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131)

9. 르니에강 남편 쟁탈전

커다란 산 아래 넓게 퍼져 진을 친 반란군. 그리고 산 위, 가파른 곳에 서 있는 성.

그곳과 적당히 떨어져 있는 언덕 위에 제국군이 진을 치고 버티고 있었다.

제국군 제1 사령관, 아쉴레앙 공작이 높은 곳에 우뚝 서서 반란 세력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녹색 눈은 산 아래에 퍼져 있는 반란군 세력을 보고 있었다.

바람에 붉은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어 산 위의 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남편이 그곳에 있었다.

루비아나는 당장 뛰어들어 루이먼드를 도로 납치해 오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억누르고, 또 억누르며 연락을 기다렸다.

인내심이 닳고 닳아 넋이라도 있고 없고 수준이 되었을 즈음, 수도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공작님, 폐하께서 이것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황실 시종이 손바닥만 한 비단 주머니를 내밀었다.

루비아나는 그 안에 든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패를 확인하고는 돌아섰다.

“당장, 피오니 로렌 사무관을 내 막사로 들라고 하도록.”

***

피오니 로렌은 학자의 집 출신 황실 관리로 아쉴레앙 공작의 추천을 받아 치수 사업 담당관으로 동부에 파견됐다.

함께 파견된 관리들은 모두 피오니보다 열 살 이상은 많았다.

펠트하르그 공작이 엄선해 꾸린 파견단인 만큼 관리들은 노련하고 행정 업무에 빠삭했으며, 만성 피로에 젖어 있었다.

관리들은 학자의 집 출신이든 아니든, 모두 일에 찌들어 있었기에 동지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뒤따라오는 피오니를 한마음으로 안쓰러워했다.

“아쉴레앙 공작의 추천을 받았다니…… 대체 그 공작한테 무슨 원한을 산 거니?”

“가면 일이 산더미 같을 텐데 저렇게 좋아하다니. 분명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분명해.”

“악독한 공작 같으니!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우린 그렇다 치고, 저렇게 파릇파릇한 젊은이를 딸려 보내?”

“가면 못해도 10년은 처박혀 있어야 할 텐데. 저 처자는 결혼은 했는감?”

“저는 결혼 안 할 거예요. 평생 공부해도 다 못 할 것 같은걸요.”

제 이야기를 하는 줄 알고 쏙 끼어든 피오니가 씩씩하게 말하자, 학자의 집 출신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십시오, 저 아이가 우리 학자의 집 최우수 학생이었습니다. 그대로 10년만 더 공부만 했으면 위대한 대현자가 되었을 텐데.”

“그래, 결혼해 뭣 하나? 공부에 방해만 될 뿐이야. 시간만 뺏기고.”

“어머, 이 사람들이. 젊은이 앞길 막는 소리 하네. 정 할 일이 많으면 뒷바라지 잘해 줄 참한 남편을 얻으면 되지.”

“맞아 맞아, 그래도 가족이 있으니까 버티는 거지. 나도 밤늦게까지 일하다 집에 딱 들어갔는데 남편이 애랑 자고 있는 걸 보면, 다시 출근할 기운이 난다니까.”

수도에서 동부까지는 먼 길이었다. 심심한 관리들은 마침 잘되었다는 듯 ‘일 욕심 많은 피오니 로렌 사무관이 결혼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로 진지한 토론을 이어 갔다.

아무래도 미혼이 많은 학자의 집 출신과 기혼자가 많은 비학자의 집 출신으로 편이 갈렸다. 결혼은 안 해도 된다. 아니, 남편감을 잘 고른다면 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호오, 결국 남편 될 사람이 관건인 거네요.”

당사자인 피오니는 토론을 주의 깊게 듣고는, 괜찮은 남편감만 발견한다면 결혼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에 학자의 집 출신 관리들은 좌절했고, 기혼자 관리들은 그렇지!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하, 하지만! 그런 남잔 찾기 쉽진 않아요.”

“아무렴. 괜히 우리의 선생님의 선생님들, 또 그 선생님의 선생님의 선생님들이 학자의 집으로 모여 오직 공부만 하자고 서약했던 게 아니지.”

“암, 암. 널 뒷바라지해 줄 수 있는 몸 좋고 잘생기고 참한 남자는 이 세상에 없어. 있어도 이미 결혼했으니 찾기 힘들지.”

“맞아. 그렇다고 눈을 낮추면 안 돼. 절대 타협해선 안 된다고. 그렇지 않은 놈과는 절대! 연애도 안 돼!”

