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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 회의에서 루비아나가 지도를 펴들고 르니에강 상류와 오딜 후작이 점거한 지역을 가리켰다.
군 참모들이나 참관하러 온 관리들이나, 다 함께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참모들은 얼떨떨해하고 말았지만, 관리들은 달랐다.
“안 됩니다. 불가능할뿐더러, 가능하다 해도 안 됩니다. 이럴 거면 왜! 그때 우리한테 고생했다고, 수고했다고 하신 겁니까? 우리가 여길 어떻게 지켰는데!”
아쉴레앙 공작의 눈에 띄지 않는 게 목표라던 스이가 대놓고 삿대질하며 왁왁 소리쳤다.
그러다 아까부터 루비아나 옆에 서서 어색한 표정으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피오니와 눈이 마주쳤다. 스이는 더욱 분노했다.
“피오니 로렌 사무관을 인질로 잡다니! 공작님 말을 따르지 않으면 피오니 사무관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다, 뭐 그런 겁니까?”
“헉, 그런 악독한!”
“그럴 수가!”
다른 관리들이 경악하며 한마디씩 더했다.
“그런 것이었던 것인가!”
“공작님이라면 그러실 만도 한데…….”
참모들은 그런 관리들을 말리기는커녕, 덩달아 휩쓸려 버렸다.
“도대체 내 평판이 어떻기에 이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지?”
루비아나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음…….”
옆에 서 있는 죄로 그 중얼거림을 들은 피오니는 말을 아꼈다.
“공작님, 흥분하시면 위험합니다.”
루비아나의 배탈 관리를 위해 피오니의 반대쪽 옆에 서 있던 의사가 소곤소곤 말했다.
“잠시만요, 전 인질 같은 게 아니라……”
“비겁합니다!”
“일단 피오니 사무관은 놔주십시오. 그런 다음 이야기하시지요.”
관리들은 피오니 로렌을 구하기 위해, 피오니 로렌의 해명 따위는 듣지 않았다.
참모들은 감히 루비아나에게 맞서는 관리들을 보며 감탄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그러게. 배탈이 심하게 나서 내내 기분이 안 좋은 공작님께 저렇게 개길 수 있다니.”
“설득하기 전에 인질부터 잡은 공작님 잘못이지.”
관리들의 혁명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덩달아 간이 부은 참모 한 명이 루비아나를 돌아보며 충심 어린 조언을 바쳤다.
“인질 때문에 오히려 반발이 심해지는 것 같은데, 그냥 풀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인질 아니라니까.”
“저 인질 같은 거 아닌데요.”
루비아나와 피오니, 두 사람이 해명했으나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사랑받고 있군요.”
루비아나가 피오니에게 말을 건넸다.
“…….”
피오니의 얼굴이 빨개졌다. 부끄러움과 뿌듯함이 공존하는 그 얼굴을 감상하고 있는데, 피오니가 눈을 내리깔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이먼드가 없어서 그래요. 아, 아쉴레앙 공작 부군님이요.”
“……부르고 싶은 대로, 편하게 불러도 좋습니다.”
루비아나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리고 말과는 달리, 쥐고 있던 펜이 뚝- 하고 부러졌다.
“아, 이런.”
루비아나는 나직하게 혀를 차고는 부러진 펜을 집어 던졌다.
“흠흠, 아쉴레앙 공작 부군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피오니는 자신의 허리가 저 펜처럼 뚝 부러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게 편하다면 얼마든지.”
“네. 이게 편합니다.”
영원히 루이먼드를 루이먼드라고 부르지 않으리라. 피오니는 다짐하며 얼른 말을 덧붙였다.
“이 자리에 공작 부군이 계셨다면, 분명 저 말고 공작 부군을 더 걱정하셨을 거예요. 다들, 그분을 정말 좋아하고 아끼시거든요. 저보다 훨씬 더요.”
“그렇습니까?”
루비아나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피오니는 루비아나가 자신의 말을 못 믿는 거라고 생각했다.
“네, 그럼요. 들어 보셔요. 공작 부군님이 저쪽에 잡혀갔다니까, 스이 사무관님께서 고작 저 정도로만 반대하시는 거예요. 아니었다면 이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으셨을걸요.”
“그렇군요.”
루비아나의 목소리가 더 딱딱해졌다.
‘아니 왜?’
피오니는 의아해하다가 나름의 답을 생각해 냈다.
‘스이 사무관님과 다른 분들이, 루이먼드를 구하러 가는 걸 막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오해를 풀어야 했다.
“공작님……”
“피오니 사무관은 어떻습니까?”
“네?”
“당신도 많이 걱정됩니까?”
톡. 톡. 루비아나가 지도로 덮인 탁자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물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여전한데, 어쩐지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설마. 공작님이 나한테 짜증 낼 일이 뭐 있다고?’
피오니는 자신이 착각한 거라고 생각하고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애써 무시했다.
“물론이죠.”
그리고 주저 없이 대답했다.
공부에 그리 큰 도움을 주는 동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친구는 친구였다.
피오니는 스이 사무관이나 다른 관리들이 루이먼드를 걱정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것보다 조금 더 루이먼드를 걱정했다.
