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6/131)

***

벽의 높은 곳에 손바닥만 한 창문 하나가 있는 게 전부인 방.

안을 꾸미는 가구와 그림, 캐노피가 아무리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한들, 갇혔다는 느낌을 안 느낄 수 없는 곳이었다.

포근한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남자가 일단은 그 방의 주인이었다. 아니, 그 방에 갇혀 있는 자였다.

철컥, 철컥. 몇 개나 되는 자물쇠를 여는 소리.

끼이익. 뒤이어 문을 여는 소리가 귀가 아플 정도로 들렸다.

혹시나 그가 문을 열고 도망가면 소리만으로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일부러 저렇게 만든 게 분명했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빛이 들어와 어두컴컴한 방을 비추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남자는 그 빛 때문에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렸다.

문은 바로 닫혔다.

방 안은 다시 어두워졌지만, 또다시 밝아졌다. 방 안으로 들어온 이가 불을 밝힌 덕이었다.

“왜 또 이렇게 어둡게 하고 누워만 계십니까요, 왕자님? 아니, 전하.”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다정하게 말하며, 식사가 든 트레이를 덜그럭덜그럭 끌고 들어왔다.

“……유모.”

“예, 왕자님. 아이고, 이젠 왕자님이 아니고 전하시지요.”

유모라 불린 이가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톡톡 때리며,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남자는 순순히 일어났다. 반짝반짝한 은발이 흐트러졌다.

“못 먹을 거 알면서 왜 들고 왔어?”

루이먼드가 검은 눈을 들어 트레이를 내려다보며, 힘없이 웃었다.

“그래도 드셔야지요. 제가 솜씨를 발휘해서 끓여 왔으니 한 숟갈만이라도 드셔요.”

재료를 으깨 푹푹 끓인 수프와 레몬 조각이 담긴 물.

뭘 먹든 구역질을 하고, 심하면 토하기까지 하는 루이먼드를 위한 특별식이었다.

이곳으로 끌려왔을 때만 해도 좀 나아지는가 싶었는데, 얼마 전 다시 재발했다.

오딜 후작의 수하들은 처음엔 루이먼드가 반항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억지로 입을 벌리고 음식을 처넣었다.

하지만 루이먼드가 먹는 족족 토하며 해쓱해지자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의사를 불러들였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는 몇 번이나 맥을 짚어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요, 딱히 안 좋은 곳은 없는데…….”

“아니, 저렇게 다 죽어 가는 얼굴을 보고도 아무 이상 없다는 말이 나와?”

“돌팔이 의사로군. 누가 이런 엉터리를 데리고 온 거야!”

루이먼드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오딜 후작에게 문책당할 것을 두려워한 수하들은 길길이 날뛰며 나이 든 의사에게 괜히 화풀이했다.

의사는 수치스러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루이먼드에게만 집중하며,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으음, 예전에 금슬 좋은 부부가 아이를 가졌을 때, 남자 쪽에서 대신 입덧하는 경우를 봤는데, 그와 비슷할지도…….”

그 말을 알아들은 건 루이먼드뿐이었다.

“그게, 무슨……”

루이먼드가 되물으려고 했지만 타이밍 좋게 방해받았다.

“끌고 나가. 이번엔 제대로 된 의사를 데리고 오란 말이야!”

오딜 후작의 수하들은 나이 든 의사를 끌어내고, 좀 더 젊은 의사를 데려왔다.

젊은 의사는 잔뜩 겁먹어서는 덜덜 떨며 루이먼드를 진찰했다.

그사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속을 전부 게워 낸 루이먼드보다 그 의사가 더 아파 보였다.

젊은 의사는 수하들의 눈치를 보느라 횡설수설했다.

“저기, 그것이…… 그러니까…….”

나이 든 의사처럼 아무 이상 없다고 말하려다가, 흉흉한 수하들의 얼굴을 보고는 있는 말 없는 말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아프지만 아픈 건 아닌, 병명은 모르지만 병이 안 걸렸다고는 말할 수 없는, 루이먼드가 그런 상태라고 진단하고는, 먹으면 아무튼 몸에 좋은 약재를 잔뜩 써 주고 도망치듯 떠났다.

