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131)

***

문을 닫고 나와 텅 빈 복도를 터벅터벅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아 왜 걸어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해, 의욕 없이 벽에 등을 기대섰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빈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비아!”

단지 그 생생한 부름만이 몇 번이고 심장을 긁어 댈 따름이었다.

평범한 행복을 바랐다. 이제는, 그 정도는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여전히 여긴, 지옥의 한복판.

‘너도 나도, 그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아마, 너도.

루비아나는 건너편 복도에 우뚝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단련한 몸. 단정한 얼굴. 파란색 외눈 속에 박힌 짙은 결핍.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외모도 전혀 달랐지만. 눈만큼은 꼭 닮아 있었다.

루비아나는 그 눈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고 칼레나를 발견했다. 루단테도 보았고, 원점으로 돌아와 그 눈의 본래 주인인 카드릭 또한 찾아냈다.

‘도대체 폭군은 우리들에게서 뭘 빼앗아간 걸까?’

아직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모르는 약하고 어린 것들은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어른이 되기 전 받은 상처는, 심장에 그대로 박혀 살아 숨 쉬는 매 순간, 되살아나니까.

몸을 한 바퀴 돌며 옅어진 증오와 절망은, 상처는, 선명한 심장을 돌아 다시금 새롭게 절망과 증오를 건네받아 온몸을 휘감는다.

심장에, 뼈에, 피에 사무친 고통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약하고 어린 것을 상처 주면 안 돼. 커서 강하고 또 강해진 다음에도, 결코 낫지 못하니까.

폭군이 폭군인 이유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약하고 어린 모든 것의 심장에 그 같은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심장에 깊은 자국으로 남은 상처를 끌어안고 자라난 아이들은, 폭군의 심장에 검을 꽂고도 자신들의 상처를 감당해 내지 못하고 있다.

이미 칼레나의 심장을 들여다본 루비아나는, 또 다른 심장을 들여다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날 기다렸어?”

“할 말이 있다기에.”

굳은 얼굴 위에서 푸른 눈이 한 번 깜빡였다.

“그런데 지금 내가 많이 피곤해. 우리 폐하께서 내 마음에 불을 질러 놓았거든.”

죄책감, 미안함. 안쓰러움. 속상함. 슬픔. 그딴 것들을 태워서.

“그러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

“나는……”

“나 지금 아주 피곤해. 그러니까 나중에.”

루비아나는 카드릭을 지나치려 했다.

카드릭이 루비아나의 다치지 않은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할 말이 뭐였지?”

“나 지금 되게 피곤해, 그래서 고운 말이 안 나올 거야. 그래도 지금 듣고 싶어? 괜찮겠어?”

하아. 루비아나가 한숨을 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이 깔끄럽기에 펴 보니, 피가 굳어 가루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루비아나는 망토에 손을 문지르다, 망토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임을 확인하고는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꼈다.

슬슬 어깨를 치료해야 할 것 같았다.

“루비.”

일단 남의 이름을 함부로 막 불러제끼는 저 애꾸 공작을 처리하고.

“내 유언장은 어쨌어?”

루비아나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골치 아프다는 티를 팍팍 냈다.

“네가 부탁한 대로 처리했어.”

“내 남편한테 제대로 전달했다?”

“그래.”

“그런데 왜, 내 남편이 내 유언장을 집행하지 않은 거지?”

“내 알 바 아니……”

“아니, 네 알 바야. 나는 네게 내 남편을 부탁했으니까.”

루비아나가 성큼, 카드릭에게 다가갔다. 카드릭은 눈앞에 불쑥 다가온 루비아나의 얼굴을 보고 놀라 숨을 흡, 멈췄다.

그뿐, 아무 방비도 하지 못했다.

덕분에 루비아나는 아주 손쉽게 카드릭의 멱살을 쥐어, 그를 벽 쪽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쿵.

카드릭의 등이 벽에 부딪쳤다.

루비아나는 멱살을 잡아 끌어 내렸다.

카드릭 쪽이 머리 하나 이상은 더 큰지라 멱살을 잡아 밀어 올린들 몸이 들리지 않았다. 근육으로 다져진 저 몸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고.

그러니 루비아나는 좀 더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카드릭을 밀어붙이고, 그 얼굴을 제 눈높이까지 끌어 내리는 것으로.

“펠트하르그 공작.”

“이런 상황에서도 내 이름을 안 부르는 건가?”

“유부녀잖아. 외간 남자 이름 부르기 싫어서.”

“…….”

하나뿐인 눈에 불똥이 튀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평소라면 짐짓, 못 본 척 고개를 돌려주었겠으나, 이번엔 아니었다.

