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131)

***

인간 한 명과 와이번 한 마리는 금방 북부의 경계를 벗어나 수도에 도착했다.

확실히 왕눈이는 말보다 빨랐다. 그리고 자주 휘청거렸다.

왕눈이는 지쳐 있었고, 몸도 성치 않았다.

“잠깐 쉬었다 가자.”

루비아나가 왕눈이를 걱정해 속도를 줄이거나 착지하려고 하면, 왕눈이는 고집을 부리며 더 높이 날아올랐다.

“내가 배고파서 그래, 내가 힘들어서. 그러니까 잠깐 쉬었다 가자.”

루비아나는 왕눈이의 상태가 심각해진다 싶으면 다독여 아래로 내려갔다.

황무지면 큰 돌 아래에 몸을 뉘었다. 빈 들판이면 작은 짐승을 잡아 와 노릇하게 구워 왕눈이에게 대부분을 주고, 자신은 남은 것을 먹었다.

수도에 가까워 올수록, 마을 근처에 착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람들은 갑자기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검은 날개가 자신의 마을에 내려앉는 걸 보고는 비명을 질러 댔다.

그 검은 날개를 가진 괴물의 등에서 붉은 머리의 사람이 내리는 걸 보고는 줄줄이 뒤로 넘어갔다.

아쉴레앙 공작의 악명에 검은 용을 타고 다니는 마수 공작이라는 칭호가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루비아나는 기절하지 않은 사람 중 제일 튼튼해 보이는 사람을 그 지역의 영주에게 보내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허겁지겁 달려온 영주는 루비아나의 붉은 머리카락과 그녀의 검에 새겨진 문장을 확인하고는 극진히 대접했다.

왕눈이는 성주의 성, 혹은 저택을 휘감고 누워 잠을 청했고, 루비아나는 영주가 내준 방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침대는 푹신했지만, 몸은 전혀 편하지 않았다. 자꾸 루이먼드 생각이 났다.

루비아나는 나중에 사례하겠다고 말하며 왕눈이의 먹이를 푸짐히 준비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의사는 청하지 않았다.

“사, 사례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공작님을 모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 더없는 영광입니다!”

영주들은 한사코 거절했지만, 왕눈이가 소 스무 마리를 꿀꺽 삼키고도 입맛을 다시는 걸 보고는 조용히 아쉴레앙 공작저로 보낼 계산서를 작성했다.

누구 하나 루비아나에게 설설 기지 않는 영주가 없었다. 어떻게든 잘 보이려 애쓰는 모습이 딱하기까지 했다.

결혼 적령기의 아들을 둔 영주는 한밤중에 루비아나의 침실에 제 아들을 들이밀기도 했다.

루비아나는 잠결에 영주 아들놈의 목을 쥐어 창밖으로 집어 던졌고.

으아아아아-!

영주 아들의 비명을 들은 왕눈이는 푸르렁, 콧방귀를 뀌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어떤 맛좋은 음식도, 정성 어린 대접도, 아들놈을 침대에 밀어 넣는 서비스도, 루비아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루비아나는 그들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매번 혼자 씻었고 혼자 옷을 갈아입었다. 혼자 상처를 천으로 싸맸다.

“요즘 수도에 새로운 소식이 있나?”

“새로운 소식이라 하심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뭐, 가령 내가 죽었다든가?”

“예에? 하하하,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다 있습니까.”

“아니, 예를 들면.”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수도, 그 시끄러운 곳에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돈답니까? 그런 허황한 소문이 거기에서나 농담처럼 돌고 말지, 어찌 여기까지 내려온답니까. 여기까지 내려오는 건 정말 중요한 소문뿐이지요.”

“정말 중요한 소문?”

“예, 그것이…….”

“가감 없이 말해 보게, 내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해도, 화낼 생각 없으니까.”

“허어, 아닙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아니라, 글쎄 학자의 집에 폭군의 사생아가 숨어 있었다지 뭡니까.”

“…….”

루비아나가 결혼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있는지 기특할 따름이었다.

‘내가 그 사생아와 결혼했다는 소식은 내년쯤 도착하려나 보군.’

루비아나가 픽 웃자, 영주는 자신이 대단한 소식을 루비아나에게 알려 줬다고 착각하고는 싱글벙글 웃었다.

“그래? 그것참 대애단한 일이로군.”

루비아나는 그 착각을 깨부수는 대신, 대충 장단을 맞춰 주었다.

