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31)

***

‘언젠가 내 뒤통수를 칠 수도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설마 저걸 건드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루비아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북부인들이 단체로 돌아 버리지 않는 이상 장벽을 망가뜨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장벽은 오직 외부의 마수들을 막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북부인들이 단체로 돌아 버려서 스스로 장벽을 무너뜨렸다.

남쪽에서 건네준 게 분명한 폭약과 마법 도구는 최고급품이었다. 장벽 전체에 손상을 입히진 못했으나, 일부분을 기어이 무너뜨렸다.

그동안 남쪽에서 온 협잡꾼들은 암살자로 돌변해 루비아나에게 달려들었다.

루비아나는 그들을 상대하느라 시간을 낭비해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저, 정말 무너지네?”

“무너질 수 있는 거였구나, 저거.”

“괘, 괜찮아. 우리한텐 이제 대장이 있으니까.”

북부인들의 생각은 간단했다. 적어도 장벽을 새로 짓는 동안은 루비아나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겠지.

루비아나가 있으니, 장벽이 ‘조금’ 무너져도 마수들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루비아나가 장벽이 완성되지 않았던 몇 년 동안이나 그들을 지켜 주었으니까.

그들이 미처 계산에 넣지 않은 건, 요 근래 폭설이 계속 내렸고, 마수들이 평소보다 과하게 날뛰고 있었다는 것.

장벽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마수들은 굉음에 흥분해 장벽으로 달려들었다.

북부인들은 오랜만에, 루비아나가 없던 북부에서 매일같이 경험했던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노련한 병사들마저 바지에 오줌을 지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누구도 감히 손의 활과 검, 방패를 들고 맞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막 암살자들을 처리하고 달려온 루비아나가 나타났다.

“모두 제자리로. 물러서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우왕좌왕하던 궁수들이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장벽 위에 자리 잡고 활시위를 당겼다.

“선발대는 무너진 장벽을 지키고 서라. 방패 앞으로, 창은 그 뒤. 칼은 마지막이다!”

루비아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사들이 삼단으로 서서 무너진 장벽을 막아섰다.

“마수들이 성벽에 닿기 전에 모조리 죽여라. 코앞에 들이닥쳐도 무너지지 마라, 도망치지 마. 몸으로 막아, 죽어서라도 버텨라! 등 뒤에 누가 있는지 잊지 마!”

성벽 안에는 그들의 가족들이 있었다. 그들의 남편과 아내. 검과 활을 들고 마수들과 싸우기엔 아직 어린 아이들, 노약자들, 다친 병사와 기술자들이.

장벽을 지키지 못하면 그들이 마수들의 맛난 먹이가 될 터였다.

병사들의 눈빛이 돌변하였다.

“너희의 목숨을 바쳐 지켜라. 한 마리도 안으로 들이지 마!”

루비아나가 일갈하며, 그들을 지나쳐 장벽 밖으로 달려 나갔다.

“공작님?”

“대, 대장?”

“대장!”

무장한 북부인들이 당황하며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 한 올 움켜잡지 못했다.

루비아나는 하얀 눈밭 위에 서서 검으로 어깨를 그었다.

후두둑. 피가 흘러내렸다.

드래곤을 죽이며 드래곤의 피로 흠뻑 젖은 몸. 드래곤의 피가 섞인 인간의 피.

마수들은 인간이 맡지 못하는 향에 매혹되어 날뛰었다.

루비아나는 피를 흘리며 장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까지 달려 나갔다. 마수들이 그녀를 갈가리 찢어 씹어 삼키고자 뒤따랐다.

키이이익!

왕눈이가 날아왔다.

목에 사슬이 감겨 있고, 사슬의 끝에 거대한 쇠말뚝이 덜렁덜렁 끌려 나오고 있었다.

피 냄새를 맡고 아예 목줄을 뽑아 들고 온 듯했다.

왕눈이의 눈이 번들번들 빛났다. 그 눈에 피를 흘리는 루비아나가 비쳤다.

키에엑!

왕눈이가 수직으로 하강했다. 루비아나의 머리 위로 달려들었다.

장벽을 지키던 북부인들은 왕눈이가 루비아나를 잡아먹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안 돼!”

“대장!”

긴 창을 든 북부인들이 팔뚝의 근육을 부풀리며 창을 높이 들었다. 왕눈이의 날개를 꿰려는 것이었다.

루비아나가 손을 들어 장벽의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왕눈이를 올려다보며 손을 폈다. 손끝에 무너진 장벽이 걸렸다.

“가서, 장벽을 지켜. 난 괜찮아.”

끼이이이익!

당장이라도 루비아나를 집어삼킬 듯 입을 쫙 벌렸던 왕눈이가, 몸을 틀어 장벽으로 날아갔다. 왕눈이는 장벽 위를 돌며, 와이번들을 공격했다.

루비아나는 제게 달려드는 마수들을 적당히 상대하며, 그들을 장벽에서 멀리, 조금 더 멀리 유인했다.

그리고 절벽 아래에 섰다.

계속되는 폭설 때문에 계곡에는 눈이 잔뜩 쌓여 있었다. 눈사태가 일어나면 그녀는 물론이거니와 마수들마저 단번에 쓸려 나갈 정도의 눈이었다.

마수와 인간은 비슷하다. 하나하나 상대하기엔 수가 너무 많다. 장벽만 무사했더라면 성벽 위에서 편하게 한 마리 한 마리씩 죽였겠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마수들이 무너진 장벽 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한 번에 쓸어버려야 했다.

‘그러니까 이 방법밖엔 없어.’

루비아나는 검을 고쳐 쥐고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눈사태는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한 줌의 눈덩이만으로도 시작된다.

드래곤도 죽였던 인간의 힘찬 칼질 정도야 눈사태의 시작으론 부족함이 없을 터.

물론 비탈진 경사 바로 아래 서 있는 루비아나가 제일 먼저 눈사태에 휩쓸릴 것이다.

‘살아남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게, 눈사태를 일으키면 안 되는 이유가 될 순 없었다.

루비아나는 주저 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검으로 절벽을 내리치기 전, 루비아나는 잠깐, 아주 잠깐 칼레나를 떠올렸다.

‘나마저 시체로 돌아가면, 넌 어떡하지?’

칼레나의 주변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카드릭, 루단테, 내무국장, 회계국장, 시종장.

하지만 그들이 루비아나의 빈자리를 채워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가족은 동료, 부하와는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

‘내가 죽으면, 레나는 혼자가 된다.’

그게 걱정돼서, 죽어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다.

