼드는 그녀의 뒤에 기둥처럼 섰다.

루이먼드는 귀족들을 눈으로 훑으며 그레이움 백작과 오딜 후작을 찾았다. 두 사람 다 외모의 특징이 뚜렷한 터라 금방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실수로라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게 어색해 보였다.

‘정말 사이가 안 좋은 건가?’

루이먼드는 마차에 뛰어들어 하소연하던 그레이움 백작을 떠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겠어?’

반란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레이움 백작과 오딜 후작의 사이가 틀어지거나 말거나. 전혀 상관없었다. 루이먼드는 아예 눈을 돌렸다.

신년제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대신관이 단상 아래에 서서 황제와 제국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도문을 읊었다.

커다란 은쟁반을 받쳐 든 하인, 하녀들이 재빨리 귀족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연회장을 누볐다.

은쟁반에는 포도주가 든 술잔이 가득했다. 귀족들은 누구나 술잔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루이먼드는 의욕 없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얼굴이 낯설었다.

그럴 수밖에. 그들은 원래 황궁에서 일하던 자들도, 아쉴레앙 공작저에서 일하는 고용인들도 아니었다. 대부분 시녀장이 어디선가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신년제 규모가 크다 보니 황실의 하인, 하녀들만으론 일손이 딸렸다.

예전엔 펠트하르그 공작가의 사람들을 데려다 썼다던데, 시녀장은 귀족들의 연회를 대신 준비해 주는 전문 업체가 있다며 그곳에서 사람들을 데려왔다.

‘결혼식 준비도 대신해 주는 곳도 있는데, 연회를 대신 준비해 주는 곳도 있겠지.’

루이먼드는 시녀장을 믿었기에 그녀의 추천대로 그들을 연회장에 세웠다.

평소의 루이먼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시녀장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한 번 확인하지도 않고 지나치다니. 하지만 이번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년제 준비는 여느 귀족의 결혼식 준비와 달리 혼자 준비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또한 준비 기간 내내, 루이먼드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였다.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힘든 상황에서, 제 몸을 추스르지도 않고 생명력을 깎아 가며 겨우겨우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 부분을 시녀장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시녀장이 준비한 하인, 하녀들은 은색 술이 달린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하나같이 어깨가 떡 벌어지고 몸이 좋아 하얀 연미복이 잘 어울렸다.

그들은 힘차게 걸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오랫동안 함께 훈련받아 온 병사같이 절도 있었다. 연회장에 풀어놓은 은빛 연어 떼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주 수상쩍었으나, 루이먼드는 그들을 의심할 만한 의욕이 없었다.

‘리먼스 부인이 알아서 잘했겠지.’

단상 위로도 하인이 올라왔다. 하인은 제국 최고의 권력자들 앞에서도 떨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생글생글 웃어 보이며 은쟁반을 내밀었다.

칼레나와 두 공작, 그리고 루이먼드는 피처럼 붉은 술이 든 잔을 하나씩 골라잡았다.

연회장 안 사람들이 모두 잔을 들자, 대신관은 기도문을 불태웠다. 얇은 종이로 된 기도문은 화르륵, 불에 타 허공에 흩어졌다.

사람들이 손에 든 잔을 높이 들어 올리고는 허공에 흩어진 재를 술잔으로 받으려는 듯 그대로 잠시 멈췄다.

“제국에 무궁한 영광이 함께하기를!”

단상 아래 귀족들이 한목소리로 외치며 잔을 단숨에 비웠다. 누구 하나 예외는 없었다. 신년제의 포도주는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자에게도 허용되었다.

“폐하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합니다.”

두 공작이 잔을 비우고,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충성을 맹세했다.

비운 잔을 내려놓는 행동에서 성격이 드러났다. 카드릭은 바닥에 가만히 내려놓았고, 루단테는 치울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잔을 던져 버렸다. 쨍그랑.

“…….”

루이먼드는 잠시 망설이다가 술잔을 입에 댔다.

역시나. 바로 구역질이 밀려왔다.

루이먼드는 술은 입에 대지도 않고 잔을 내려놓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부토니에를 움켜쥐었다. 백합이 손안에서 형편없이 구겨졌다.

일어설 때, 부토니에를 빼 들어 칼레나에게 덤벼들 생각이었다. 그럼 두 공작 중 누군가는 검을 빼 들어 감히 황제를 암살하려 한 사생아의 목을 벨 터.

‘그러면 돌아갈 수 있겠지. 또 그때로.’

부디 아홉 번째 삶이 있기를.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때에도 루비아나를 찾아가 계약 결혼을 제안할 것이다.