“아무렴! 그런 놈이 와도 네가 아깝단다.”

“기존 통계를 보면……”

있는 거라고는 끈기뿐인 학자의 집 출신 관리들은 굴하지 않고 다시 토론에 참전했다.

그들은 이 세상에 피오니의 야망을 이해하고 뒷받침까지 해 줄 수 있는 남자는 많지 않으며, 절대 피오니가 눈을 낮춰 자신보다 못한 남자를 만나서도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그건 그렇지.”

“하지만 요즘 젊은것들은 근성이 없어서 말이야. 그런 남자를 찾는 게 쉽진 않을 텐데…….”

“그러게. 나 때에는 말이야,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면 온몸의 뼈를 부술 각오로 말이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중 학자의 집 출신이 아닌 어느 관리 한 명이 망발을 내뱉었다.

“거 아쉴레앙 공작의 부군 되신 그분이 학자의 집 출신이라 하지 않았나? 왜 이 아가씨가 그분이랑은……”

선남선녀가 폐쇄된 곳에 갇혀서 지냈는데, 정말 아무 일이 없었단 말인가?

그는 뒷말을 마저 이을 수 없었다.

학자의 집 출신 관리들이 일제히 그를 경멸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피오니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을!”

“말도 안 돼, 선배님들 말씀이 맞았어. 학자의 집 밖 세상은 위험해.”

“가족끼리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욧!”

“아, 아니… 내 말은…… 나, 난 그냥, 해 본 말이었……”

“해도 될 말이 있고, 아닌 말이 있는 거죠.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나요? 본인의 윤리 관념, 도덕성이 아무리 최악이래도 일단 남에게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것 말이에요!”

“맞아, 이제 보니 아덴 왕국의 도덕 교육이 엉망이었나 보군.”

“제국도 위험해. 초반부터 제대로 잡아야 해! 당장 공교육 담당 부서에 투서를 넣어야겠어.”

“으아니, 내,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아닛!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다니. 이건 공교육의 대실패야!”

감히 피오니와 루이먼드를 엮으려 시도했던 관리는 말로 후드려 맞았다.

동료 관리들은 차마 구해 줄 엄두를 내지 못하고 혀만 내둘렀다.

“학자의 집 관리들은 자기들끼리 사귀거나 결혼하는 걸 근친이나 다름없게 생각한다더니, 정말이었군.”

아예 연애, 결혼은 생각도 안 하고 학문에만 매달리는 공부벌레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나뉘는 게 아니라 학자의 집 출신과 그 외,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인간으로 나뉜다고 생각하는 학자의 집 출신으로서는 억울한 평가였다.

근친이라니? 아예 연애와 결혼이 인생 계획표에 들어가 있지 않다니까!

하지만 어쨌든 피 안 섞인 가족과 같은 끈끈함을 유지하며 서로를 연애, 결혼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학자의 집 출신 관리들은 원흉, 단 한 사람만을 조졌다.

감히 학자의 집의 공식 여동생, 남동생이었던 피오니와 루이먼드를 성애적으로 엮으려 했던 관리. 그는 동부에 도착할 때까지 학자의 집 출신 관리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그는 동부에 도착하기 직전, 피폐해진 얼굴로 피오니에게 사과했다.

“괜찮아요. 모르면 그럴 수도 있죠.”

피오니는 그의 진정 어린 사과를 산뜻하게 받아 줬다.

그렇게 동부로 떠나는 길목에서부터 동료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피오니 로렌은, 동부에 도착해 본격적으로 치수 사업에 투입되면서 더더욱 존재감을 빛냈다.

“아아, 젊다는 건 좋은 것이야…….”

“나도 저런 때가 있었을까……?”

“저 때에는 야근을 해도 재미있는 법이지…….”

지치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빠릿빠릿하고 똑똑한 젊은이로.

그토록 맡길 바랐던 업무를 담당하게 된 피오니는 신이 나 싱싱 날아다녔다.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은 꼬박꼬박 지키며 열심히 일했다.

똑똑하고 건강한 젊은이가 열심히 일하기까지 하니 업무적으로 두드러져 보여야 마땅하나, 함께 동부로 파견된 다른 관리들이 영 만만치 않았다.

관리들은 피곤에 찌든 만큼 행정 업무에 능숙했다.

피오니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선배 관리들을 겨우 따라잡을 뿐. 그 업무량을 뛰어넘어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긴 했다. 하지만 피오니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차근차근 피로와 업무 숙련도를 쌓아 올렸다.

그리하여 열정과 체력을 이긴 다크서클이 눈가에 짙게 드리워질 즈음.

