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31)

***

칼레나와 루단테는 뒤따라오는 루비아나를 무시하고, 그나마 덜 망가진 서재로 향했다.

칼레나가 먼저 들어가고 루단테가 뒤따르려고 할 때, 루비아나가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아 루단테의 뒷목을 잡아챘다.

“우왓!”

루단테를 집어 던지고, 대신 서재로 들어갔다. 루단테가 뒤따라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기까지 했다.

철컥철컥.

“뭐야, 뭐 하는 거야! 당장 안 나와? 감히 나와 폐하, 둘만의 독대를! 루비 누나! 루비 누나 이러기야? 폐하! 폐하! 누나 좀 혼내 주세요!”

루단테가 문손잡이를 돌리며 문을 쾅쾅 두드려 댔다.

마음만 먹으면 문짝 정도는 단숨에 부수고 들어올 수 있는 주제에 엄살을 부렸다.

남들을 제 발끝의 때만도 못하게 보기 때문에 제멋대로 구는 거지,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자매의 다툼에 낀 거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장난 반, 칼레나와 독대하는 시간을 빼앗겨 짜증 난 마음 반, 그런 마음으로 요란을 떠는 것이었다.

“쳇, 루비 누나. 두고 보자! 딱히 누나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와서, 기뻐서 물러나 주는 게 아니야. 내가 오늘은 이렇게 순순히 넘어가지만 다음번엔 국물도 없어!”

잠시 후, 루단테가 투덜거리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루비아나는 루단테에게 고마워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칼레나는 문밖이 조용해지고 눈이 마주치자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봐, 반란이 일어나면 다들 황제 보기를 뭐같이 본다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언제 이런 적 있었어?”

“…….”

“없었잖아.”

“제 무례에 화나셨다면……”

“계속 아쉴레앙 공작으로서 말할 건가?”

“…….”

“아니면 언니로서 말할 거야?”

칼레나가 커다란 책상 끝에 걸터앉아 커다란 창을 등졌다.

창밖의 밤하늘이 칼레나의 등 뒤로 굽이굽이 펼쳐졌다. 촘촘히 박힌 별들이 칼레나에게로 쏟아질 것 같았다.

그 배경을 뒤로하고, 칼레나가 오만하게 웃고 있었다.

조금 전, 머무는 황궁이 반란 세력에게 털려 버렸으며, 광대한 제국 곳곳에서 반란 세력들이 들고 일어섰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이 젊고 강하고 아름다운 황제는 조금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 보였다. 그 모든 일을 예견한 사람처럼. 아니, 이렇게 되길 바랐던 사람처럼.

차라리 루이먼드가 반란 세력에게 잡혀가고 비밀 통로가 폐쇄됐을 때, 언니 남편을 찾아오라고 소리 지르던 그 모습이 좀 더 인간다워 보였다.

루비아나가 내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은 확신이 되었다.

“다 알고 있었구나.”

“…….”

칼레나가 말없이 빙긋, 미소 지었다.

어릴 때의 모습이 조금 남아 있었다. 부모님 몰래, 언니인 루비아나도 모르게 일을 벌여 놓고는, 뒤늦게 발각되었을 때 씩 웃던 그 모습.

그때 저지른 일이래야, 몰래 이웃 영지에 놀러 갔다 온다거나 앞으로의 용돈을 담보로 몰래 상인과 할부 계약을 맺어 보석 눈이 박힌 드래곤 목각 인형을 사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황제가 된 칼레나가 벌인 일은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알고 있었던 거야. 신년제 때 반란이 일어나리란 걸.”

“글쎄.”

“정복당한 왕국들이 오딜 후작과 연계해 반란을 일으킬 것도 알고 있었던 거야?”

루단테도 알고 있었을까? 루비아나는 조금 전 회의 시간에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능력 부족’을 운운하던 루단테를 떠올리곤, 그랬으리라 확신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리먼스 부인.”

“내가 언니에게 보내 준 시녀장? 그녀가 왜?”

“그래, 네가 내게 직접 보내 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반란 세력과 내통했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루비아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물었다.

“네가 시킨 건가? 시종장도?”

그건 한 가닥 바람이기도 했다.