오딜 후작의 수하들은 루이먼드가 굶어 죽으려고 음식을 거부하는 건 아니라고 멋대로 생각하고는, 안심하고 오딜 후작에게 루이먼드의 상태를 보고했다.

원래도 굶어 죽을 생각이 없었던 루이먼드로서는 괜한 오해를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헛구역질이 너무 심하고 먹은 게 없어 지쳐 있었기에, 그들의 오해를 풀어 줄 힘도, 여유도 없었다.

오딜 후작에게 보고가 올라가고 며칠 뒤 루이먼드에게 하녀 한 명이 배정됐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살집이 있는 여인이었다. 커다란 보따리를 꼭 끌어안고 걸어오는 걸음걸이가 묘하게 익숙하다고 생각했건만.

루이먼드는 여인의 주름진 얼굴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말았다.

“유모.”

“왕자님! 아, 아니. 전하!”

마찬가지로 눈물을 글썽이는 늙은 하녀는, 어린 루이먼드를 보살펴 주었던 유모였다. 그 전엔 루이먼드의 어머니, 아니샤의 유모이자 전담 하녀였다.

어린 루이먼드를 껴안고 우리 불쌍한 왕자님, 하고 남몰래 눈물짓던. 그 차갑고 싸늘한 그레이움 백작저에서 유일하게 루이먼드의 편이었던 사람.

하지만 그녀가 품은 루이먼드에 대한 마음은 제 피붙이에 대한 걱정보다 작았다.

딸이 동부 남자와 결혼해 떠난 뒤 아이를 낳고 몸이 약해졌다는 소식을 전달받자마자, 유모는 일을 그만두고 동부로 떠났다.

오딜 후작이 그녀를 찾아 루이먼드 앞에 데려다 놓은 것이었다.

그레이움 백작에게 미리 정보를 들었든 어쨌든, 몇십 년 전 헤어져 연락도 끊겼던 사람을 며칠 만에 찾아오다니.

루이먼드는 오딜 후작이 얼마나 철저하게 반란을 준비했던 건지 실감 났다.

루이먼드는 힘이 없는 와중에도 기가 질렸다.

유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고아이고 곡소리만 냈다. 그녀 역시 자신이 반가워 그러는 것이리라, 루이먼드는 멋대로 착각했다.

착각의 대가는 씁쓸했다.

유모는 오딜 후작의 수하들이 나가자마자 루이먼드의 발아래 엎드려 울며 손을 싹싹 빌었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왕자님!”

“내가 유모를 죽일 일은……”

“제 딸, 제 손자를, 제발!”

“…….”

오딜 후작은 유모의 가족들을 잡아 놓고, 유모를 협박했다고 한다. 루이먼드를 성심껏 돌봐, 그가 제대로 식사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가족들을 다신 볼 수 없을 거라고.

그 옛날, 딸과 손주를 돌보러 루이먼드의 곁을 떠났던 유모가 이제는 딸과 손주를 살리기 위해 다시 루이먼드에게로 온 것이었다.

“하하…….”

루이먼드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 옛날에 헤어진 유모가 반란 소식을 듣고는 자신을 걱정해 제 발로 찾아올 리 없건마는.

혼자서 옛 기억에 젖어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해 버렸다.

몸이 차갑게 식었다. 추웠다. 외로움에,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에 몸서리쳤다.

그 외로움을 기억해 낸 원인은 유모지만, 외로움의 이유는 유모가 아니었다. 유모는 그저, 루이먼드가 애써 외면했던 것을 다시 들여다보게 해 줬을 뿐이었다.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는 절망감.

내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

손끝에서부터 차가워져 심장을 얼리는 고독.

이 세상 어디에도 루이먼드란 사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 따윈 없다는 자각.

루비아나를 만나기 전까지, 언제나 그림자처럼 그를 덮고 있던 냉기였다.

평생 그레이움 백작에게 이용당했으면서도, 차마 그레이움 백작가 사람들을 끊어내지 못했던 건, 그 차가운 절망에 먹혀 버릴까 봐 두려워서였다. 혼자인 게 무서워서였다.

