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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아나는 공작저로 돌아가 주치의에게 어깨를 내보였다. 내내 괜찮은 척했지만,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루이먼드를 돌본 인연으로 아쉴레앙 공작저의 주치의가 된 간 큰 의사는 루비아나의 상처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의사가 손을 덜덜 떨며 상처에서 돌 조각들을 뽑아내고 상처를 봉합하는 동안, 루비아나는 수면초나 마비약도 먹지 않고 생으로 버텨 냈다.
언제 황궁에서 부를지 모르는데 정신을 놓고 있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사실 아쉴레앙 공작저를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루이먼드에 이어 시녀장까지 없어진 아쉴레앙 공작저는 어수선했다.
시녀장이 잡혀간 것을 알지 못하는 하인, 하녀들은 우왕좌왕했다.
루비아나는 자신의 저택에서도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긴장 상태로 주변을 경계하며 치료를 받았고, 겨우 상처 봉합을 끝낸 의사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날아다니는 도마뱀류도 고칠 줄 아나?”
“저, 저는 인간 전문 의사입니다.”
의사는 설마 루비아나가 자신에게 와이번을 떠맡기려 했다고는 상상하지도 못하고, 무사히 함정을 피했다. 루비아나는 아쉬워하며 의사를 물렸다.
“저, 좀 더 공작님의 상태를 살펴보고 싶습니다만.”
“나중에, 나중에.”
루비아나는 귀찮다는 듯 손사래 치며 의사를 내보냈다.
“이상하다, 왜 임산부의 맥이 공작님한테서…… 에이, 설마.”
의사는 상처를 봉합하기 전 가볍게 루비아나의 손목을 잡아 맥을 확인했을 때 느꼈던 이상한 기운을 찝찝해하며, 맥없이 쫓겨났다.
이후 루비아나는 파충류 전문 수의사를 찾아 왕눈이를 진찰하게 하고, 큰 수레를 만들어 왕눈이를 태워 북부로 보냈다.
키이이이이!
왕눈이는 혼자 가지 않겠다고 발버둥 치며 사람들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금방 돌아갈게, 가서 치료 잘 받고 얼른 나아서 날 기다려 줘. 너 지금 상태로는 나한테 방해만 되지, 하나도 도움 안 돼. 알잖아?”
루비아나가 여러 번 타이르자 풀이 죽어서는 수레 위에 죽은 듯 엎드렸다.
불만스럽다는 마음을 나타내듯 긴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주변에 루비아나 말고 다른 사람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황궁을 휘감고 있던 왕눈이가 떠나자, 슬슬 황궁에서 있었던 일이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백성이 불안해하고, 오딜 후작의 황궁 침입으로 가족을 잃은 귀족들이 황궁으로 몰려와 울부짖으며 시체를 찾아간 후.
황제는 세 공작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도미넨트 공작은 서부.
펠트하르그 공작은 남부.
아쉴레앙 공작은 동부.
북부는 아쉴레앙 공작의 보고를 믿고, 따로 진압군을 보내지 않았다.
내무국장을 비롯한 여러 행정 관리들은 카드릭을 서부로, 루단테를 동부로, 루비아나를 남부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위급 상황에서는 공작들이 원래 뿌리내렸던 곳으로 가서 토착 세력과 긴밀하게 연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리 있는 주장이었으나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소식을 전해 들은 역사 전공 관료들은 자기들끼리만 눈빛을 공유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만약 이 반란 진압에 성공하면, 도미넨트 공작과 펠트하르그 공작은 새로 분봉받은 지역에 잘 적응할 수 있겠군요.”
“위기는 곧 기회! 폐하께서 멀리 내다보셨네.”
“그런데 일단 반란을 잘 막은 다음 일 아닌가?”
그리고 그 잠깐 농땡이 부린 걸 상사에게 걸려, 일을 한가득 떠맡고는 울상 지었다.
“두 공작이 새로운 영지에 뿌리를 박는 것보다 우리가 과로로 죽는 게 더 먼저일 것 같아요.”
“바보야, 그걸 이제 알았어?”
관료들이 전쟁 준비로 죽어 가는 동안, 황궁에선 세 공작의 출정식을 진행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모든 건 약식으로 간단하게 진행했다. 참석자 역시 황제와 내무국장이 고작이었다.
두 사람은 발코니에 서서 세 공작을 배웅했다.
카드릭은 가신단과 기사단을 이끌고 칼레나에게 인사한 후 남부로 떠났다.
루단테 역시 수백의 사병들과 새로 고용한 용병들 수백을 이끌고 서부로 떠났다. 부족한 병사는 각각 남서부에서 징발할 예정이었다.
앞의 두 공작에 비하면, 루비아나의 병력은 단출하다 못해 초라했다.