좀 더 능숙하게, 어설프지 않게 사랑을 고백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혹시 어긋날지도 모르니까 이번이랑 똑같이, 조금도 다르지 않게 루비아나에게 말할 것이다.

“겨, 결혼해 주세요.”

이번에도, 제발.

“절대, 절대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루비아나를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속이 조금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다들, 고개를 들지.”

칼레나가 말했다.

루이먼드는 몸을 일으키며 부토니에를 뽑아 들었다. 그대로 칼레나에게 달려들려 할 때였다.

“큭.”

칼레나가 인상을 찡그리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손에 들고 있던 포도주잔이 바닥에 떨어졌다. 입가에서 포도주처럼 붉은 피가 흘렀다.

꺄아악. 비명이 울려 퍼졌다.

“폐하.”

“폐하!”

두 공작이 칼레나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몇 걸음 못 걸어 고꾸라졌다.

“폐하를 지키…… 컥.”

“이게 무슨, 큭.”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피를 토했다.

단상 위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어억!”

“크허헉!”

“사, 살려……!”

귀족들이 하나둘,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쨍그랑, 쨍그랑. 빈 술잔들이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그 위로 시뻘건 피가 뿌려졌다.

연회장은 금세 핏빛으로 물들었다.

“커헉, 수, 숨이, 숨이!”

“살려, 줘!”

“허억!”

귀족들이 바닥에 쓰러져 꿈틀댔다.

멀쩡하게 서 있는 건 연회장의 연어 떼들, 은술을 두른 하얀 연미복을 입은 하인과 하녀들뿐이었다.

“으아악!”

“사, 사람 살려!”

그들 중 일부는 이 상황을 이해 못 해 두리번거리고 비명을 질렀다.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연어들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어 그들을 죽였다. 황궁의 하인, 하녀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쓰러졌다.

“아덴의 배신자들!”

“죽어서 아덴 왕께 사죄하라.”

“아덴 왕국 만세!”

연어들은 피 묻은 단검을 들고 사방으로 흩어져, 아직 죽지 않은 귀족들의 심장에 칼을 박았다.

“크윽, 젠장.”

칼레나는 휘청이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어떻게든 몸을 가누려고 애썼고, 찬란한 금발이 허공에 출렁였다. 그녀는 아주 좋은 표적이었다.

와장창.

단상 위에 올라왔던 연어 한 마리가 은쟁반을 집어 던지고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그 찬란한 표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덴 왕국의 영광을 위해!”

“어, 딜!”

“크윽, 감히!”

두 공작은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황제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커억!”

칼레나와 두 공작 말고, 연어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연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는 굳은 목을 꺾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절 공격한 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 째서, 당신, 께서……?”

연어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상대는 애초부터 그에게 어떤 믿음을 준 적도 없었건만.

푹. 루단테의 검이 그의 목을 그었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연어는 제 목을 움켜잡을 새도 없이 고꾸라졌다.

하얀 연미복 등판에 뭔가 박혀 있었다. 백합으로 손잡이를 감싼,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짧은 단검. 그것이 칼레나와 두 공작의 눈에 들어왔다.

허억, 허억. 루이먼드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부토니에를, 단검을 쥐고 있었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욱, 우윽.”

루이먼드는 그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헛구역질했다.

‘내가, 사람을 죽였어.’

늘 남에게 죽임당하기만 했지 누굴 죽인 건 처음이었다.

첫 살인의 충격은 강렬했다. 아무것도 못 먹어 텅 빈 속이 뒤집히고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제법인데. 덕분에 살았어.”

칼레나의 목소리 때문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루이먼드는 고개를 들어 칼레나를 바라보았다.

칼레나는 카드릭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괜, 찮으십니까?”

“방금, 그쪽이 내 목숨을 구해 줬잖아.”

퉷. 칼레나가 피를 뱉어 내며 나직이 말했다. 동시에 단상 아래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렸다.

“사, 살려 줘!”

칼레나와 두 공작, 루이먼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쪽을 돌아보았다.

단상 위쪽과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그레이움 백작을 지키겠다며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정도?

그레이움 백작이 지키거나 그레이움 백작을 지켜 줘야 하는 세 아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진 지 오래였다.

그들의 몸이 푸들푸들, 간헐적으로 떨렸다. 하지만 그게 아직 살아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레이움 백작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림자의 주인은 오딜 후작이었다. 그는 아직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검을 들고 있었다.

흰 예복을 입고 있는 그의 주변으로, 피 묻은 연어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연어 떼를 이끄는 대장 연어였다.

자신이 대장 연어라고 생각했던 피라미는 소중한 세 아들을 잃고, 그 자신도 죽을 위기에 처하고 나서야 자신이 이용만 당했음을 알아차렸다.