자신을 가진 걸 알자마자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는 어머니. 어머니가 자신을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제 아이가 아니라고 외면했던 아버지.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아이가 온기를 바랄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에라도 절 놔주지 않는 그레이움 백작이 필요했다. 그마저 없으면 루이먼드의 곁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은 그레이움 백작가 사람들뿐이었다.

그런 그들을 여덟 번째 삶 만에 끊어 낼 수 있었던 것 또한, ‘가족’ 때문이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신 앞의 신성한 결혼 서약으로 맺어진 아내.

3년 기한의 계약 결혼이라 해도 좋았다. 아니, 유통 기한이 있는 관계라는 걸 잊을 만큼 빠져들었다.

그녀가 좋았다.

그녀와 함께인 일상이 좋았다.

언제나 가장 필요로 할 때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그녀를,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당신만 있으면 돼요.’

‘당신만 있으면 난,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

‘당신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할 거야. 뭐든 하겠습니다.’

그녀가 있으니까. 자신을 가족으로도 여기지 않는 가족들을 잘라낼 수 있었다.

함께 잠들고, 함께 식사하고, 헤어질 땐 잘 다녀오라고 인사말을 나누고, 다시 만나면 100년 만에 재회한 연인처럼 서로를 반가워하고.

그런 일상이 하루하루 쌓이면서, 감히 착각했다.

그녀와 자신, 두 사람이 가족으로 엮였다고. 다른 무엇보다 서로가 소중해졌다고.

적어도 한쪽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른 한쪽은 아니었다.

그걸 깨달은 건 신년제 때였다.

비밀 통로 안으로 끌려 들어가자마자 통로 입구가 폐쇄됐다.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입구, 그 틈바구니에서 루이먼드는 루비아나를 보았다.

다급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 같은 루비아나의 모습. 그 모습이 진짜인지 착각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곧 세상은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으니까.

손발이 묶이고 입에 재갈까지 물려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른 채 끌려가면서, 눈앞에선 자꾸만 루비아나의 마지막 모습이 반복되었다.

“레나!”

어느 때보다 다급한 목소리.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황제에게로 향하던 루비아나.

‘뭘 바랐던 걸까, 나는?’

위급한 순간에, 그 다급한 순간에 그녀가 황제보다 자신을 먼저 구해 주기를?

‘그럴 리 없잖아.’

알고 있다. 루비아나가 황제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그건 그저, 신하가 자신의 주인에게 바치는 충성심 정도가 아니었다.

하나 남은 가족. 자신이 지켜 왔고 자신을 지켜 준 유일한 혈육.

칼레나는 루비아나의 가족이었고.

‘나는 아니었던 거지.’

다시 혼자가 되어 버렸다. 아니, 이제 정말로 혼자가 되어 버렸다.

외로운 절망과 함께, 애써 외면했던 진실이 뼈에 사무쳤다.

루비아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늘 자신의 삶을 반쯤 내려놓은 것같이 굴었다. 모든 일에 무심하게 굴었고, 진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잘 몰랐을 때는 그저 자신만만하고 매사에 여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당장 어디든 떠날 사람처럼 구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정을 붙이지 않으려 하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묻히지 않고, 그렇게 정을 두지 않으려 하고.

그런 그녀의 태도 때문에, 더 그녀에게 목을 매고 그녀를 안는 데 집착했던 건지도 모른다.

몸을 맞대고 사랑을 나눌 때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해 주었으니까.

날것의 감정을 보여 주었으니까.

하지만 손을 놓으면 훨훨 어디론가 날아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루비아나를 그나마 이 땅에 붙들어 매 놓은 건 황제였다.

‘내가 아니라.’

그래서 루비아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든 그럴 수 있는 사람 같았으니까.

마음 한편으로, 황제를 질투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황제여, 당신마저도 그녀를 완전히 붙잡는 데에는 실패한 거야. 결국 그녀는 당신마저 버리고 죽음이 내민 손을 받아들인 거야. 그러니까 나만 버림받은 게 아니야, 당신마저도 버림받은 거지.’