‘눈 뜬 채로 죽으면 관 뚜껑을 열어 볼 때 무서울 텐데. 레나가 놀라진 않으려나?’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장벽이 무너졌다. 그 장벽 너머에, 그녀가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지키는 게 그녀의 임무이자 권리였다.

황제에게 북부를 잘 다스리라 명 받은 아쉴레앙 공작은 있는 힘껏, 검으로 절벽을 후려쳤다.

쿠우웅!

굉음과 함께 골짜기가 무너져 내렸다.

산사태가 일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드래곤을 죽이는 데 일조한 붉은 머리의 공작마저, 제 한 몸을 빼낼 순 없었다.

제게 쏟아져 내리는 눈 더미를 올려다보며, 루비아나는 죽음을 예상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반란, 정복 전쟁, 북부. 늘 죽음을 그림자처럼 두르고 살았다.

어떻게 죽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살고 싶다고 질질 짜며 적의 발아래 엎드리거나 죽기 싫다고 발악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담담하고 이성적으로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나중에라도 시체가 발견되면 성한 모습일 테니 그건 다행이겠어.’

이런 생각을 할 여유까지 있다니. 괜찮은 죽음이라고 생각하며, 루비아나는 눈사태에 휩쓸렸다.

‘3년은 같이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1년도 같이 못 살았군.’

마지막으로 생각난 건 루이먼드였다.

3년도 못 살 거, 평생 안 놔주고 싶다느니 그런 어리석은 생각은 왜 했을까? 그냥 3년 동안 재미있게 살 생각이나 열심히 할걸.

‘……신년제, 못 가겠네.’

의식이 끊기기 직전, 지킬 수 없게 된 약속이 떠올랐다.

미안했다.

그리고 끝이었다.

루비아나는 유언장에 자신과 함께 싸운 이들의 유가족을 챙겨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루비아나는 홀로 싸웠고, 홀로 절벽 아래에서 눈 더미에 파묻혔다.

여기까지가 루비아나의 기억이었다.

그 뒤의 일은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엉엉 울고 비는 북부인들에게서 전해 들었다.

루비아나가 일으킨 산사태는 확실히 마수들을 대부분 해치웠다. 장벽 안쪽도 피해를 입긴 했으나, 마수들이 장벽 안으로 밀고 들어왔을 상황에 비하면 미미했다.

약간의 방패병과 창병들이 산사태에 휩쓸렸고, 무너진 장벽으로 밀어닥친 산사태가 인근 마을을 뒤덮었다.

그렇게 북부는 다시 한번 살아남았고, 루비아나를 잃었다.

눈사태가 진정되자 북부인들은 곧바로 루비아나를 찾아 나섰다. 루비아나가 살아 있었다면 멍청한 짓이라고 혀를 찼겠으나, 북부인들은 나름 절실했다.

“멍청한 짓을 했군. 장벽부터 보수했어야지.”

역시나 이야기를 듣던 루비아나는 그렇게 말했고, 덩치 큰 북부인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였다.

왕눈이는 가증스럽다는 듯 눈알을 굴리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상한 먹이를 볼 때의 표정이랑 비슷했다.

산사태에 휩쓸려 죽은 사람의 시체를 찾는 것만큼 멍청하고 위험한 일이 또 없다.

그래서 실속 없는 일만 하고 제 앞가림 못 하는 사람을 ‘산사태 일어난 뒤에 제 시체 찾아다닐 놈’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북부인들 대부분이 그 짓을 하고 다녔다.

그랬으면 찾기라도 할 것이지. 아무도 루비아나를 찾아내지 못했다.

루비아나를 찾은 건 루비아나의 애완 와이번 왕눈이였다.

왕눈이는 어떤 인간도 제 근처에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했다. 누가 먹이통을 들고 가까이 올라치면, 고막을 찢는 울음을 내뱉으며 날아올랐다.

절그럭, 절그럭. 사슬과 쇠말뚝을 단 채, 먹이도 먹지 않고 산사태가 일어난 주변을 빙빙 돌았다.

사슬이 감긴 목의 비늘이 찢겨 피가 뚝뚝 떨어졌다. 추워서 상처가 곪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날아다니며 북부인들의 고막을 모두 찢을 기세로 울부짖던 왕눈이가 오늘, 어느 지점에 내려앉아 발톱으로 땅을, 아니, 눈을 팍팍 팠다.

그리고 눈 속에 파묻혀 있던 손을 발견하고 날아올랐다. 덕분에 루비아나는 살아났고 어깨가 탈골되었다.

루비아나는 어깨뼈를 스스로 끼워 맞추고, 겸사겸사 어깨에 난 상처를 만져서 확인했다. 상처가 얼어붙은 덕에 피가 나지 않고 있었다.

눈에 파묻힌 덕분에 과다 출혈로 죽지 않았다. 얼어 죽지 않은 게 신기하긴 했으나, 그러려니 했다.

‘드래곤의 피를 뒤집어써서 그런가?’

드래곤의 피가 배 속에 뭉쳐 있는 건지 배 속이 따듯했다.

루비아나는 배를 문지르며, 제 앞에 엎드려 눈물을 질질 짜는 북부인들을 바라보았다.

“왕눈이보다 못한 것들.”

흠칫, 북부인들이 어깨를 떨었다.

키이익!

왕눈이가 루비아나의 등 뒤에 얌전히 서서는 당연한 말을 한다며 두 날개를 펄럭였다. 그러다 루비아나가 몸을 휘청이자 얼른 다시 날개를 접었다.

“그래, 니가 사람보다 낫다.”

루비아나는 토닥토닥, 왕눈이의 발을 두드려 주고는 대장장이를 불러 목에 칭칭 감긴 사슬을 잘라 냈다.

얼마나 날뛰었는지 목 부분이 비틀려서, 열쇠 구멍에 열쇠가 들어가지도 않았다.

사슬을 벗자 목의 상처가 훤히 드러났다.

“으.”

루비아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꽤 아파 보였다. 정작 왕눈이는 아프지도 않은지 목을 쭉 내밀었다. 상처가 아니라 훈장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무리 봐도 인간보다 나았다.

루비아나는 제 발치에 엎드린 북부인들을 그냥 지나쳐, 장벽 안으로 훌쩍 뛰어들어 갔다.

왕눈이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조금 고민하더니, 펴려던 날개를 접고 두 발로 깡총깡총 뛰어 뒤따랐다.

왕눈이가 뛸 때마다 땅이 가볍게 흔들렸다.

북부인들은 루비아나를 보자마자 양쪽으로 쩍 갈라져 길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혹시라도 루비아나와 눈이 마주칠까 봐 고개를 돌리면서도 힐끔힐끔 그녀를 훔쳐보았다.