자신을 외할머니처럼 챙겨 줬던 시녀장, 오랜 세월 가족처럼 지내 왔던 시종장. 두 사람 모두의 배신을 믿고 싶지 않은 마음.

“아니, 그건 아니야.”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며 얼렁뚱땅 대답하던 칼레나가 이 질문만큼은 분명하게 대답했다. 응, 그거 아냐, 언니. 한 가닥 희망마저 철저히 짓밟았다.

“가능성을 점쳐 봤고, 어쩌면 나와 언니에게 정을 붙여 마음을 바꿔 먹지 않을까 기대도 해 봤는데, 그 두 사람 다 자신이 가진 가능성만큼 움직이더라고.”

배신할 줄 알고서 시녀장을 루비아나에게 보냈으며, 시종장을 곁에 두었다는 뜻이었다.

“시녀장의 남편은 폭군이 만들었던 친위 기사단의 말단 기사였다던데, 새벽 전투 때 죽었다나 봐.”

“하.”

“혹시 화났어? 아니면 서운해? 시녀장이랑 그사이 많이 친해졌던 거야? 음, 하긴. 언니는 은근히 고용인들한테 정을 잘 주곤 했으……”

“어쩌려고 그런 짓을! 잘못하면 넌 죽을 수도 있었어!”

루비아나가 벌컥 화를 냈다.

칼레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젖혔다.

“안 죽었잖아.”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젠장.”

루비아나는 이를 악물고 끓어오르는 속을 억눌렀다.

‘침착, 침착해야 한다. 침착해야 해. 말려들면 안 돼.’

흥분하면 또 칼레나에게 어영부영 넘어가게 될지 모른다. 몇 번이고 되뇌었다.

심호흡 몇 번에 숨이 차분해졌다.

쳇, 칼레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아닌 게 아니라, 루비아나의 화를 돋워 이야기를 대충 마무리하고 싶었던 듯했다.

루비아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흥분이 가라앉으니 확실히 아까는 보지 못했던 게 눈에 들어왔다. 예를 들면, 아주 예전에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대화의 한 조각.

“내가 결혼 승낙을 받으러 왔을 때 일부러 3년을 말했지.”

루이먼드도 3년을 말했고, 칼레나도 3년을 말했다. 둘이 짠 듯이.

그땐 별생각 없이 넘겼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이었다.

루이먼드의 3년은 이혼 후에도 그레이움 백작가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결혼 기간이었다.

그와 달리 칼레나가 말한 3년은, 아무 근거도 없는 3년이었다.

3년 뒤에 반란 세력이 날뛰게 될 것이다? 굳이 3년을 기다려 반란 세력을 쑥쑥 키운 다음 한 번에 잡아들인다?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그때 루비아나는 칼레나가 자신과 루이먼드의 대화를 엿듣고, 자신을 놀리기 위해 굳이 3년 기한을 건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랬을 리가.

동생인 칼레나도, 황제인 칼레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 것을.

“내가 방심하도록 3년을 말한 거였어. 네가 3년 뒤에 반란이 일어날 거라고 말하면, 난 당연히 3년 뒤를 생각하고 그 전은 걱정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황제와 아쉴레앙 공작의 분열 소문 따위, 애초에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소문은 반란 세력에 대한 루비아나의 경계를 늦추기 위한 위장술에 불과했다.

“나부터 속인 거였구나. 내 눈을 가리려고.”

전술의 기본이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루비아나는 자신이 칼레나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놀아났음을 알아차렸다.

루비아나만이 아니었다. 루이먼드를 납치해 가선 자축하고 있을 반란 세력, 오딜 후작 또한 처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칼레나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쪽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겠지만.

칼레나는 새삼 원망스럽지도, 배신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황제는 필요하다면 측근의 신하도, 하나 남은 언니도 속이고 이용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곤란해.”

루비아나는 황궁 바닥을 덮은 시체들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몇 날 며칠 공들여 단장하고 신년제에 참석한 제국 귀족들 대부분. 황제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기사들, 하인과 하녀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어.”

오랫동안 전쟁터를 떠돌고, 수많은 적을 베어 넘겼다고 해서 살인을 즐기는 광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죽인다. 하지만 죽이지 않을 수 있다면 죽이지 않는다. 루비아나의 전투 방식은 늘 그러했다.