그리고 난, 당신과 달리 그녀에게 다시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어.

황제를 따돌리고, 황제에게 처음으로 우월감을 느끼며 단검을 뽑아 들었건만.

루비아나가 살아 돌아왔다.

살아 움직이는 그녀를 보며, 루이먼드는 절망과 환희를 함께 느꼈다.

그리고 절망적인 현실이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쩌면 수도를 벗어나기 전에, 이들이 자신을 반란 세력의 왕으로 추대하기 전에 루비아나가 뒤늦게라도 자신을 구하러 와 줄지도 모른다고, 루이먼드는 한 가닥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루이먼드는 바로 희망을 버렸다.

비밀 통로를 벗어난 뒤. 루이먼드는 어느 상자에 실리고, 또 어느 마차에 갇혀 수도를 벗어났고 동부에 도착했다.

스스로도 본인이 어떻게 수도에서 동부로 왔는지 알지 못했다. 계속 약에 취해 잠들어 있었으니까.

눈을 뜨니 눈앞에 오딜 후작이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니, 저를 아덴 왕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가득 모인 홀에서 높은 단상에 올라 왕관을 쓰고 있었다.

대관식은 결혼식을 겸하고 있었다.

오딜 후작에게 충성하는 건지 매수를 당한 건지 모를 사제의 주관으로, 루이먼드는 리사나와 혼인했다.

사제는 용감하게도, 루텔 수도원이 공증한 루비아나와 루이먼드의 결혼 서약을 무효로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루이먼드는 약에 취해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었다.

리사나는 루이먼드의 팔을 꼭 잡고, 약에 취해 흐물거리는 그의 몸을 지탱했다.

루이먼드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파닥대며, 리사나가 끼워 준 반지를 꼈고, 리사나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수줍게 웃는 리사나의 얼굴 위로, 피 칠갑한 루비아나의 얼굴이 그려졌다.

사제가 맹세의 키스를 하라고 재촉했다. 리사나가, 아니, 얼굴에 피가 잔뜩 묻은 루비아나가 살포시 눈을 감았다.

‘이상하다, 비아는 그때 이러지 않았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고개는 꺾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입술이 닿기 직전.

우웩.

루이먼드는 헛구역질하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침대 위였다. 안개가 낀 것처럼 주변에 연기가 자욱했다.

침대 옆에 놓인 커다란 향로에서 흰 연기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이먼드는 좀 더 흐물흐물해졌다.

온몸의 뼈가 녹아 버린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 눈은 가물가물 감겼다.

그런 루이먼드에게, 속이 다 비치는 잠옷을 입은 리사나가 다가왔다.

“루이.”

리사나가 아까 미처 못 한 입맞춤을 시도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입이 닿으려 할 때였다.

“우욱.”

루이먼드는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구역질에 몸이 들썩였다.

“꺄악!”

리사나가 뒤로 넘어갔다. 루이먼드는 언제 연기에 취해 있었냐는 듯, 상체를 벌떡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뱉을 곳, 뱉을 곳!’

움푹한 단지가 보였다. 루이먼드는 향긋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 단지에,

“우웩.”

토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야, 자신이 저도 모르는 사이 훌륭하게 리사나를 무찔렀다는 걸 알게 되었다.

헛구역질이 심해지고 그나마 먹던 음식도 다시 먹지 못하게 된 건 리사나와 첫날밤을 보낼 뻔했던 그날 이후부터였다.

마치 몸이 루비아나 외의 다른 사람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첫날밤을 최악으로 망친 리사나는 충격이 큰지, 그 뒤로 한동안 루이먼드를 찾지 않았다. 루이먼드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다만, 리사나가 오지 않는 만큼 오딜 후작이 찾아와 문제였다.

“제 딸이 전하께 한없이 부족합니다. 모든 건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제 탓이니, 저를 탓해 주십시오.”

오딜 후작은 루이먼드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옛 아덴 왕국이 아직 망하지 않았고, 첫째 왕자가 살아 있었을 때 오딜 후작이 첫째 왕자 앞에서 하던 행동이었다.

“…….”

루이먼드는 뒷골이 당겼다.