북부 근방의 영지들은 확실히, 수도와 거리도 멀고 접근성도 떨어졌다. 루비아나와 직접 소식이 오가는 장벽보다도 정보력이 떨어졌다.

“그런데 혹시 최근에 누군가 수도에서 북부 장벽 쪽으로 간다고 급히 가다가 이 근방에서 지쳐 죽었다거나, 얼어 죽었다거나 하진 않았나?”

“예? 아니요. 금시초문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즉시 제게 보고가 들어왔겠지요.”

“없었단 말이지……. 알겠네.”

아무래도 유언장이 집행되지 않은 건 확실한 듯했다.

이렇듯 지방 영주들이 알고 있는 정보는 루비아나가 알고 있는 것만도 못했다.

누구도 아쉴레앙 공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러니 살아 움직이는 루비아나를 보고도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단 한 명, 있었다.

수도 근처에 영지를 가진 밀턴 백작.

“어, 어떠…… 헉!”

그는 왕눈이가 아니라 루비아나를 보고 놀랐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걸 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루비아나는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 그러고는 지나쳐 온 다른 영주들에게 그러했듯 하룻밤 머물기를 청했다.

백작은 덜덜 떨며 저녁 만찬에 초대하겠다 말했고, 루비아나는 그의 성으로 가 씻을 물을 준비시켰다.

늘 그랬듯 하녀들을 물리고 뜨거운 물이 잔뜩 든 욕조에 몸을 담그려는데, 갑자기 물러났던 하녀들이 욕실로 뛰어들었다. 손에 날카로운 무기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역시.”

루비아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욕조 물은 금세 붉게 물들었다. 하녀 다섯 명의 피가 욕조 바닥을 질척하게 적셨다.

첨벙. 첨벙. 루비아나는 그 핏물에 손을 씻었다.

루비아나는 젖은 셔츠와 바지 차림 그대로 만찬장이 아니라 백작의 침실로 향했다.

긴 복도를 걷는 중 성의 하인, 하녀들을 마주쳤다. 그들은 피에 젖은 루비아나를 보며 놀라 비명을 지르거나,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달려왔다.

살기를 가진 자는 없었다. 그래서 죽이진 않았다. 그냥 한동안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만 만들었다.

칼레나가 봤다면 일 한번 번거롭게 한다고 혀를 찼을 것이다. 카드릭은 아무 말도 안 했을 테고. 루단테는 마음이 그렇게 약하니 날 못 이기는 거라고 이죽댔겠지만.

……루이먼드는 잘했다고 말해 주지 않을까?

백작 밑에서 일한 게 죄는 아니지 않느냐고. 죽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고.

‘내 남편은 상냥하고 정 많은 사람이니 분명 그렇게 말하겠지.’

루비아나는 손속에 자비를 두며 계속 걸었다.

백작의 방에 도착하기 전, 백작 부인의 방이 먼저 나타났다. 백작 부인은 홀로 자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백작 부인의 입을 틀어막고, 뺨을 톡톡 두드렸다. 눈을 뜬 백작 부인은 입이 막힌 와중에도 비명을 질렀다.

“으으읍!”

“계속 비명을 지르면, 난 당신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

하지만 곧 침묵했다.

“현명하시군요, 부인.”

루비아나는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뗐다.

“어, 어째서…… 공작님께서, 왜, 왜…… 아!”

백작 부인이 벌벌 떨며 루비아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더니, 무언가 중요한 게 생각났는지 고개를 쳐들었다.

한밤중이었다. 빛이라고는 창문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뿐이었다.

그런데도 루비아나는 백작 부인의 동공이 확대되는 걸 보았다. 그만큼 백작 부인의 반응이 극적이었다.

백작 부인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루비아나 역시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듯했다.

백작 부인은 굴러떨어지듯 침대에서 내려와 루비아나의 발치에 엎드렸다.

“저, 저희 아이는 살려 주세요. 제발요! 그 아이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제발, 제발!”

“백작 부인께는 죄가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만.”

“그, 그건…… 그건…….”

“아닙니까?”

루비아나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했다.

하지만 백작 부인은 속지 않았다. 목소리 안에 숨은 분노를 눈치챌 정도로 예민해서가 아니었다.

뚝, 뚝. 백작 부인의 머리 위로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는 핏방울 때문이었다.

물방울이라고 착각할 수 없었다. 곱게 자란 귀부인도 느낄 수 있을 만큼 피비린내가 지독했으니까.

