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회장 밖 상황은 안보다 더 나쁘면 나빴지, 좋지는 않았다.
길목마다 지키고 서 있던 병사와 시종들은 대부분 죽어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은 곳곳에서 연어 떼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폐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폐하를 보필하라!”
싸우고 있던 기사와 병사들은 칼레나를 보자마자 고함을 질렀다. 반가워서 그런 것이겠으나 연어들에게 칼레나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이기도 했다.
기사들은 길목을 막아서고 연어들을 제 몸으로 막으며, 여분의 병력을 쥐어짜 두 사람에게 붙여 주었다.
하지만 길목을 돌 때마다 여지없이 쏟아져 나오는 연어 떼를 상대하기 위해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폐하를 부탁드립니다!”
“폐하를!”
그들이 연어 떼를 막는 사이, 루이먼드는 기를 쓰고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며칠째 물 몇 모금, 수프 한두 숟갈 말고는 먹은 게 없는데 무슨 힘이 있어 이렇게 뛸 수 있는 건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위기 상황에 닥치면 마수 같은 힘이 솟구친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듯했다.
“황궁 구조를 잘 알고 있군.”
루이먼드가 자신의 기적 같은 체력에 감사하는 동안, 칼레나는 루이먼드의 또 다른 기적 같은 모습을 지적하며 킥킥 웃었다. 그러다 쿨럭쿨럭, 피 섞인 기침을 토했다.
자꾸 기침하긴 하지만, 그녀는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힘없이 루이먼드의 어깨에 척 하니 걸쳐져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루이먼드의 속도에 맞춰 제 발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안색이 창백했고, 말 한마디 할 때마다 피 섞인 기침을 토해 내기 바빴다. 그래서 루이먼드는 칼레나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십니까? 당연히 제가 잘 알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루이먼드가 피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이를 악물었다.
제국의 황성은 아덴 왕국의 왕궁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증축하긴 했지만, 황제가 머무르고 귀족들이 오가는 내부는 아덴 시절의 구조 그대로였다.
그래서 루이먼드는 예전에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바로 가 루비아나와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이번에도 제 집 드나들듯 요리조리 도망 다닐 수 있었다.
연어들에게 쫓겨 도망 다니는 상황에서 궁의 구조를 잘 알고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익숙하다는 의미는, 그레이움 백작과 오딜 후작에게도 익숙하다는 의미였으니까.
골목마다 버티고 있다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오는 연어들을 보아하니, 반란 세력은 아덴 왕궁이었던 황성의 구조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그동안 뭘 하신 겁니까? 아덴 왕국의 왕궁 따위 다 허물어 버리고 새로 짓든지, 그냥 놔두고 쓸 거면 좀 많이 고치기라도 하든지 하지!”
“바빠서 그럴 틈이 없었어.”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 곳인데 황궁부터 제대로 지었어야지요. 이놈의 왕성 따윈 다 때려 부수고!”
루이먼드가 이를 갈며, 진저리 치듯 말했다.
아덴 왕국의 왕궁은 루이먼드에게 단 한 번도 좋은 기억인 적이 없었다.
제국을 새로 세웠다기에 왕궁 따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줄 알았건만. 처음 황궁에 왔을 때, 그대로인 모습을 보고 얼마나 당황했던가?
그가 이 왕궁을 얼마나 끔찍하게 싫어하는지는 칼레나에게 충분히 전달됐다.
“이번에 살아남는다면, 그쪽의 충언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칼레나는 신하의 하찮은 소원을 들어주듯 가볍게 말했다. 쿨럭쿨럭, 피 섞인 기침을 하면서.
“불확실하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살아남으실 겁니다.”
“아아.”
“아아, 말고 그래, 라고 대답하셔야 합니다.”
루이먼드가 끙차, 칼레나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살려야 한다!
칼레나는 자신을 살리고자 강한 의지를 불태우는 루이먼드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날 지키려고 애쓰는 거지? 그대는……”
“네, 네에. 망할, 폭군의 사생아이자 현재로선 그 폭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핏줄이고, 반란군들이 반란에 성공하면 자신들의 왕으로 세울 허수아비 후보이지요.”
“…….”
정확하게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칼레나가 그런 표정을 지었다.
루이먼드의 예쁜 이마 위에 힘줄이 빠직, 솟았다. 누가 누굴 바보 보듯 보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멍청한 줄 알아? 비록 학자의 집에서 매번 낙제점을 받았고, 피오니의 발끝의 때만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난, 반란군 세력들이 번번이 기회만 노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 아덴 왕국의 왕궁을 그대로 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 걸까? 루이먼드는 더는 칼레나가 무섭지 않았다.
칼레나 앞에만 서면 맹수 앞에 선 토끼처럼 바들바들 떨며 큰 귀를 감추기 바빴던 그 사내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칼레나는 제법 건방지게 말하는 루이먼드에게 무엄하다고 타박하는 대신,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러고는 루이먼드가 그냥 지나치려고 했던 복도를 손으로 가리켰다.
“침실에 비밀 통로가 있어. 그리로 가지.”
“……그것도 아덴의 것을 그대로 남겨 둔 건 아니겠지요?”