오딜 후작은 진심으로 루이먼드를 제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속마음이 어떻든, 눈에 보이는 행동이 그러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무얼 말입니까?”

“날 이용해 망해 버린 왕국을 다시 세우고, 제멋대로 주무르고 싶어 하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도구로 이용할 거면서 왜 깍듯이 예의를 갖추며 대우해 주는 흉내를 낸단 말인가?

루이먼드는 오딜 후작의 가식이 우습고 역겨웠다.

첫 번째 삶의 루이먼드였다면 저 모습에 깜빡 속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루이먼드는 속지 않았다.

“영명하십니다.”

오딜 후작이 고개를 들어 루이먼드를 바라보았다.

고저가 없는 목소리. 차분한 눈빛.

그 어디에도 납치를 해서라도 원래의 고귀한 자리에 올려 드리고 싶었다는 격렬한 충성심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저 눈에 늘 자리 잡고 있던 경멸의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변화라면 변화랄까?

이제 저 눈에 뿌듯함과 약간의 애정만 깃든다면, 아덴 왕국의 첫째 왕자를 보던 눈빛과 비슷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충성을 바친 신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는 모습. 과연, 성군의 모습이라 할 만합니다.”

진심 없는 칭찬. 웃지 않는 눈.

‘아아…….’

루이먼드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난 첫째 왕자 대신인 건가?’

자신의 무엇이 오딜 후작을 만족시킨 건지 모를 일이었다.

첫째 왕자와 비슷해지거나 그 이상이 될 순 없어도, 발치라도 따라갈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지게 만들다니.

루이먼드는 궁금했으나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날카로우시다, 영명하시다는 입에 발린 칭찬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내가 아니라, 꼭두각시의 미덕이겠지요.”

“저는 당신의 충실한 종입니다, 전하.”

“그럼 날 놓아주고,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장난이었다고 선포하십시오.”

“…….”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반역자 계집 옆에 붙잡혀 있던 동안 나쁜 버릇이 옮으셨나 봅니다.”

오딜 후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가 손에 쥔 채찍을 꽉 움켜쥐는 것까지 보고 난 다음, 루이먼드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당장 제게 그 채찍을 내리쳐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 얼굴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루비아나가 자신의 얼굴을 좋아했으니까. 루이먼드는 고개를 돌려 얼굴만은 보호하려다가 말았다.

‘이번 생에선, 이제 다시 만날 수 없을 텐데.’

얼굴을 지켜야 할 이유가 사라져 버렸다. 루이먼드는 의욕을 잃고, 오딜 후작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 모습이십니다, 전하.”

어째서인지 오딜 후작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자존심 강한 귀족이 한낱 사생아에게 면박을 당하고도 화를 내는 대신 기뻐하다니.

‘변태인가?’

여덟 번 사는 동안 온갖 변태들을 다 만나 봤기에 새삼 놀라지는 않았다.

“과연, 아덴의 왕다우십니다. 심지 굳고,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심한 모습.”

자신을 내세운 반란 따위, 당장 그만두라는 루이먼드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루이먼드의 담담한 태도만을 칭찬했다.

젊고 멍청한 왕을 보필하는 ‘왕의 조언자’다운 모습이었다. 오딜 후작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무척이나 만족했다.

그가 진정 만족스러워하는 건, 제 앞에서 멋대로 입을 놀리는 사생아 왕이 아니라, 그 애송이에게 충심을 다해 조언하는 자신의 모습인 것 같았다.

학자의 집 역사상 최고의 낙제생도 금방 알아차린 걸, 아덴 왕국 최고의 기사인 당사자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저딴 태도를 보인다는 건.

‘변태네.’

과거에 사로잡혀, 조금의 변화도 인정하지 않는 변태.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느니, 사생아를 왕으로 삼아서라도 기존의 망가지고 낡아 버린 과거를 붙들겠다고 우아하게 진상을 피우는 변태.

매번의 삶에서 가장 많이 봤던 유형의 변태였다.

오딜 후작은 말끝마다 루이먼드를 전하라 호칭하고, 정중히 대했지만 루이먼드는 절대 착각하지 않았다.