오딜 후작의 반란이 터졌다.

굳이 수도에서 급보가 전해지지 않아도, 반란 소식을 빠르게 알게 되었다.

오딜 후작이 자리 잡고 아덴 왕국의 새 영토라 선포한 곳이 동부였기 때문이었다.

“안 돼! 왜 하필 동부야!”

“우리가 하는 일을 탐낸 거야. 그런 게 분명해!”

“이제 겨우 기초를 다졌는데!”

중요 서류를 담당했던 관리들은 절규하며 서류를 끌어안고 도미넨트 노백작에게로 달아났다.

도미넨트 노백작은 급박한 와중에도 서류를 내 몸같이 바리바리 안고 온 학자들을 반기고, 기꺼이 그들에게 제 성의 한켠을 내주었다.

관리들은 감사하며 도미넨트 백작의 성에서 업무를 계속 이어 나갔다.

서류 업무를 맡은 관리들은 서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도미넨트 백작에게 달아나기라도 했지. 현장에 나간 관리들은 도망가거나 숨기는커녕 불안해하는 일꾼들을 달래 현장 공사를 계속 이어 나갔다. 이탈자는 한 명도 없었다.

도미넨트 백작이 기사와 병사들을 보내 철수를 권해도 아무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거기에 피오니가 있었다.

관리들은 피오니만은 도미넨트 백작의 성으로 가길 바랐다. 하지만 피오니는 단칼에 거절했다.

“여기나 거기나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여전히 이 동부는 반란군의 소굴이잖아요.”

“아니, 아직 소굴까지는 아니지 않……”

“반란을 일으킨 주범이 와 있는데, 조만간 도미넨트 백작님부터 치겠죠. 차라리 여기 있는 게 나아요.”

“……그렇게 말하면 거기로 중요 서류를 옮겨 놓은 우리들의 결정이 뭐가 되겠니?”

“뭐가 되긴요? 가장 잘한 결정이겠죠. 그나마 안전한 곳이 그곳이긴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나마 안전한 그곳으로 가는 게……”

“어머, 제가요? 왜요? 왜 그래야 하죠?”

“……그러게, 왜일까?”

제국 전역이 구 왕국들의 반란으로 떠들썩해져도, 동부 치수 사업은 계속 진행됐다.

오딜 후작 쪽에서 도미넨트 노백작의 성을 포위하고 공격해 들어가며 치수 사업 현장에 부하들을 보냈다.

적당히 회유할 생각이었을 텐데, 오히려 회유당해 버렸다.

“동부를 가로질러 흐르는 르니에강은 동부의 밀 생산력을 책임지는 수원으로, 사람의 몸으로 따지면 대동맥과 같습니다. 그것을 정비하고 동부의 각 농토로 이어지는 수로를 만드는 게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 수로의 주인이 어느 왕국이든 제국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일단 지금 우리는 제국에서 월급을 받고 있으니 제국을 위해 수로를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반란…… 아, 반란이 아니라 오히려 반란 세력을 쳐부수는 쪽이시라고요? 뭐, 아무튼 좋습니다. 여러분께서 성공하여 이곳이 아덴 왕국이 되어도, 이 수로는 필요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 만들고 있는 걸 중지시키고 부수는 것보다는, 가만 놔두고 나중에 뜻을 이루시거든 접수하러 오시지요. 어차피 이건 동부를 위해 필요한 사업입니다. 완성만 하면, 동부의 수확량이 확 늘어 세금도 많이 걷으실 수 있을 테니까요.”

외교부에서 일하다 왔다는 스이 사무관이 오딜 후작 쪽으로 홀로 찾아가 이렇게 말하니, 오딜 후작 측은 그럴듯하다고 여기고 물러났다.

치수 사업 현장을 건드리지 않고 놔두겠다고 약속하는 걸로도 모자라, 오딜 후작 측에서 점령한 지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일해도 좋다는 문서까지 내주었다.

훗날 이 사건은 스이의 수로 담판이라고 알려지게 되었고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 스이는 다시 외무부로 끌려갔다.

겨우 외무부에서 도망쳐 동부 치수 사업 현장에서 느긋이 지내려던 스이의 인생 계획은 완전 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정년퇴임할 때까지 외무부에서 혹사당하며 제국의 외교 관례를 세워 나갔다.

그렇게 스이의 미래를 바꿔 버린 이 협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반란 세력이 동부를 장악하고 자신만만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에서 진압군이 내려오면 저들은 다시 우리를 노릴 거야.”

