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131)

***

전술 회의는 열렬한 분위기 속에 마무리되었다.

관리들은 마탑에 대한 반발심이 가라앉자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마탑 놈들도 괜히 해 본 말이지 정말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놈들이 툭하면 떠들어대는 그놈의 8서클 마법! 그 8서클을 이뤄낸, 대마법사라 불릴 만한 마법사가 없지 않습니까?”

관리들은 인적이 드문 구석에서 똘똘 뭉쳤다.

“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가서 안 하겠다고 말합시다.”

“여기 계셨네요?”

그들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그리워졌다. 상큼한 목소리는 덤이었다.

“피오니?”

“피오니 사무관?”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겁니까? 얼른 이리로 오세요. 앞으로 무조건 우리와 함께 움직입시다. 저 악독한 공작이 피오니 사무관을 노리고 있지 않습니까!”

관리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피오니를 받아들이고, 열심히 토론하였다.

이윽고 땅거미가 지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대충 결론이 났다.

“마탑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줍시다.”

“옳소!”

“상류 쪽 현장을 건드리지 않도록 최대로 비틀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 이참에 마탑 놈들의 마력을 쪽쪽 빨아먹어 버리자고!”

분위기가 반전됐다.

관리들은 누가 일 중독자들 아니랄까 봐 벌써부터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것 봐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건 스이뿐이었다. 스이는 이 반전된 상황의 주역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워낙 따사로워, 피오니는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스이가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피오니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못 알아들은 척했지만, 결국엔 스이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스이가 막사 뒤로 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니?”

“보직이 변경되었어요.”

피오니는 서툴게 거짓말하느니,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걸 선택했다.

“어쩌겠어요?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안 그래요?”

“그래서, 뭘로? 인질에서 첩자로?”

“아쉴레앙 공작님의 참모? 부관? 그런 걸로요.”

“그래서 비밀 방첩 활동을 한 거야?”

“……마탑 애들이 온다잖아요.”

피오니가 인상을 팍 썼다.

“애는 무슨. 거기 너보다 어린 사람 없다아?”

“…….”

맞는 말인지라, 피오니는 입을 꾹 다물었다.

“허, 참. 회의 전에 널 따로 부르셨다고 해서 뭔 일인가 싶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군.”

스이가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며 혀를 찼다.

“가만 보면 곰이 아니라 여우라니까, 여우.”

“저 여우 아닌데요.”

“너 말고, 아쉴레앙 공작.”

“……사무관님께서는 끝까지 반대하고 싶으신 건가요?”

“왜? 그래 보여?”

“네.”

“그렇다고 하면?”

“설득해야지요.”

피오니는 스이를 따라 팔짱을 끼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공작님의 참모가 된 건, 보직 변경 명령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작님이 말씀하신 방법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에요. 마탑 놈들만 제대로 해 주면…….”

“내가 걱정하는 점이 바로 그 점이야.”

“예? 왜요?”

“전혀 아쉴레앙 공작답지 않으니까.”

“답지 않다니요?”

“우리가 네게 약하다는 걸 알고 너부터 포섭하거나 그런 말도 안 되는 전술을 밀어붙이는 거나.”

스이는 많이 피곤해 보였다. 아니, 그는 언제나 피곤해 보였으나 지금 좀 더 지쳐 보였다.

“스이 사무관님?”

“아쉴레앙 공작은 절대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사람이 아닌데, 무슨 생각인 건지…….”

스이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피오니는 심각해진 스이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불쑥 말했다.

“사랑의 힘인 거죠.”

“뭐?”

딴 사람도 아니고 피오니가 이런 말을? 스이가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내가 잘못 들었나?”

“아뇨, 제대로 들으셨어요. 저쪽에 아쉴레앙 공작 부군이 잡혀갔잖아요.”

“어? 어. 그렇지. 그게 왜?”

“아까 공작님이 잡혀간 공작 부군을 생각하시다가 펜을 뚝 부러뜨리셨어요. 한 손으로. 아니, 두 손가락으로 이렇게요.”

피오니가 아까 회의 중 봤던 장면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금슬이 좋다더니, 정말 남편 때문에?”

스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다운 게 뭔데? 라고 묻던 루비아나를 생각하면 피오니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 아쉴레앙 공작이?”

하지만 영 납득이 가지 않았다.

스이는 룩센 백작의 반란 때부터 칼레나를 좇았던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때문에 스이는 전쟁터에 선 루비아나를 숱하게 봐 왔다.

묵묵히 검을 휘두르던 카드릭. 화려한 검무를 추듯 날뛰던 루단테.

그리고 짙은 녹색 눈으로 적을 쫓으며 손으로, 때론 이로 활시위를 당기던 루비아나.

그녀의 손에서 떠난 화살이 꿰뚫는 건 언제나 적진에서 가장 중요하고,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두 공작과는 다른 의미로 섬뜩한 공포였다.

언제나 이성적이었으며, 주변을 살피고, 가장 적은 희생으로 승리를 만들어 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인내하고, 기다렸다.

그런 루비아나가 변했다? 남자 때문에?

“얼마나 대단한 미남이기에? 젠장, 그때 행정관에 있을 때 우연히라도 한번 마주쳐 볼걸.”

스이는 뒤늦게라도 요즘 유행한다는 루이먼드의 초상화를 구해 봐야겠다고 중얼거리며 피오니에게 손짓했다.

“첩자 노릇도 적당히 해. 이번엔 나만 눈치챈 것 같지만, 앞으로도 계속 어설프게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눈치챌 거야.”

“네.”

하지 말란 말이었는데, 피오니는 안 들킬 정도로 완벽하게 하란 말로 알아들었는지, 뭔가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니다, 됐다. 가 봐.”

스이는 한마디 더 하려다 말고 손을 내저었다.

피오니는 스이가 붙잡을세라, 얼른 돌아서 총총 걸어갔다. 가는 방향을 보아하니, 아쉴레앙 공작의 막사가 있는 쪽이었다.

“허, 참. 푹 빠졌군.”

마탑의 황금 패를 들고 온 것도 모자라 그 새침한 피오니를 제 편으로 만들다니.

“이런 사람의 남편을 홀라당 들고 가고선, 반란이 성공하길 바라다니.”

스이는 저 멀리 보이는, 오딜 후작이 점거한 산 위의 성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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