루비아나 뒤에 서 있는 건, 수도에 남아 있던 부하 대여섯이 고작이었다. 원래는 서른 명 정도였으나 대부분 왕눈이와 함께 북부로 떠난 뒤였다.
“승전 소식만을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루비아나는 십만 대군을 이끌고 떠나는 사령관처럼 담담했다. 배웅하는 칼레나 역시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당황하고 걱정하는 건 내무국장의 몫이었다.
회계국장이 옆에 있었다면 당황하지 않도록 이러저러한 설명을 들려주었을 텐데.
회계국장은 보급선을 짜느라, 행정관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저게 무슨 일입니까? 혹시 동부의 도미넨트 백작에게 병력을 지원받기로 한 겁니까?”
내무국장은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 머리를 쥐어 짜냈다.
어젯밤 마지막 회의 때, 북부로 보낼 편지를 급하게 쓰던 루비아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루비아나는 북부인들에게 촐싹거리며 남쪽으로 내려올 생각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썼다. 마수들과 싸우며 실력을 다져 온 북부인들을 이번 반란 진압에 이용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 기댈 곳은 동부에서 반란 세력에 넘어가지 않은 귀족들의 지원뿐이었다.
“아니. 그런 연락이 오갈 수 있는 시간이 없었잖아. 도미넨트 백작이 언니를 돕지 않을 리는 없지만.”
칼레나는 남의 나라 내전을 구경하듯 성의 없이 대꾸했다.
“예에? 그, 그런데 저렇게 가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아아.”
칼레나는 그제야 내무국장이 뭘 걱정하는지 깨닫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한 걱정을 하네.”
“예?”
“내가 황제가 되기 전, 언니 역시 북부의 공작이 아니었어. 황제가 된 내가 언니에게 북부를 주었지. 그럼 북부의 지배자도, 아쉴레앙 공작도 아닌 언니가 날 어떻게 황제로 만들었겠어?”
“그건…….”
내무국장이 말을 흐렸다.
“모르겠어? 쉽게 생각해 봐. 날 만나기 전에 루비 언니가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될 텐데.”
“루텔 수도원? 거기가 왜……? 아, 설마?”
“응. 그 설마.”
칼레나가 미소 지었다.
당시 아덴 왕국 내에 세워져 있던 루텔 수도원은 57곳이었다.
루텔 수도원은 기도와 노동, 몸의 단련을 중시하는 곳이었다.
수도원에 들어간 루비아나가 어떻게 밤마다 활을 쏠 수 있었을까? 루텔 수도원 뒷마당에 활터가 있었으니까.
왜 수도원 뒷마당에 활터가 있었던 걸까? 평소 수도사들이 활을 쏘며 몸을 단련했기 때문이었다.
루텔 수도원은 속세와 가까이 지내며 적당히 때가 묻은 세속적인 수도원이었다.
수도사들은 신께 기도를 드리는 틈틈이 신도들에게 헌금을 갈취하고, 그 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속세의 기사들처럼 몸을 단련했다.
“그들이 언니의 힘이야.”
루비아나가 하필 루텔 수도원에 들어간 건, 다른 수도원보다 부패하고 규율이 느슨해서만은 아니었다.
칼레나가 룩센 백작이 되어 폭군을 쓰러뜨릴 준비를 하는 동안, 루비아나 역시 룩센 백작인 칼레나를 지킬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차근차근, 루텔 수도원 최상층 수도사들과 친분을 다져 나가며.
만에 하나 폭군이 룩센 백작 칼레나마저 건드리려고 한다면, 루텔 수도원의 힘을 이용해 칼레나를 지키기 위해.
예배 시간에 포도주가 든 오크통 옆에서 쿨쿨 잠들 수 있는 권력은, 어지간해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권력은 후에 고스란히 룩센 백작의 반란에 이용되었다.
그 룩센 백작은 반란에 성공해 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기도 시간마다 수도원의 창고에 숨어들어 쿨쿨 자던 게으른 수도사는 아쉴레앙 공작이 되었다.
그리고 루텔 수도원은 300개의 수도원을 가진, 제국 최대의 수도원이 되었다.
칼레나는 벌써 멀어져 보이지 않는 칼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장 큰 병권을 가진 건 눈에 보이는 펠트하르그 공작이 아니야. 우리 언니지.”
씩 웃는 얼굴이 어쩐지 자랑스러워 보였다.
“대단하십니다아아.”
내무국장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혈육이라고 해도, 한낱 공작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걸 그대로 놔둘 뿐 아니라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하는 황제.
동생을 지키겠답시고 스스로 수도원에 들어가 그 거대한 힘을 손에 넣은 아쉴레앙 공작.
둘 다 평범한 황실 관료는 이해할 수 없는 배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