그런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이번 신년제는 충분히 막을 수 있는 비극이었고, 막을 수 있다면 막았어야 하는 비극이었다.

그게 루비아나와 칼레나의 차이였다.

“그래, 너무 많은 귀족이 죽었지.”

“알면서 왜?”

“그러니까 그들의 가족은 절대 날 배신하지 못할 거야, 이제.”

“……뭐?”

“복수심 때문에라도, 혹은 갈 곳이 없어졌기 때문에라도 말이야.”

“지금 그 말은, 설마?”

“응. 그 설마.”

칼레나가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오딜 후작은 반란의 중요 파트너였던 그레이움 백작을 죽였다.

신년제 연회장에 반란에 가담한 귀족이 그레이움 백작뿐이었을까?

천만에.

초대받은 귀족 중 절반가량은 오딜 후작과 접촉했던 자들이었다. 칼레나가 루단테와 의논하여 아주 세심하게, 빠짐없이 초대했으니까.

“오딜 후작은 고지식하고 결백한 인물이야. 자신의 손으로 아덴 왕국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명분에 사로잡혀서는, 새 아덴 왕국의 귀족이 되어도 괜찮을 인물들을 고르고 또 골랐겠지.”

그 안에 들지 못한 떨거지들은 이용만 당하다 버려졌다. 바로 오늘.

“아주 과감해, 나와 달리 말이야. 그러니 그 과감함의 대가도 과감하게 감당해 내겠지. 청렴하고 결백한 아덴의 마지막 조언자, 오딜 후작은 말이야.”

그 대가를 오딜 후작을 대신해 상상해 보는 듯, 칼레나의 입가의 미소가 짙어졌다.

“버림받은 쓰레기의 가족들은 복수심에 불타 나에게 충성을 다할 거야. 버림받은 쓰레기들이 매달릴 곳은 이제 나뿐일 테니까.”

오딜 후작은, 반란 세력은 알까?

칼레나가 자신들의 반란을 이용해 제국의 지배층을 한 번 거르고 정리하려 한다는 것을. 마치 맛있는 과자를 만들기 전, 밀가루를 체로 쳐서 고운 가루들만 골라내는 것처럼.

“각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들도, 뭐 나쁘지 않아. 이참에 한 번 더 밟아 주자고.”

“일부러 오딜 후작과 다른 반란 세력들이 연락하는 걸 놔뒀구나.”

“나랑 언니가 너무 착해서, 왕국들을 정복할 때 너무 착하게 굴었잖아? 그러니까 제 분수를 모르는 것들이 살아서 저렇게 날뛰고 있잖아. 초반에 한 번 더 가지치기를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제국에 반감을 가진 옛 왕국들의 반란 세력을 이참에 쓸어버리자는 것이었다.

칼레나에게 반란 세력들은 체스 위의 말과 같았다.

이리저리 움직이고 서로 연락해 힘을 합치고 제국의 전복을 꿈꾸는 그 자그마한 말들은, 칼레나가 자신들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으리라.

모든 게 칼레나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계획에는 절대적인 명제가 하나 따라붙어야 한다. 황제인 칼레나에게 그 반란 세력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는 강한 무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 무력은 세 공작이었다. 칼레나에게 절대 충성하며, 칼레나가 명령하면 드래곤의 심장이라도 파내 올 수 있는 자들.

그러니 칼레나의 계획은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루비아나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살짝 휘청거렸다.

뚝, 뚝. 어깨에서 핏물이 떨어졌다. 위에 덮은 망토는 이미 축축해진 지 오래였다. 그 어깨에 칼레나의 시선이 머물렀다.

“언니 어깨는, 성할 날이 없네.”

“모든 게 네 계획대로 됐어? 만족해?”

루비아나가 다친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언니?”

칼레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대답했다.

“이제 시작인걸.”

“…….”

“아, 변수가 하나 생겼어. 언니 남편 말이야.”

“내 남편?”

루비아나가 눈을 번쩍 떴다.

그제야 루비아나는 칼레나가 줄곧 루이먼드를 ‘언니 남편’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신년제 연회장에서 떼로 독살당한 귀족들에 대해 말할 때는 보이지 않던 온정이 느껴졌다. 북부로 떠나기 전과 다른 태도였다.