광대의 놀음판에 귀족이 끼어들어 고깔 쓴 원숭이에게 고개를 숙이고 아부한다고, 귀족이 진심으로 원숭이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건 아닐 테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지 않은가?

그리고 오딜 후작은, 변태이긴 해도 미친 사람은 아니었다.

“어쩔 셈입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전하? 말을 할 땐 주어를 분명하게 말해야 상대방에게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는 법입니다. 특히나 전하같이 높은 위치에 있는 고귀한 분의 말씀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바……”

“반란은 실패할 겁니다.”

뚝. 오딜 후작이 다시 채찍을 꽉 움켜잡았다.

“전하.”

“성공할 리 없지 않습니까? 상대는 드래곤을 죽이고 그 가죽을 깔고 앉은 황제입니다. 대륙의 대부분이 황제의 영토. 게다가 황제에게는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세 공작도 있지요.”

특히나, 동생의 일이라면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는 아쉴레앙 공작이.

“전하께는 제가 있습니다.”

“당신에겐 가족이 있지 않습니까?”

“제 가족은 전하의 가족이기도 하지요.”

“그들을 반역자로 만들어 죽게 만들 셈입니까?”

“…….”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멈춰요.”

그리고 날, 내 아내의 곁으로 돌려놔.

루이먼드는 오딜 후작을 노려보았다.

“제 가족의 안위를 걱정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하의 걱정을 덜어 드리고자 말씀드립니다만, 반란은 성공할 겁니다.”

“아니, 실패할 겁니다.”

지난 일곱 번의 삶에서 제국이 누군가의 반란에 망했던 적도, 아덴 왕국이 다시 나타난 적도 없으니까.

어디선가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으나, 그랬다더라 정도로만 퍼지고 금세 사라졌다.

제국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사람들은 하루하루 제국에 익숙해졌다.

오딜 후작의 반란 역시 그 실패한 여러 반란 중 하나일 게 분명했다.

젊은 룩센 백작의 반란과 달리,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일이 되어 버리리라. 루이먼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신은 실패해, 오딜 후작.”

그리고 나도.

루이먼드는 섬뜩한 느낌을 견디지 못하고, 손으로 목을 감싸 쥐었다.

루비아나와 함께 사는 동안 잊고 있었는데. 서늘한 죽음의 올가미가 다시 그의 목을 죄어 왔다.

루이먼드의 안색이 창백해지자, 오딜 후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실망했다는 표정.

“……!”

루이먼드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딜 후작을 실망시킨 게 무어라고.

평생 왕의 조언자이자 왕자의 스승으로 살아왔던 그는 표정 한 번, 손짓 하나로 상대방을 휘어잡을 줄 알았다.

“전하께서 불안해하시는 점은 이해합니다만, 괜한 걱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저는 꽤 오랫동안 아덴 왕국의 재건을 위해 준비해 왔습니다.”

진심으로 루이먼드를 아덴의 왕으로 생각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 줄 수는 없다. 오딜 후작은 개소리도 품위 있게 할 줄 알았다.

“설사 저의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해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가족은 기꺼이, 기쁘게 전하를 뒤따라 목을 바칠 겁니다. 물론, 전하의 왕비님이신 제 따님도 말입니다.”

그걸 걱정하는 거잖아, 이 변태야. 루이먼드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으나 일단 참았다.

오딜 후작에게 흥분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위험한 일은 없다. 이곳에 끌려온 뒤 여러 번 경험했다.

‘아덴의 왕으로서 품위 있는 모습을 유지하셔야 합니다.’

오딜 후작은 그렇게 말하며, 놔달라고 몸부림치는 루이먼드의 눈앞에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시종을 대령했다.

그리고 눈앞에서 시동의 손등을 회초리로 내리쳤다.

한 대, 두 대, 열 대, 서른 대.

손등이 터져 살점이 뜯기고 피가 흐를 때까지. 아니,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그만, 그만! 그만하십시오. 잘못했습니다. 내가 잘못했어요, 가만히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우욱. 제발, 우욱.’

루이먼드는 피비린내에 질려 헛구역질하며 오딜 후작에게 빌었다.

