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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디토 남작이 마법사 무리를 이끌고 도착했다.
병사로 분장해 보급품 사이에 끼어 왔는데, 멀리서 본다면 속을지 모르겠으나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이 들킬 수밖에 없는 허술한 변장이었다.
마법사들은 얼굴이 허여멀겋고 두 손이 말랑말랑했다. 아무리 허름한 옷을 입고 있어도, 마법사 말고 다른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짐마차를 편하게 타고 왔는데도, 당장이라도 죽을 듯 숨을 헐떡이며 픽픽 쓰러졌다. 체력이 아주 저질이었다.
동부에 오기 전까지 마법사들과 비슷한 상태였던 관리들은 현장 업무를 하며 적당히 피부가 그을리고, 손발이 제법 거칠어져 있었다. 관리들은 올챙이 적 생각 못 하고 마법사들을 비웃었다.
“마법사가 약골이네!”
“두, 두고 보자, 황궁의 개들…….”
마법사들은 이를 갈며, 관리들을 향한 분노에 힘입어 몸을 다시 일으켰다.
마법사들 중 그나마 멀쩡한 건 디토 남작이었다.
루비아나는 마법사들이 도착하자마자, 관리들이 디토 남작과 대화를 나누기 전 그를 빼돌렸다.
루비아나는 디토 남작을 정중히 맞이하며 황금 패를 내밀었다. 디토 남작은 허허 웃으며 손사래 쳤다.
“이미 드린 것을 어찌 돌려받겠습니까? 이 제국에 여생을 다해 충성하겠다고 맹세했던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연륜이 묻어나는 답이었다.
디토 남작은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지만,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그가 하지 않는 질문 속에, 손녀에게 행복한 결혼식을 만들어 준 루이먼드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을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배려에 감사하며, 황금 패를 다시 챙겼다.
“저희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디토 남작이 물었다.
관리들에게 말했던 것과 달리 마법사들은 자신들이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루비아나가 디토 남작을 납치하듯 자신의 막사로 모시고 온 이유이기도 했다.
루비아나는 자신의 전술을 간단히 설명했다.
디토 남작의 반응은 관리들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참고로 이곳에 파견된 황실 관료들은 마탑이 제 역할을 다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거라고, 아니, 가능하게 만들어 낼 자신이 있다고 소견을 밝혔습니다.”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하려고 했습니다만. 흠흠. 무슨 일만 하려고 하면 서류를 떼 오라는 둥,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둥, 시간만 끄는 황실 관리들이 제대로 보조를 맞춰 준다면 말입니다.”
디토 남작이 얼른 말을 바꿨다. 루비아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옅게 웃어 보였다.
***
마탑의 마법사들과 함께 도착한 보급품은 어마어마한 양의 옷감이었다.
식량도 충분, 무기도 충분. 딱히 보급이 급하지 않았던 상황인지라, 요청하지도 않은 옷감이 잔뜩 도착하자 보급 담당 행정병들은 의아해하며 서류를 뒤적였다.
생전 처음 보는 옷감이 산더미.
“뭐야, 누가 이런 걸 요청했어?”
“천막 만들 때 쓰면 딱 좋겠군.”
그러니까 전쟁 막바지에 이른 지금은 전혀 쓸모없다는 말이었다.
“뭔가 잘못된 거 아냐?”
“이상하다, 보급을 맡으신 국장님께서 실수를 하실 리 없는데.”
행정병들은 곧 이 엉뚱한 보급품을 자신들 몰래 요청한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냈다.
아쉴레앙 공작.
이곳의 최고 명령권자로, 행정병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수도에 보급품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행정병들은 우르르, 루비아나에게로 갔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러 가는 것이니, 한 사람만 가도 충분하겠으나 모두 아쉴레앙 공작과 독대하는 걸 무서워하며 가길 꺼려서 그냥 함께 몰려갔다.
루비아나는 뭐 문제 될 거 있느냐는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이걸 다 어디에 쓰시렵니까? 아니, 그 전에 이건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입니까?”