루비아나는 괜히 긴장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칼레나가 루이먼드에게 호감을 내보이는 이유를 알 수 없기에, 루비아나는 이 변화를 좋게 생각해도 될는지 혼란스러웠다.

루비아나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칼레나가 말을 이었다.

“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니까 따라 죽으려고 하더라고.”

“……!”

안 듣느니만 못한 이유였다.

“오늘 오딜 후작이 움직이지 않았더라도, 난 암살 시도를 받았을 거야. 언니 남편에게. 자살 못 하게 막으니까 반역자가 되어 죽을 생각을 한 것 같더라고.”

“…….”

어깨를 움켜잡고 있던 손을 내리니, 품속에 넣어 두었던 단검이 만져졌다.

“루이는……”

“그리고 날 구하려고 했어.”

“…….”

“웃기지 않아? 폭군의 사생아 따위가, 폭군을 죽이고 일어선 나를 구하겠다고 제 몸을 던졌어.”

칼레나가 피식, 웃었다.

제국 건국의 주역인 황제와 세 공작은 모두 폭군에게 소중한 것을 빼앗겨 상실을 경험한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 앞에 난데없이 폭군의 사생아가 나타났다. 폭군이 버려 버린 혈육.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겨 결핍된 자들 앞에, 그 결핍을 준 자의 가장 소중하지 않은 것이 나타난 것이다.

칼레나는 그 아이러니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잘생긴 걸 좋아하는 언니가 홀려 남편으로 삼겠다고 했을 때,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하게, 실컷 이용하다 죽여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고것이, 제법 귀엽게 굴어 칼레나의 마음을 샀다. 칼레나는 루비아나를 향한 루이먼드의 지고지순한 마음이 꽤 마음에 들다.

그래서 가볍게 변덕을 부려 보았다.

“살려 줄게, 언니 남편은.”

루이먼드는 칼레나에게 꼭 반란을 진압하고 자신의 목을 베러 와 달라고 말했다. 칼레나는 폭군의 사생아의 간절한 부탁 따위, 별로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죽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때, 나 너무 너그럽지? 칼레나가 그런 표정을 지으며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루비아나는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짧은 숨을 내쉬었다.

어깨를 잡고 있던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려다가, 손바닥에 묻은 피를 보고서는 주먹만 꾹 쥐었다.

“……고이 살려 줄 생각은 아니잖아.”

방심하지 않는 루비아나는 칼레나의 생각을 금방 읽어 냈다.

“어머?”

“끝까지 루이를 이용할 셈이야?”

“응. 안 돼?”

“어쩌려고?”

루비아나가 물었다.

“죽이진 않아.”

“죽느니만 못한 상황이라면, 나는 받아들이지 않겠어.”

“신기하네. 언제부터 아쉴레앙 공작이 이렇게 내 말에 토를 달았지?”

“…….”

“사랑은 위대한 건가? 동생을 향한 사랑과 황제를 향한 충심을 넘어설 만큼?”

“아닌 거 알잖아.”

루비아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알아. 언니는 그때 날 선택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걸. 그러니까 나도 언니 남편을 살려 주겠다는 거야. 언니에게 선택받지 못한, 불쌍한 언니 남편을.”

칼레나가 산뜻하게 대답했다. 루비아나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비아!”

대답하지 못한 부름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어쩔 셈이야?”

“반란 세력을 철저히 짓밟을 거야.”

칼레나가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웃었다.

“멸망한 왕국을 향한 한결같은 충성심? 옛 아덴을 다시 일으키려는 충신들? 그렇게 명예롭게 역사에 이름을 남기도록 할 것 같아?”

반란은 당연히 실패할 것이다. 칼레나는 이 명제를 기본에 깔고 말하고 있었다.

“이 반란은 머저리들의 바보 행진에 불과해.”

“레나.”

“들어 봐, 언니. 아주 재미있을 거야. 학자의 집에서 문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상상력이 아주 뛰어나더라고.”

칼레나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자신만만한 게 이해가 갈 정도로 더럽게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오딜 후작의 딸 리사나는 아쉴레앙 공작의 아름다운 남편을 탐내, 감히 신성한 신년제 자리에서 아쉴레앙 공작의 부군을 납치해 갔다.