장벽을 부서뜨려서라도 루비아나를 북부에 잡아 두려는 계획을, 대부분의 북부인들이 알고 있었다는 게 티 났다.

“…….”

루비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을 지나쳤다.

“공작님, 잠시만! 잠시만 제 얘기를 들어 주십시오.”

누군가 길 앞을 막아섰다.

왕눈이를 쫓아왔고, 루비아나 앞에 엎드려 사정을 설명했던 부하였다.

그전에는 루비아나에게 계속 돌아오라고 편지를 보냈고, 폴 네리오의 조각상마저 실어 보냈던 자이기도 했다.

루비아나는 그가 마음에 들어 곁에 두었고, 자신이 없는 동안 북부의 장벽 경비를 맡겼다.

그랬는데 남쪽에서 온 협잡꾼들에게 넘어가 루비아나를 배신했다.

아마도 이자가 장벽을 무너뜨리는 계획을 주도했으리라. 루비아나는 확신했다. 그는 북부에서 몇 안 되는 똑똑한 자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남쪽의 복잡한 정치 사정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이득을 얻을 수 있을지 계산한 후 반란 세력에 가담할지 말지 고민할 수 있는 자였다.

아덴 왕국의 폭군을 피해 북부로 도망 왔던 문관. 세기의 천재라 불리웠던 파렌 라프.

폭군은 그의 열 손가락을 비틀었으나 그의 머릿속에 든 지식만큼은 망가뜨리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큼은 반란 세력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있어서 안심하고 북부를 떠날 수 있었건만.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루비아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할 말이 있다면서? 해 봐.”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어떻게?”

“어떻게든, 무엇으로든!”

“그러니까, 어떻게?”

“……예?”

“내가 벌을 줄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벌을 받을 생각이지?”

“그게 무슨……?”

“너흴 미워하지 않아.”

“……!”

“증오하지도 않고, 처벌할 생각도 없어.”

루비아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안색이 더 안 좋아진 건, 파렌뿐이었다.

“그건, 우리에게 아무 기대도 믿음도 없었다는 뜻입니까?”

파렌이 이를 악물었다.

“왜, 왜 그래. 진정해!”

“한번 봐주시겠다잖아. 그런데 왜 화를 내!”

뒤따라온 부하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파렌을 뜯어말렸다.

파렌은 그들의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고 루비아나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파렌.”

“압니다. 어이없으시겠지요. 죄를 지은 주제에 오히려 성낸다고 말입니다. 그럼 차라리, 죽이십시오. 불경죄든, 반란죄든 뭐든 이름 붙여서 죽이십시오.”

파렌이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파란 눈동자 속에 일렁이는 감정은, 짙은 배신감이었다.

그는 북부인 중 누구보다도, 북부로 돌아오지 않는 루비아나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격앙한 감정을 알아차린 루비아나는 상냥하게 말해 주었다.

“눈 깔아.”

“……!”

파란 눈은 오히려 휘둥그레졌다.

“말 안 듣는 건 여전하네.”

“공작님!”

“이렇게 사고를 치고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눈을 그렇게 떠? 눈 안 깔아?”

루비아나가 파렌의 뒤통수를 꾹 눌렀다.

“윽.”

파렌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였다.

“이잇!”

허리를 들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그래 봤자 본인의 목과 허리만 아플 뿐이었다.

루비아나는 한 손으로 파렌을 누른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북부인들이 어색해하며, 눈 둘 곳을 몰랐다. 그러면서도 루비아나의 분노를 두려워하며 흩어지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그들도 파렌이 뭘 말하고 싶어 하는지 어렴풋이 알아들은 듯했다. 그래서인지 밝아졌던 안색이 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화를 낸다는 건 실망했다는 의미. 실망했다는 건 기대를 했다는 것.

기대하지도 실망하지도 않았다면 화를 내지도 않는다.

파렌과 북부인들은 루비아나가 화내지 않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배신감도 느꼈다.

차라리 화를 내고 길길이 날뛰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잘못했다고 빌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또 빌었을 텐데.

루비아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건 마치, 난 너희가 날 배신할 줄 알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린, 대장에게 아무것도 아닌 건가?’

‘우리가 중요하지 않아?’

북부인들은 배신감 위에 절망감을 덧칠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자신들이 감히 섭섭할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알에서 막 깨어난 오리처럼 루비나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들을 소중히 여겨 주기를 바랐다.

루비아나는 쯧, 혀를 찼다.

“폐하께서 내게 북부를 맡기셨고, 나는 그 명을 받들어 너희를 지키고 이 땅을 지키러 왔다.”

너흰 내 일거리일 뿐이야.

그렇게 땅땅, 판결을 내리는 것같이 들리는 말이었다. 성질 급한 이들이 욱해서 고개를 쳐들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대들려고 했는데, 루비아나와 눈이 마주치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녹색 눈이 똑바로 그들을 바라봐 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너희는 내 몫이다. 난 너희를 포기하지 않아. 너희가 날 죽을 뻔하게 만들었어도.”

루비아나는 그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너희가 너희 목숨 위험한 줄 모르고 장벽을 부숴도 난 다시 쌓을 거고, 너희가 날 죽이려 들어도 난 죽지 않고 계속 너희를 다스릴 거다.”

인간은 약하지만 무리를 지으면 자신들이 강해진 줄 알고 제멋대로 날뛴다. 그 목에 목줄을 매고 휘어잡으려면,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붙잡고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그건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두들겨 패는 것만큼이나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지만 루비아나는 꾸준히 해 볼 생각이었다.

“아직도 믿고 싶지 않다면 얼마든지, 몇 번이고 시험해 봐. 덤벼 봐. 다 받아 줄 테니까.”

그만큼의 인내와 끈기는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제국은, 폐하는 너희를 절대 포기 안 해. 너희는 제국의 백성이다.”

루비아나는 손에 잡힌 파렌의 동글동글한 뒤통수를 슥삭슥삭 문질러 주었다.

“노, 놓으십시오!”

파렌이 버둥거렸다.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귓불이 시뻘건 걸 보아하니 정말 싫은 건 아닌 듯했다.

“그러니까 네가 포기해. 난 포기 안 할 거니까.”

“그, 그런! 입에 발린 소리는!”

“잠자코 장벽이나 잘 지키고 농사지어 먹고살 생각이나 해 봐. 이 잘난 머리로 농사 말고, 다른 방법으로 돈 벌 방법을 찾아봐도 좋고. 폐하께 세금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잘 먹고 잘 살 생각이나 하란 말이야.”

혼자서는 버거울 것 같아 동료를 데리고 올 생각도 해 봤다.

피오니 로렌.

