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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나의 말대로, 루텔 수도원을 지나칠 때마다 루비아나를 뒤따르는 병력이 뭉게구름처럼 늘어났다.
때론 멀리에 있는 루텔 수도원에서 달려온 수도사들이 길 앞에서 루비아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부에 도착했을 때.
루비아나는 만 명가량의 수도사들, 무기를 든 승병을 이끄는 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처음 보고받은 동부의 반란 세력은 두 곳이었다.
하지만 그새 일곱 곳으로 늘어나 있었고, 도미넨트 백작은 반란 세력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었다.
도미넨트 백작을 구하고, 반란 세력을 쳐부수기 위한 첫 전투를 앞둔 저녁 시간.
루비아나는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어깨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끌고 온 의사로부터 들은 소식이었다.
“임신? 내가?”
루비아나가 묻자 의사는 바들바들 떨면서 바닥에 엎어졌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임신했는데 왜 당신이 죽을죄를 지었다는 거지? 당신이 날 임신시켰나?”
“히이이이익!”
의사가 너무 겁에 질려 있어 농담 한마디 해 본 건데, 의사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흐음. 루비아나는 의사가 제정신이 들 때까지 기다리며, 배를 문질러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 근래 속이 더부룩하고 음식을 먹을 때 구역질이 나긴 했다. 눈사태에 쓸려 죽다 살아난 후유증이라고 생각했건만.
하필, 이 시기에.
‘난감하군.’
루비아나는 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삼켰다.
“주변에 말했나?”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저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다행이군, 죽여서 입막음 안 해도 되니.”
“헙.”
의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당분간 비밀로 하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읍. 으읍. 읍!”
의사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러다 목뼈가 부러지겠다 싶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의사의 목뼈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나가 보라고 손을 내저었는데, 의사가 우물쭈물하며 버텼다.
“내게 할 말이 있나?”
“저…… 공작님, 감히 말씀드리자면, 지금이 가장 위험한 시기입니다. 임신 초기이고, 아기님이 아직 배 속에서 안전하게 자리 잡지 못하셨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때문에?”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의사가 특기를 발휘했다. 오지랖, 혹은 직업 정신. 의사는 벌벌 떨면서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지, 지금이라도 후방으로 물러나시어 몸조리를……”
“안 된다는 거, 대충 눈치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
“알았으니 일단 나가 봐.”
루비아나가 다시 손을 내저었다.
이번에는 의사도 더는 미적거리지 않았다. 다만, 막사를 나가면서도 몇 번이나 루비아나를 돌아보았다. 어지간히 걱정되는 듯싶었다.
걱정되는 건 루비아나도 마찬가지였다.
의사 앞에서는 퉁명스럽게 말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의사가 나가고 막사 문이 닫히자마자 다시 배에 손이 올라갔다.
‘여기에, 아이가 들어 있다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를 원했다. 그래서 루이먼드와 결혼했고, 한 침대를 썼고, 또 밤마다 많이 노력했는데.
정말로 배 속에 아이가 들어섰다니.
얼떨떨했다.
의사에게 직접 듣고도 거짓말이 아닐까, 착각이 아닐까, 환각을 본 게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긴, 안 생기는 게 더 이상한 일일 지도.’
루비아나는 결혼 후 루이먼드와 보냈던 화끈한 신혼 생활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불과 얼마 전 일인데, 먼 옛날의 일인 듯 아득하게 느껴졌다.
또 그렇게 태평하게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부모님이 폭군의 부름을 받아 수도로 떠났던 그 날 끝나버렸던 유년 시절처럼 영영 되찾을 수 없게 될까.
후자이기를 바라지마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찾아온 지도 모른 채 품고 있었던 아이가, 더욱 소중했다.
임신 초기.
의사의 말대로 조심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아기를 포기하기에도 더없이 적당한 시기일지도 모른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아기를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남에게 떠맡기고, 혼자 뒤로 물러나 있을 수도 없었다.
“아가야, 널 알게 되자마자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음. 루비아나는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계속, 힘들 거 같아. 그래도 버텨 줄래? 지금까지 용케 잘 버텨 준 것처럼.”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루비아나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미안하지만 이것뿐이었다.