폭군이 폭정을 펼칠 때는 조언자의 역할을 저버리고 도망쳤고, 새로 세워진 제국에 순응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오딜 후작은 사랑하는 딸의 상사병을 지켜보다 못해 아쉴레앙 공작 부군 납치 소동에 가담한다.

멸망한 옛 왕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다고 떠들어 대 세력을 모았고, 남자 하나 납치하려고 벌인 일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던 주변 왕국의 후손들이 멍청하게 휘말려 든다.

“그래서 남편을 빼앗기고 분노한 아쉴레앙 공작의 말발굽 아래, 반란 세력은 철저히 짓밟힐 거야.”

그 아쉴레앙 공작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칼레나는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오딜 후작과 그 딸은, 아쉴레앙 공작의 손에 목이 잘릴 거고. 아쉴레앙 공작은 무사히, 자신의 아리따운 남편을 되찾는 거지. 어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었다. 승자가 될 예정인 칼레나는 이미 어떻게 역사를 써 나갈지 구상을 끝냈다.

남은 건, 그 구상대로 현실이 진행되는 것뿐이었다.

“…….”

루비아나는 침묵했다.

“왜? 별로야? 미남에게 홀린 초대 아쉴레앙 공작이라는 기록이 좀, 부끄러우려나?”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지만…….”

언제나 칼레나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던 루비아나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그리하겠노라 말할 수 없었다.

칼레나가 준비한 역사대로, 이 전쟁에서 루이먼드는 살아남을 것이다.

사는 평생, 치욕스러운 꼬리표가 따라붙을 것이다. 두 여인 사이에서 납치당하고, 강제로 취해졌던 미인.

어쩌면 개선식 때, 가장 존귀한 전리품 취급을 받으며 전시될지도 모른다.

백성은 소문의 그 미인을 보려고 앞다퉈 거리로 뛰쳐나올 것이고, 루이먼드를 보고는 과연 저 미모 때문에 반란이 일어날 법하다고 입방아를 찧어 댈 것이다.

백성이 제멋대로 떠들어 대면 떠들어 댈수록, 오딜 후작의 반란은 하찮아질 것이다. 종래에는 여덟 왕국이 들고 일어선 반란은 한낱 미남 쟁탈전으로 치부되어 버릴 것이다.

칼레나가 원하는 대로, 오딜 후작은 후손들의 기록에서마저 명예를 잃고 치욕스럽게 이름이 불릴 것이다.

‘루이는 평생 그런 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하겠지.’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관심과 비난, 저질스러운 루머가 쫓아다닐 것이다. 감당할 수 있을까?

……루이먼드는 간절히 살길 바랐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남고 싶어 하진 않으리라.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새삼 오딜 후작에 대한 증오가 옅어져서는 아니었다. 오로지 루이먼드 때문에 품은 물음이었다.

“응. 난 이때만을 기다렸거든.”

루이먼드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긴 했지만, 루비아나만큼 루이먼드가 소중하지는 않은 칼레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기다렸다고?”

“언니, 들어 봐. 나는 부모님이 죽고 언니가 날 떠난 후 세상 모든 걸 원망했어.”

단조로운 목소리. 하지만 담은 내용까지 단조롭지는 않았다.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피해자들마저도 말이야.”

그그극. 칼레나가 손톱으로 책상 위를 긁었다.

가벼운 소리였지만, 루비아나에겐 누군가의 비명처럼 들렸다.

“동부에서 성을 높이 쌓고 꽉 틀어박혀서는 오직 제 아들 하나만 살리고자 전전긍긍했던 동부 도미넨트 백작도.”

“…….”

“부모와 형제, 친척들이 몰살당하고 혼자 살아남은 주제에 제게 매달리는 서부의 백성을 책임지겠다며 기어이 폭군의 변경백이 되어 버티고 서 있던 펠트하르그 변경백도.”

침착한 척하던 녹색 눈이 드디어 한 꺼풀, 가식을 벗어 내고 분노를 드러냈다.

“내 부모님이 바친 진주를 멋대로 만지작거리다 떨어뜨려 흠집을 내고는, 그걸 내 부모님에게 덮어씌운 그레이움 백작도.”