정말 탐나는 인재였다. 파렌과 나란히 놓고 일 시키면, 이 북부를 수도만큼 살기 좋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자신이 그런 고민을 할 동안, 이 동그란 머리통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아무튼 너무 똑똑해도 문제라니까.’

이렇게 똑똑한 건 부하로 써먹어도 이렇게 귀찮은데, 남편으로 삼아 옆에 두면 얼마나 귀찮을까?

그런 의미에서 루이먼드는 완벽한 남편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루이는 내가 죽은 줄 알고 있으려나?’

카드릭을 찾아가 도움을 받고, 피오니 로렌과 무사히 도망갔을까?

아니면 그 착한 성격에 자신의 죽음을 슬퍼한답시고 아무것도 안 하고 저택에 틀어박혀 울고 있으려나?

어느 쪽이든 별로였다.

북부인들에게 배신당해 눈사태에 파묻혔다 살아난 다음에도 기분이 딱히 나빠지거나 하진 않았는데.

루이먼드가 피오니와 떠나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매우 더러워졌다.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 공작님!”

“아, 이런.”

하마터면 파렌의 머리를 수박처럼 부숴 버릴 뻔했다. 루비아나는 파렌을 풀어 주고 손을 털었다.

“으윽.”

파렌은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했다.

“반란에 동조한 죗값은 네가 대표로 받은 거야. 그렇게 생각해.”

루비아나는 미안한 마음을 그득 담아 파렌의 어깨를 툭툭 친 후, 그를 스쳐 지나갔다.

“공작님!”

파렌이 뒤를 졸졸 쫓아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비아나는 바삐 걸었다.

‘빨리 수도에 연락해야겠군.’

나 안 죽었으니까, 내 남편 도망갈 생각 말라고.

아직 3년을 채우려면 멀었지 않은가? 루비아나는 눈사태에 휩쓸리기 전 반성했던 걸 잊지 않았다.

‘3년, 정말 알차게 보내 봐야지.’

그리고 성에 도착하자마자, 수도에 연락 보내는 걸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폴 네리오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우 즐겁게 조각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그 조각은 누가 봐도 죽은 사람을 추모하고자 나무 관 위에 올리는 장식이었다.

“아이 신나! 내가 살면서 이렇게 즐겁고 행복하게 작업했던 적이 있었던가? 우헤헤헤!”

폴 네리오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루비아나는 그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헉, 시, 시체가 제 발로 걸어 다닌다. 과연 괴물…… 꾸에에에엑!”

루비아나는 폴 네리오의 작품 세계를 넓혀 주기 위해, 그를 사알짝 지르밟아 주었다.

그리고 파렌을 불러 피해 상황 복구를 논의하던 중 다시 생각해 냈다.

“맞아, 수도에 내가 살아 있다고 연락을…… 잠깐, 내 죽음을 수도에 알렸다고?”

“네. 바로 수도에 부고를 보냈습니다.”

파렌은 쓸데없이 신속하고 유능한 부하였다.

“그런데 수도에서 아무 연락이 없었다고?”

뭔가 이상했다.

칼레나가 자신의 죽음에 분노해 북부를 쓸어버리겠다고 군대를 일으켰다거나, 자신의 후임으로 루단테가 부임하여 북부인들을 학살하려 한다거나.

그런 후일담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칼레나도 카드릭도, 루단테마저도, 자신의 죽음을 슬퍼할망정 생각 없이 움직이지는 않으리라. 루비아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제국의 황제와 공작이니까.

그들의 어깨에는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거대한 제국이 얹혀 있었다. 사적인 복수를 위해 함부로 움직일 위치는 아니었다.

그 위치에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란 것은 어마어마했다. 그 힘을 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함부로 써도 누가 감히 말리지 못할 만큼.

그래도 칼레나와 카드릭, 루단테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폭군을 죽이고, 아덴 왕국을 멸망시키고, 제국을 세운 게 아니니까.

그 자식을 죽이고, 그 더러운 왕국을 짓밟고, 그 위에 세울 내 왕국에 두 번째 칼레나는 없어.

듣고 있어, 언니?

부모의 시체와 언니의 희생을 밟고 서서 홀로 모든 의무를 떠안은 채로 살아야 하는 삶 따위, 다신 반복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러기 위해서라면 신을 무릎 꿇려 내 왕국을 짊어지게 만들 거야.

상황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루비아나는 카드릭이나 루단테 한 명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복수를 위해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칼레나는 예외였다.

그러니 서운하지 않았다.

칼레나나 카드릭, 루단테 중 누군가가 군대를 일으켜 북부로 진격해 왔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분명 미치지 않고서야 그래선 안 되지.’

한 명이 미치면 둘이 양쪽에서 말렸을 테니, 셋이 단체로 미쳐 버려야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

그러니 황제와 두 공작이 복수하겠다며 북부로 달려오지 않은 걸 이상하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왜 내 남편이 내 유언을 집행하지 않은 거지?’

제국에 매여 있는 황제나 두 공작이 아니라 오직 자신에게만 매여 있는 자신의 법적 남편, 루이먼드.

루비아나는 왜 그가 움직이지 않은 건지 의아했다.

분명 유언장에 함께 싸우다 죽은 자들의 가족을 돌봐달라고 써 놨다.

유가족을 돌보려면 일단 피해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북부를 방문해야 한다. 그런데 남쪽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그 점이 이상해 파렌의 멱살을 잡았다.

“정말 아무도 안 왔어? 배신한 거 들킬까 봐 죽이고 입 싹 닦은 거 아냐?”

“큭, 아, 안 그랬습니다!”

“혹시 그랬으면, 또 죽인 사람 중에 은발에 검은 눈을 가진 미남이 있었으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미쳤습니까? 공작님의 사람을 죽이다니?”

“난 죽일 수 있고, 내가 보낸 사람은 못 죽인다?”

“죽이려 한 적 없다니까요!”

파렌이 진심을 담아 외쳤으나 루비아나는 귓등으로 흘렸다.

“혹시 길가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발견하진 않았고? 너무 추워서 오다가 얼어 죽었을 수도 있잖아.”

“아니요, 아니요!”

“나 죽었다고 제대로 알린 거 맞아?”

“공작님이 전투 중 사망했고, 시체는 아직 찾지 못했다고만 적었습니다. 북부의 사정, 사상자와 피해액 따위 계산하지도 못했고, 쓰지도 않았습니다.”

파렌은 목이 졸려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서도 열심히 대답했다.

“남쪽에선 그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전혀!”

악이 받쳐 이렇게 소리 지르기도 했다.

북부에서 아무도 오지 않은 걸 서운해해야 하는 건 루비아나인데, 어째서인지 파렌이 더 열 받았다.

