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31)

***

인간은 너무 약하다. 그걸 알기에 인간은 무언가를 대적할 때 떼를 지어 덤빈다.

그러면 아무리 강한 무언가도 주춤하게 된다.

새삼 무리 지은 인간이 강해져서가 아니라, 상대하기 귀찮아져서.

그러니 수가 많은 건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시간을 마냥 낭비할 수는 없으니, 이쪽도 무리를 짓는 수밖에.

“내 쪽으로 다 모여.”

루비아나가 황실 기사들을 불러들였다.

“고, 공작님을 보필하라!”

“공작님을 엄호하라!”

루비아나를 선두로, 황실 기사들이 뭉쳐 연어 떼를 밀어냈다.

루비아나는 그들과 함께 전진했다. 가는 곳마다 연어 떼와 연어 떼가 아닌 자들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길을 뚫으며, 루비아나의 무리는 적어지기도 하고 불어나기도 했다.

그들을 이끌며 황제의 침실에 도착했다.

어떤 곳보다 연어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루비아나가 찾는 두 사람이 그 속에 파묻혀 있었다.

연어 떼를 상대하며 싸우고 있는 칼레나. 그리고 연어 떼에게 잡혀 있는 루이먼드.

황홀하리만치 아름답던 머리카락이 억센 손에 감겨 있었다. 그 자가 루이먼드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확 꺾인 목 위로 드러난 얼굴은 피와 눈물로 젖었다.

고작 그 정도 엉망이 되었다고 못 알아볼까?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람인데.

“루이?”

그녀의 남편이 처참한 몰골로 끌려가고 있었다.

“비아!”

그가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당연히 그쪽으로 몸을 날려 그를 구해야 마땅했다.

“폐하!”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울부짖음만 아니었다면.

눈동자가 옆으로 돌아갔다. 칼레나가 거기 있었다.

루비아나를 보고도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연어 떼를 상대하는, 반란을 맞닥뜨린 황제. 어느 기사와 등을 맞댄 채 적들을 상대하는 기사. 등을 맞댄 기사가 스러지고, 등이 무방비로 노출되어 버린,

내 동생.

칼레나의 어깨에 연어의 칼이 스치는 순간. 루비아나의 온몸,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세상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의 끝.

“레나!”

루비아나는 칼레나 쪽으로 몸을 돌렸다.

“페하, 폐하를 지켜라!”

절 뒤따르는 황실 기사들에게 외쳤다.

그리고.

그걸 본 검은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루이먼드는 저항을 멈췄다. 자신을 끌고 가려는 연어들을 밀어내던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또 부르게 될까 봐. 비아, 하고.

“서둘러.”

리사나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루이먼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뺨을 타고 내리는 것이 눈물인지 핏물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쿠웅!

묵직한 소리가 들린 뒤, 다시 눈을 떠도 그의 세상은 온통 까맸으니까.

“오지 마, 언니 남편을 구해!”

칼레나의 비명을 듣고 루비아나가 고개를 돌렸을 땐,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비밀 통로 문이 닫히고, 입구가 무너져 내렸다.

루이먼드가 잡혀갔다.

리사나가 루이먼드를 끌고 간 후.

상황은 우스울 정도로 손쉽게 정리됐다.

비밀 통로 입구가 무너지는 소리가 신호였는지 연어들이 썰물 빠지듯 도망쳤다.

대부분 뒤쫓아 잡아 죽였으나, 일부가 기어이 황궁을 빠져나가 축제 분위기로 흥겨운 거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일부에 오딜 후작이 포함되어 있었다.

반란 세력은 황제를 죽이는 데 실패하여 도망쳤으니 이쪽의 승리라 할 만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누구도 승리감을 느끼지 못했다.

“젠장!”

오딜 후작을 놓친 루단테는 분을 참지 못하고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루단테가 오딜 후작을 상대하는 내내 홀로 연어 떼를 감당했던 카드릭은 살아남은 기사들을 모아 칼레나를 호위하도록 했다.

칼레나는 드래곤의 가죽을 덮은 의자에 앉아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루비아나는 칼레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난 괜찮아. 가 봐. 찾아야 하잖아. 더 멀리 달아나기 전에 잡아야 해.”

칼레나가 아무리 말해도 루비아나는 석상처럼 우뚝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루비아나의 얼굴은 무섭도록 차갑게 굳어 있었다. 루단테마저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할 정도였다.

“비아!”

루이먼드의 마지막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쟁쟁 울렸다. 눈을 감으면 자신이 외면했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 보였다.

버림받았다는 충격에 휩싸인 얼굴. 반항할 힘을 잃고 실 끊긴 인형처럼 툭 꺾이던 목. 모든 게 다 생생했다.

“공작님, 저 팔이…….”

칼레나를 돌보던 의사가 주춤주춤 루비아나에게 다가왔다.

루비아나는 의사 말고 칼레나를 보았다. 칼레나는 제가 보낸 게 맞는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난 됐고, 폐하의 상태는 어떠한가?”

의사는 루비아나의 날카로운 녹색 안광을 마주하고는 겁먹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저, 그, 그것이 큰 상처는 없으셔서…….”