“…….”

“왕의 조언자로서 충신을 그리 죽여선 안 된다고 간언해야 하는 임무를 저버리고, 제 영지에 처박혀 눈과 귀를 가리고 숨어 있던 오딜 후작도.”

그리고.

“날 버리고, 혼자 편하게 수도원에 틀어박혀 버린 언니까지도.”

루비아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루비아나도 칼레나도, 다른 두 공작도,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딱히 금기시하지 않았다. 쉽게 입에 담았고, 들었다.

하지만 그건, 각자의 심장에 새겨져 있는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 수준의 이야기뿐이었다. 더없이 표면적이고 사건 위주의 가벼운 말들.

어디서 싸울 때 죽을 뻔했다느니, 네게 칼 맞은 어깨가 비만 오면 쑤신다느니, 그때 보급이 끊겼을 때는 정말 짜증 났다는 둥.

특히나 레나는 그 시절, 자신의 감정이 어땠는지에 대해 농담으로라도 입에 담지 않았다.

칼레나는 늘 이성적이었고 자신만만했으며, 항상 웃었다.

산뜻해 보이기까지 한 칼레나의 웃는 모습은, 그녀를 따르는 병사들에게 승리의 증표처럼 추앙받기도 했다.

칼레나의 말대로 오랫동안 기다렸던 때가 되어서일까? 아니면 이번엔 정말 죽은 줄 알았던 언니가 살아 돌아와서 마음이 풀어진 걸까?

칼레나는 꽁꽁 숨겨 두었던 자신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알아, 알고 있어. 다 어쩔 수 없었던 거야.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어.”

칼레나가 빙긋, 웃었다. 즐거워 짓는 웃음은 결코 아니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목소리를 높이고, 울었으면 나았을 것 같은데, 칼레나는 결코 울지 않았다.

“언니는 날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버린 거야. 어쩔 수 없이 날 떠난 거야. 폭군이라 할지라도, 룩센 백작 부부를 죽이고 다음 대 룩센 백작까지 제 침실의 노리갯감으로 삼지는 못할 테니까. 룩센 백작의 미혼 여동생을 건드리는 건 쉬워도.”

칼레나가 피식, 웃었다. 루비아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도미넨트 백작은 우리 부모님과 달리 자기 자식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그치?”

“……그래.”

“펠트하르그 변경백은 제게 매달리는 서부의 백성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부모와 형제들을 죽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거고.”

“……그랬지.”

누구에게나 다 이유는 있었다.

“그레이움 백작은 권력을 위해 제 딸까지 폭군에게 가져다 바친 개새끼니까 남부의 촌구석에 가만히 있는 룩센 백작 따위에게 누명을 씌울 때 무슨 망설임이 있었겠어? 그땐 특이한 일도 아니었잖아? 그놈의 손에 그렇게 죽어 간 귀족만 수십, 수백이었으니까.”

그레이움 백작은 신년제 연회장에서 오딜 후작의 손에 죽었다. 그간 저지른 죄에 비하면, 너무 쉬운 죽음이었다.

그가 죽을 때, 칼레나는 독 때문에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눈을 부릅뜨고 그 죽음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쉬워했다.

너무도 아쉬웠다.

저렇게 쉽게 죽으면 안 되는데.

“오딜 후작은 대대로 왕의 조언자라는 명예를 이은 주제에, 미친 주인에게서 도망치지도 못하고, 반항하지도 못한 채 낑낑대는 개새끼에 불과했어.”

“레나.”

“알아, 다 알아.”

하하, 칼레나가 웃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다들, 불쌍한 자들이야. 폭군만 아니었다면, 다들 그럭저럭 적당히 멍청하게 살았을 텐데.”

수천, 수만 번 마음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던 주문이었다. 어쩔 수 없었어. 다들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까 폭군만 죽이면 돼, 그럼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그리 생각하며, 투항하는 그레이움 백작을 살려 줬고 폭군 밑에서 빌빌대던 다른 귀족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끝까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잘난 척하는 오딜 후작마저 인정해 줬다.

나쁜 건 폭군이었으니까.

“언니.”

칼레나는 이를 악물고 루비아나를 노려보듯 바라보았다. 루비아나는 말없이, 그 눈빛을 받아 냈다.