백작 부인은 벌벌 떨며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녹색 눈이 선명히 빛났다. 무서웠다. 지옥에서 악마와 눈을 마주친다면 이런 기분이리라.

백작 부인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아직 울긴 이릅니다. 당신은 지켜야 할 게 있지 않습니까?”

루비아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백작 부인을 앞세워 그녀의 딸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갔다.

다섯 살 아이는 유모의 품에 폭 안겨 잠들어 있었다.

피투성이의 붉은 머리 괴물 공작이 아이를 빼앗아 들자, 유모는 비명 지를 새도 없이 기절했다.

백작 부인은 목이 메는지 캑캑댔다. 그 와중에도 비명을 지르지 말라는 루비아나의 말을 기억하고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제, 제발, 제발…….”

엉금엉금 기어와 다시 다리에 매달려 하는 말이라곤 이것뿐이었다.

백작 부인을 보며 루비아나는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질문을 하나 떠올렸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룩센 백작의 반란 때도, 새벽 전투 때도, 정복 전쟁 때도 계속 떠올랐으니까.

루비아나는 아이만이라도 살려 달라며 엎드려 비는 부모들을 볼 때마다 궁금했다.

과연 내 부모는 어떻게 죽었을까?

룩센 백작 부부는 폭군에게 바친 진주에 작은 흠집이 있다는 이유로 수도에 끌려갔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누가 봐도 모진 고문과 학대를 당했음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부모님은 백작 부인처럼 폭군의 발치에 엎드려 빌었을까? 우리 딸들만은 살려 달라고? 걔들은 아무 죄도 없다고?

궁금했지만 폭군을 칼레나 앞에 무릎 꿇렸을 때, 묻지 않았다. 폭군이 부모님을 입에 담는 걸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폭군에게 묻지 않았으니 답을 알 수 없었다. 답을 알지 못하니,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생각난다.

그래서 루비아나는 백작 부인의 어린 딸을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폭군만도 못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

이 눈물 많은 백작 부인도 죽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폭군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루비아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백작 부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백작 부인은 이 상황에서도 루비아나의 품속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자신의 딸을 보며 눈물을 쏟아냈다.

“당신의 남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내게 말하고, 폐하께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흐읍. 고, 공작님, 제발, 아이만은!”

“선택하라는 겁니다. 당신의 남편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고 아이와 살아남을지, 아니면 아이만 남긴 채 남편과 함께 죽을 건지.”

어떤 선택지든 아이는 살아남는다는 단서가 붙었다. 백작 부인은 그것만으로도 다시 숨은 쉴 수 있게 되었다.

“저, 저는……. 저는…….”

하지만 여전히 말은 잇지 못했다.

루비아나는 백작 부인이 다시 말문이 트이도록 도와주자고 마음먹었다.

“이 나이의 아이가 부모도 없이 홀로 살아야 한다면, 그 삶이 평탄하지는 않겠지요.”

외동이니 성인이 될 때까지 울타리가 되어 줄 언니가 없다. 그러니 성인이 될 때까지 삶이 고달플 것이다.

“이 아이만 남겨 둘 겁니까? 아비도, 어미도 없는 상태로 홀로 자라도록?”

“……아, 아니요, 아니요!”

백작 부인이 와락 달려들어 아이를 빼앗아갔다. 루비아나는 순순히 내주었다.

와아앙!

아이가 잠결에 울음을 터뜨렸다.

“응, 응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자자, 다시 자자. 괜찮아.”

백작 부인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이를 달랬다. 다행히 아이는 금방 다시 잠들었다.

잠귀가 어두운 아기였다.

좋은 일이었다. 밤에 푹 자는 건 건강에 좋은 일이니까.

백작 부인은 아이를 안은 채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남편이, 남편이 반란 세력에 가담했습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우리 딸의 좋은 혼처를 찾지도 못하고, 이대로 시골에 처박혀 살게 될 거라고…… 위험이 큰 만큼 보상도, 클 거라고……. 잘하면 루이먼드 왕자님과 혼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울음이 섞여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어느 대목에서 루비아나의 눈썹이 삐죽 솟았다.

“저, 저는 말렸습니다. 반란은 꿈에도 꾸지 않았습니다!”

백작 부인이 황급히 변명했다. 루비아나가 짜증 난 부분은 그 부분이 아니었건만, 백작 부인은 끝까지 알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루비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백작이 바라는 혼사는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

반란 세력에 가담한 건 백작뿐이고 자신은 아니라는 백작 부인의 고백이 진실인지, 살아남기 위한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루비아나는 유모와 백작 부인을 침대 기둥에 묶었다.

