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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후방의 의료 막사. 부상이 가벼운 병사들은 일단 다 나을 때까지 부대에 복귀할 수 없으니 의료 막사에 누워 있는, 꽤 심심한 상태였다.
아픈 사람이 빨리 나을 생각을 해야지, 심심할 일이 무엇 있겠냐마는.
남들은 다 바쁘게 움직이는데, 누워만 있고 앉아만 있다 보면 좀이 쑤시기 마련이었다.
반란 세력을 한 곳에 몰아넣고, 아마도 마지막 전투를 앞둔 상황이니 더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병사들의 불만과 건의 사항을 잘 들어주는 편인 아쉴레앙 공작은, 그들의 불만마저 귀담아듣고 금방 해결책을 내려 주었다.
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그 어마어마한 양의 옷감을 꺼내, 심심한 병사들에게 던져 주고 바느질을 시킨 것이었다.
옷감을 옷감끼리 이어 한없이 큰 천을 만들도록 했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고 투덜대면서도 일단 시키는 대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바느질을 했다.
행정병들은 일단 시키는 대로 옷감을 꺼내 의료 막사로 옮기면서도 어이없어했다.
“이러려고 받아 온 거야?”
“우린 이렇게 여유롭고 할 짓 없다. 니들을 상대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보이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죠?”
“글쎄. 그건 공작님 전투 스타일이 아닌 것 같은데…….”
행정병들이 다시 몰려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벌이시는 거냐고 묻기 전, 루비아나가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루비아나는 특별히 목소리가 큰 병사들을 뽑아 높은 망루 위에 올리고, 밤낮으로 적들을 향해 소리치게 했다.
“파렴치한 오딜 후작 영애는 당장 공작 부군을 내놓아라!”
“아내 있는 유부남을 납치해 가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루비아나는 위험하니까 그러지 말라는 참모들과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반란군 세력이 진을 친 곳으로 말을 타고 가 소리쳤다.
“내 남편을 되찾으러 왔다!”
적들도 어이가 없었는지, 활을 쏘거나 기사를 내보내 루비아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적진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루비아나는 몇 번 더 내 남편을 내놓으라고 큰소리를 친 뒤, 유유히 돌아왔다. 적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기사를 내보냈으나 루비아나가 탄 말의 뒤꽁무니도 쫓지 못했다.
‘우리 공작님, 심심하셨나 보네.’
드디어 전투가 시작되는 건가? 바짝 긴장하며 바늘을 내려 놓았던 병사들은 다시 묵묵히 바느질을 이어 나갔다.
루비아나에게 그럭저럭 익숙해진 아군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지만.
루비아나를 알지 못하고, 오직 아쉴레앙 공작만 아는 적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이게 무슨 말이오!”
“우리의 대의, 우리의 목표는 이런 게 아니었잖소!”
“정말입니까? 밖에 나도는 소문처럼, 우리의 반란이 고작 당신 딸의 남자 욕심 때문에 시작된 거냔 말입니다!”
가뜩이나 떠도는 소문을 듣고 불안해하던 반란 세력은, 루비아나가 직접 나서서 남편을 돌려 달라 소리치자 격분하여 오딜 후작에게 몰려들었다.
오딜 후작은 루이먼드가 아프다며, 그를 성 깊숙이에 숨기고 보여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황과 맞물려 오해가 깊어졌다.
거기에 루비아나가 매일매일 산책을 나오듯 가까이로 와서 남편을 내놓으라고 소리치니, 귀족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우리의 왕을 보여 주시오.”
“소문처럼, 당신 딸의 침대에 파묻혀 지내고 있는 거 아니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가만있지만은 않겠습니다!”
오딜 후작을 따르던 귀족들이 이렇게 흔들리는데, 아래의 병사들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이러다 괜히 개죽음하는 거 아냐?”
“계속 졌잖아. 여기서 힘을 합쳐 이기면 된다더니, 이게 뭐야!”
“그래서 남의 남자는 건드리는 게 아닌데.”
“새 아덴 왕국은 무슨. 그 폭군의 사생아가 그렇게 잘생겼다던데, 결국 남자 하나를 둔 두 여자의 싸움이었네.”
“내가 왜 남의 사랑싸움에, 그것도 불륜 때문에 여기까지 끌려와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하는 건데!”
병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탈영자도 속속 늘어났다.