“도대체 수도에서 무슨 취급을 받고 있었던 겁니까, 공작님!”

“배신당하지는 않았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어디서 배신자 따위가 내 동생을 의심해? 루비아나는 파렌의 목을 짤짤 흔들며 생각에 잠겼다.

‘내 죽음을 묻으려고 한 건가? 레나가 그렇게 결정했다 해도, 루이가 유언장을 무시하지는 않았을 텐데.’

루비아나가 아는 루이먼드는 남 걱정을 사서 하는 착한 사람이었다.

예술가의 거리, 의상 거리 등을 열심히 헤집고 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내어 돕기 일쑤였다.

옷감 사업이 망해도 그 옷감을 생산하는 지역의 주민들이 불쌍하다며 손해를 껴안고 계속 옷감을 사들였다.

힘이 닿는 한 계속 주변 사람들을 도왔다.

그러니 다른 건 몰라도, 유언장에 쓰인 유가족을 도와주라는 내용을 무시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피오니 로렌과 도망가기 바빴다고 해도, 분명 북부 일은 처리하고 갈 줄 알았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유언장을 아예 불태워 버렸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하고 혀만 끌끌 찼다.

화를 내진 않았다. 오죽 상황이 급했으면 그랬을까, 오히려 걱정됐다.

‘무사히 도망갔으려나? 너무 멀리 도망간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찾기 귀찮으니까.’

그리고 다시 찾아올 생각을 굳혔다.

못 찾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찾지 않고 고이 보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눈사태에 휩쓸리기 전, 후회하지 않았던가? 평생 말고 3년이라도 알차게 보낼 것을, 하고.

그러니 수도로 돌아가는 대로 루이먼드를 찾아내, 남은 결혼 생활을 마저 즐길 생각이었다.

피오니 로렌에게 미안한 일이나,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았으니 3년의 계약 결혼 또한 계속 진행되어야 했다.

그리 생각하니 루이먼드가 유언장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유언장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았으니 유언장의 내용은 무효. 고로 루비아나와 루이먼드, 두 사람 사이에 남은 계약은 딱 하나뿐이었다. 결혼 계약서.

그 계약서에는 3년간 서로가 서로에게 성실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도망간 루이먼드를 잡으러 가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생각을 정리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루비아나는 파렌을 놓아주었다.

죽기 직전, 겨우 숨통이 트였다. 파렌은 목을 붙잡고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고, 공작님.”

“날 배신했잖아. 그 벌 받는다고 생각해.”

“아까, 전에 분명, 큭, 벌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만.”

파렌은 허리를 반으로 접은 채, 그 파란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루비아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왜? 힘들어? 내가 눈밭에 파묻혔던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텐데.”

“……차라리, 눈밭에 파묻어 주십시오. 한 번에 끝내시죠.”

파렌은 과연 똑똑했다. 루비아나가 앞으로 두고두고 우려먹을 거란 걸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알아채 봤자였다.

“싫은데.”

“공작님!”

“나가서 일이나 해. 또 눈사태 일어난 뒤에 내 시체 찾을 생각 말고.”

루비아나는 파렌을 내쫓았다. 가서 장벽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살피고 수습할 방법을 찾아오라고 내보낸 건데, 파렌은 아무래도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감을 못 잡은 듯했다.

“어디 가지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 의사를, 지금 당장 불러오겠습니다.”

“의사?”

루비아나는 의아해하다 제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어깨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언 상처가 녹고 있는 듯했다.

눈으로 보고 나니 그제야 고통이 몰려왔다. 시큰한 게 아렸다. 가볍게 어깨를 돌리기만 해도 절로 이가 다물렸다.

“왕눈이는 괜찮나 모르겠네.”

루비아나는 상처를 꾹 누르며 밖으로 나갔다. 가만히 있으라는 파렌의 말을 들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깨의 상처는 밖으로 나가는 길에 복도에 걸린 휘장을 잡아 빼 어깨에 둘둘 감아 놓았다.

연무장으로 가니, 커다란 철창 우리가 보였다.

키이익-!

우리 속에 축 늘어져 있던 왕눈이가 루비아나를 알아보고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의사가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다. 그치?”

루비아나가 우리 안으로 손을 뻗었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게 왕눈이가 보기에는 한 입 거리도 안 되어 보였다. 꽉 깨물면 이빨 사이에 이쑤시개처럼 낄 것 같달까.

그간의 원한을 생각하면 저 팔이라도 해치우는 게 옳은 일이었으나 왕눈이는 그러지 않았다.

끼이이.

대신 굳이 아픈 목을 구부려, 제 눈알보다 작은 루비아나의 손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한쪽 팔만 뜯어먹어 봤자 간에 기별도 안 가니까. 먹이야 먹이통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 얼어 있던 걸 녹여 먹는 건 신선도가 떨어지니까.

복수는 다음에, 와이번의 왕답게 명예를 되찾는 것도 다음번에. 다음번에야말로, 꼭!

왕눈이는 다음을 기약하며 건방진 손길을 일단 받아주었다.

툭툭. 루비아나는 왕눈이의 머리 가죽을 쓰다듬었다.

“비단결 같았는데, 많이 거칠어졌네.”

루비아나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어디 간 거지?”

아픈 왕눈이를 돌보고 치료해 줘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 배신자 놈들이 내 생명의 은인을 홀대해?”

루비아나는 북부인들에게 배신당해 눈밭에 파묻혔을 때에도 보이지 않았던 분노를 내보였다.

“윽.”

화를 내니 상처에서 피가 났다.

키이이!

왕눈이가 놀라 우리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쿠웅. 큰 대가리가 부딪치니 우리가 들썩였다.

“기, 기다려! 움직이면 안 돼! 약을 발라야 한단 말이다아아아!”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이어울프를 키우는 부하 놈이었다.

‘그 다이어울프 이름이 뭐였지?’

루비아나는 가물가물한 이름을 기억해 보려고 했으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히익.”

허겁지겁 달려오던 다이아울프 애비는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루비아나를 발견하곤 기겁했다.

“대, 대장!”

“내가 대대장밖에 안 된다고? 누구 마음대로 강등시켜?”

가벼운 농담이었다.

루비아나는 룩센 백작의 반란 때부터 사령관급이었다. 사령관에게 대대장이라고 하다니 네가 뭔데 날 수직으로 강등시키느냐, 농담 겸 면박을 준 것이었는데

“……대장, 대장이 아니라 대대장이었수?”

다이어울프 애비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쯧, 루비아나는 혀를 차고 말았다.

“이래서 군대 안 갔다 온 놈하고는 말을 말아야 하는데.”

“지, 지금! 대장 밑에서 싸우고 있잖수!”