스이는 저들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태도를 바꿀 거라 예상했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아쉴레앙 공작이 동부에 도착해 고립된 도미넨트 노백작을 구하고 동부의 반란 세력을 쓸어버리자, 반란 세력은 여유가 없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수로를 만들겠다고 모여 있는 일꾼들과 관리들에게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반란군은 스이와의 협상을 멋대로 어기고는 수로 건설 현장에 쳐들어왔다. 모두 끌고 가거나 죽이겠다는 생각인지, 기사 수십 명과 수백 명의 병사까지 몰고 왔다.

그리고 그들은 치수 사업 현장에 닿기 전, 몰살당했다. 루비아나가 끌고 온 군대가 숨어 있다 기습한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꼼짝없이 반란군에게 잡혀가게 되리라. 겁에 질려 있던 일꾼들이 저 멀리서 피어나는 흙먼지를 발견하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또 무슨 말로 반란군을 꼬셔야 하나, 머리를 쥐어뜯던 스이 사무관의 귀에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반란군이 아니에요! 백합이에요, 백합!”

피오니가 안경을 치켜 올리며,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흙먼지 속 우뚝 선 깃발의 문양을 알아보았다.

펄럭이는 커다란 사령관 깃발은 붉은색이었다. 거기에 새겨져 있는 은장 백합.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가볍게 흔들리며, 폭풍 같은 흙먼지를 일으킨 무리의 선두에 선 사람이 보였다.

구원의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은 타오르는 횃불 같았다.

일꾼들은 안도하며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울음을 터뜨렸다.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신을 부르짖으며 엎드려 감사 기도를 올리는 이도 여럿이었다.

“미술사를 전공한 리리를 데리고 올걸. 죽어도 동부엔 안 온다고 빠져나가는 걸 봐주는 게 아니었어.”

어느 학자의 집 출신 관리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피오니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보고 있는 광경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보니 지금 현장에 와 있는 관리들은 죄다 문과였다.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선을 찍찍 그어 산과 바다와 인간을 완성할 뿐인, 지독한 문과들.

그러하니 욕망은 있어도,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미술사를 전공한 리리 사무관이 이 중얼거림을 들었다면, 자신은 미술사 전공이지 미술 전공이 아니고, 그림을 못 그리는 건 마찬가지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겠으나.

만약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 역시 이 순간을 그림으로 남겨 둬야 한다는 의견에는 반드시 동의했으리라.

일꾼과 관리들은 갑옷을 입은 붉은 머리의 구원자가 가까이 올 때까지, 넋을 잃은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커다란 밤색 말이 피오니 앞에 멈춰 서고 태양을 등진 붉은 머리의 사령관이 피오니를 굽어볼 때까지,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반란군이 코앞까지 와도 눈썹 한 번 깜빡이지 않았던 그들을 한 번에 얼려 버린 당사자는 본인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늦지 않게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건가? 제국의 소중한 관리들이 선 채로 죽어 있다니. 내무국장이 알면 날 죽이려 들겠군.”

농담이랍시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던지고는 혼자 피식, 웃는 걸 보면.

“……하나도 안 웃긴 말씀이시네요.”

피오니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오- 작은 탄성이 들렸다. 기사들이 범인이었다.

그들은 드디어 공작님한테 정직한 조언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며 멋대로 떠들어 댔다.

그 떠들썩한 소리 덕에 일꾼과 관리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듯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나타난 붉은 머리의 사령관이 신이 내린 천사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 그것도 그런 썰렁한 농담을 하는 아쉴레앙 공작일 뿐이라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의 눈은, 그녀를 좇았다.

피오니 역시 상황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루비아나가 수도에서 봤던 것보다 더 멋있어 보인다는 걸 인정했다.

수도에서 봤던 아쉴레앙 공작이 심심해서 꾸벅꾸벅 졸던 사자였다면, 지금 눈앞에 나타난 아쉴레앙 공작은 방금 사냥을 마치고 배가 부른 사자였다.

가까이서 본 아쉴레앙 공작은 머리와 갑옷에 흙먼지와 피가 묻어 있었고, 어쩐지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그럼에도 사냥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눈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행동거지는 느긋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렇게 생각하니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사자의 갈기 같아 보이기도 했다.

‘백합이 아니라 사자여도 좋았을 것 같아.’

피오니는 사령관 깃발에 수놓인 백합을 힐끔 보며 생각했다.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 건, 그 아쉴레앙 공작이 말에서 내릴 때였다.

평소처럼 훌쩍 뛰어내리는 게 아니라, 종자가 나무 선반을 가져오길 기다렸다가 밟고 내렸다.