“만약 네가 잘못된다면…….”
루비아나는 나직히 한숨을 내쉬고 마저 말했다.
“나도 많이 슬프겠지만. 그 사람이 정말 많이 슬퍼할 거 같아. 사흘 동안 펑펑 울지도 몰라.”
루이먼드가 이 아이가 찾아온 걸 기뻐해줄지, 혹은 아이가 잘못되었을 때 슬퍼할지는 겪어보지 않았으니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루이먼드라면.
“비아!”
루비아나는 귓가에 쟁쟁 울리는 마지막 목소리를 들으며 쓰게 웃었다.
“나는 너도, 네 아버지도 포기 못 해. 그러니 버텨 주렴.”
루비아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넌 날 닮아 게으르고, 네 아버지를 닮아 상냥할 테니까 할 수 있을 거야. 아니, 해야 해.”
아이를 위해서 의사의 말처럼 조심하지도, 후방으로 물러나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이에게 바라는 것만 많았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루이먼드와 배 속의 아이, 둘 중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새삼 신에게 기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신과는 이미 거래했으니까. 신은 자신이 받아 가야 할 이 아이를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그날 밤.
루비아나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적진을 습격했다.
루비아나는 승리했고, 배 속의 아이는 잘 버텨 주었다.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제국은 순식간에 여섯 조각, 아니 열여섯 조각, 아니 서른 몇 조각으로 찢길 위기에 놓……이게 된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동부와 서부, 남부로 떠난 세 공작은 대부분의 반란을 순식간에 진압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매일 아침, 수도로 속속 도착했다.
칼레나는 커다란 대리석 탁자에 대륙의 지도를 펼쳐 놓았다. 곁을 지키는 건 내무국장이었다.
회계국장은 세 공작이 수도를 떠난 그날 이래로, 단 하루도 행정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는 칼레나 앞에 놓인 지도보다 더 크고 자세한 지도를 행정관 벽에 걸어 놓고, 보급망을 총괄 관리하고 있었다.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하는 게 내무국장의 아침 인사였다.
“서부와 남부는 대충 정리가 됐군.”
칼레나는 지도에 올려져 있는 나무로 된 체스 폰들을 쓸어 버렸다.
폰에는 반란 세력들이 내세운 옛 왕국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들이 바닥에 떨어져 볼품없이 데굴데굴 굴렀다.
내무국장은 그게 반란 세력들의 목이 데굴데굴 구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세 공작은 지금까지 진압한 반란 세력에 가담한 귀족들 중 그 누구도 살려 두지 않았다.
억지로 끌려가 병사가 된 백성을 제외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반란을 일으킨 누구의 항복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속 편하게 내전이니 반란이니 떠들어 대지만, 내무국장이 보기에 이건 숙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무국장이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제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정리됐다.
동부와 서부, 남부를 책임지고 경쟁하듯 반란군을 우르르 쓸어버리고 있는 세 공작의 무력과 전술이 대단해서이기도 하지만, 반란 세력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반란 세력이 급속하게 약해진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심리전에서 철저히 밀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제국에 짓밟혀 버린 자신들의 조국, 옛 왕국의 부활.
감히 제국의 심장부에 쳐들어와 황제의 암살을 시도하고, 아쉴레앙 공작 부군을 납치해 간 오딜 후작의 세력.
그들이 가장 먼저 아덴 왕국의 부활을 외쳤다.
다른 반란 세력들은 뒤따라 각 지역에서 멸망한 왕국의 이름을 외쳤다.
그들이 정말 망해 버린 왕국에 충성심이 남아 있는지 아닌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옛날로 돌아가자는 반란 세력의 구호는 제국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급격히 변하고 있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고작 몇 년밖에 안 된 제국보다는, 몇백 년을 유지했던 왕국이 익숙하고 그리운 사람들은 널리고 널려 있었다. 당장 하루 세끼 챙겨 먹고 살기도 버거운 백성 말고 귀족들 중에서는 특히나.