‘설마. 비밀 통로 정도는 새로 만들었겠지. 생명이랑 직결되는 거잖아. 암살 위험도 있고.’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왜 이리 마음이 쿵쾅쿵쾅 뛰는 걸까? 루이먼드는 불안한 눈빛으로 칼레나를 바라보았다.
칼레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맙소사!”
“새로 뚫을 시간이 없었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루이먼드는 울컥했으나, 참았다.
지금은 황제랑 새로운 비밀 통로의 필요성에 관해 토론할 때가 아니었다.
‘나도 알고 있는 걸, 그들이 가만 놔뒀을까?’
심장 한쪽이 서늘하고 불안했지만, 칼레나의 말처럼 지금으로선 침실로 도망치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황궁 안을 뱅뱅 돌 수는 없었다. 밖으로 나갈 수는 더더욱 없었고. 안전한 곳에 틀어박혀 지원군이 오길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황제의 침실은 루이먼드가 알기로, 이 황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정 아닌 것 같다 싶으면 비밀 통로를 폐쇄하고, 문을 단단히 잠그고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 보자.’
무려 황제의 침실이다. 가 본 적은 없지만, 칼레나가 말하는 걸 보아하니 아마도 아덴 왕의 침실을 그대로 쓴 듯한데 폭군의 침실이라면 루이먼드도 아주 모르지만은 않았다.
폭군은 기분에 따라 남을 죽이는 살인마였지만, 그런 주제에 제가 죽는 것은 두려워하는 겁쟁이였다.
폭군은 자는 중에 암살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침실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육중한 문을 걸어 잠그면 누구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침실에서 성밖으로 연결된 비밀 통로 역시 누군가 그 통로를 이용해 안으로 기어들어 올까 봐 안에서 걸어 잠가 폐쇄할 수 있도록 따로 장치를 만들어 두었다.
루이먼드가 알기로, 그건 오딜 후작도 그레이움 백작도 모르는 일이었다. 폭군은 침실을 보수하는 일만큼은 철저히 기밀에 붙이고 측근인 오딜 후작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 작업을 맡은 건 어느 충성스러운 자작이었다.
그 자작은 침실 개조 작업이 끝난 후 숙청당했고, 그렇게 폭군의 침실에 대한 비밀은 영원히 비밀로 묻힐…… 리가 없었다. 폭군은 그걸 바랐겠으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사라지지 않았다.
루이먼드가 폭군의 침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폭군이 그래도 핏줄이라고 특별히 말해 주어서가 아니었다. 숙청당한 자작은 어느 백작 부인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고, 그 백작 부인이 늙은 자작을 상대하다 지루해지면 루이먼드를 침대에 끌어들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 속에 폭군의 침실 개조 작업 내용이 섞여 있었다.
‘왕궁을 그대로 재활용했으면 침실도 그대로 놔뒀겠지.’
루이먼드는 그 튼튼한 침실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황제의 침실 앞에 섰다.
굳게 닫혀 있어야 하는 침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주변을 지키는 기사도, 시종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연어 떼가 몰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체도 피도 보이지 않았다.
유독 이곳만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아직 반란 세력이 여기까진 오지 못한 것 같습니다.”
루이먼드는 오직, 연어 떼가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 안심하며 말했다.
“글쎄.”
칼레나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으나, 루이먼드가 절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막지는 않았다.
침실 안에 시종장이 서 있었다. 그는 정확히 비밀 통로가 있는 벽 앞에 서서, 비밀 통로를 여는 장치를 만지고 있었다.
루이먼드는 시종장이 황제를 피난시키기 위해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저들이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한 건가? 다행이다.’
신은 황제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 듯했다.
“시종……”
장님, 이라고 부르기 직전.
비밀 통로가 열렸다. 대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비밀 통로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당연하게도 황제의 기사단은 아니었다. 황제와 황궁을 지키기 위해 달려온 지원군도 아니었다.
은술이 달린 흰 연미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황궁을 어지럽히고 있는 은빛 연어 떼와 같은 세력이라는 건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입은 검은 갑주 위에 옛 아덴 왕국의 문장이 선명히 그려져 있었으니까.
설령 그 문장이 없다 해도 루이먼드는 그들을 지원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장한 검은 연어 떼의 제일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 무척이나 익숙했으니까.
“……오딜 후작 영애?”
리사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높이 치켜 묶고 검은 갑주를 입은 그녀가 황제의 침실에 우뚝 섰다.
“어서 오십시오.”
그리고 시종장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그녀를 맞이했다. 칼레나가 아니라 리사나를.
“역시.”
칼레나가 쯧, 혀를 찼다.
‘역시?’
루이먼드는 아연해졌다.
‘반란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건가?’
그럴 리가.
만약 그랬다면 신년제를 열지 않았거나 최소한 독은 먹지 않았어야 했다.
루이먼드는 황제가 독을 먹은 것도 모자라 믿었던 최측근에게까지 배신당해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닌가 의심했다.
‘일부러 반란을 놔두고 독을 먹은 게 아닌 이상에야……설마?’
깨달음은 한 박자 늦게 찾아왔다.