내 남편을 내놓으라는 루비아나의 외침. 그 파급력이 이 정도였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오딜 후작도 더는 가만있을 수 없었다.
르니에강 상류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보인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거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반역자 계집이 제법, 꾀를 부리는구나. 그런다고 나의 대의를, 새 아덴 왕국의 위엄을 깎아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오딜 후작은 모든 논란을 한 번에 가라앉힐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왕비 전하, 이것을 국왕 전하께서 드시는 음료에 넣으십시오.”
“이, 이것이 무엇인가요?”
“국왕 전하의 건강을 염려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부디 걱정은 마십시오. 전하의 몸에 해를 입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오딜 후작은 딸 리사나에게 작은 유리병을 건네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저 잠깐, 몸이 굳고 혀가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드는 약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나?”
오딜 후작이 서재 한쪽에 음산하게 서 있는,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습지요. 고작 1서클을 이뤄낸 마법사가 만든, 흔하디흔한 물약일 뿐입니다. 비록 마탑에서는 이 하찮은 업적이 사악하다 하여 절 쫓아냈지만 말입니다. 그 약을 마시면, 제가 지시하는 대로 말을 하게 되지요. 아, 저의 지시가 아니라 오딜 후작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말입니다. 그게 바로 전하의 진짜 속마음입지요, 그러고 말고요.”
그가 넙죽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정말,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거겠지요? 루이, 전하께서는…… 정말로 몸이 안 좋으시잖아요.”
“오오, 왕비님. 정말입니다. 이 미천한 소인의 충심 어린 말을 부디 진실하게 들어 주십시오. 이 하찮은 목숨을 걸고 맹세컨대, 전하의 생명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겁니다.”
마법사가 불안해하는 리사나를 안심시키며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이 약은 몇 번이고 사용해도 전혀 몸에 무리를 주지 않는답니다. 일단 이번에 한번 사용해 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깊은 밤, 두 분의 침대 위에서 사용해 보셔도…… 아이쿠, 이 하찮은 놈이 괜한 말을 하였군요. 높으신 분들께서 알아서 귀하게 사용하실 것을.”
마법사가 낄낄 웃으며, 구석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리사나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왕비 전하.”
오딜 후작이 자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네.”
리사나는 약병을 꼭 움켜쥐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날.
루비아나가 유유히 병사 둘을 데리고 적진 가까이로 와 남편을 내놓으라고 소리쳤을 때.
높은 망루 위에, 은발 흑안의 남자가 나타났다.
루이먼드였다. 루비아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루이먼드는 붉은색 망토를 두르고,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외투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금관을 썼다.
곁에는 리사나가 서 있었다.
새 아덴 왕국의 루이먼드 왕과 리사나 왕비는 사이좋은 부부처럼 꼭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면 루이먼드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서 있을 뿐이고, 리사나가 찰싹 붙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지만, 그렇게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루비아나는 그 모습을 보고도 묵묵히 망루 가까이 다가갔다.
망루 위에 늘어선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기자, 루비아나를 뒤따르던 병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정작 루비아나는 긴장하거나 방어 자세를 취하지 않고 태평했다. 그녀의 눈은 오직 망루 위에 선 루이먼드만을 바라보았다.
루이먼드의 얼굴은 창백하고 해쓱했다. 그럼에도 초라해 보이기는커녕 처연미가 만발하여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아름다움을 뽐냈다.
루비아나를 따라온 병사들은 물론, 오랜만에 루이먼드를 보는 반란 세력들마저 잠시나마 넋을 잃고 루이먼드를 바라보았다.
“저 정도로 잘생겼으면…….”
“역시, 소문이 맞는 걸지도…….”
궁수들마저 술렁였다.
리사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루이먼드의 팔을 끌어안았다.
루비아나는 그런 리사나를 힐끔, 보았다.
“……!”
리사나는 그 서늘한 눈빛에 놀라 흠칫, 어깨를 떨었다.
짙은 녹색 눈은 리사나를 힐난하고 있었다. 왜 내 남편을 뺏어 갔느냐는 원망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렇게 좋아해서 뺏어 간 주제에,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저 꼴을 만들어 놨냐는 비난의 눈빛이었다.
리사나는 그간 루이먼드가 헛구역질하며 절 거부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역시 네 옆에선 그가 행복하지 않네. 루비아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냐, 그런 게 아냐!’