“그걸 모르다니?”
친절하게 이건 무엇이다, 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어떻게 이걸 모를 수 있느냐는 반박을 듣게 되다니.
행정병들은 마음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다.
“저, 저희가 웬만한 직물은 다 꿰고 있습니다만, 이건 정말 처음 보는 것입니다. 다들 그렇지?”
“으, 으응. 당최 이런 건 처음이니까. 튼튼해 보이기는 하는데…….”
행정병들이 수군댔다.
루비아나는 그들이 내민 청색의 옷감을 받아 들고, 그 까끌한 겉면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
‘아무도 이걸 모른다니.’
흠칫. 행정병들이 하던 말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뭐지?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분노하신 건가?’
‘업무 태만이라 생각하는 건지도 몰라.’
‘저렇게 많은 양의 옷감이 한 번에 실려 올 정도면 분명 어디선가 대량 생산하고 있는, 이름 있는 직물일 텐데.’
‘하지만 정말 뭔지 모르겠는걸.’
행정병들은 조용히 눈빛만 교환했다.
행정병들의 걱정과 달리, 루비아나는 화낸 것이 아니었다. 루비아나는 이 노련한 행정병들이 처음 보는 옷감이라 난리 치는 이것을, 이 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으로 만들겠다고 큰소리쳤던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공작가의 재산을 두 배로 불려 놓겠다고 했던가?’
성의 없이 응원한다고 혼났던 기억도 났다. 루이먼드와 시녀장과 셋이서 속 편하게 웃고 떠들었던 기억.
얼마 전 일인데, 먼 옛날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니, 정말 그렇게 편하게 웃고 떠들었던 날이 있기는 했는지 의심이 들기까지 했다.
평범한 행복이 너무 가지고 싶어서, 꿈이라도 꾼 게 아닐까?
사실 오딜 후작에게 잡혀 있다는 폭군의 사생아, 은발 흑안의 미남자는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남자가 아닐는지?
북부에서 눈사태에 쓸려 죽다 살아났을 때, 기억이 왜곡된 건지도 모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그런 게 아니라는 듯 배가 쿵쿵 울렸다.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서 배 위에 손을 올리면, 날 잊지 말라는 듯 배가 당겼다.
‘그래, 네가 있었지.’
그제야 모든 게 실감 났다. 아무것도 허상이 아니고 현실이라는 것이.
“이런 게 있는 걸 아셨으면, 초반에 막사를 세울 때 구해 주셨으면 잘 써먹었을 텐데 말입니다.”
룩센 백작의 반란 때부터 루비아나를 쫓아다니며 보급을 맡았던 행정병이 투덜거렸다.
“쓸데가 있어서 요청한 거니까, 일단 남들의 눈에 안 띄는 곳에 처박아 놔. 최대한 후방에, 되도록 경미한 부상자들이 있는 의료 막사와 가까운 곳에 두는 게 나중에 편할 거야.”
“이걸 붕대로 쓰시려고요? 하지만 이건 그런 용도에 적합해 보이지 않을뿐더러. 의약품은 모자라지 않습……”
“설명은 나중에 하지. 일단 그렇게 알아 둬.”
루비아나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행정병들을 내쫓았다.
행정병들이 떠난 후 남은 건, 그들이 깜빡 잊고 두고 간 옷감 한 필뿐이었다.
“…….”
가만히 지켜보던 루비아나는 그것을 들어 살짝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어 저편을 바라보았다. 반란군이 모여 진을 친 산 아래. 그리고 산 위의 성.
“아이고, 공작님. 죄송합니다. 깜빡 잊고 두고 간 게 있어서요.”
행정병 한 명이 뒤늦게 옷감을 찾으러 왔을 때, 막사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루비아나는 없었고, 풀어 헤친 옷감만 탁자 위에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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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니에강 상류. 치수 사업 현장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도 꿋꿋이 까만 로브를 뒤집어쓰고 나온 마법사들과 구릿빛 피부를 자랑하는 관리들이 맞붙었기 때문이었다.