루이먼드는 제멋대로 흘러가는 생각을 강제로 중단했다. 이 생각은 위험하다. 머릿속에서 경고가 울렸다.
“제때 통로를 열어 주었군요, 고마워요.”
리사나가 시종장을 치하했다.
“…….”
시종장은 묵묵히 고개만 숙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드님의 원한은 제가 갚아 드리지요.”
리사나는 시종장을 스쳐 지나가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고는 칼레나와 루이먼드, 정확히는 루이먼드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일부러 찾아다녀야 하는 수고를 덜어 주어서 고마워요.”
윽. 루이먼드는 진저리 치며 뒷걸음질 쳤다. 여덟 번의 삶을 통틀어 가장 소름 끼치는 순간이었다.
충분히 절망스러운 상황이었으나 루이먼드는 바로 무너지지 않았다. 혼자였다면 금방 포기해 버렸을지 모르나, 지금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난 끌려가도 황제는 살아야 해. 잡히면 안 돼.’
루이먼드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둘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문은 아직 반쯤 열려 있었다.
들어올 때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도로 나가도 얼마 동안은 연어들과 마주치지 않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오딜 후작을 해치우고 온 카드릭이나 루단테와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고작 운에 기대야 한다는 게 참담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루이먼드는 비밀 통로에서 쏟아져 들어온 연어 떼를 무찌르고 황제를 지킬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제 몸뚱이를 이용하여 저들이 잠깐 한눈을 팔게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혼자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그 정도는 될 것 같은데, 그건 왜 묻지?”
칼레나가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며 답했다.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카드릭의 부축을 받았던 걸 생각하면, 인간답지 않은 빠른 회복력이었다. 하지만 루이먼드는 그걸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제가 저쪽 창문으로 달려갈 때, 바로 저 문밖으로 나가 도망가십시오.”
“뭐?”
“두 번 말해야 알아듣는 분이셨습니까?”
“……지금 나보고, 그대를 미끼로 삼아 도망치라는 건가?”
“둘 다 잡혀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글쎄, 차라리 둘 다 잡혀가는 게 낫지 않을까? 언니가 알면, 날 가만 안 둘 것 같은데.”
칼레나는 너무 당연하게, 루비아나가 살아 있을 거라는 전제를 깔고 말했다.
루이먼드는 울컥했지만 제 입으로 루비아나, 아쉴레앙 공작은 죽었다고 고쳐 주진 않았다.
젠장. 황제는 알아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곤 이를 갈았다.
“전 괜찮을 겁니다. 아까 오딜 후작이 절 보고 왕자님이라고 부르는 걸 듣지 않았습니까?”
“저쪽 아가씨는 그쪽을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어 안달 난 것 같은데?”
칼레나가 리사나를 턱으로 가리켰다.
아닌 게 아니라 잡히기만 하면 정말 몸째로 잡아먹힐 게 분명했다.
“그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를 악물고 참으려 했지만, 진저리 치는 느낌이 칼레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칼레나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루이먼드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제가 걱정되면 부디, 저들에게 잡히지 말고 무사히 도망가 주십시오. 그래서 이 반란을 막아 주십시오.”
“당연히 그럴 거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황이 안 좋아 장담할 수 없겠는데. 칼레나가 가볍게 말하고 넘겼으나 루이먼드는 확답을 바랐다.
“폐하는 반드시 이기실 겁니다. 제가 살았던 삶 중에 단 한 번도 이 제국이 일찍 무너지거나 황제인 당신이 반란 세력에게 죽었던 적은 없으니까요.”
물론 아쉴레앙 공작이 죽었던 적도 없었다. 하지만 아쉴레앙 공작, 루비아나는 죽었다.
그러니 얼마든 미래는 바뀔 수 있다. 칼레나가 죽을 수도 있고, 오딜 후작의 반란이 성공해 제국이 멸망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루이먼드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나는 그런 거 몰라. 역사학 따위, 항상 낙제점이었다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할 거야.’
그래야지만 버틸 수 있었다.
“내가 죽은 적이 없어? 그게 무슨……”
“그러니까 옛날, 아덴 왕국을 무너뜨렸던 것처럼 저 반란 세력도 싹 쓸어버리고 저들이 새 아덴 왕으로 내세운 절 죽여 주십시오.”
“뭐?”
칼레나가 인상을 찡그렸다. 루이먼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단, 반드시 펠트하르그 공작과 도미넨트 공작, 둘 중 한 명에게 제 목을 치라고 명령해 주셔야 합니다. 그게 제 부탁입니다.”
루이먼드가 칼레나를, 아니, 칼레나의 녹색 눈을 들여다보며 웃어 보였다.
“오늘 신년제 연회장, 꽤 멋졌잖아요? 열심히 준비한 상을 내려 주셔야지요.”
“잠깐.”
칼레나는 상으로 죽음을 내려 달라는 언니의 남편을,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째서 그딴 말을 지껄이느냐고 물어봐야 했다.
“그…… 쿨럭.”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건 말이 아니라 피 섞인 기침이었다.
“젠, 장.”
칼레나는 허리를 굽히며 피를 토해 냈다.