정신은 잃은 유모는 물론이거니와 아이를 안은 백작 부인은 반항하지 않았다.

꽁꽁, 하지만 아프지는 않게 묶은 뒤.

루비아나는 어려운 선택을 한 백작 부인에게 경의를 표하듯 고개를 까딱이고는 돌아섰다.

등 뒤에서 억눌린 울음소리가 들렸다.

루비아나는 그녀가 마음껏 울도록, 문을 꼭 닫아 주었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녹색 눈에는 더 이상 인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곧장 백작의 방으로 갔다. 방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백작은 깨어 있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서 자신의 영지로 날아들었는데, 그 아쉴레앙 공작에게 암살자를 보내 놓고 속 편하게 퍼 자고 있을 수 있을 리가.

그는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움직이며 손톱을 씹어 댔다.

루비아나는 그가 더 불안해하지 않도록,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피에 젖은 루비아나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괴물 공작, 그 자체였다.

“어, 어떻게!”

백작은 악마라도 본 것처럼 기겁했다.

“고작 그 정도로 날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

백작은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래도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눈앞의 사람을 괴물 보듯 하는 눈빛.

루비아나가 검을 어깨에 걸치고 다가가자, 백작은 창문 쪽으로 도망쳤다.

아내와 딸이 있는 곳은 루비아나의 등 뒤였다. 이미 아내와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묻는 걸 잊을 만큼, 살고 싶은 걸까?

궁금했지만 딱히 답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루비아나는 그의 어깨에 검을 던졌다.

“끄아악!”

백작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뚜벅, 뚜벅. 루비아나는 급하지 않게 걸어 백작의 등을 밟았다.

꺼억. 익숙하고 흔한 비명이 들렸다. 아무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허리를 숙여 백작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무슨 일을 벌이고 있지?”

“크흐으…….”

“아직 대답하고 싶지 않은 건가?”

검 손잡이를 잡고 비틀자, 더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이제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드나?”

“그, 그것이…….”

그것만으로도 백작은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말없이 듣고 있던 루비아나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사, 살려, 살려만…… 커헉.”

단번에 백작의 목을 잘랐다.

검에 묻은 피를 털 새도 없이, 몸을 던져 창문을 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키이이이-.

왕눈이가 하품 소리가 들렸다. 루비아나는 몸에 묻은 유리 조각을 털 새도 없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왕눈이는 쇠그물에 덮인 채 눈만 끔뻑대고 있었다.

쇠그물이 날개에 걸려 간지러울 때마다 날개를 펄럭였는데, 그러면 쇠그물이 치맛자락처럼 흔들렸다.

쇠그물을 당기고 있던 병사들이 어어어어- 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었다.

자신을 본 백작의 태도가 수상쩍어, 왕눈이에게 오늘 저녁은 굶으라고 했다.

왕눈이가 수면제, 혹은 독약이 든 먹이를 먹지 않으니, 기사와 병사들을 보내 쇠그물로 묶으려 한 듯했다.

딱 봐도 조악한 그물이었다.

기존의 것으로는 왕눈이의 크기를 감당할 수 없으니 쇠그물 여러 개를 얼기설기 엮은 듯한데.

고작 그 정도로 왕눈이를 묶을 수 있을 리가.

지루한지 하품하며 키이이- 숨소리를 내던 왕눈이가 눈을 데룩데룩 굴려 루비아나를 보았다. 정확히는 피투성이가 된 루비아나를.

반쯤 감겨 있던 꺼벙이 눈이 번쩍 뜨였다.

키이이이익!

왕눈이가 분노하며 날개를 쫙 펼쳤다.

그것만으로도 왕눈이를 덮고 있던 쇠그물이 갈가리 찢겼다.

으아아악! 쇠그물을 당기고 있던 병사들이 고꾸라지고, 날개바람에 날아갔다.

“내, 내 귀! 내 귀!”

와이번의 비명에 익숙하지 않은 병사들은 귀를 움켜잡으며 쓰러졌다.

루비아나가 다가가자 왕눈이가 목을 굽혔다. 루비아나는 단번에 왕눈이의 등 위에 올라탔다.

“가자, 수도로.”

루비아나가 속삭였다. 왕눈이는 즉시 날아올랐다.

어두운 밤, 밤보다 더 검은 와이번의 날개가 하늘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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