리사나는 루이먼드의 팔을 부러뜨릴 듯 꽉 쥐며 고개를 휙 돌렸다.
“어서요, 어서요, 루이. 나의 전하. 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여자에게 진실을 말해 주세요. 당신이 누굴 사랑하는지, 저 여자가 뭘 착각하고 있는지를요!”
루이먼드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녀의 눈은 루이먼드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옆 망루의 마법사를 보고 있었다.
마법사는 눈이 마주치자 입을 쭉 찢어 웃고는, 갈퀴처럼 긴 손가락을 움직였다. 마치, 실에 묶인 인형을 움직이는 것처럼.
동시에 루이먼드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아덴의 왕. 나의 적법한 아내는 내 옆을 지키는 나의 리사나뿐.”
루이먼드는 제 입에서 흘러나오는 제 목소리를 듣고는 눈을 부릅떴다.
‘안 돼, 하지 마. 이러지 마!’
오늘은 눈을 뜨면서부터 이상한 날이었다. 아침 식사를 들고 들어오는 유모는 유독 불안해 보였고. 오늘따라 유달리 헛구역질이 심했다.
도저히 음식을 입에도 못 댈 것 같아 물리려는데, 갑자기 리사나가 건장한 기사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들은 강제로 루이먼드의 입을 벌리고 수프를 밀어 넣었다.
‘여기에 뭔가 넣었구나.’
루이먼드는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수프를 토해 내려고 했다. 하지만 기사들이 입을 틀어막아 그럴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숨 막혀 죽기 전 약효가 돌았다.
손발의 감각이 사라졌다. 루이먼드는 더는 반항할 수 없었다. 숨이 끊기기 전, 기사들이 코와 입을 막았던 손을 치워 주었다.
리사나가 사뿐히 다가와 팔짱을 끼자, 루이먼드의 몸이 그녀의 손길을 따라 움직였다.
루이먼드의 몸은 루이먼드의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였다. 마치 줄에 묶인 목각 인형이 된 것 같았다.
루이먼드는 그대로 시종들에게 몸을 맡겨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잘 꾸민 예쁜 인형이 되어 다시 리사나의 곁으로 돌아왔다.
리사나는 뭐가 그리 기쁜지, 옆에서 쉼 없이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수줍게 웃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루이먼드는 그런 리사나를 보며 참담함과 연민을 함께 느꼈다.
왕으로 모시겠다고 떠들어 대고 사랑한다며 수줍게 고백하면서도, 결국 자신들 입맛에 맞게 움직이는 예쁜 인형이 되길 바라는 이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힘없이 휘둘리는 자신의 처지가 참담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해서까지 자신을 가지려 하는 리사나가 불쌍했다.
자신 역시 지독한 짝사랑을 하고 있기에, 이제 와 새삼 리사나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 건지도.
자신을 향한 리사나의 사랑이 정말 본인의 것인지, 아니면 오딜 후작의 세뇌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루이먼드는 그리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아니, 피식 웃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해 못 하겠어. 내 마음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서, 어떻게 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
그 생각은 부메랑처럼 본인에게 돌아왔다.
넌? 너는 비아의 마음을 소중히 여겼어? 비아의 마음이 어떤 줄 알고?
서글픈 깨달음이었다.
루비아나와 함께 행복했던 기억은 한 줌뿐이었다. 그중 대부분은 루비아나의 마음을 얻겠다며 무리하게 나댔던 기억이었다.
처음 가져 보는 감정에 취해 루비아나에게 질척하게 매달렸다. 루비아나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겠다며 무리하게 일을 벌이다가 번번이 실패했다.
그때마다 루비아나는 함께 있어 주었다. 그뿐이랴? 망친 일을 대신 수습해 주기까지 했다. 매번? 매번.
‘나야말로 내 감정에 취해 멋대로 굴기만 했잖아.’
리사나와 다를 바가 무언가? 힘과 능력이 있어 상대를 납치했고 안 했고의 차이일 뿐.
“…….”
깨달음이 서글픈 이유는 망아지처럼 날뛰던 자신과 달리, 루비아나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고 강요하지 않았다는 게 실감 나서였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다 좋아 보일 정도로 날 사랑하진 않았을 테니까. 결국 내게, 그만큼의 감정도 관심도 없었다는 거겠지.’
