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131)

***

신년제는 예정대로 진행됐다. 황궁 밖의 신년제는.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공표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신년제 때문에 수도에 인구가 밀집해 있고 소란스러운데, 괜히 혼란만 가중할 거란 의견이었다.

“어쩌면 그게 반란 세력이 바라는 걸지도 모르지.”

칼레나의 말에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수긍했다.

황궁은 밤새 환하게 불을 켰다. 원래대로라면 그 불빛 아래 화려한 연회가 열렸을 터이나, 이번엔 죽은 자를 떠나보내고 산 자들이 모여 복수를 도모하는 회의가 열렸다.

황제는 살아남은 반란 세력의 체포를 명했다.

시종장은 침실에서 바로 잡혔고, 아쉴레앙 공작가의 시녀장 역시 바로 신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황궁에서 자신을 잡으러 올 것을 예상했던 듯, 현관 앞에 단정히 서 있었다.

공작저는 텅 비어 있었다.

시종장과 시녀장은 순순히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시종장은 미리 반란 세력과 접촉해 신년제 당일 비밀 통로 문을 열기로 했다고 말했다.

시녀장은 아쉴레앙 공작저로 가기 전부터, 반란 세력과 내통하고 있었다고 실토했다.

아쉴레앙 공작이 죽었다는 소식이 활동 신호였다.

시녀장은 정신없는 루이먼드를 속여, 황궁으로 일하러 들어가는 일꾼들을 반란 세력으로 채웠고, 신년제 당일엔 일을 돕겠다고 나서는 공작저 고용인들에게 모두 휴가를 주어 내보내고 빈 저택을 지켰다고 했다.

“공작저의 고용인들은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 죄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제가 혼자서 한 일입니다.”

그녀는 끝까지 공작저의 다른 고용인들을 걱정했다. 엄격하지만 상냥한 시녀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칼레나는 그들을 감옥에 가두되, 고문은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루비아나는 두 사람의 체포 내용을 전해 듣고는 작게 한숨만 내쉬었다.

회의실에는 황제와 세 공작, 두 명의 국장이 모였다.

독을 거의 다 토해 내고 해독제를 먹었음에도 황제와 두 공작의 얼굴은 창백했다. 의사는 그 독을 먹고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게 기적적인 일이라 말해 루비아나의 화를 돋웠다.

급히 불려 온 내무국장과 회계국장은 독을 먹은 황제와 공작들보다 더 얼굴이 안 좋았다.

다행히도 행정관은 반란 세력에게 피해를 입지 않았을뿐더러. 연어들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신년제임에도 행정관에 틀어박혀 일하고 있던 내무국장과 회계국장은 반란이 일어난 줄도 몰랐다.

“멍청한 반란군 놈들. 제국을 무너뜨리려면 행정관부터 공격했어야지.”

회계국장이 반란군의 멍청함을 아쉬워했다.

신년제 준비로 내내 야근했던 두 사람은 살아 있되 살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피로와 피곤, 그 자체인 행정관의 두 수장에게 황제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반란이 일어났어, 곧 내전이 벌어질 것 같아.”

“그럴 줄 알았어요오오.”

내무국장은 철퍼덕, 테이블에 엎어지며 미지근한 눈물을 흘렸다.

“전쟁?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합니다만.”

룩센 백작의 반란 때 보급 부대를 쫓아다녔고, 그 공으로 정복 전쟁 때 보급 부대의 회계 총괄이 되었고, 이어 제국의 초대 회계국장이 되어 갈갈 갈리고 있는 남자는 다시금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말에 잠깐 현실 도피를 시도했으나 곧 머리를 움켜잡고 절망했다.

“공작님, 그놈의 정보기관은 매달 비용 처리만 산더미처럼 보내면서 예산을 축내는 주제에 반란 하나 미리 막지 못하고 뭐 하는 겁니까!”

그는 세 공작 중 제일 만만한 루단테를 걸고넘어졌다.

“인력과 예산이 부족해서, 귀족들을 모두 세세히 감시할 수 없었다고.”

루단테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많이, 처먹었으면서 부족하다고요?”

“뭐? 처먹어?”

루단테가 인상을 팍 썼다.