루이먼드는 칼레나를 등 뒤로 숨겼다. 그 모습이 제법 친밀해 보였기에 리사나가 짜증을 냈다.
“두 분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다정하게 하시는 건가요? 루이먼드 님, 분명 예전에 제가 질투가 많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리사나가 해사하게 웃으며 검은 연어들에게 손짓했다.
“작별 인사는 나눈 것 같으니, 모셔 오도록 해요.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아, 물론 우리의 왕이 되실 루이먼드 님만.”
연어 떼가 루이먼드와 칼레나에게 달려들었다.
루이먼드는 칼레나를 문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 뒤 어떻게든 연어 중 한 명의 검을 뺏어 제 목에 대고 시간을 끌려고 했건만.
어느새 문밖에도 연어들이 가득 차 있었다. 검은 갑주를 입고 있는 걸 보아하니, 황궁 내 다른 비밀 통로를 통해 들어온 듯했다.
‘멋있는 척 한번 해 보려고 했더니 망했네.’
루이먼드는 여장 하인으로 살았던 때 익혔던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칼레나는 루이먼드와 등을 맞대고, 문밖의 연어들과 대치했다.
“아까의 기백은 좋았지만 계획이 너무 허술했어. 시작하기도 전에 막혀 버리면 곤란하지.”
칼레나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로 킥킥 웃으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검을 뽑으려는 순간.
콰앙-!
굉음이 울리며, 바닥이 흔들렸다.
‘지진? 폭발?’
칼레나는 서둘러 벽을 잡고 몸을 기댔다.
루이먼드는 몸을 크게 휘청이며 칼레나와 멀어졌다.
칼레나가 루이먼드를 붙들려고 손을 뻗었으나 닿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결국 바닥에 엎어져 뒹굴었다.
루이먼드는 바로 일어나려 했지만, 굉음에 귀가 먹먹해지고 바닥이 계속 흔들려 쉽지 않았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건 리사나와 연어 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루이먼드에 대한 집착은 칼레나보다 리사나 쪽이 더 깊었다. 그 집착이 환경을 이겼다.
“루이먼드 님을 잡아!”
리사나가 비명을 지르듯 명령했다.
연어 떼가 몸을 던져 루이먼드를 붙들었다.
“이런!”
칼레나는 손을 거두고 뒤로 물러서면서도 낭패 어린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도망가세요! 제기랄, 어떻게든 도망가란 말입니다!”
루이먼드는 붙잡힌 김에 달려드는 연어 떼를 몸으로 막아섰다.
사방이 연어 떼로 덮인 상황. 루이먼드의 말대로 도망을 가야 하긴 하는데, 그냥은 불가능했다.
칼레나는 피를 토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열린 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연어 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헉, 헉.”
얼마 움직이지 않았는데 숨이 거칠어졌다.
다행히 몸이 빠르게 회복하고 있기는 한데, 아직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도 칼레나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일대다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기세였으니까.
칼레나는 연어를 발로 차 넘어뜨리고 그 심장에 칼을 박았다. 뿜어져 나온 피가 얼굴을 적셨다.
칼레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씩, 웃어 보였다. 섬뜩해 보였다. 훈련받은 연어들마저 주춤거릴 만큼.
“자, 와라. 오딜 후작이 내 목에 황금 더미 정도는 걸었을 텐데? 목숨을 아끼지 말아야지, 응?”
칼레나가 연어들에게 손짓했다.
이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독에 당한 증거가 아니라, 사신의 표식이었다.
칼레나는 겁먹은 연어들을 족족 베어 내며 문밖으로 전진했다. 검은 연어 떼 너머, 흩날리는 눈부신 은발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루이먼드가 연어 떼들을 막아선 건 잠깐, 아주 잠깐의 일이었다.
연어들은 곧 루이먼드의 팔다리를 한 짝씩 붙잡고 그를 무력화시켰다. 그러고는 루이먼드를 리사나에게 끌고 갔다.
“놔, 놓으라고!”
루이먼드가 발버둥 칠 때마다 연어들이 휘청였다.
보이는 것과 달리, 루이먼드는 꽤 골격이 두껍고 힘이 셌다. 하지만 훈련받은 연어 떼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리사나는 칼레나가 연어들을 도륙하든 말든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어차피 황성은 연어 떼가 점령했다. 연어들이 조금 죽느냐, 많이 죽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황제는 오늘 이곳에서 반드시 죽으리라.
연어들이 루이먼드를 리사나 앞에 무릎 꿇렸다. 어떻게 봐도 루이먼드를 자신들의 왕으로 여기는 태도는 아니었다.
리사나는 손가락으로 루이먼드의 턱을 들어 올렸다.
“…….”
루이먼드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치욕에 떠는 그 처연한 모습이, 얼마나 정복욕을 자극하는지 본인은 알지 못하는 듯했다.
“드디어 내 손으로 돌아왔군요, 루이먼드 님.”
리사나는 황홀하다는 듯 루이먼드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손에 넣을 뻔했다가 직전에 놓쳤다. 그 뒤엔 당연하게도 오딜 후작의 질책이 뒤따랐다.