다이어울프 애비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건 자경단이지.”

“그거나 그거나!”

“전혀 달라. 그러니까 어디 가서 그런 말 함부로 하고 다니지 마.”

아쉴레앙 공작이 북부에서 남몰래 군대를 기른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곤란했다.

예전이야 북부에서 무슨 말이 돌든 말든 그게 수도로 전해질 걱정은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수도의 반란 세력이 북부로 기어들어 와 장벽을 무너뜨리고, 루비아나를 암살하려 덤벼들지 않았던가? 북부의 허튼 소문이 수도로까지 전해질 가능성은 충분했다.

‘수도와 북부가 서로를 가깝게 느끼길 바라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는데.’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딴 놈들도 입조심하라고 하고.”

루비아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마디를 더 했다.

자신이 군인이 아니라 자경단이라는 걸 알게 된 다이어울프 애비는 풀이 죽어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후 수의사가 도착했다.

수의사는 루비아나를 발견하고는 기뻐했다. 루비아나가 곁에 있으면 왕눈이가 자신을 잡아먹지 않을 거라고 기대한 것이었다.

수의사는 루비아나가 왕눈이를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패서 자신을 지켜 주리라 예상했지만.

“저거 골초야. 맛없어, 먹지 마.”

루비아나가 왕눈이에게 조언만 한마디 던졌다.

다이어울프 애비는 술고래니, 차라리 그쪽이 더 맛있을 거다. 수의사는 담배를 많이 피워 폐가 다 썩어 있을 테니 먹으면 탈 날지도 모른다.

키이익!

맛없는 건 싫어. 썩은 건 더 싫어. 미식가인 왕눈이는 흥미를 잃고 고개를 홱 돌렸다.

“감사합니다, 대장.”

수의사가 안도한 것도 잠시.

“아니다, 나름 훈연 처리한 거라서 더 맛있으려나?”

키이이?

루비아나의 말 한마디에 도로 고개를 돌려, 수의사를 훈제 연어 바라보듯 바라보았다.

“히이익!”

가까운 미래에 누구보다 먼저 금연에 성공하게 될 수의사가 기쁨에 벅차 엉덩방아를 찧었다.

“대장, 자, 장난치지 말아 주십시오. 저, 절 왕눈이 먹이로 삼을 생각, 어, 없으시잖아요!”

“왜 없을 거라고 생각해? 아, 하긴 나도 너희에게 배신당할 줄은 몰랐으니까.”

거짓말이었다. 루비아나는 북부에 머물며 한순간도 긴장을 놓은 적이 없었다.

“…….”

수의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배신할 때, 왕눈이한테 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해 봤어?”

“…….”

해 봤을 리가.

수의사가 입만 뻐끔거렸다.

매일 담배를 뻑뻑 피워 대며 오래 사는 것에 별 미련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닌 듯했다.

“제, 제겐 토끼 같은 딸과 마누라가……”

“아들밖에 없는 거 알아.”

“…….”

아들은 생명 연장에 도움이 안 됐다.

“으으.”

수의사는 울상이 되어서는, 루비아나의 손에 죽는 게 덜 아플지, 왕눈이에게 잡아먹히는 게 덜 아플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루비아나는 북부인들의 배신을 농담거리로 삼았고, 서슴지 않고 입에 올렸다.

수의사를 비롯한 북부인들은 곤혹스럽고 당혹스러웠으나,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루비아나가 반란과 배신의 주동자를 솎아 내 숙청할 생각이 없다는 뜻일 테니까.

“저… 그…….”

다이어울프 애비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루비아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남쪽에서 온 협잡꾼 중 일부가 지하 감옥에 산 채로 갇혀 있다고 말해 주었다.

대부분은 장벽이 무너진 날, 루비아나를 암살하려 달려들다 루비아나의 손에 제거됐고, 일부는 숨어 있다가 루비아나가 눈사태에 쓸려나간 뒤 분노한 북부인들의 손에 붙잡혀 나와 돌팔매질을 당했다.

“죄 없는 자만 우리에게 돌을 던져라. 너희도 결국 다 아쉴레앙 공작을 배신한 배신자들 아닌가!”

협잡꾼 중 한 명이 옳은 말을 하니, 찔리는 게 있는 북부인들은 더욱 성을 내 아예 협잡꾼들을 산 채로 찢어 죽이자고 날뛰었다.

그들을 막아선 게 파렌이었다.

“그들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도 그들도, 공작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공작님께서 돌아오셔서 처리하시도록 일단 목숨은 붙여 둡시다.”

그의 말을 들은 북부인들은 일단 돌팔매질을 멈췄다.

남쪽에서 온 협잡꾼들은 일단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러느라 파렌의 시퍼런 안광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하 감옥에서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삶을 살고 있는 중이었다.

파렌 라프. 열 손가락이 비틀렸지만, 머릿속의 지식은 빼앗기지 않은 아덴 왕국 최고의 천재.

그는 열 손가락이 비틀린 만큼 마음도 비틀려,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지 못하게 됐다. 절망을 경험한 이성은 종종 흉포함과 잔인함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냈다.

볼 거라고는 얼굴밖에 없는 비리비리한 샌님이 범죄자들뿐인 북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흉포함과 잔인함 덕분이었다.

“인간은 원래 악한 법입니다.”

서른도 안 된 청년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루비아나를 만나기 전까지.

“개소리.”

루비아나는 이 후천적 성악설 신봉자가 개소리를 할 때마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팼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파렌은 심히 연약했다. 잘못하면 ‘한 방에 후천적 성악설 신봉자를 때려잡은’이라는 칭호를 얻게 될 터였다.

다른 북부인들을 팰 때처럼 마음 편히 패지 못하고 조심조심, 유리 다루듯 패다 보니, 남들보다 배는 더 공이 들어갔다.

그렇게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덕분에 파렌은 자신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보는 개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제정신 아닌 머릿속은 도통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아, 가끔 충성심이 도를 넘었다. 이번처럼.

충성심이 넘치다 못해 이상한 쪽으로 새어 제 주인의 발목을 물어뜯었다.

그런 주제에 제 주인의 발목을 노리는 다른 개들은 가만두지 않았다.

파리한 안색 속에 감춘 파렌의 진짜 광기를 아는 사람들은 지하 감옥에 갇힌 협잡꾼들을 동정했다. 차라리 돌팔매질로 죽었으면 편히 죽을 수나 있었을 텐데.

다이어울프 애비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겉보기와 달리 마음이 여렸다. 그러니까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다이어울프를 그냥 지나치거나 식량으로 삼지 않고, 몰래 숨겨 키운 거겠지만.