통나무가 된 루이먼드는 혼자 납득하고 혼자 슬픔에 잠겨, 높은 망루에 다다랐다.
슬픔이 워낙 깊어, 저편에서 합창처럼 울려 퍼지는 ‘내 남편 내놔!’라는 외침을 듣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눈앞에 루비아나가 나타났다.
그녀는 짙은 밤색 말을 타고, 산책이라도 나온 듯 편안하게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뒤따르는 수도사 복장의 병사들 손에 무기가 들려 있지 않았다면 이곳이 반란의 현장이 아니라 수도 외곽의 어느 한적한 들판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비아?’
루이먼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래도 루비아나가 사라지지 않자, 루이먼드는 그때부터 눈 깜빡이는 것마저 아쉬워하며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살아서, 산 채로 자신에게 걸어오는 루비아나가 그 자체로 기적이었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에 온 거지? 난 당신 말고, 다른 두 공작 손에 죽어야 하는데. 그래야 다음번에는…… 이렇게 말고, 좀 더 현명하고 지혜롭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 텐데.’
자신의 목을 베러 온 이가 루비아나라는, 달콤한 기적.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자신을 구하러 온 걸 거라고, 실수로라도 착각하지 않았다.
‘난 이미 반란군의 왕이 되었으니까.’
황제의 치세에 큰 오점이 되어 버린 자신을, 루비아나가 구하러 온 것일 리 없다. 루이먼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루비아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루비아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었다. 끝내 그녀의 이름 한 번 부를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자신의 입에서 괴상망측한 말이 줄줄 흘러나오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당장 나에 대한 명예롭지 못한 짓거리를 멈추고, 새롭게 일어서려는 아덴의 앞길을 막지 마라. 그대의 선조가 나의 선조에게 했던 충성 맹세를 기억해 내게 복종하라. 그것이 그대의 불충과 불명예를 씻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일 것이다.”
이어서 루이먼드의 입술과 혀는 루비아나는 물론이거니와 황제인 칼레나까지 모독하는 말을 줄줄이 내뱉었다.
루비아나가 격분해 저 주둥이를 꿰매 버리겠다고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듣고 있던 반란 세력의 사람들마저 이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이런 게 아닌데…….’
루이먼드는 안간힘을 쓰며 입을 닫으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차라리 혀를 깨물어 버리려고도 했으나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잘 들었겠지? 괜한 모함은 멈추고, 더는 나의 남편, 우리 전하를 모욕하지 말아요.”
리사나가 루이먼드의 품에 폭 안기며 외쳤다.
그즈음, 루이먼드는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다.
‘그래, 차라리 잘된 건지도.’
분노한 루비아나가 이 자리에서 활을 쏴 제 심장을 꿰뚫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깜빡이자, 안간힘을 쓰던 중 고였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루이먼드는 그 눈물을 닦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리사나의 손이 제 뺨에 닿는 것도 싫어 눈을 질끈 감았다.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니. 참담하고 슬플 따름이었다.
루이먼드는 오래지 않아 다시 눈을 떴다.
자신을 증오스러운 적 보듯 보는 루비아나만큼은 보고 싶지 않은 마음 반. 그런 루비아나라도 한 번 더 눈에 담고 싶은 마음 반.
그런 마음으로 루비아나를 바라봤건만. 루비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확실했다.
“이제는 알아볼 수 있습니다.”
루비아나가 덤덤한 표정으로, 계속 루이먼드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을, 루이먼드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이 순간을, 자신이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새삼 실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이 어떨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또 어떤 눈빛을 하는지.”
“…….”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한 모든 말이, 당신이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
“그러니까 절대 죽지 말아요. 내가 당신을 구하러 갈 때까지.”
목 위까지 감은 크라바트 때문에 목의 상처가 보일 리 없었다. 설령 크라바트를 매지 않았다고 해도, 이 정도 거리에서 상처가 보일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자신의 목을, 그 목에 난 상처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목 부근이 화끈거렸다. 두 공작에게 목이 잘렸을 때 느꼈던 섬뜩한 서늘함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루이, 내가 눈물을 닦아 줄 수 없을 땐 울지 말아요.”
루비아나가 손을 들어 올렸다.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그럼에도 루비아나의 손이 닿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루이먼드는 그 황홀함에 젖어 눈을 내리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