아버지인 오딜 후작에게 혼나는 것도 싫었지만, 그보다 더 싫었던 건 루이먼드를 손에 넣고 의기양양하게 웃던 루비아나의 모습이었다.
이제 그 루비아나는 죽었고, 루이먼드는 온전히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리사나는 환희에 휩싸여 전율했다.
“진짜 아내의 얼굴을 제대로 보셔야지요, 네?”
리사나가 한껏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루이먼드의 턱을 붙잡아 얼굴을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이제 이 남자는 내 거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남자를 손에 넣었다. 영원히 어떤 여자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리라.
영원할 것 같은 승리감과 정복욕에 한껏 취해 웃음 지었을 때였다.
우와아아아아!
함성이 들렸다.
이쪽으로 돌격해 오는 무리의 발소리에 바닥이 작게 진동했다. 아까의 영문 모를 굉음에 비하면 한없이 소박했으나, 무시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도대체 얼마나 준비해 온 거지? 이 반란 세력이 다 어디에 있었던 거야?’
루이먼드는 황궁을 가득 채운 연어 떼가 지긋지긋하다 못해 치가 떨리게 끔찍해서, 새로운 무리의 등장마저 당연히 연어 떼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뭐가 이상하냐고 물으면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그냥 알 수 있었다. 온몸의 감각이 심장을 쥐고 흔들어 대며 비명을 질러 댔다.
저기에 있다고.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던 그 사람이 저기에 있다고.
이건 이성의 영역이 아니었다. 학문으로도 마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몸을 맞대고 마음을 나누며 감히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꿈꿨기에.
영혼에 각인되어 버린 존재를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루이먼드가 고개를 틀어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은빛의, 혹은 검은 갑주를 입은 연어 떼 너머로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피투성이였지만 누구의 피로도 그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의 찬란함을 덮지 못했다.
“비아?”
부고를 전해 받은 이후 죽어 있었던 검은 눈이 되살아났다.
칼레나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리사나에게 끌려가겠노라 무기력하게 고꾸라졌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비아!”
루이먼드가 몸부림치며 리사나의 손길을 떨쳐 내고 몸을 일으켰다.
“언니?”
루이먼드의 고함을 들은 칼레나 또한 그쪽을 바라보았다.
“루이, 루이먼드 님!”
리사나가 갈고리 같은 손으로 그의 팔을 움켜쥐었으나 루이먼드는 아픈 줄도 몰랐다. 그저 그 횃불 같은 찬란함을 향해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고 했다.
곧바로 우악스러운 손길들에 붙잡혀 바닥에 엎어지고, 대리석 바닥에 얼굴이 처박혔지만.
연어들이 그를 제압했다.
이마를 대리석에 박아 쾅, 소리가 났다. 뭔가 흐르는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살갗이 찢겨 피가 나는 듯했다.
“당장 그 손 떼지 못해!”
리사나가 기겁하며 루이먼드의 머리를 잡아챈 연어의 손등을 칼로 그었다.
연어가 잘린 손을 붙잡고 뒤로 넘어갔다. 덕분에 루이먼드는 다시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루이먼드는 핏물로 덮인 눈을 들어 다시 붉은 머리카락을 찾았다.
그제야 그녀가 제 앞을 가로막은 연어 떼를 베어 넘어뜨리고, 온전히 제 얼굴을 드러냈다.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에 선명한 녹색 눈.
루비아나였다.
일곱 번의 삶 동안 감히 다가가지 못했고, 여덟 번째 만에 겨우 닿았던. 아홉 번째 삶을 꿈꾸게 만들었던 사람.
“살아, 있었어…….”
그녀의 건재함을 확인한 검은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서, 어서 안으로! 일단 루이먼드 님을 모시고 떠난다. 어서!”
리사나가 비밀 통로 쪽으로 몸을 돌리며 명령했다. 연어들이 기다렸다는 듯 루이먼드를 비밀 통로 안으로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겨우 다시 만났는데.
이대로 끌려가면, 다시 만날 순 있을까?
“아, 안 돼. 안 돼!”
루이먼드가 몸부림치며 손을 뻗었다.
그때.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녹색 눈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고 루이먼드는 생각했다.
한없이 추웠다. 졸렸다.
눈앞이 점점 까매졌다. 눈을 뜰 수 없었다. 아니, 눈 뜨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아니, 왜 눈을 떠야 하는지 기억해 내지 못했다.
바닥에서 손이 여러 개 튀어나와 몸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한없이 추락하고 가라앉는 기분.
무서워야 하는데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그래서 이게 죽음이라고 느꼈다. 삶은 열여섯 이후로 한 번도 편안한 적이 없었으니까.
“정말? 단 한 번도?”
누군가 물었다.
그래, 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뭔가 마음에 걸렸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의 무언가가, 아주 소중한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렇게 깊이, 죽음을 닮은 잠에 빠져들려는데, 누군가 손을 잡아 주었다.
작은 온기였다. 어찌나 작은지, 손을 다 움켜쥐지도 못해 검지를 감싸 쥐는 게 고작이었다.
내민 줄도 모르고 내밀고 있던 손을 잡아 준 건, 아주 작은 아이였다.