그들이 뭉쳐 예전보다 홀쭉해진 배를 두드리며,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자고 뭉치기가 무섭게, 제국 전역에 기이한 노래가 떠돌았다.
루이 왕자님은
남몰래 납치당해
전부인 공작님을
밤에 몰래 그리며 우네
가락은 단순하고, 길이는 짧았다. 한 번 들으면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쉬웠다.
아이들이 누가 준 건지 모를 사탕을 입에 물고, 골목골목 뛰어다니며 큰 소리로 부르니 빨래하던 사람들이 흥얼거리게 되고, 밭일하던 사람들이 또 흥얼거리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모르는 사람이 없는 노동요가 되었다.
노래엔 당연히 이러쿵저러쿵, 소문이 따라붙었다.
“반란은 무슨. 오딜 후작 따님이 아쉴레앙 공작 부군한테 홀딱 빠져서, 신년제 연회 때 납치한 거라며?”
“그 괴물 공작이 신년제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는데, 자기 남편 납치됐다니까 북부에서 마수를 타고 온 거 봐 봐.”
“괴물 공작이 남편을 뺏기고 미쳤다더라. 그러니까 북부로 안 돌아가고 바로 동부로 날라 버렸지.”
“아쉴레앙 공작이 갔으니 거긴 끝이지 뭐. 그러기에 왜 남의 남편을 건드려?”
“오딜 후작님, 존경했는데 완전 실망이야. 아무리 딸을 사랑해도 그렇지, 유부남을 훔쳐다 줘?”
“자기도 부끄러운 줄 아니까, 망해 버린 왕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네 어쩌네 하는 거지.”
“성공하면 자긴 왕 되고, 딸은 미남을 가지고? 부녀가 쌍으로 지랄 났네.”
“아니, 동부에 있는 건 가짜라는 말도 있던데? 오딜 후작이랑 그 딸은 벌써 다른 대륙으로 튀었다는 말도 있던데.”
“나도 그 이야기 들었어. 하긴, 아무리 오달 후작님이라도 어떻게 우리 황제 폐하와 괴물 공작을 상대할 수 있겠어?”
“이야, 얼마나 대단한 미남이기에, 명예랑 재산을 다 버리고 그럴 수 있대?”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한번 품어 봤을 텐데.”
“어휴, 주책이야, 주책.”
“그 괴물 공작하고, 후작 딸이나 되는 여자가 양쪽에서 물고 늘어지는 미남인데.”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나 싶다.”
때맞추어 판화로 찍은 루이먼드의 초상화가 전국적으로 싼값에 유통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반란은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 명분이 설득력을 잃으면, 반란은 명예롭고 고귀한 것이 아니라, 하찮고 우스운 것이 된다.
하찮고 우스운 건 두려움, 혹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놀림거리가 된다.
놀림거리가 된 반란은 성공할 수 없다.
제국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이 그러했다. 오딜 후작이 아덴 왕국의 부활을 외치며 루이먼드를 새 왕으로 내세우자 그를 지지하며 각지에서 들고 일어섰건만.
그들은 망해 버린 옛 왕국의 충신이 아니라 미남을 두고 다투는 두 여인의 다툼에 끼어들어,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나댄 얼간이들이 되었다.
명분을 인정받지 못한 반란의 열기는 시들시들해졌다.
병사로 끌려간 사람들은 유부남을 훔쳐 간 쪽을 위해 싸우다 개죽음을 당하기 싫다며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쳤다.
반란에 가담한 귀족들은 자신의 명예가 더러워졌다며 수치스러워했다.
반란군은 뭘 해 볼 틈도 없이 사기가 꺾였다.
그리고 제국의 세 공작은 의욕 없는 반란 세력을 단숨에 꺾었다.
그들의 가차 없는 진압 소식을 들은 다른 반란 세력들은 더더욱 의욕을 잃었다.
반란 세력 입장에선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영리한 자들은 자신들이 여론전에서 밀린 걸 뼈저리게 후회하며, 어떻게든 그 악순환의 연쇄 고리를 끊으려 애썼지만.