별것 아닌 행동이었으나 피오니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특히나 룩센 백작의 반란 때부터, 혹은 정복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칼레나에게 속해 일하며 루비아나를 종종 봐 왔던 관리들은 더더욱.

그들은 드래곤이 앞발로 나이프를 들어 스테이크를 썰어 먹는 걸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뭘 좀 잘못 먹었는지 배탈이 나서.”

루비아나가 배를 문지르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에?”

그 아쉴레앙 공작이 배탈이 났다고?

루비아나를 우러러보던 관리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북부에서 찬 것만 먹다가 아래로 내려와 따뜻한 것 좀 먹으니까 몸이 받아 주질 않네. 나도 북부 촌놈이 다 됐나 봅니다.”

왜, 떫으냐?

루비아나가 유독 큰 소리를 내었던 스이와 눈을 마주치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의 영혼에 자신의 배탈을 새겨 주려는 듯이.

으힉. 스이는 혼자 반란 세력에 맞섰던 사람답지 않게, 기겁하며 딴 사람도 아니고 저보다 두 뼘이나 작은 피오니의 등 뒤에 숨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아니, 왠지 저 눈빛을 마주하니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어. 마치 날, 다시 수도로 끌고 가 그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외교부에 다시 처넣을 것 같은 눈빛이랄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나도 말이 안 된다고는 생각하는데…… 아쉴레앙 공작은 중앙 업무에 전혀 관여 안 하니까. 아무튼, 그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니까! 당분간 저 사람 눈에 띄지 말아야 할 거 같아.”

피오니와 스이가 속닥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엄청 눈에 띈다는 걸, 두 사람만 몰랐다.

잔뜩 겁먹은 스이를 위해, 뒤따르던 기사들이 나섰다.

기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웃음 지었다.

“영 낫질 않아, 심하실 때는 전투에 참여도 못 하시고 지휘만 하셨습니다. 덕분에 반란군 진압이 늦어졌지요.”

“원래대로라면 벌써 다 끝나고 수도로 돌아가야 했는데 말이지요.”

“감히 그런 기밀을 멋대로 떠들어 대다니, 다들 군법으로 채찍질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루비아나는 고개를 돌려 기사들에게 윽박지르고는, 다시 관리들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담담하여, 방금 전 기사들을 협박하던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여러분을 지키겠습니다.”

대단한 말은 아니었다.

동부로 파견된 관리들과 고용된 일꾼들이 자신들의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듯.

아쉴레앙 공작과 군인들 또한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겠다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일꾼과 관리들은 그 짧은 말에 진짜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살았다.”

누군가 말했다. 모두가 동의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곳을 지켜 주어서 고맙습니다. 폐하를 대신하여, 그리고 동부의 백성, 당장 내년도 밀값을 걱정하는 제국 전역의 백성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전쟁이 일어나든 반란이 일어나든, 잘 먹고 잘 사는 귀족들이 벌인 일일진대, 삶이 곤란해지는 건 늘 백성이었다.

나라는 무너져도 백성의 삶은 무너지면 안 된다. 곤란하게라도 이어 나가야 하는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먹을 빵이, 그 빵을 만들 밀이 있어야 한다.

반란이 일어나도, 설령 막 세워진 제국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그 땅에 사는 백성은 계속 농사를 짓고 밀을 수확해 빵을 만들어 먹고 삶을 이어 나가야 하니까.

이곳에 남은 일꾼과 관리들이 했던 일은 그 기본적인 삶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결코 지키기 쉽지 않은 일.

루비아나는 그들의 그 근면성실함과 책임감에 기꺼이 경의를 표했다.

손을 주먹 쥐어 갑옷 흉판을 쳐 소리를 내곤, 그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지 마세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사람 부담스럽게 왜 이러셔요?”

피오니가 놀라 다급히 루비아나를 말리려 했지만, 이 똑소리 나는 젊은 사무관도 이어진 광경에 압도되어 버리고 말았다.

척, 철컥. 루비아나를 따르는 기사들, 수도사의 로브에 피를 묻힌 승병들이 루비아나와 같은 자세로 일꾼과 관리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관리들은 치수 사업 현장을 지키기 위해, 반란군에게 ‘우린 제국에 충성심 따윈 없다, 월급을 주니까 일하는 거고 이 수로는 너희가 반란에 성공하면 너희에게도 도움이 될 거다.’라고 약 팔았던 걸 잊고. 잠시나마 제국민으로서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다.

루비아나가 누군가를 통해 스이의 수로 담판을 알게 되어 스이가 루비아나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숨어 다니게 된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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