“어서요, 어서요!”
아이가 손을 잡아끌었다.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아이가 이끄는 대로 이끌려 손을 내밀었다. 좀 더, 조금만 더.
손이 미끄러졌다.
아이를 놓쳤다.
“안 돼!”
다급하게 손을 더 뻗었으나, 아이는 나폴나폴 멀어졌다.
“잠깐, 잠깐만!”
아이를 붙잡고자 있는 힘껏 손을 뻗었건만.
환한 빛이 나타나 아이를 감쌌다. 그 빛 덕에 아이의 동그란 뒤통수가 보였다. 곱슬한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붉은 머리?’
빛에 잠긴 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빠가 기다려요, 어서요.”
생긋 웃는 통통한 볼과 입술이 누군가를 꼭 닮아 있었다.
“뭐?”
놀라 움찔하는 순간.
아이가 사라지고, 빛의 구덩이가 루비아나를 집어삼켰다. 아니, 쑤욱 끌어 당겼다.
“공작님!”
익숙한 미성이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 덥석, 손목을 붙잡았다.
이 거칠거칠하고 딱딱한 감촉은 분명.
‘왕눈이?’
키에에에에에!
왕눈이가 울부짖었다.
“윽, 시끄러.”
루비아나는 고막이 찢어지는 것 같은 울음소리에 괴로워하며 눈을 번쩍 떴다.
샌님처럼 곱상한 파란 눈의 미청년 하나에 수염이 덥수룩한, 북부에 두고 온 다른 놈들 여럿.
“대장, 대자앙!”
“찾았다! 마녀를 찾았다!”
저 아래에서 펄쩍펄쩍 뛰며 손을 흔들어 대는 철없는 것들은 북부인들이었다.
‘왜 저것들이 저기에 있는 거지?’
이 고민은 ‘여긴 어디? 난 누구?’라는 고민과 맞아떨어졌다.
‘아, 나 북부에 왔지.’
루비아나는 기억을 더듬다가 아까부터 귀에 거슬리던 고함을 되새겼다.
‘그나저나, 뭐? 마녀?’
누가 감히 대놓고 그 소리를 지껄인단 말인가?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 단체로 겁대가리를 상실한 게 분명했다.
특히 제일 큰 소리로 “마녀가! 마녀가 살았다!”라고 외치는 놈이 하나 있어, 아주 귀에 거슬렸다.
‘얼굴을 확인해 둬야지. 나중에 반드시 손봐 주마.’
눈을 부릅뜨고 아래를 내려다봤는데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인간들이 하얀 눈밭 위에 콩을 한 움큼 뿌려 놓은 것처럼 작게 보였다.
자꾸 세상이 흔들리기도 했다.
‘뭐야, 지진인가?’
그제야 루비아나는 깨달았다. 자신이 왕눈이의 발톱에 팔이 끼인 채 하늘을 높이 날며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키에에에엑-!
왕눈이가 두 날개를 활짝 펼쳐 하늘을 날며 울부짖었다.
아까처럼 귀가 아프진 않았다. 듣는 인간들 고막 터지지 말라고 강도를 조절해 이렇게 약하게 울다니.
‘기분 좋아 보이네.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루비아나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다가 장벽을 보았다.
돌로 쌓아 올리고 마법으로 꾹꾹 다진 높다란 장벽은 보는 것만으로도 먹먹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뿌듯하기도 했다.
그 장벽의 한쪽이 허물어져 있었다.
처음 장벽을 쌓아 올렸을 때만 해도, 몇백 년은 버티리라 자신했건만.
‘설마 인간이 안쪽에서 폭약을 터뜨려 무너뜨릴 줄은 몰랐지.’
외벽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벽이 약하다는 걸, 무너뜨려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다시 쌓으려면 시간 좀 걸리겠군.’
그때까지 영악한 마수들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야 할까?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려 왔다. 아니, 이 두통은 뇌가 얼었다 녹느라 생기는 건지도 몰랐다.
쯧, 루비아나는 혀를 차며 왕눈이의 다리를 쾅쾅 내리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방만 맞아도 갈비뼈에 금이 가거나 코뼈가 부러지거나, 이빨이 부러졌겠지만. 왕눈이에게는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키에에엑!
……아마?
왕눈이가 날다 말고 고개를 숙여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왕 큰 눈이 어쩐지 서운해 보였다. 구해 줬는데 때려? 꼭 이렇게 따지는 것 같았다.
“어어…….”
너무 서운해서 몸 가눌 기운도 없는 걸까? 왕눈이의 몸이 기우뚱했다.
“어엇.”
루비아나는 얼른 왕눈이의 발을 두 손으로 잡았다.
발톱과 발이 엉망이었다. 특히나 발톱이 다 구부러져 부러지고, 닳아 있었다.
‘뭐야, 누가 이랬어?’
자신이 죽은 줄 알고 북부인들이, 부하들이 왕눈이를 홀대한 걸까? 루비아나는 마음이 울적해졌다.
왕눈이는 매우 어설프게 눈밭 위에 착지했다. 전혀 왕눈이답지 않은 착지였다.
