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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눈이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날았다. 루비아나의 기분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는,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속도를 높였다.
평소라면 왕눈이를 걱정해 살살 날라 다독였으련만, 루비아나는 왕눈이를 말리지 않았다.
저 멀리, 수도의 성벽이 보였다. 녹색 눈은 오직 가까워져 오는 성벽만 집요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신년제 때문인지 성벽 밖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사람들은 하늘을 뒤덮은 시꺼먼 마수를 보고는 놀라 기겁했다.
왁자지껄하니 흥이 넘치던 축제 분위기가 단숨에 아비규환, 난장판의 상황으로 바뀌려던 순간.
“아, 아쉴레앙 공작님이다! 공작님이 마수를 타고 돌아오셨어!”
누군가 왕눈이 위에 탄 사람을 발견했다.
타오르는 횃불 같은 머리카락. 바람에 날려 깃발처럼 펄럭이는 은장 백합 문장이 새겨진 망토.
은빛 백합은 핏물로 얼룩져도 선명하게 빛났다.
“괴물 공작이다!”
“아쉴레앙 공작님이시다!”
“공작님이 신년제에 드래곤을 타고 오셨어!”
두려움이 가시고, 좀 전보다 더 큰 흥이 돋았다.
“아쉴레앙 공작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제국 만만세!”
성문 밖 사람들의 고함에, 성벽을 지키던 경비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딱 봐도 평소보다 수가 반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 신년제를 즐기러 가고, 최소한의 인원만 남은 듯했다. 병사들 역시 루비아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공작님!”
“연락되는 인원을 모두 불러들여 성벽을 지켜라.”
“……예, 예에? 예?”
“이 시간 이후로 성문을 닫는다. 누구도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한다. 개미 한 마리도 성 밖으로 내보내지 마라.”
“예에에?”
“고, 공작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서, 설마 북부에서 마수가?”
병사들이 당황하여 웅성댔다.
신년제 동안에는 성벽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 사람들이 편히 드나들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제국이 생긴 지 몇 해나 되었다고 관례를 운운하냐고 할지 몰라도, 제국이 생긴 이래 늘 그렇게 해왔다. 때문에 병사들은 루비아나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루비아나는 그들을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아쉴레앙 공작으로서의 명령이다. 어길 시, 군령으로 다스리겠다.”
루비아나는 검을 집어 던졌다. 콰직, 검이 성벽에 박혔다. 검에 새겨진 은장 백합이 선명하게 빛났다.
히익! 으아악. 가지각색의 비명이 들렸다. 그들의 머리 위로 검은 마수가 지나갔다.
멍하니 왕눈이를 바라보던 경비대 병사들은 그 마수가 황궁으로 향하는 걸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무, 문! 성문을 닫아라! 아쉴레앙 공작님의 명령이시다!”
“휴가 나간 놈들 다 불러들여!”
“다른 성문 쪽에도 전해! 당장 문을 닫아!”
“수비를 강화해라, 모두 제 위치로!”
활짝 열렸던 성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
“북부에서 마수 떼가 내려오나 봐!”
“사, 살려 줘! 살려 줘. 얼른 성문 안으로 들어가야 해!”
난데없는 마수와 아쉴레앙 공작의 등장에 넋을 놓고 있던 사람들은 성문 안으로 들어가거나 나가기 위해서 허둥대기 시작했다.
성문 한 곳에서 그런 소란이 일어났지만, 성벽 안의 들뜬 축제 분위기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수도는 축제 분위기로 꽉 차 있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그 분위기에 취해, 머리 위로 마수가 날아가도 감탄부터 터트렸다.
“우와, 드래곤이다!”
“정말? 우리 폐하께 신년 인사라도 하러 온 건가?”
“보아하니 새끼 드래곤인 거 같은데, 정말 우리 폐하께 인사라도 드리러 온 건가 봐.”
거기엔 북부의 드래곤을 때려잡은 황제와 세 공작이 자신들을 지켜 주고 있다는 믿음도 단단히 한몫했다.
수도에 황제와 공작 둘이 버티고 있는데, 무슨 드래곤이 또 나타나 감히 난동을 부리겠는가?
루비아나는 왕눈이를 향해 손을 흔들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이를 악다물었다.
‘일부러 이때를 노렸군.’
가장 번잡하지만 가장 경계가 느슨해질 때.
1년 중 단 하루를 꼽으라면, 신년제 날이었다.
반란 세력이 준비가 덜 됐는데 무턱대고 덤빈 게 아니라, 나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는 의미였다.
북부에서 루이먼드와의 약속을 기억해 냈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발, 제발. 늦지 마라. 제발!’
손바닥에서 땀이 흥건했다. 루비아나는 버릇처럼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가, 검을 성벽에 박아 넣고 온 걸 기억하고는 젠장, 욕설을 내뱉었다.
키이이이이!
왕눈이가 울부짖었다. 황궁에 감도는 진한 인간 피 냄새를 맡은 것이었다.
루비아나는 황궁 성문을 지키는 기사들이 고꾸라져 있는 걸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현재 황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왕눈아, 박아 버려.”
루비아나가 정궁, 본래대로라면 경건하게 신년제 의식이 이루어지고 있어야 할 건물을 가리켰다.
키이이이!
왕눈이가 그 건물에 제 몸을 들이박았다.
콰앙!
굉음이 울리며, 건물이 무너졌다.
왕눈이에게 괜찮으냐고 물어볼 정신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바로 뛰어내려 쏟아지는 건물 잔해와 먼지 속을 뒹굴었다.
“큭.”
하필 다친 어깨를 뾰족하게 부서진 잔해에 부딪쳤다.
팔이 뜯기는 고통이 느껴졌으나, 몇 바퀴 바닥을 구르고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갔다.
방금 전의 굉음과 지진으로 전선이 엉킨 듯, 두 세력이 뒤섞여 싸우고 있었다.
하얀 연미복을 입은 연어 무리와 황실 기사단.
누가 적인지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근처에 있던 연어가 황실 기사를 상대하다 말고 몸을 돌려 루비아나를 공격했으니까.
“공작님!”
기사가 다급히 손을 뻗기도 전에, 연어의 목이 꺾였다. 우득.
연어는 제 죽음을 믿지 못하며 쓰러졌다.
루비아나는 허리를 굽혀 그 옆에 죽어 있는 황실 기사의 시체에서 검을 빼내 들었다.
“폐하께선 어디에 계시지?”
“이곳을 지나 침실이 있는 곳으로 가신다고, 크윽.”
대답하던 기사가 피를 뿜으며 고꾸라졌다.
루비아나는 기사를 벤 연어를 베고, 기사를 한 손으로 붙잡았다.
기사는 급하게 나온 건지 갑옷을 미처 꿰어 입지도 못하고,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그 셔츠가 콸콸 쏟아지는 피로 시뻘겋게 젖어 들었다.
기사는 창백해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괘, 괜찮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괜찮아.”
루비아나는 기사를 벽에 기대게 하고, 두 손으로 상처를 누르고 있도록 잡아 주었다.
“크윽. 폐, 폐하가!”
“쉬어, 뒤는 내게 맡기고.”
루비아나는 기사를 등지고 일어서서, 검을 허공에 한 바퀴 돌렸다.
순간, 주변 공기가 변했다.
연어들은 숨 막히는 살기를 느끼며, 하던 공격을 멈추고 루비아나를 노려보았다.
수십 쌍의 눈빛을 한 몸에 받으며 루비아나가 픽 웃어 보였다.
“시간 끌지 말고, 한 번에 덤벼.”
수십 마리의 연어가 일제히 루비아나에게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