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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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아나는 치수 사업 현장 근처에 진을 쳤다. 이곳을 지킬 인원을 정비할 때까지 머물 생각이라고 했다.

자신들을 구해 주기만 하고 다시 훌쩍 떠날 줄 알았건만. 루비아나가 직접 진을 치고 머무르며 이곳을 지킬 병력을 정비하겠다고 하자, 관리들은 덜컥 겁먹었다.

혹시나 루비아나가 이곳의 일꾼들과 관리들을 전투에 끌어들이려고 그러는 건가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치수 사업은 계속해야 한다. 그런데 관리들과 일꾼들을 전투 병력으로 차출하면, 치수 사업은 중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쉴레앙 공작, 루비아나는 황제로부터 동부에 있는 제국민을 병력으로 얼마든지 차출할 수 있는 권리를 위임받았다.

관리들은 그 점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불안해했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아닌 건 아닌 것이었다.

결국 제비뽑기에서 진 스이가 앞장서서 루비아나를 찾아갔다.

우리를 전투에 써먹지 않을 거라는 확답을 달라고 부탁했지만, 루비아나는 답하지 않았다.

“당장의 치수 사업을 방해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계획대로 계속 일을 해 나가시면 됩니다.”

그녀답지 않은, 모호한 대답이었다.

관리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그런 상황에서 루비아나가 피오니를 불렀다.

피오니는 잠깐 스이에게 붙들려 상대방의 말재간에 넘어가지 않는 비법을 몇 가지 전수받고야 사령관의 막사로 올 수 있었다.

“공작님께선 식사 중이십니다. 거의 끝나셨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그러죠.”

피오니는 문 앞을 지키고 선 경비병의 제지를 받고 대기했다. 과연, 곧 막사의 문이 열리고 빈 그릇을 들고 나오는 주방장이 보였다.

‘공작님쯤 되면, 식사 수발을 주방장이 직접 하는구나.’

피오니가 신기해하며 주방장을 바라보았다.

주방장은 경비병 옆에 선 피오니를 보지 못했는지, 혼잣말을 하듯 경비병에게 투덜거렸다.

“옛날 남부에 계실 적에 드셨던 청어절임과 미트파이만 줄창 찾으셔서, 내내 그것만 만들어다 바치고 있다고. 이 난리 통에 싱싱한 청어가 땡긴다는 사령관이나 사령관이 먹고 싶다니까 얼음 상자에 갓 잡은 청어를 넣어 신선마법까지 걸어 보급해 주는 보급 부대나, 다 미쳤다니까. 이게 지금 전쟁터야, 놀이터야? 나 참.”

“하하, 그래도 매일 같은 것만 드시니까 만들긴 쉽잖습니까?”

“쉽긴! 난 평생 동부에만 살아서 청어절임 따위 만들 줄 모른다고. 게다가 뭐? 옛날에 먹던 맛이 아니야? 그 맛을 내가 어떻게 알…… 아.”

경비병이 어색하게 웃으며 눈치를 줬는데도, 주방장은 뒤늦게 피오니를 발견하고 입을 꾹 닫았다.

피오니는 차마 못 들은 척은 못 하고, 소문을 퍼트리지 않겠다는 의미로 두 손으로 입을 닫았다.

주방장은 안심하고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피오니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전쟁터인데 사탕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주방장도 딱히, 긴장감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사탕 안에 진한 초콜릿이 든, 수도 유명 제과점의 사탕은 더더욱.’

피오니는 사탕을 도로 뺏길지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뒷말은 꾹 삼켰다.

그리고 경비병의 안내를 받아 막사 안에 들어간 후, 은밀히 루비아나에게 보고했다.

“주방장님이 청어절임하고 미트파이만 만드는 게 너무 싫다는데요?”

레몬을 띄운 물로 입을 가시고 있던 루비아나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들었습니다. 나 들으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하는 거니까요.”

“아…….”

전시 상황에 사령관한테 네가 원하는 요리 만들기 싫다고 대놓고 투덜거리는 요리사는 얼마나 현실적인 존재인가?

피오니는 떠난 주방장을 쫓아가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계속 내 편식을 함께 고민해 주는 것도 좋겠지만, 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아, 네? 네. 넵!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는 아니고, 일단 앉아요.”

루비아나가 빈 의자를 가리켰다. 피오니는 얼른 자리에 앉아 허리를 곧게 세우고 루비아나를 바라봤다.

머릿속으로는 스이가 말해 준, 상대방의 언변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방법을 계속 되새겼다.

‘절대, 절대 우리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여기서 일만 할 거야.’