“널 믿어서 유언장을 맡겼고, 후처리를 부탁했어. 그런데 내 남편이 자살을 시도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보기만 했다고?”

“내가 어떻게 처신하길 원했는데?”

“어떻게라니?”

루비아나는 제국 최고의 멍청이를 보듯 카드릭을 바라보았다.

“그 똑똑한 머리가 안 돌아가? 독이 덜 빠졌어?”

“내가 어떻게 하길 원했냐고 물었어.”

평소처럼 못 본 척, 모르는 척할 수 없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카드릭이 손을 들어 제 멱살을 움켜쥔 루비아나의 손을 덮었다.

손가락뼈라도 꺾을 듯 우악스럽게 다가오더니, 막상 손등을 덮을 때는 새 깃털을 움켜쥐듯 조심스러웠다. 파르르, 손이 떨렸다.

루비아나는 이 느낌을 알았다.

전투 중 칼레나가 죽은 줄 알고 그쪽으로 달려갔다가, 칼레나가 주변의 적을 죄다 쓰러뜨리고 자신만만하게 웃는 걸 봤을 때.

칼레나의 손을 잡고 동생이 살아 있는 걸 확인하던 루비아나의 손이 딱 이만큼 떨렸다.

북부에서 전해 온 부고는, 그 부고를 찢고 살아 돌아온 루비아나는.

루단테가 쉽게 칼레나와의 독대를 양보하게 만들었으며, 칼레나가 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속내를 드러내게 만들었다.

또한 카드릭을 이만큼 떨게 만들었다.

끈끈한 애정을 느끼고 설레거나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루비아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카드릭에게 내가 죽은 줄 알았냐고, 그래서 무서웠냐고 달콤하게 속삭이는 대신.

그의 손을 젖은 낙엽 떼어 내듯 털어 버렸다.

“내 남편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걸 네게 굳이 알린 이유는……”

“내가 네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아서지. 그래서 내가, 네 남편에 대한 적의를 지우고 네 남편을 도울 거라고 생각해서.”

비꼬려는 생각이었는데, 말의 끄트머리에 이르러선 원망이 불쑥 솟았다.

원망. 원망. 그럼에도 사랑.

“…….”

루비아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드릭이 비죽 웃었다.

카드릭은 다시 루비아나의 손을 붙잡았다.

쳐 내려는 듯 꿈틀대는 그 손을 놓치지 않고, 오히려 제 멱살을 더 세게 잡으라는 듯 알아서 조였다.

그렇게라도 루비아나에게 닿고 싶었다. 루비아나가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하고 싶었다.

실감하고 나니, 원망스러웠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 셋 중 네가 가장 생각 없고, 단순하다고 하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적어도 나는 알아. 네가 얼마나 영리하고 영악한지, 루비.”

“그렇게 부르라고 허락한 적 없어.”

“그럼, 나도 이렇게 부를까? 비, 아?”

“카드릭!”

“그동안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 내 마음을 외면하고 모른 척했지.”

“그런 적 없어.”

“아니, 항상 그랬어. 그런 널 보며, 아무 말 못 하고 네가 매번 건네는 유언장이나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내 마음을, 넌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어?”

“…….”

“어땠을 것 같아? 네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네 남편이란 작자에게 마지막 유언장을 건네야 했을 내 마음은 어땠을 것 같냐고?”

“내가 안다고 뭐가 달라지지?”

루비아나가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물었다.

“네가 나한테 청혼하지 못한 이유, 내가 모를 것 같아?”

루비아나가 픽,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카드릭의 눈가가 꿈틀, 움직였다.

“나는……”

“내 동생 핑계 대지 마.”

“아니, 나는 네게 청혼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을 뿐이야.”

“그 준비, 넌 죽을 때까지 못 할 거야, 펠트하르그 공작.”

이런 상황에서까지 펠트하르그 공작, 펠트하르그 공작. 그놈의 펠트하르그 공작.

폭군의 사생아를 루이라고 부르는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그놈의 펠트하르그 공작 때문에, 카드릭은 머리가 돌 것 같았다.

“왜 못 할 거라고 생각하지?”

그래서 울컥하는 마음에 언성을 높였다.

“나는 네게 속하고 싶어서, 너와 함께 있기 위해서라면 펠트하르그 공작의 지위도 포기할 수 있어서, 먼 친척을 찾아내 작위를 넘길 준비를 하고 있었어.”

“아아, 갑자기 폭군이 씨를 말려 놓은 펠트하르그 방계를 찾는다고 애쓴다더니. 그런 이유에서였나?”

루비아나가 코웃음 쳤다. 카드릭의 노력을 전혀 가상하게 봐 주지 않았다. 카드릭은 서운했다.