“어, 어째서 나를…… 나마저?”

“새롭게 일어설 아덴 왕국의 왕에게 탐욕스러운 할아버지 따위가 있어서야, 곤란하지 않겠소?”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레이움 백작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오딜 후작과 더 대화를 나눠 봐야 살아남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아무튼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빨랐다.

그는 루이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 루이, 살려 다오. 루이! 네 할애비가 지금, 주, 죽을 위기…… 커헉.”

루이먼드가 그 손을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기도 전에, 오딜 후작의 검이 그레이움 백작의 몸을 관통했다.

“새 아덴 왕국의 재건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충신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거요, 그레이움 백작.”

그의 생각에 그레이움 백작은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아덴 왕국에 더 이로울 듯했다.

오딜 후작이 그레이움 백작의 엉덩이를 밟고 검을 뽑았다.

한때 폭군의 충신이었으며, 누구보다 빨리 칼레나에게 항복하여 그럭저럭 총애를 받았던 제국의 백작.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감히 왕의 조부를 꿈꿨던 탐욕에 비하면, 너무 값어치 없는 마지막이었다. 한낱 개돼지를 죽일 때도 저렇게 성의 없이 죽이지는 않을 터이니.

“윽.”

루이먼드는 이를 악다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실망해 절연장을 보냈다고는 하지만, 피 섞인 조부였다. 자신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모습에 정이 떨어지긴 했으나, 이런 식으로 죽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왜 다 죽는 거지?’

루비아나에 이어 그레이움 백작까지.

지난 일곱 번의 삶에서 그레이움 백작이, 아쉴레앙 공작 루비아나가 죽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었다. 루이먼드가 무슨 짓을 하든지, 어떻게 도망치든지, 두 사람은 잘 살았다.

‘이런 반란이 일어난 적도 없었어. 단 한 번도.’

너무 빠르게, 일어나선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루비아나의 죽음, 반란, 그레이움 백작의 죽음.

‘……설마?’

루이먼드는 겁에 질린 눈으로 칼레나를 바라보았다.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긴 하지만, 칼레나는 피를 토하고 있었다.

‘황제도, 죽을 수 있다는 건가?’

안 그래도 창백한 루이먼드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안 돼, 그것만은 절대 막아야 해.’

황제가 죽는다면, 두 공작 역시 나란히 죽게 될 것이다. 반란은 성공할 것이고 루이먼드는 오딜 후작의 허수아비 왕이 될 것이다.

리사나와의 결혼을 강요받고, 나아가 잠자리를 강요받으리라. 그의 역할은 오직 리사나의 배 속에 아덴 왕의 핏줄을 잉태시키는 것뿐.

아이가 태어나면 쓸모없어졌다는 이유로 죽임당할지도 모른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다만, 두 공작 말고 다른 이의 손에 목이 잘리는 것만은 사양이었다.

‘난 펠트하르그 공작이나 도미넨트 공작에게 목이 잘려 죽어야 해.’

그러니 반란은 성공하면 안 된다. 황제도, 두 공작도 죽어선 안 된다. 그들은 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자신의 목을 잘라야 한다.

‘황제를 대피시켜야 해.’

다급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오딜 후작과 눈이 마주쳤다.

“……!”

“모시러 왔습니다, 루이먼드 왕자님.”

오딜 후작이 손목을 돌려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말했다. 목소리도, 동작도, 어디 한군데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는 첫째 왕자의 검술 스승이었다. 루단테가 이름을 알리기 전까지 아덴 왕국 제일의 검사로 불렸던 자이기도 했다. 탐욕스러운 그레이움 백작을 해치우는 것 정도로는 숨이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영감탱이, 폼만 살아서는.”

루단테는 이를 갈며 검을 고쳐 잡았다. 당장이라도 오딜 후작에게 달려들 기세였으나 정말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독을 먹었고, 황제를 지켜야 했다.

루단테는 자신이 단지 제국 제일의 기사이기만 한 게 아니라, 도미넨트 공작이기도 하다는 걸 잊지 않았다.

“내가 최대한 막아 볼 테니까, 폐하를. 응?”

루단테가 카드릭에게 눈짓했다. 카드릭이 하나뿐인 눈을 찡그리며 대답하려는 순간, 루이먼드가 나섰다.

“폐하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뭐?”

루단테가 인상을 찡그렸다. 뒷말은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너 따위가?’

“난 독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검을 다룰 줄 모른다.

남아 있어 봤자 싸우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니, 독을 먹지 않아 멀쩡한 몸으로 칼레나를 부축해 달아나는 게 옳다. 일곱 번이나 도망쳤다 죽어 봤던 경험자의 노련한 계산이었다.