그래도 오딜 후작은 멈추지 않았다.

‘당장, 당장…… 윽. 머, 멈추십시오, 내가…… 명령, 하지 않습니까!’

루이먼드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 오딜 후작이 말하는 그 품위라는 걸 눈곱만큼이라도 보이고 나서야, 오딜 후작의 회초리질이 멈췄다.

시동은 쓰러졌고, 루이먼드는 기절했다.

그 뒤로 루이먼드는 난동을 부리지 못했다.

오딜 후작은 루이먼드를 제 입맛에 맞게 주무르기 위해, 타인을 도구처럼 사용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 타인 안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자신의 딸도 들어갔다.

“당신의 딸을, 가족을, 그런 죽음으로 몰아넣을 셈입니까?”

소중한 가족을 지키려 애쓰기는커녕 도구처럼 이용하고, 제 야심에 휩쓸려 죽게 만들다니.

남은 너무 가지고 싶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지지 못한 것을, 그렇게 쉽게 여기다니.

루비아나와 자신의 사이에서 태어날, 하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부성애가 솟구쳐 눈물을 글썽거리곤 했던 루이먼드로서는 오딜 후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망해버린 왕국 따위보다 내 자식이 백배 천배 더 귀한 게 당연한 일일 텐데.

그리고 오딜 후작은 굳이 루이먼드를 이해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계속 실패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데.”

“그럴 테니까.”

“뭐, 대책 없는 낙관주의에 젖어있는 것보다는 낫습니다만. 자애로움이 넘쳐나 비관주의자가 되실까 염려될 따름입니다.”

“나는-”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으실 텐데. 왜 그렇게 실패하실 바라십니까? 마치, 돌아갈 곳이 있다고 착각하는 개새끼처럼.”

“……!”

“전하, 당신이 계셔야 할 곳은 이곳입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이 전하의 옆인 것처럼 말입니다.”

돌아갈 곳이 없을뿐더러 도망치게 놔두지도 않을 테니. 갈 곳 없는 개새끼처럼 얌전히 여기 있어라.

오딜 후작이 고상하게도 말했다.

“…….”

루이먼드는 입술을 깨물며 침묵했다. 오딜 후작은 할 말이 있으면 얼마든지 해보라며 기다려주었지만, 루이먼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길거리에 버려진 개새끼 취급당했다는 모멸감보다, 자신이 정말 그런 처지라는 자각이 먼저였다.

루이먼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딜 후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는 좀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식사도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전하가 건강하셔야, 아덴 왕국이 튼튼해질 것이고.”

그리고 루이먼드의 다리 사이를 힐끔, 보았다. 길거리에 버려진 개새끼를 주워온 이유는 그것뿐이라는 듯이.

“빨리 후사를 얻어 왕국의 안녕을 도모하셔야지 않겠습니까.”

“…….”

“아덴 왕국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개소리는 상대방이 하고 있건만. 루이먼드는 정말 갈 곳을 잃어버린 개새끼처럼 축 늘어졌다.

돌아갈 곳.

‘나도 모르게, 그런 걸 바라고 있었던 건가?’

정곡을 찌른 말을 들으니,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슬펐다.

루이먼드는 오딜 후작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눈을 감으면 한 사람이 떠올랐다. 눈가에 아른한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너무 커,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오딜 후작의 말대로 돌아갈 곳 따윈 없는데.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다시 만나면 안 되는 사람이 왜 이렇게도, 사무치게 그리운 걸까.

‘저자의 말대로, 나는 길거리를 헤매는 개새끼와 다를 바 없네.’

저를 버린 주인을 잊지 못하고, 그런데도 사랑하고 기다리는 개새끼.

하하. 루이먼드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오딜 후작이 떠난 뒤. 며칠 봤다고 그새 얼굴이 익숙해진 하인 한 명이 트레이를 끌고 왔다. 트레이 위엔 이것저것,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루이먼드는 한 입도 먹을 수 없었다. 음식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몰려왔다.

그 뒤로 의사 여러 명이 다녀가는 해프닝을 겪었고, 유모를 만났다.