그렇게 의지를 다지며 잔뜩 긴장했는데.

“이게 내 계획입니다.”

루비아나가 탁자에 펼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손가락이 르니에강 상류에서 오딜 후작이 점령하고 있는 산 쪽으로 쭉 그었다.

“네?”

피오니가 기겁하며 눈을 깜빡였다. 루비아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역시 마음에 들어.’

루비아나는 이번 일이 끝나면, 피오니에게 북부로 가지 않겠느냐고 꼭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건 불가능해요!”

피오니가 소리쳤다.

“도와줄 인력은 곧 도착할 겁니다.”

루비아나가 품에서 툭, 무언가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

그걸 알아본 피오니의 눈이 뎅그래졌다.

“이, 이건!”

번쩍번쩍 빛나는 그것은 오다 주웠다는 식으로 툭 내던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학자의 집 출신인 피오니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공작님.”

피오니가 눈을 번뜩이며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내 친구인 줄 알았는데 사실 내 원수의 친구였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의 눈빛과 같았다.

루비아나는 그 눈빛을 담담히 마주 보며, 마법의 한마디를 내뱉었다.

“저쪽은 된다던데.”

게임 끝이었다.

피오니가 허락 없이 벌떡 일어섰다. 어찌나 거세게 일어났는지, 의자가 넘어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곳 담당은 저희입니다. 저희가 하면 될 수도 있겠지요. 그쪽은 올 필요도 없고, 온다고 해도 저희에게 들러리처럼 이용이나 당하면 되는 겁니다!”

“믿음직스럽군요. 그럼 곧 있을 회의에서 지원을 부탁합니다.”

“네! ……네?”

‘회의라니?’

피오니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막사 밖이 시끄러워졌다. 루비아나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또 도착한 듯싶었다.

“아니, 공작님 배탈은 도대체 언제 다 낫는 건가?”

“그것이, 저도 잘…….”

“아니, 의사면서! 그것도 공작님 전담 주치의면서 그걸 모른단 말이오?”

의사와 성질 급한 부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막 자리에 앉은 건데도, 피오니는 괜히 조바심이 들어 엉덩이를 들썩였다.

루비아나는 피오니가 얼른 일어나고 싶어 한다고 착각하고는, 너그럽게 말했다.

“자세한 설명은 회의 때 하도록 하지요.”

“저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지만, 전 잠시 후 어떤 회의가 있고 거기에 참석해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

루비아나가 깜빡했다는 듯,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여태 피오니 로렌 사무관은 참관하지 않았지요. 알겠습니다. 일단 숙소로 가 대기하고 계십시오. 곧 사람을 보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후엔 시간에 맞춰 회의에 참석하도록 하십시오.”

“아, 혹시 그 회의라는 게……?”

피오니는 뒤늦게 요즘 스이나 다른 선배 관리들이 전술 회의에 참석한다고 말했던 걸 떠올렸다.

참석하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신들과 수로 현장 사업을 전투에 이용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당연히 조무래기 사무관인 피오니는 참석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자리였다.

“그런 회의에 절 참석시키겠단 말씀은 설마…….”

“피오니 로렌 사무관, 당신에게 보직 변경을 명합니다.”

“……!”

“오늘부로 당신은 동부 치수 사업 현장 업무에서 손을 떼고 동부 진압군 사령관의 참모가 됩니다. 본 사령관이 수도로 복귀할 때까지의 한시적인 보직이며, 동부의 반란 상황이 종결된 후 본래의 업무로 복귀시켜 주겠습니다.”

스이가 그렇게나 두려워했던 아쉴레앙 공작의 전시 선발권이었다.

제국인이라면 누구나 징발할 수 있는 권리.

루비아나가 이 동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시 선발권을 사용했다. 피오니에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현재의 업무에 매우 만족하고 있는 피오니는 당연히 반발했다.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고 싶다고 했잖습니까?”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 어, 그런데 제가 한 말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인상 깊어서요. 그리고 기억이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들만의 전유물도 아니니까요.”

“그건, 그렇지요. 그렇긴 한데…….”

“‘치수 사업 중 반란군이 근처 영지를 점령하자, 아쉴레앙 공작은 르니에강을 이용한 전술로 반란군을 쓸어버렸다. 승리의 주역은 르니에강의 치수 사업을 맡고 있던 파견 관리들이었다.’라는 역사 기록에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습니까?”

루비아나가 물었다.

“……!”

피오니의 눈이 댕그래졌다. 그냥 놀라서 동그래지고 만 것이 아니었다.

루비아나는 피오니의 눈동자 속에 이글이글 피어나는 불길을 읽어 냈다.

심히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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