쿠웅!
왕눈이가 눈밭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루비아나도 덩달아 굴렀다.
“공작님!”
“대자앙!”
북부인들이 기겁하며 눈밭 위를 달려왔다.
대자아앙! 우렁찬 합창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저 소리만으로도 눈사태가 일어나기 충분해 보였다.
‘저것들이 나 또 파묻히라고 수를 쓰는 건가? 아니면 귀청을 찢어서 아무것도 못 듣게 만든 다음에 실컷 내 욕 하려고?’
그게 아니고서야 저렇게 간절하게 부를 이유가 없었다.
루비아나는 그들이 다가오기 전, 몸을 일으켰다.
온몸의 관절이 얼어붙은 것처럼 몸이 삐그덕거렸다. 몸을 가누기 힘들어 휘청이니, 북부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는 아예 눈밭 위를 구르듯 다가왔다.
루비아나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아찔한 기분을 참아내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버릇처럼 허리에 손이 갔지만 검은 잡히지 않았다. 아마 눈밭 어딘가에 묻혀 있으리라.
루비아나는 쓰러진 왕눈이를 등 뒤에 세웠다. 왕눈이의 상태는 엉망, 그 자체였다.
이 몸으로 날아다닌 게 용할 지경이었다.
‘어쩌다?’
루비아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참고는, 일단 돌아서서 북부인들을 마주했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엔 약간의 웃음기도 없었다. 특히나 녹색 눈은 그녀가 밟고 있는 눈보다 차가웠다.
루비아나는 기본적으로 무표정한 사람이었다.
그녀와 몇 년간이나 함께 지낸 북부인들은 그녀의 무덤덤한 태도에 익숙했다. 그런 그들마저도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공, 작님?”
“대, 대장?”
“……괜, 찮수?”
그들은 뭐 마려운 개새끼처럼 낑낑댔다.
“…….”
루비아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무너진 장벽 쪽을 바라보았다.
성벽 안쪽에 모여 있는 북부인들이 두려움과 안도감에 물든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한 명이었고, 그들은 수백 명이었다. 수백 명이 저를 쳐다보고 있으니 부담스럽기도 하련만, 루비아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먼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건 수백 명 쪽이었다.
저들 모두가, 북부 전체가 루비아나를 배신했다.
“멍청하기는.”
쯧, 루비아나는 혀를 찼다.
“대, 대장?”
“공작님…….”
눈앞의 북부인들이 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들은 방금 들은 루비아나의 목소리를 듣고도 믿을 수 없어 했으며, 동시에 그게 환청이 아니고 진짜라 믿고 싶어 했다.
자신들이 배신하고 죽이려 했던 공작이, 북부의 지배자가 전혀 화를 내지도 않고 담담히 말을 하니, 그럴 수밖에.
“왜, 한번 배신해 보니까 별로야? 후회돼서 이래?”
루비아나가 물어보았다.
“……!”
그들의 얼굴이 눈보다 하얗게 질렸다.
***
겨울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폭설이 계속 내리고, 대규모의 마수가 장벽 근처로 이동. 전투 중.
장벽이 위험하니 아쉴레앙 공작의 귀환을 바란다.
북부의 전보가 황성에 도착했다. 삐뚤빼뚤하게 쓰인 글씨엔 절박한 상황에 대한 비탄이 담겨 있었다.
루비아나는 왜 북부의 소식이 자신이 아니라 황제에게 먼저 도착했는지 의아하지 않았다. 원래 그래야 맞는 거니까.
이상하게 여기고 주의하라 당부한 건, 드래곤을 죽인 이후 북부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칼레나였다.
“반란 세력이 북부에도 손을 뻗친 것 같아.”
“그래 봤자야. 북부엔 반란 세력이랑 한편 먹을 수 있을 만큼 똑똑한 놈이 없어.”
“글쎄, 과연 그럴까?”
“북부는 내가 잘 알아, 걱정하지 마.”
루비아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북부는 폐쇄적인 곳이었다. 루비아나마저도 그들과 섞여 들기 전까진 꽤 고생했다.
북부로 도망 온 범죄자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마을을 이루고, 도시를 세웠다.
그 안에서 자급자족하며 근근이 살아왔고, 남쪽에 대한 원한과 증오를 쌓아 나갔다.
북부로 도망쳤다 하나, 자신이 아덴 왕국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북부인은 하나도 없었다. 비록 자신은 북부로 도망쳤어도 아덴 왕국이, 남쪽이 자신들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도망쳤으나 버림받고 싶지 않은 마음. 모순적이나,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아덴 왕국은 북부를 철저히 외면했다.
차라리 토벌군이라도 보냈으면 고마웠으리라. 남쪽은 북부를 아예 없는 지역, 없는 사람 취급했다.
버림받은 북부는 자신들끼리 똘똘 뭉쳤고, 공동체 의식을 공유했다.
‘우린 버림받은 게 아니야. 우리가 남쪽을 버린 거야.’
그것이 북부인들의 정체성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다스리러 온 루비아나에게도 그러한 특성을 뽐냈다.
당시 루비아나는 막 정복 전쟁이 끝나자마자 북부로 온 터라 살짝, 아니, 조금 많이 과격했다.