‘대장이 돌아왔으니까 그놈들도 이젠 편히 눈을 감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서 슬쩍 루비아나에게 말을 꺼낸 것이었다.

“배후를 실토했어?”

“예.”

자백은 첫날 다 끝났다.

파렌의 손에 들어가면 누구든, 반나절을 넘기지 못하고 모든 걸 불었다.

그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지하 감옥에서 겪고 있는 고문은, 파렌의 가벼운 분풀이에 불과했다.

“파렌이 데리고 있나?”

루비아나가 낌새를 눈치채고 물었다.

“글쎄요…….”

다이어울프 애비는 말을 흐렸지만, 고개는 열심히 끄덕였다.

“나중에 수도로 데리고 가야 하니까 적당히 하라고 해.”

“…….”

‘이미 적당히 수준을 넘긴 것 같은데요.’

다이어울프 애비가 차마 입으로 말하진 못하고 눈만 껌뻑였다. 루비아나는 알아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러라고 했다고 하면, 일단 들은 척은 할 거야.”

“예, 그러믄입죠.”

“그놈은 시키는 일은 안 하면서, 이상한 거에만 꽂혀서.”

루비아나가 혀를 찼다.

‘그게 다 대장님하고 연관된 일뿐인데요.’

다이어울프 애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둔하고 눈치 없는 사람을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루비아나가 수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파란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장벽을 바라보던 파렌이 떠올랐다.

남쪽의 협잡꾼들이 오지 않았더라도, 장벽이 언젠가는 부서지지 않았을까.

“저게 무너지면, 돌아오시려나? 올 때 같이 와 주면 좋겠는데. 옛 아덴 왕의 사생아 말이야. 학자의 집 출신 샌님 놈 따위, 시체도 못 찾게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그건 제 열 손가락을 비틀어 버린 폭군의 핏줄에 대한 증오 따위가 아니었다.

세르딤을 반기고, 루이딤이라고 이름 붙인 것도 파렌이었다.

북부인들은 루이딤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행복해했고, 파렌은 그 루이딤을 쫙쫙 찢으며 행복해했다.

“이 루이는 정말 갈가리 찢는 맛이 있어. 아, 내가 방금 이 귀한 옷감을 루이딤이라고 제대로 부르지 않고, 우리 공작님의 부군 되신 분의 이름으로 불렀던가요?”

이번 일도 그 감정의 연장 선상에서 일어난 일일지도.

‘분명해, 분명히 그런 걸 거야.’

다이어울프 애비는 감히 확신했다.

파렌은 애초부터 남쪽의 협잡꾼들의 입에 발린 말에 넘어가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들을 이용해 루비아나를 북부로 오게 만들려고 했던 게 아닐까?

물론 진실은 알 길이 없었다.

루비아나가 덮고 넘어가겠다고 했으니 주동자인 파렌을 붙잡아다 자백을 받을 수는 없었다.

루비아나 앞에서는 겨울 여우처럼 탐스러운 꼬리를 살살 흔드는 요망한 파렌 라프가 술술 속마음을 털어놓을 리도 없으니까.

“아무튼 그건 그렇게 하고.”

루비아나는 심란해 보이는 다이어울프 애비를 놔두고, 수의사의 옆에 섰다.

루비아나의 그림자가 머리 위에 길게 드리우자, 수의사는 루비아나가 왕눈이의 입이라도 붙잡아 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루비아나는 수의사의 기대에 부응하는 대신, 그의 옆에 마찬가지로 쭈그려 앉아 다친 어깨를 내밀었다. 왕눈이를 치료하는 김에 겸사겸사 자신의 어깨도 좀 고치라는 의미였다.

“전…… 수의사인뎁쇼.”

정확히는 도축사였다. 북부로 도망 오기 전, 살던 지역에선 꽤 알아줬다고 했다.

그는 도축해선 안 되는 것을 도축한 죄로, 북부로 도망 왔다.

소 대신 귀족, 제 아들놈을 건드리려 하는 변태 귀족 놈의 뼈와 살을 분리해 버렸다던데.

북부에서는 도축사 겸 수의사로 통했다. 사냥철엔 도축사, 비수기 때는 수의사.

“사람을 발골해 본 건 딱 한 번뿐이라, 아직 사람 몸은 잘 몰라서 못 건드린다고요.”

수의사는 겸손하게 루비아나를 치료하길 거부했다. 그러고는 슬금슬금, 우리로 기어들어 갔다.

루비아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배가 당기는 불편한 느낌이 들어 몸을 일으켰다.

다이어울프 애비가 어깨에 걸쳐 메고 있던 통에서 물통과 나무잔을 꺼냈다.

물통의 뚜껑을 비틀어 여니, 하얀 김이 솟았다. 물통에 달군 돌을 넣어 놓은 듯했다. 사방으로 퍼지는 향에 코끝이 시원해졌다.

“이거나 한잔하십쇼.”

“박하차?”

“철이잖아요.”

“아, 하긴.”

북부에선 여름에 박하꽃을 수확해 말렸다가 일년 내내 차로 마셨다.

맛도 좋고 효능도 뛰어나니, 북부인들은 임산부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박하차를 물처럼 즐겨 마셨다.

루비아나는 잔을 받아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말린 박하꽃을 엮어 만든 리스가 곳곳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작년처럼 그 양이 많지는 않았다.

“부실한데?”

“죄다 대장을 찾으러 다녔으니까 그렇지요. 아직 덜 만들었어요.”

“저런.”

“……하나도 안 아쉬운 목소리인데.”

“글쎄.”

“됐수, 말을 말아야지.”

다이어울프 애비가 구시렁댔다.

루비아나는 잔에 코를 대고 박하 향을 음미하다,

“윽.”

헛구역질했다.

“대장?”

“날 독살할 셈이었나?”

아직 배신이 끝나지 않은 건가? 루비아나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이요!”

다이어울프 애비가 기겁했다. 큰 덩치로 요란 떠는 게 가증스러웠다.

“하려면 제대로 하든가.”

“뭐, 뭘!”

“냄새부터 팍 신호가 오는데, 이런 걸로 날 죽이려 들다니. 장난해?”

두 번이나 배신당했다는 것보다, 고작 이런 걸로 죽을 거라고 얕보였다는 게 더 짜증 났다.

“냄새라도 안 나는 걸 타던가.”

“아니, 박하차에서 박하 냄새 나는 게 뭐라고! 독이라니! 내가 대장을 왜!”

“코가 막혔나? 이 냄새가, 안 맡아져?”

드래곤의 피 때문에 무슨 독을 먹어도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독을 다 토해낼 때까지는 골골거려야 한다. 그러니 굳이 독을 먹어 보일 생각은 없었다.