“어째서, 너는 항상 그렇게…….”

왜 날 봐 주지 않는 거냐고, 내 노력이 네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거냐고 물으려 했건만.

“너, 나 죽으면 따라 죽을 수 있어?”

루비아나가 먼저 물었다.

“…….”

루비아나를 위해 펠트하르그 공작위도 깔끔하게 포기하려 했던 카드릭이 잠깐,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그 잠깐 동안 카드릭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간 생각을, 루비아나가 모를 리 없었다.

대를 이어 펠트하르그 변경백 가문에 충성해 온 가신들. 그 가신의 가신들.

그 가신들의 가족. 아직도 펠트하르그 변경백을 신의 사자처럼 떠받드는 서부의 백성.

그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고, 책임질 것 또한 너무 많았다.

그것들이 그를 살게 만들었다.

그가 제 부모와 형제들을 죽인 폭군에게 충성하게 만들었고, 그가 룩센 백작 칼레나를 따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젠, 그가 펠트하르그 공작으로 살게 지탱해주고 있었다.

카드릭은 그것들을 다 저버리고 루비아나를 따라 죽을 수 없었다.

루비아나와 결혼하기 위해 펠트하르그 공작위를 내려놓는다?

그가 더 이상 펠트하르그 공작이 아니게 된다 해도, 여전히 펠트하르그 가문의 가신들과 서부의 백성은 카드릭을 따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카드릭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오면, 펠트하르그 공작이 아닌 카드릭 역시 그들을 위해 다시금 그들의 앞에 설 것이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카드릭이 펠트하르그 공작위를 내려놓겠다는 말은, 일종의 기만이었다. 남들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속이려 드는, 어설픈 기만.

“난, 널 위해, 공작위도, 모든 것도 내려놓을 생각도 했어.”

다급히 말했으나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카드릭은 혀를 깨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날 따라 죽을 순 없겠지.”

“…….”

카드릭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들었다.

“널 탓하려는 게 아냐. 널 이해해. 왜냐면…….”

루비아나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또한 그러니까.”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칼레나, 하나뿐인 동생. 그 동생이 일으켜 세운 제국, 그 제국의 백성. 특히나, 겨우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귀족을 얻고는 그 귀족을 어쩔 줄 모르는 북부의 머저리들.

그러니 만약 카드릭과 결혼한 후 그가 죽는다 해도 그를 따라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설령 루이먼드가 이번 일로 인해 죽는다 해도, 그를 따라 죽는 일 또한 없을 것이고.

“그런데 루이, 내 남편은 날 따라 죽으려고 했다지? 내 부고를 듣자마자, 아무 미련 없이.”

“그 자식이, 나보다 널 더 사랑한다고?”

“그건 모를 일이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알고, 비교할 수 있겠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피오니 로렌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자꾸만 의문이 생긴다.

피오니 로렌을 사랑하는 루이먼드가 어째서, 자신의 부고를 받자마자 죽으려 했던 걸까?

아쉴레앙 공작이라는 방패막이가 사라진 것이 절망스러워서? 벼랑 끝에 몰렸다고 생각해 피오니 로렌이라도 살리고자 자신을 희생한 걸까?

아니면 따라 죽을 만큼 자신을 사랑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앞의 지극히 타당한 이유들을 다 놔두고, 허황한 바람을 마음속에 품게 된다.

루이먼드가 자신을 피오니 로렌 이상으로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바람.

스스로가 어처구니없어 웃음이 났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착각은 자유라지 않는가?

그러니까 루비아나는, 일단 루이먼드를 되찾을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할 셈이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 때문에 죽으려 했던 건 분명하니까.

“하지만 이건 분명해. 그 사람한테는 지금, 내가 유일한 거야. 나밖에 없어.”

“비아!”

응답받지 못한 절실한 외침.

어째서 다른 여자를 마음에 담고 있는 그가 그리도 절실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른 건지, 자신을 따라 죽으려고 했던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루비아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든, 넌 내 남편을 못 이겨.”

“네 마음은? 네 마음은 어떤데?”

카드릭이 이를 악물었다.

“그걸 왜 물어봐? 그쪽으론 네가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을 텐데?”

“비아!”

“그나마 네가 내 남편과 겨뤄 볼 수 있는 방면으로 비교해 준 거야.”

“……그 자식을, 사랑해?”

카드릭이 물었다. 루비아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 남편인데.”

“비아!”

이 감정은 분명, 사랑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 부름에 답하지 못한 게 뼈에 사무치는 것이겠지.

칼레나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으면서, 그 상황을 천 번 만 번 곱씹게 되는 이유이리라.

루비아나는 카드릭의 멱살을 놓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손을 탈탈 털었다.