루이먼드는 자신이 적임자라는 걸 더 설명하는 대신 칼레나의 손을 붙잡았다.

칼레나는 피식 웃었고, 루이먼드는 칼레나의 한쪽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문 쪽으로 달렸다.

루이먼드는 거의 칼레나를 번쩍 들다시피 했다. 덕분에 칼레나는 덜그럭덜그럭 끌려가지는 않았다.

“잡아라, 놓치지 마라.”

오딜 후작이 외쳤다.

그가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은 누구일까? 황제? 아니면 폭군의 유일한 핏줄? 루이먼드는 등 뒤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연어 떼는 루이먼드가 자신들 편에 서기는커녕 칼레나와 함께 달아나는 것을 보고는 당황해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오딜 후작이 두 번 명령할 때까지 미적거리지는 않았다.

연어들이 움직였다.

“그렇겐 안 되지.”

“감히 폐하를 노려?”

카드릭과 루단테가 앞을 막아섰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 텐데, 감히 내 앞길을 막으려 하다니.”

오딜 후작이 그들을 비웃었다.

“너희가 먹은 독이 무엇인지 아는가?”

“알 리가 있나, 뭔지 말해 주고 먹인 거 아니잖아?”

루단테가 이죽이며 오딜 후작에게 달려들었다. 카드릭은 묵묵히 연어들을 베며 루단테가 후작에게 바로 갈 수 있도록 지원했다.

루단테와 오딜 후작의 검이 맞붙었다. 엇갈린 검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먹자마자 죽는 독은 아니었다.”

“그래? 덕분에 이렇게 살아 있네. 참 고마워.”

“그렇게 쉽게 죽여 줄 수는 없지. 점차 독이 온몸으로 퍼지면서 혈관이 들끓고 사지가 뒤틀리는 고통을 맛보며 천천히 죽게 될 것이다, 반역자들이여.”

“하이고! 늙은이, 지금 소설 써? 누구 앞에서 그딴 삼류 희극에 나오는 악당이나 할 법한 말을 하고 앉아 있는 거야?”

쿨럭. 루단테가 피 섞인 기침을 토하며 비죽 웃었다.

기침하면서도 눈은 오딜 후작에게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검을 든 자세 또한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딜 후작은 그 뛰어난 실력에 감탄하면서,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 빛나는 재능을 반역에 써먹다니.”

“아까부터 자꾸 반역 반역 하는 거 말이야, 오딜 후작.”

“그럼 반역자에게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인가?”

“글쎄?”

루단테가 킥, 웃으며 그그극- 검을 긁어 뒤집었다. 오딜 후작이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물러서는 틈을 노려 쇄도했다.

오딜 후작은 공격을 막는 데 급급하며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섰다.

쿨럭. 루단테가 피를 한 움큼 뱉어 낸 뒤 무릎을 살짝 굽혔다 펴며, 그 반동으로 뛰어올라 오딜 후작의 머리 위를 내리쳤다.

“우리 쪽에선 당신이 반역자여서 말이지. 반역자에게 왜 반역했냐는 소리를 들으니 참, 기분이 더럽네.”

“새 나라를 세우고 새 작위를 가진다고 신하 주제에 왕을 죽인 반역죄가 지워질 것 같으냐!”

“오, 고리타분한 말. 진짜 연극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계속해 대네. 그래, 그래서 루비 누나를 죽였어?”

루단테의 눈이 번뜩였다.

아쉴레앙 공작이 북부에서 죽었다. 직후 신년제에서 반란 세력이 황궁을 급습했다.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완벽했다. 반역의 정석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네 짓이지? 루비 누나를 죽인 게?”

루단테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검을 휘둘렀다. 다시 두 검이 맞붙었다.

“큭.”

루단테의 검을 받아 낸 오딜 후작의 손이 떨렸다.

“독이, 퍼질 때가 되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힘이?”

“아, 독. 퉤.”

루단테가 피 섞인 침을 뱉으며,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독, 드래곤의 피보다 센가?”

“……뭐?”

오딜 후작은 처음엔 루단테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설마!”

“응, 그 설마.”

“……!”

“원하는 대로 쉽게 죽여 주지는 않을게. 차근차근, 혈관이 들끓고 사지가 뒤틀리는 고통을 맛보며 천천히 죽게 해 줄 테니까.”

“당장, 당장 뒤를 쫓아라. 더는 시간을 끌어서는……”

후작이 급히 연어들에게 소리쳤다. 그런 그를 보며, 루단테가 서늘하게 웃었다.

“기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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