“흐음, 쉽지는 않겠군.”
디토 남작이 지도와 르니에강 상류의 실제 지형을 확인하며 난감해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관리들이 앞다퉈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댔다.
“그러면 그렇지.”
“아니, 왜? 아예 수도에서부터 못 하겠다 말씀하시지, 괜히 이 먼 곳까지 일부러 와서 못 하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아아, 8서클에 도달하지 못해서 그런 거구나아. 그놈의 8서클!”
특히 학자의 집 출신 관리들의 반응이 굉장했다.
그들은 ‘그놈의 8서클’을 돌림 노래 부르듯 말하며 마법사들 주변을 빙빙 돌았다.
“피오니 사무관, 이럴 줄 알고 당연히 대안을 준비해 뒀겠지?”
“물론이죠. 8서클을 이루지 못한 마법사들이 뭘 할 수 있겠어요?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요.”
피오니가 눈을 빛내며 두꺼운 서류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이, 이딴 일! 8서클이 아니어도 해낼 수 있다고! 감히 위대한 마법의 힘을 무시하다니!”
성질 급한 마법사가 버럭, 소리 지르며 디토 남작을 돌아보았다.
“그렇죠? 그렇지요?”
제발, 어서, 그렇다고 말씀해 주세요. 마법사는 간절했다.
그 간절함은 디토 남작뿐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에게까지 들불처럼 퍼졌다.
“그렇죠! 이 정도는, 우습죠.”
“위대한 마법의 힘 앞에선!”
황금 패에 순종하겠다는 마탑의 서약. 그리고 마탑주인 디토 남작을 향한 존경심. 오직 그것들 때문에 마탑에서 나와 이곳까지 고생고생하면서 온 마법사들은 사실 이 임무가 썩 내키진 않았다.
짐마차에 덜그럭덜그럭 실려 오면서 괜한 짓 하는 것 아니냐는 회의감도 깊어졌었더랬다.
하지만 황실 관리들을 마주한 순간, 마음 가짐이 달라졌다. 감히 위대한 마법의 힘을 무시하는 무식한 황실 관리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고야 말리라.
“강이 문제야? 우리 마탑은 마법의 힘으로 산도 옮길 수 있다고!”
“맞아, 맞아. 우린 할 수 있다아아앗!”
마법사들이 불타올랐다. 그 선두에는 말없이, 은은히 분노를 내보이는 디토 남작이 있었다.
그는 팔을 걷어붙이고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에게서 찌릿한 전력이 흘러나와 주변의 땅을 퍽퍽 파냈다. 삽이나 일꾼이 따로 필요 없었다.
“다시는, 다시는 내 앞에서 마탑을 무시하지 마시오.”
점잖으나 협박성이 다분한 말이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역시 우리 마탑주 어르신이 최고라며 환호했다.
관리들은 겁먹거나 물러서기는커녕 어디 할 테면 해 보라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 말씀은 공작님의 명령을 완, 벽, 하, 게, 마친 후에 하시는 게 순서에 맞지 않겠습니까?”
“옳소!”
“그렇지!”
황실 관리들은 이미 아쉴레앙 공작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뒤라,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있었다. 8서클도 아닌 마탑주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파지지직. 마법사와 관리들 사이에 살벌한 전류가 흘렀다. 디토 남작의 4서클 전격 마법 따윈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짜릿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이깟 일, 단숨에 해치워 버려 마탑의 위대함을 보여 주자.”
“아이고, 8서클도 못 이룬 마법사님들께서 애쓰신단다. 실패할지도 모르니, 우린 우리대로 일이나 하자아아!”
흥. 흥. 마법사와 관리들은 서로를 등지며 휙 돌아섰다.
그러고는 상대편에게 뒤질세라, 맹렬히 일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철통같은 감시와 보호 속에서, 르니에강 상류는 깊은 밤에도 환하게 불이 켜져서는 꺼질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