“그냥 박하차라니까, 독 같은 거 안 넣었단 말입니다!”

다이어울프 애비가 억울해하며, 제 잔에 코를 처박고 킁킁댔다.

“박하 향밖에 안 나는데!”

“그래? 그럼 마셔 봐.”

마셔서 네 순수를 증명해 봐라. 루비아나가 잔을 내밀었다.

“독이 들었다면 내가 다 먹고 뒈질라니까, 보쇼!”

다이어울프 애비는 씩씩대며, 잔을 들어 벌컥 들이켰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미리 해독제를 먹고 왔나?’

너무 당당한지라, 루비아나는 살짝 오해할 뻔했다.

“앗, 뜨거.”

한 모금 삼키지도 못하고 토해 내고는, 호호 불어 홀짝 마시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 정도 지능은 없는 듯했다.

“정말 독을 안 넣은 건가?”

“정말이라니까요!”

다이어울프를 키워서 그런지, 꼭 다이어울프처럼 울었다. 아우! 억울해!

“아니면 말지,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왕눈이만큼 울지도 못하면서 시끄럽게.”

“억울하니까 그렇지!”

“그럼 네가 차를 잘못 우렸나 보지. 다시 한 잔 줘 봐.”

루비아나는 끝까지 다이어울프 애비를 타박하며, 다시 잔을 건네받았다.

하얀 연기가 코끝에 닿았다. 코가 뚫리는 듯 상쾌한 향은 분명, 박하 향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역했다. 굳이 마시고 싶지 않을 정도로.

속에서 안 받아주는 느낌이었다.

다 죽었다 겨우 살아났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고, 빈속에 따뜻한 차가 당길 법도 한데.

‘이상하네.’

루비아나는 무심코 배를 문질렀다.

박하차를 싫어하지 않았다. 북부에 있는 내내 물처럼 마셨다. 북부에서 박하차는 기호 식품이 아니라 생존 식품이었으니까.

박하차만이 아니라, 루비아나는 딱히 음식에 기호가 없었다.

전쟁터에서 급할 때는 나무뿌리를 파내 씹어 먹었다. 한때는 북부에 식량이 모자란 걸 해결해 볼 생각에 마수의 고기를 이것저것 구워 먹기도 했다. 개중 맛이 좀 괜찮은 건, 지금도 식용으로 삼고 있었고.

룩센 백작의 큰딸 시절에는 이것저것 가리는 것도 있고 싫어하는 음식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편식을? 내가?’

루비아나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또 원정 나갈 일 있을 때 그 지역에서 못 먹는 음식 생기면 곤란하겠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고쳐야 된다, 였다.

하지만 박하차는 영, 먹고 싶지 않았다.

‘지금 원정을 나온 것도 아니고, 당분간은 전쟁이 일어날 리도 없으니까 천천히 고쳐도 되겠지.’

박하차 정도야 안 먹어도 보급에 지장이 있는 게 아니니까.

루비아나는 결국 박하차를 마시지 않았다.

“진짜 독 안 넣었다니까!”

다이어울프 애비가 방방 날뛰었다.

“알아.”

“아는데 왜 안 마십니까요?”

“그냥, 안 땡겨서.”

“왜 안 땡기는데요? 예전엔 대접째로 마시던 분이. 아, 수도에 가서 비싼 것만 먹고 와서 입맛이 바뀌셨수?”

“아니. 배신당해서 눈밭에 며칠 파묻혀 있다 나오니 입맛이 바뀌었나 봐.”

“어, 그, 그렇다면야…….”

날뛰던 다이어울프 애비가 급속도로 얌전해졌다.

“공작님!”

파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종잇장 같은 몸을 팔랑거리며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인간을 주로 돌보는 의사가 뒤쫓아 오고 있었다.

북부에서 인간을 돌볼 수 있는 의사는 몇 안 됐다. 귀한 의사를 하나 성에 데려다 놓고 놀리는 게 마땅찮아서, 루비아나는 주치의를 따로 두지 않았다.

그러니 의사를 데리고 왔다는 건, 아랫마을에 다녀왔다는 뜻.

“저게 또 내 말을 안 듣네.”

일을 시켰는데 상전의 건강이 더 걱정이라며 시킨 일을 내팽개치고 의사를 부르러 다녀온다?

전혀 감동스럽지 않았다.

“배신해서 죽을 뻔하게 만들었으면서, 이제 와서 날 걱정해?”

“……!”

“……!”

수의사와 다이어울프 애비가 동시에 움찔, 몸을 떨었다.

“하하, 하하하. 뭐, 아무튼. 대장도 돌아오고 했으니까, 이번 월동제는 열 수 있겠네.”

다이어울프 애비가 딴청을 부렸다.

“월동제? 아직 안 지났나?”

“지나기는, 대장 찾느라 정신없어 다들 손 놓고 있었다고요. 이제 다시 준비하면 늦게라도 열 수 있겠지만.”

다이어울프 애비가 뻐기듯 말했다. 루비아나는 월동제까지 며칠이나 남았는지 묻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벽 수리는 그 뒤로 미루지.”

마수를 죄다 눈사태로 쓸어 버렸으니, 한동안은 안전할 터. 루비아나는 너그럽게 말했다.

그만큼 북부에서 월동제가 가지는 의미는 컸다.

수도에서 신년제를 열 때, 북부에서는 월동제를 연다.

드래곤이 살아 있을 적에는 보석과 금을 드래곤에게 바치며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비는 의식이었다고 하는데.

드래곤이 죽은 후에는, 겨울 날 준비를 끝내고 한숨 돌리는 즐거운 축제가 되었다. 식량도 충분하고 박하꽃도 많이 말렸으니, 이번 겨울도 걱정이 없구나, 야호!

북부인들은 월동제를 사랑할 뿐더러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남쪽에서 수도의 신년제를 똑같이 따라 하는 것과 달리, 자신들은 자신들만의 월동제를 따로 연다는 자부심.

그런 월동제 준비를 내팽개치고 루비아나를 찾아 나섰다. 죽었다면 죽은 시체라도 찾기 위해서.

루비아나에 대한 북부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만, 루비아나는 감격하지 않았다.

“월동제라…….”

오히려 찜찜해했다.

어쩐지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는 느낌이랄까?

다행히, 그 무언가가 금방 기억났다.

“아, 신년제!”

북부의 월동제와 같은 시기에 열리는 수도의 신년제. 그리고 그 신년제 전에 돌아가겠다고 한 약속.

“신년제 전엔 돌아오겠습니다.”

가지 말라고, 불안해하며 매달리는 사람을 그 말 한마디로 다독이며 떠나왔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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