반란 진압군 사령관 앞에서 반란군의 왕이 되어 버린 루이먼드를 두둔하는 건 자칫 잘못하면 반역죄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피오니는 그런 점은 걱정하지 않았다. 루비아나 역시 딱히 처벌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렇군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넘어갔다. 더는 피오니에게 묻지 않았다. 또한, 피오니에게 원한다면 스이 사무관이 있는 쪽으로 가도 된다고 했다.
***
회의는 과열된 분위기 때문에 잠깐 중단했다가 다시 이어졌다.
흥분을 조금 가라앉힌 관리들은 피오니가 자신들 쪽으로 종종 다가오자 안심하고는, 본격적으로 루비아나의 전술에 반대했다.
루비아나는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손가락을 세 개 폈다.
“여러분이 반대하는 이유는 세 가지로군요. 첫째,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둘째, 저쪽이 눈치챌 것이다. 셋째, 치수 사업을 방해해 인력과 예산을 낭비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스이가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끼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루비아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핏 지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관리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첫째,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둘째, 저들의 시선을 돌려 직전까지 알아채지 못하게 할 겁니다, 내가.”
손가락이 또 하나 접혔다.
“셋째, 차후 드는 모든 비용은 아쉴레앙 공작의 예산에서 지원할 겁니다.”
마지막 손가락마저 접혔다.
“그건 너무 두루뭉술한 말입니다. 공작님답지 않으십니다!”
스이가 반박했다.
“나다운 거? 나다운 게 뭔데?”
“그, 그건…….”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보지요, 스이 모겐 사무관?”
녹색 눈이 번뜩였다. 숨어 있던 짜증과 분노가 슬쩍, 수면 위로 드러났다.
루비아나와 눈이 마주친 스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잠깐 새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공작님, 진정하십시오. 아이, 아니, 배탈에 안 좋습니다.”
“아.”
루비아나는 의사의 조언에 기세를 가라앉혔다.
‘왜 자꾸 짜증이 나지?’
어쩌면 조바심일지도 모른다.
바로 눈앞에, 저기에 내 것이 있는데.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데, 양손과 양발이 붙들려 나아가지 못할 때 드는 기분.
전술 회의에서 아군이 전술의 빈틈을 찾아내고 실패 가능성을 말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반박을 이겨내고 모두를 설득시키는 것이 본인의 임무라는 걸 모르지 않는데. 자꾸만 짜증이 났다.
‘진정하자. 괜찮아, 곧 다 끝나.’
루비아나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흥분하면 안 돼.
조급해지면 안 돼.
이성적으로. 흔들리지 말고. 차분하게.
지금까지 늘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칼레나를 쫓아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정복 전쟁 때 적의 함정에 빠져 죽을 뻔했을 때도, 다 괜찮았는데.
이번만은 그게 쉽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자꾸만 울컥울컥 치솟는 울분과 짜증과 분노를 어쩌지 못하고, 이를 꽉 깨물었다.
계획대로 될 것이다. 반란군은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쓸려나갈 것이고, 루이먼드는 무사히 돌아올 것이다.
되찾을 수 있다. 아니, 당연히 되찾을 것이다.
‘이 손에. 내 곁에.’
그러니까 흔들리면 안 돼.
루비아나는 저도 모르게 배에 손을 올리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직 배에 뭐가 있긴 한 건지, 실감이 안 나는데. 그래도 이렇게 하면, 어쩐지 응원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 괜찮아요. 잘하고 있어요. 다 잘 될 거예요. 뭐 이런 말?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예, 그,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심호흡하시고요. 절대, 절대 흥분하지 마십시오. 공작님. 제발!”
의사는 애 떨어질 뻔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루비아나가 아니라 의사가 아픈 사람 같아 보였다.
‘의사가 저렇게 신경 쓸 정도면, 그냥 배탈은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설마…….’
피오니와 관리들의 의심 어린 눈빛이 루비아나를 향했다.
‘지독한 풍토병에 걸린 걸까?’
‘지독한 배탈에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닌 거 같아!’
관리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는 바람에 조용해진 틈을 노려, 루비아나가 툭 말했다.
“곧 마탑에서 지원이 올 겁니다.”
“…….”
‘올 게 왔구나.’
피오니는 경건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이게 뭔 소리야? 내가 잘못 들은 거지?”
“헉?”
“귀가 멀었나, 왜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당황하는 관리들 앞에서, 루비아나는 문제의 그 황금 패를 내보였다.
지도로 덮인 탁자 위에 가볍게 던졌는데, 하필이면 르니에강 상류 부분에 뚝 떨어졌다.
번쩍번쩍한 금판이 관리들의 업적을 덮어 버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관리들은 그 패를 알아보고 입을 쩍 벌렸다.
“말도 안 돼!”
“저, 저게 왜 공작님께?”
“그 찌질하고 게으른 데다가 오만하고, 예산만 처먹는 머저리들이 여기에 온다고?”
관리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눈빛으로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딱 봐도, 내 편까지는 아니어도 그 비슷한 수준으로는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 원수와 한편이었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런 눈빛을 맞닥뜨린 건 두 번째인지라, 루비아나는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그리고 마법의 한마디를 내뱉었다.
“마탑에선 된다던데.”
효과는 놀라웠다.
“그럼 저희도 가능합니다. 아니, 저희도 불가능하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그냥 장애물이 있다고 말씀드렸을 뿐이지요!”
관리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탁자 위 황금 패가 번쩍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