딸과 손자를 살려달라 비는 유모를 보며, 루이먼드는 힘없이 웃었다.

오딜 후작이 손등이 터진 어린 시동 다음으로 선택한 게 유모의 딸과 손자라는 뜻이었으니까.

루이먼드는 유모가 건네준 수프 그릇을 들고, 헛구역질하면서도 꾸역꾸역 삼켜 절반 정도를 비웠다. 그리고 남몰래 화장실로 가 전부 게워냈다.

유모는 혹시나 제 딸과 손자가 잘못될까 봐 전전긍긍하며, 화장실 밖에서 망을 봐주었다. 루이먼드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도 했다.

손길을 따뜻하고, 괜찮냐고 묻는 목소리는 다정했다. 하지만 루이먼드는 절대 착각하지 않았다.

이건 애정이 아니라 최소한의 동정이었다. 유모가 애정을 쏟는 이는 제 딸과 손주였다.

‘그들이 잘못될까 봐 날 걱정하는 거야.’

유모의 손길이 등에 닿을 때마다 절망감에 헛구역질이 더 심해졌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루이먼드는 속을 게워내며, 그만큼의 눈물을 함께 흘려보냈다.

“이러시다간 정말 큰일 나시겠어요. 아이고, 이를 어쩌면 좋을까나.”

유모는 탈진한 루이먼드를 도로 침실에 뉘이고는, 왔다 갔다 움직이며 발을 동동 구르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대로 어딘가 갇혀 있는 딸과 손자를 찾아가, 요정의 힘이든 악마의 힘이든 빌려 반란군 세력을 무찌르고 무사히 도망갔으면 참 좋았을 텐데.

루이먼드는 요즘 일곱 살짜리도 유치하다며 안 읽을 허황된 탈출 이야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 속 유모는 다시 루이먼드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스프 접시를 들고 있었다. 루이먼드는 한 번 더 속을 게워낼 각오를 하고 스푼을 들었다.

스푼을 들었다. 스프는 아주 묽었다. 그리고 특유의 향신료 냄새도, 들어간 재료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

루이먼드는 별 탈 없이 접시를 반 이상 비웠다.

막고 나서야 놀라 유모를 바라보니, 유모가 흐뭇하게 웃으며 물잔을 건넸다. 레몬을 짜 넣은 따뜻한 물이었다.

루이먼드는 그것마저 달게 마셨다.

속이 더부룩하긴 했지만, 헛구역질이 나지 않았다. 음식 냄새가 역하지도 않았다.

“……먹을 만하네.”

“그렇지요? 혹시나 해서 만들어봤는데 입맛에 맞으신다니 다행이네요.”

“예전에 아니샤 아가씨께서 입덧이 심하실 때, 이렇게 드리면 그나마 드실 수는 있으셨는데.”

“……어머니가?”

“왕자님, 아니, 전하를 가지셨을 때. 입덧이 심해 많이 고생하셨답니다. 제가 이걸 만들어드리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나셨을 거예요.”

“…….”

루이먼드는 스푼을 들어, 그릇에 남은 스프를 휘휘 저어 보았다.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맛.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상냥한 목소리가 기억나는 것도 같았다.

“아이고, 왕자, 아니, 전하께서 사내만 아니었어도. 입덧하시는 게 아닐까 생각했을 겁니다. 어쩜 그렇게 아니샤 아가씨 입덧하실 때와 똑같으신지. 아니샤 아가씨께서 정말, 고생이 심하셨지요.”

유모는 루이먼드에게 뭔가를 먹였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려서는, 주절주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눈치 없고 말 많은 것.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녀의 그 눈치 없는 태도가 장점으로만 작동됐다.

루이먼드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밍밍한 스튜에 소금기가 더해지는 걸 유모는 알아차리지 못했고, 루이먼드는 들키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어머니……왜 아무도 날 사랑해주지 않는 걸까요.'

루이먼드는 참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건 단 한 사람.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해일처럼 몰려들어 숨 막힐 것 같으면서도, 루이먼드는 도망치듯 눈을 뜨지 않았다. 차라리 그 그리움에 익사하길 바라듯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