이미 주도권은 제국 쪽으로 넘어가 버린 뒤였다. 그리고 제국의 황제는 주도권을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루이먼드의 판화는 제국 건국 초, 최고의 히트작이었다.
반란으로 제국이 떠들썩한 와중에도, 결혼 적령기의 남자들은 루이먼드를 따라 은발로 머리를 염색했다.
눈을 검은색으로 만들어 준다는 엉터리 마법 약을 구해 먹다 배탈이 나 줄줄이 병원에 실려 갔다.
루이먼드는 세상에 다시없을 미남, 전쟁을 부르는 미인,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가지고 싶은 남자가 되었다.
아름다운 남자가 결혼 시장에서 우대되었다.
어느 지역에서는 남자가 결혼 전에 한 번쯤 납치당해야 매력 있는 것으로 생각해,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해서라도 납치를 당하는 풍습이 생겼다.
그러다 정말로 납치당해 외국으로 팔려 가 노예가 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 황제의 귀에까지 닿고, 대대적인 납치범 소탕 작전이 벌어지게 되지만 그건 나중의 골칫거리였다.
내무국장은 황궁에 앉아 그 모든 상황을 조종한 황제를 바라보며, 어젯밤 문득 생각난 질문을 던졌다.
“……이러려고 종이를 대중화한 건 아니시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칼레나는 말과 다르게,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 말도 안 된다는 건 저도 아는데……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네요오오.”
내무국장은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평탄한 직장 생활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나저나 이제 남은 건 동부뿐입니다.”
“맞아, 한 곳 남았지.”
내무국장이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지도 위에 올려져 있는 나무 조각은 단 하나. 옛 아덴 왕국이 아니라 오딜 후작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나무 조각이 놓여 있는 곳은 동부의 비옥한 평야 위에 솟아 있는 산. 그 산에는 제국 최대의 은광이 있었다.
그 일대를 장악하고 아덴 왕국의 독립을 선포했던 오딜 후작은, 밀리고 밀려 산 위의 성을 꽉 닫아걸고 농성 중이었다.
루비아나는 오딜 후작을 바로 치지 않았다. 동부의 크고 작은 반란 세력을 쳐부수며, 포위망을 좁혀 서서히 오딜 후작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동부 곳곳에서 패배한 반란 세력들은 하나둘, 오딜 후작에게로 모여들었다.
루비아나는 일부러 포위망에 틈을 내 그들이 오딜 후작 밑으로 기어들어 가게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을 고비를 넘겨 오딜 후작에게 도착했다 생각하겠지만, 전혀 아니었다. 루비아나가 그들을 그곳으로 몰아넣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생각이신 걸까요? 전혀 공작님답지 않은 방식입니다아아.”
내무국장이 힘없이 말했다.
그녀는 솔직히, 동부가 가장 먼저 안정화될 줄 알았다. 루비아나는 큰 세력을 흐트러뜨리고, 윗대가리만 죽여 전투를 쉽게 만드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내무국장이 가장 싫어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패배한 반란 세력들이 아무리 하찮다고 하나, 다시 모여 하나로 뭉치면 강해진다.
적이 강하면 싸움이 길어진다. 싸움이 길어지면 당연히 더 많은 보급이 뒤따라야 하고, 여론과 내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받치는 힘이 더 많이 필요해진다. 그건 회계국장과 내무국장의 일.
내무국장은 자신의 원수가 오딜 후작이 아니라 루비아나가 아닐까,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게 약속했거든.”
칼레나는 내무국장의 분노를 자신에게로 돌렸다.
“약속이요?”
무슨 약속? 나와 내 남편을 반드시 죽기 직전까지만 쥐어짜겠다는 약속?
내무국장이 잠깐 충성심을 잊고 눈을 부릅떴다.
칼레나는 싱긋 웃으며 내무국장의 퀭한 눈을 따사롭게 바라보았다.
“다른 두 공작에게 돌아오라고 해. 개선식은 성대하게 준비하도록 하고.”