회계국장은 쓸쓸히 웃으며, 제 왼쪽 가슴을 가리켰다. 어서 여기에 칼을 꽂아 넣어 날 산재 처리해 달라고.

“안 됩니다. 이 사람 죽으면, 저도 죽어요.”

내무국장이 힘없는 목소리로 루단테를 말렸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눈물겨운 희생심 따위는 아니었다.

“저 사람 없으면 보급 누구한테 맡기려고요?”

덤터기를 쓸 순 없다. 내무국장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아. 죄송.”

루단테는 얼른 사과하며 물러섰다.

내무국장의 말이 하나 틀린 게 없었다.

회계국장의 잔꾀에 넘어가 하마터면 그를 죽일 뻔했다. 전쟁이 나면 보급을 맡아 줄 소중한 인재인데.

“비, 비겁하다! 남편을 버리고 적의 편에 가담하다니.”

“아내 혼자 놔두고 죽어 버리겠다는 남편 편을 들어 뭐 해? 새 회계국장이 일 익숙해질 때까지 나만 덤터기 쓰는 거잖아, 싫어어!”

“부국장, 내가 잘 훈련했어. 믿어도 돼, 여보.”

“아무렴, 당신만 하려고. 내가 먼저 과로로 죽으면 죽었지, 당신이 먼저 죽는 건 절대 못 봐.”

“끔찍한 소리. 당신 죽으면, 내무국 일까지 나한테 넘어올 텐데.”

“지금 내가 죽는다는데, 내무국일 떠맡는 게 중요해?”

“곧 전쟁 날 거라잖아. 그 일을 나 혼자 어떻게 다 하라고?”

행정관의 두 수장이 힘없이 투닥투닥 싸웠다.

황제와 세 공작은 전적으로 내무국장을 응원했다.

회의실 분위기는 대략 이러했다. 반란은 남의 나라 일 같았다.

대화 중 내전이니, 보급이니, 무서운 단어가 오갔으나 내일 아침 식사 메뉴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보다 가볍게 들렸다.

“그 늙은이, 반드시 내가 죽여 버리겠어.”

그나마 루단테가 오딜 후작에게 적의를 불태울 뿐이었다.

“…….”

루비아나는 다친 어깨를 망토로 가리고 앉아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아!”

귓가에 맴도는 환청을 수천, 수만 번 곱씹을 따름이었다.

루비아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누구도 루이먼드를 입에 담지 않았다. 루단테마저 힐끔힐끔 루비아나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게 생각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중 폭탄이 도착했다.

“폐하!”

부시종장이 노크하는 것도 잊고 회의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봐 봐, 한번 반란이 일어나면 너나 나나 다 황제 무서운 줄 모른다니까.”

칼레나가 싱긋 웃으며 부시종장을 맞이했다.

“죽일까요?”

루단테가 부시종장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사아악. 부시종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이 이렇게 어마무시한 무례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외쳤다.

“제,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알아, 반란 일어난 거. 우리가 이 밤중에 왜 안 자고 이렇게 모여 있는데?”

루단테가 성의 없이 대꾸했다.

“그, 그게, 그게 아닙니다.”

“아니라고?”

“예, 황궁에서 일어난 반란이 아니라 제국 전역에서, 여덟 곳에서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제, 제국이 있기 전으로 돌아가겠다며, 옛 왕국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부시종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비아나가 몸을 일으켰다.

“폐하.”

“앉아.”

“제가 가겠습니다.”

“앉으라고 했어.”

“절 보내 주십시오.”

루비아나는 칼레나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 사람처럼 굴었다. 칼레나는 그런 루비아나를 외면했다.

“도미넨트 공작, 상황 파악해 봐. 어느 정도인지.”

“예, 폐하.”

“폐하!”

“펠트하르그 공작.”

“예, 폐하.”

“미안하지만 바로 출전 준비를…….”

“폐하!”

루비아나가 칼레나의 말을 중간에 끊고 앞으로 나섰다.

하아. 칼레나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루비아나는 그 틈에 황제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안 가겠다고 해도 보낼 거야. 못 들었어? 여덟 군데에서 동시에 반란이 일어났다잖아.”

“절 보내 주십시오. 저 혼자면 충분합니다.”