허공에서 두 자매의 눈이 마주쳤다.

한 사람의 눈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들을 받아 줄 때마다, 밤마다 나는 침대에 누워 피를 토했어.”

신년제 때 먹은 독은, 그때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온몸의 뼈를 바스러뜨리고, 온몸의 피를 다 토해 내는 고통으로 그들을 받아들였어.”

어떤 독도 그 밤들보다 독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을 받아들여 줬어.”

아니, 사실 단 한 순간도 그들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저 숨죽여,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발아래 엎드린 뱀들이 기어이 고개를 쳐들고 자신들의 본성대로 제 발꿈치를 물려고 하는 그때를.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쫙 입을 벌린 그 뱀들을 내려다보며, 칼레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 뱀들의 머리를 발로 짓이기려 하고 있다.

뱀들이 살고자 칼레나의 발목을 감고 비틀고 도망치려고 해도, 칼레나는 결코 발을 치우지 않을 것이다.

제 발목이 상해도, 뱀의 독과 피로 발바닥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도 웃겠지.

그렇다면 루비아나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칼레나 대신 뱀을 밟고, 독에 몸을 태우는 것.

루비아나는 칼레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언젠가처럼, 칼레나를 우러르며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되겠니?”

“가, 가서 죽여.”

칼레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이 질문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감히 내게 반기를 든 자들을 잔인하게 죽여. 그들의 죽음을 치욕스럽고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칼레나가 책상을 손톱으로 쥐어뜯듯 긁었다. 그그극. 그것이 마치, 적들의 신장이라도 되듯이.

“이 제국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가장 어리석고 멍청하며 천박하고 더러운 자들이 될 거야. 내 빛나는 권좌의 그림자도 되지 못할, 더러운 오물로 만들어 역사에 기록되도록 할 거야. 그러기 위해서, 그들을 죽이고 와. 내가 원하는 건 그거야.”

단 한 번도 분노하지 않은 적 없었던 녹색 눈이, 단 한 번도 제 편이 아닌 적 없는 녹색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드러내는 증오. 악 받친 분노가 차갑게 불탔다. 그 어떤 때보다 선명한 녹색으로.

루비아나는 제게 쏟아지는 분노와 증오를 온전히 받아 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대답을 말했다.

“명을, 받듭니다.”

루비아나는 칼레나의 손을 잡아당겼다. 손톱이 다 상해 버린 그 손을 소중히 움켜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당신의 적이 나의 적. 당신이 밤마다 흘린 피의 값을 반드시 받아 오겠습니다.”

“언니, 반드시 죽여야 해.”

“그러겠습니다.”

“죽여. 사지를 찢어 죽여. 갈가리 찢어 죽여야 해.”

“꼭, 그러겠습니다.”

“우리 부모님을! 우리의 행복한 어린 시절을,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로 바꿔 버린, 그들을, 절대 용서하지 마.”

“반드시 그러하겠나이다.”

“병사 하나, 말 한 마리, 그 성의 곡식을 갉아 먹은 쥐 새끼 한 마리까지 살려 두지 마. 투항 따위 용서하지 않아. 그들이 똬리를 튼 땅에서는 풀 한 포기도 나지 않게 만들어. 피를 뿌리고 소금을 뿌리고 자갈을 덮어. 그들의 피와 살을 받아먹은 땅 위를 거대한 돌산으로 만들어. 영원히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어.”

칼레나가 루비아나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엉망이 된 손톱이 루비아나의 손을 파고들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언니, 나는, 누구도 용서 못 해. 절대.”

대신 다른 곳이 너무 아팠다. 몸 안의 모든 피가 모이고 지나가는 곳이.

“…….”

나도, 용서 못 할 거니, 라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건 이득인 걸까, 해로운 걸까?

루비아나는 여전히, 여전히 답을 알지 못했다. 그저, 자매란 원래 이런 거겠지 싶을 따름이었다.

“아무도 용서하지 마. 그래도 돼, 너는.”

“맞아, 우리는 그래도 돼, 언니.”

칼레나가 해사하게 웃으며 눈꼬리를 곱게 휘었다.

칼레나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루비아나는 울고 있는 제 동생의 손을 오래도록 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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