루비아나는 절 혐오하며 배척하는 북부인들은 가만두지 않았다.
같은 인간으로서 이렇게 말하는 게 미안하지만, 인간은 약하고 수가 많은 종족이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에 전쟁이 생겨난 건지도 모른다. 개개는 약하니까, 뭉쳐서 덤비면 좀 더 강해질 수 있으니까 떼로 싸우게 된 거 아닐까?
……이런 사색을 하며.
루비아나는 한 명, 한 명 손에 잡히는 대로 두들겨 팼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수고를 무릅썼다.
수도로 요청하면 칼레나는 얼마든지 기사단과 군대를 보내 주겠으나, 루비아나는 북부인들과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귀찮지만 꾸준히 상대하다 보면 모두 골고루 팰 수 있겠지.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패다 보니, 정말 다 팰 수 있었다.
그쯤 되자 북부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비아나가 자신들의 지배자라는 것. 그리고 남쪽에서 새로 만들어진 나라가, 자신들을 버릴 생각이 없다는 것을.
함께 쌓아 올린 장벽이 그 증거였다. 장벽 위에 올라서 저 너머의 마수들을 내려다보는 루비아나가 그 증표였다.
그런데 그 증표가, 남쪽에서 온 황제의 부름을 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떠나 버렸다. 그러고는 아무리 연락을 보내도 미적거리며 돌아오지 않았다.
북부인들은 불안해졌다.
한 번 버림받았던 자들은, 두 번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두 번째로 자신들을 버릴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애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불안감은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예정대로 옷감과 곡식이 남쪽에서 배달되었지만, 그들이 정말로 돌아오길 원하는 사람은 계속 돌아오지 않았다.
루비아나가 남쪽 최고의 미남과 결혼해 수도에 아주 눌러앉았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기어이, 오라는 루비아나는 오지 않고 루비아나의 이름으로 웬 남자가 북부로 실려 왔다.
미치광이 조각가 폴 네리오.
남쪽에선 어떤지 모르겠으나 북부인들이 보기엔 아무튼 미친놈이었고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
북부인들은 자신들 또한 한때 그 쓰레기와 다름없었거나 그 쓰레기보다 더 쓰레기 같았다는 걸 기억해 내지 못했다.
루비아나 덕에 사람 구실을 하게 된 지금의 자신들만 생각하며, 과거의 자신들 같았던 폴 네리오를 마땅찮아했다.
북부인들은 그를 왕눈이에게 던져 주며 웃고 떠들었지만, 마음 한켠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돌아오랬더니 돌아오진 않고, 이런 쓰레기를 실어 보내?’
‘우릴 버릴 셈인 건가? 여길, 이런 쓰레기나 모아 두는 곳으로 만들 셈이야?’
‘다시는 북부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거야. 우릴 이 안에 몰아 두고, 떠나 버린 거야.’
‘대장은 무슨, 못된 마녀 같으니라고. 우릴 버렸어!’
폴 네리오의 행색과 태도가 북부인들이 보기에도 쓰레기 같았던 건 전적으로 폴 네리오의 잘못이나, 북부인들의 원망은 루비아나를 향했다.
그즈음, 남쪽 사람들이 상인인 척 위장하고 북부에 기어들어 왔다.
그들은 루비아나, 아쉴레앙 공작에 대한 이상한 말을 늘어놓으며 북부인들을 회유했다. 북부인들은 그 말에 넘어갔다.
리사나의 계획처럼, 협잡꾼들이 북부인들을 잘 선동한 게 아니었다.
북부인들은 이미 선동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걸 오딜 후작과 리사나는 물론이거니와 루비아나마저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북부인들, 본인들마저도 알지 못했다.
루비아나가 칼레나에게 했던 말처럼, 북부인들은 남쪽의 반란에 전혀 관심 없었다.
남쪽에 관심을 가지고, 남쪽의 복잡한 정치 상황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이득을 꾀하려는 계산 따위를 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루비아나를 만나기 전의’ 북부인들은 분명 그랬다. 하지만 루비아나를 만나고 난 후의 북부인들은 달라졌다.
북부인들은, 똑똑한 계산을 할 수 있는 약간의 사람들마저, 루비아나의 빈자리에 쉽게 무너졌다. 쉽게 불안해져 버렸다. 루비아나가 자신들을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루비아나는 북부인들의 폐쇄성과 고립성, 자기만 아는 이기심, 그리고 그들의 팍팍한 삶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피어난 아쉴레앙 공작 루비아나에 대한 애착을 알지 못했다.
북부인들은 남쪽에서 온 협잡꾼들의 꾐에 넘어가 거짓 전보로 루비아나를 북부로 불러들였다. 아주 거짓 전보는 아니었다.
연이어 폭설이 내리고, 마수들이 장벽을 어슬렁거리며 장벽을 무너뜨리려 하는 건 진짜였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로 마수들이 몰려든 것처럼 살짝 과장해서 보고했을 뿐.
그리고 자신들의 손으로 장벽을 무너뜨렸다. 오직, 루비아나를 북부에 잡아 두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