카드릭은 벽에 기댄 채로 허망하게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젠장, 어째서 그 자식인 거지? 왜 하필이면 폭군의 사생아 놈을…….”

“글쎄. 우리와 달라서?”

루비아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말하고 나니, 정답 같았다.

루비아나는 제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중얼거려 보았다. 역시나 정답이었다.

“설령 루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도, 난 너랑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카드릭.”

“……실컷 거절하고 나서, 이제야 이름을 불러 주는 건가?”

카드릭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루비아나의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루비아나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아니까.

황제를 향한 세 공작의 충성심은 언제나 한결같다. 제국민은 세 공작의 절대적이다 싶은 충성심을 신기해했다.

루비아나야 황제가 친동생이라 그렇다 치고. 물론 친동생에게 저렇게까지 지극할 수 있는지, 동생을 둔 많은 평범한 언니들은 공감하다가도 고개를 갸웃 내젓겠지만.

세 공작이 황제를 따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스스로의 힘으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벽 속에 갇혀 한 뼘 하늘만 올려다보고 절망하고 있을 때.

그 하늘을 가리고 나타나 불쑥 손을 내밀어 준 게, 칼레나이기 때문이었다.

칼레나가 아니었다면, 루비아나는 여전히 루텔 수도원에, 카드릭은 서부의 변경백이라는 지위에, 루단테는 아버지가 높이 쌓은 성안에 갇혀 있었을 것이다.

지켜야 하는 것을 손에 쥐고 전전긍긍하며 감히 폭군에게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을 때.

혜성처럼 칼레나가 나타나 손을 내밀어 주었다.

날 따르라고.

칼레나는 세 공작을 가둔 벽을 부쉈고, 폭군을 죽였고, 제국을 세웠다.

칼레나는 길을 만드는 자였다.

수도원 세력을 등에 업은 루비아나가, 서부의 백성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수많은 가신을 거느리고 있는 카드릭이, 왕국 최고의 검사라 불리던 안하무인 루단테가, 칼레나를 따르는 이유였다.

그리고 루비아나가 카드릭을 자신의 짝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루비아나가 생각하기에 자신과 카드릭, 그리고 루단테는 꼭 닮은 꼴이었다.

같은 상처를 가지고, 그 상처를 극복하지도 외면하지도 못하는 머저리들.

그 상처를 뛰어넘는 업적을 이룩한 칼레나의 빛에 이끌려 모여든 날파리들.

그런 둘이 몸을 비벼 대 봤자, 서로의 상처만 도드라질 뿐이었다. 상대의 상처를 보며 자신의 상처를 곱씹고, 또 곱씹을 테니까.

루비아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자식은 우리와 다르단 건가? 우리랑 똑같이 숨을 곳을 찾아 기어들어 갔잖아. 그 자식도 우리랑 똑같아.”

“그 도망이 성공적이긴 했잖아.”

“성공적이긴. 꼴에 남편이라고, 편들어 주는 건가?”

“학자의 집이 부서지지만 않았더라도 폭군 따위는 잊고 제법 행복하게 살았을 거야, 루이는.”

높은 벽에 자신을 가두고 상처를 곱씹는 세 공작과는 분명 다른 행보였다.

“그리고 학자의 집이 부서진 뒤, 살기 위해 날 찾아와 청혼했지.”

루비아나는 그때의 풋풋했던 루이먼드를 떠올리며 킥킥 웃었다. 하지만 어깨가 시큰해서, 오래 웃지는 못했다.

“분명 우리와는 달라.”

“그래, 네 남편 참 잘났다. 기어이 내 입에서 이런 소리까지 나오게 만들다니, 이제 만족하나?”

“응, 무척.”

“…….”

카드릭이 얼굴을 구겼다. 짜증 나 보였지만, 막 실연당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루비아나는 카드릭의 어깨를 툭, 치고 그를 지나쳤다.

카드릭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으나, 루비아나의 손목을 잡기 전 멈췄다.

루비아나는 무심히 그를 떠났다.

“……서로의 상처를 겉핥기식으로 핥아 주는 꼴밖에 안 되어도, 그래도 네 곁에 내가 머물고 싶다고 하면, 안 되는 거겠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폭군의 사생아 따위를 부러워하게 될 줄이야.

하하, 카드릭은 힘없이 웃으며 주르륵 미끄러져 앉았다.

황궁의 복도 한가운데, 볼품없이 앉은 꼴이 되었지만, 멋있어 보일 상대가 떠났으니 신경 쓰지 않았다.

카드릭은 손으로 두 눈을 덮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조용히, 뺨을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독이 아직, 몸에서 덜 빠졌나 보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