“별거 아냐. 그러니까 내 걱정 하지 마.”

“레나.”

루비아나의 부름에 칼레나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절 올려다보는 녹색 눈을 보며, 루비아나는 아주 오래전 심장에 새겼던 어떤 맹세를 떠올렸다.

신에게 피의 맹세를 바치기 전, 어쩌면 신을 믿고 있었을지도 모를 유년 시절에 마침표를 찍었던 그 날.

사람의 형체도 뭣도 아닌 상태로 돌아온 부모의 시체 앞에서, 울부짖고 오열하는 칼레나를 끌어안고 그녀의 눈을 가린 채로, 부모의 시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맹세했다.

반드시, 동생만은 지키겠다고.

그러니까 조금 전 상황에서 칼레나를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었다.

다시 조금 전으로 돌아간다 해도, 루비아나의 선택은 변치 않을 터였다.

루비아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칼레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 눈을 마주한 게 얼마 만인지 아득했다.

“나는 널 지켜.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만!”

칼레나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하지만은 없어.”

“지금 놓치면, 끝이야. 여지없이 그들은 그를 자신들의 왕으로 세울 거라고.”

“그렇겠지.”

“그래도 괜찮은, 거야?”

괜찮으냐고 묻는 칼레나의 얼굴에 어릴 적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루비아나가 아끼는 물건을 몰래 가지고 놀다 깨 버리거나 찢어 버리고선, 언니가 화낼까 봐 겁에 질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뭐, 이런 거 가지고 화내거나 하진 않을 거지?’ 이런 식으로 건방지게 말하다 한 대 맞을 걸 열 대 맞았던 어린 칼레나.

고작 두 살 차이지만, 그럴 때면 똑똑한 동생이 너무 어리고 철딱서니 없게 느껴져서 크게 화내지도 못했다.

그깟 레이스, 그깟 도자기가 뭐라고 잔뜩 풀이 죽어서는 눈치만 보며 꼼지락대는데, 어찌 화를 낼 수 있을까? 미워도 고와도 내 동생인 것을.

‘넌 안 다쳤어? 괜찮아?’

화 안 났다는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칼레나는 배시시 웃었으니까.

루비아나는 강제로 뜯겨나가 버린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성한 손을 뻗어 칼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텔 수도원에서 은빛 갑주를 입고 찾아온 칼레나를 동생이 아니라 주군으로 따르게 된 이래, 이런 친밀한 접촉은 처음이었다.

“……언니?”

칼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수한 당황. 칼레나의 얼굴이 여지없이 루비아나의 동생으로 돌아갔다.

루비아나는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레나, 어떤 상황에서도 난 네 언니야. 그건 변하지 않아.”

“…….”

“네가 무얼 하든 괜찮아. 네가 다치지만 않으면 돼. 하지만 넌 지금 다쳤고.”

루비아나의 눈이 칼레나의 어깨에 닿았다. 어깨에 감은 붕대에서 옅게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난 널 다치게 한 것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아.”

그 순간 루비아나의 녹색 눈에 스민 한기는, 수도에 퍼진 그녀에 대한 소문이 결코 허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언니 남편은? 어떻게 하려고?”

칼레나가 속삭이듯 물었다. 어쩐지 걱정하는 듯 들렸다.

“루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칼레나가 루이를 걱정하다니. 루비아나는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살짝 고개를 숙인 칼레나의 얼굴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어쩔 셈이냐고!”

답을 재촉하는 목소리에 루비아나는 고개를 숙였다. 툭. 칼레나와 이마를 맞대고는, 놀라 고개를 드는 칼레나에게 웃어 보였다.

“되찾으러 가야지.”

동생을 지켰으니 이제, 감히 동생에게 반기를 든 것들을 쓸어버리고 남편을 구하러 갈 차례였다.

“……그래, 언니라면 그럴 줄 알았어.”

그제야 칼레나의 얼굴에도 웃음이 어렸다.

“아아, 형제 없는 사람은 어디 서운해서 살겠나!”

뒤에서 얼쩡거리던 루단테가 그새를 참지 못하고 기어이 딴죽을 걸었다.

“입 닥치고 있어.”

루비아나는 짜증을 내며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잡아 루단테에게 집어 던졌다.

등 뒤에서 으악, 소리가 들렸다. 냉큼 피했으면서 엄살이 저렇게 요란했다.

“쟨 진짜 아니야. 알지?”

루비아나가 언니로서, 또 신하로서 진지하게 조언했다.

“글쎄.”

칼레나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얼굴이었다.

“잠깐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폐하.”

루비아나는 신하의 예를 갖추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툭. 무언가가 발에 걸렸다. 손잡이에 백합 한 움큼이 묶여 있는 단검이었다.

백합은 짓밟혀서 엉망이었다. 형편없는 모양새인데 자꾸 눈이 갔다. 루비아나가 주워 들자 루단테가 그걸 알아보았다.

“어, 그거…… 거기 있었네.”

루단테가 그 단검이 무엇인지 말해 주었다.

“…….”

루비아나는 말없이 그 단검을 챙겼다. 그녀의 표정을 본 카드릭이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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