“북부에서 분신술이라도 배워 왔어? 그런 거라면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우리한테도 알려 줘, 특히나 저쪽이 제일 절실한 것 같으니까.”

칼레나가 내무국장과 회계국장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웃음 지었다.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면 충분합니다.”

“고집부리지 마.”

“폐하야말로 고집부리지 마십시오.”

“…….”

“…….”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자매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선 넘었어, 아쉴레앙 공작.”

“폐하.”

“하나만 해. 언니면 언니. 신하면 신하.”

“신하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니, 아닌 것 같은데.”

“…….”

“저 둘을 내 옆에 붙여 놓으면 내가 더 안전해질 것 같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루비아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카드릭은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고, 루단테는 어깨를 으쓱였다. 둘 다 오늘 신년제에서 제대로 활약하지 못한 죄를 지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겠지.”

루비아나가 두 공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외부의 반란 세력은 내가 처리할 테니, 너희는 수도에서 폐하를 모시고……”

“누구 마음대로?”

이번엔 칼레나가 루비아나의 말을 끊어 먹었다.

“폐하!”

“가만있어.”

칼레나가 몸을 일으키려는 루비아나의 어깨를 지그시 잡아 눌렀다. 그리고 제법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전처럼 우리 넷이 모두 움직일 수는 없겠지. 내가 잘못되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지켜야 하는 건 수도, 황궁 따위가 아니다. 황제인 칼레나, 그녀 자체였다.

설사 반란이 성공해 수도가 넘어가고 황성이 무너진다 해도, 그녀만 무사하다면 제국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걸 칼레나도, 세 공작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루비아나는 동생이자 황제인 칼레나를 안전하게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이었고, 칼레나는 세 공작의 등 뒤에 숨어 있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나는 수도에 남고, 세 공작이 동시에 동부와 서부, 남부의 반란 세력을 친다. 보급은 회계국장이 맡도록 하고, 내무국장은 날 도와 ‘아직’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지역을 맡는다.”

칼레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실수로라도 지게 되면 무리하지 말고 곧장 수도로 꼬리 말고 돌아와. 내가 여기 있을 테니까.”

그럴 리 없지만, 만에 하나 세 공작이 반란군 진압에 실패해 온 제국이 반란 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해도, 황제가 머무는 수도만은 굳건하리라. 칼레나는 오만하게 자신했다.

세 공작은 황제를 지키며 제국을 수호한다.

그러니 황제는 그들의 뒤에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으며, 그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이자 돌아와야 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칼레나는 더없이 완벽한 황제였다.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마. 난 세 공작을 공평하게 신임하고 사랑하니까. 알았지?”

칼레나가 툭툭, 루비아나의 등을 두드리고는 돌아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세 공작은 출전 준비를, 두 국장은 보급 준비에 힘을 쏟도록.”

칼레나의 명랑한 목소리에, 행정관 두 국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미넨트 공작만 날 따라오도록 해.”

루비아나가 뒤따르려 몸을 일으키자, 칼레나가 등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말했다.

“예, 폐하!”

루단테가 신나게 대답하며 뒤따랐다. 일부러 루비아나의 어깨를 툭, 치고는 혀를 삐죽 내밀었다. 그러고는 후다닥 칼레나를 뒤따랐다.

엉덩이에 꼬리가 달려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붕붕- 흔들리고 있을 듯했다.

“…….”

루비아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가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카드릭이 루비아나의 성한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너한테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닌데, 지금은 폐하를 설득하는 게 먼저야.”

루비아나는 칼레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카드릭의 손을 밀어냈다.

“잠깐.”

카드릭이 말리려 했으나 루비아나는 다친 사람답지 않은 속도로 이미 앞선 두 사람을 쫓아간 후였다.

“젠장.”

카드릭은 빈손을 꽉 움켜쥐고 벽을 내리쳤다.

쿵.

육중한 소리에 비틀거리며 행정관으로 돌아가던 두 국장의 몸이 동시에 움찔, 떨렸다.

“제발, 황궁 벽에 대고 힘자랑하지 마요. 한 번 칠 때마다 세금 내고 쳐, 세금 내고 치라고. 반란도 세금 내고 해, 일단 돈 내고 반란한 다음에 성공하면 도로 가지고 가란 말이야.”

회계국장이 흑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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