“동부에 지원을 보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딱히 개선식을 두 번, 아니 나중에 돌아올 루비아나까지 생각하면 세 번, 따로따로 성대하게 준비해야 하는 게 싫어서 물어보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혼자 알아서 오딜 후작을 잘 정리할 수 있을 게 분명한 루비아나를 걱정해서, 두 공작을 동부로 보내 세 공작이 함께 수도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물어본 것이었다.
“왜 그래야 하는데?”
“…….”
절 위해서요. 또 내 남편을 위해서요. 내무국장은 혀끝의 말을 꿀꺽 삼켰다.
“내 언니의 영광이야, 다른 두 공작에게 나눌 생각은 전혀 없어.”
칼레나는 루비아나의 군대를 의미하는 돌로 만든 체스 말, 백합이 새겨져 있는 나이트를 톡 건드렸다. 백합의 기사가 데굴 굴러 오딜 후작의 폰에 부딪쳤다.
“이건 나와의 약속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니가 언니의 남편을 구하려는 수작이기도 하지. 한 번에 다 쓸어버릴 생각인 거야, 언니의 남편을 보며 망해 버린 왕국을 떠올릴 모든 사람을 한 번에 모두 다 쓸어버리려고.”
루비아나가 동부의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수도로 놀아오는 날.
그날 이후로 루이먼드를 보고 옛 아덴 왕국을 떠올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으리라. 곧 이 산에서 다 죽어 버릴 테니까.
“펠트하르그 공작과 도미넨트 공작이 끼어들게 할 순 없지. 언니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둬.”
“예에에…….”
내무국장은 오늘도, 혹사당하고 있는 자신의 남편을 구하지 못했다.
“아, 고마워. 덕분에 기억났네. 깜빡 까먹을 뻔했어. 보급선은 동부에 집중하도록 하고.”
“예?”
“무얼 원하든, 무엇이든 다 해 줘.”
“…….”
아니, 구하지 못한 게 아니라 더 큰 수렁으로 밀어 넣어 버리고 말았다. 미안, 남편. 내무국장은 눈물을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한도 없이 말입니까?”
“왜?”
“마침, 동부에서 연락이 와서요오오.”
내무국장이 작은 종이를 꺼냈다. 오늘 아침에 전서구가 가져온 것이었다.
내무국장은 종이를 더러운 것을 만지듯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살짝 잡고 있었다. 편지 안에 든 내용이 더럽게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칼레나는 종이를 확인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걸까, 우리 언니는?”
“거절할까요, 폐하?”
내무국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니.”
“아, 왜…….”
하지만 칼레나의 대답을 듣곤 바로 다시 어두워졌다.
“그걸 언제, 어떻게,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아주 게으르고 나약하고 사악하고 악독한 자들입니다. 매년 지원금을 그렇게 받아 처먹으면서도, 이런 위기 때 코빼기 한 번 안 비치는 거 보십시오. 제국이 위험에 직면하여 너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불러도, 들은 척도 안 할 겁니다아.”
내무국장이 깊은 원한을 가지고 간언했다.
“그렇겠지.”
“네. 그러니까 이 말도 안 되는 요청은!”
“그래도 언니가 필요하다면 보내야지, 어쩌겠어?”
칼레나가 품에서 황금 패를 꺼내 내무국장의 손바닥에 떨궜다.
“아니 이게 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폐하께서 가지고 계신 겁니까?”
으악. 내무국장이 기겁하며 황금 패를 패대기치려다가, 칼레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질색하며 붙잡았다.
황금 패를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똥을 쥐고 있어도 이렇게 싫어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학자의 집 출신 학자들만큼은 아니지만, 내무국장 역시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원한이 깊었다.
“아쉴레앙 공작이 나한테 선물로 줬어.”
“……아쉴레앙 공작님이 마탑과 친분이 있으신지 몰랐습니다.”
친하면서, 내가 마탑과 그렇게 치고 박고 싸울 때 한 번도 안 도와줬단 말이야? 내무국장은 루비아나에게도 원한을 품었다.
“아무튼, 이것은…… 고이 동부에 있는 아쉴레앙 공작님께 보내겠습니다.”
뿌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칼레나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려 동쪽 창을 바라보았다. 웃는 듯 웃지 않는 그 표정의 의미를, 내무국장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