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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뭣들 하는 거죠? 저 여자를 당장 쏴요. 우리 전하를 모욕하는 저 여자를 살려 보낼 생각인가요?”
리사나의 외침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쏴, 쏴라! 아쉴레앙 공작을, 아니, 반란자 계집을 죽여!”
옆 망루에 서 있던 어느 귀족이 호응해 외쳤다.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이 움직였다. 루비아나는 검을 뽑아 들고 크게 휘두르며 화살을 족족 동강 냈다.
“공작님!”
“일단, 오늘은 돌아가시지요. 이 이상은 위험합니다.”
양옆에 선 병사들이 큰 방패로 루비아나를 가렸다. 루비아나는 몸을 돌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루이먼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병사들의 엄호를 받으며 사정거리 밖으로 나가자마자 고개를 돌렸으나, 루이먼드는 망루에서 보이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몰아 진으로 돌아왔다.
혹여나 루비아나가 잘못될까 전전긍긍하며 기다리고 있던 참모들과 의사들이 호들갑을 떨며 루비아나를 맞이했다.
루비아나는 발판을 밟고 천천히 말에서 내렸고, 버릇처럼 의사에게 팔을 내밀었다.
“으헉!”
의사는 루비아나의 맥을 확인하려다 말고 괴상한 소리를 냈다.
“고, 공작님! 이게, 이게 대체!”
“뭐 문제 있나?”
루비아나는 징그럽게 달라붙는 참모들을 밀어내다 말고 의사를 보았다. 의사는 말하는 대신 루비아나의 손을 들어 보였다.
손바닥을 가로지르는 긴 상처는 오래된 것이었다. 그 오래된 상처 위로 새 상처가 나 있었다.
손톱 모양으로 점점이 패이고 뜯긴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아.”
루비아나는 그제야 쓰라림을 느끼고 가볍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당장 치료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그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피의 맹세 위에 덧씌워진 그 감정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루이먼드의 눈빛을, 표정을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처럼.
“아, 안 됩니다! 공작님!”
루비아나는 의사의 비명을 뒤로 하고,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짧은 손톱이 다시 상처를 파고들었다.
아팠다.
피가 뚝, 뚝, 떨어졌다.
***
르니에강 상류의 물줄기가 틀어졌다.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 동안 순리대로 흐르던 물줄기를 인위적으로 틀어 낸 장본인들은, 본인들의 업적을 자랑스러워할 틈도 없이 픽픽 쓰러졌다.
수백 명의 심심한 병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꿰맨 커다란 천은 계곡에 걸려, 뒤틀린 물줄기를 그대로 받아 냈다.
질긴 천이 빵빵해지다 못해 터질락 말락 하기까지는 이틀이면 충분했다.
이른 새벽. 건너편 계곡에 선 루비아나가 활시위를 당겼다.
휘익-!
한 대의 화살이 날아가 천을 찢었다.
거대한 댐이 무너지는 건, 그 정도로 충분했다.
푸른 하늘 아래, 천둥소리 같은 천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거대한 물줄기가 모든 걸 쓸어버리겠다는 듯 쏟아져, 반란 세력의 진을 휩쓸었다.
산 아래는 물바다가 되었고, 루비아나가 보낸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미리 높은 곳으로 피한 백성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새로 세운 제국에, 황제에게 감히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이른 새벽, 자다 말고 난데없는 물벼락을 맞은 적들이 허우적대며 쓸려 나갈 때, 갑옷 안에 계곡에 물을 가뒀던 천으로 옷을 해 입고 장화를 신은 제국군은 무기를 들었다.
선두에 선 사령관, 루비아나가 그들에게 말했다.
“도망치는 병사는 뒤쫓지 않는다. 다만, 귀족은 반드시 죽여라. 오늘 이후로 제국에 반역자는 없다.”
루이딤으로 만든 옷과 우비를 걸친 병사들이 결연한 얼굴로 루비아나를 올려다봤다.
루비아나는 어깨에 걸친 낡은 활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 자매님과 형제님들께는 그리 와닿지 않겠지요?”
전투를 앞둔 사령관답지 않은 태평한 목소리였다.
루텔 수도원의 술창고에서 쿨쿨 자던 게으른 수도사 루비아나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웃음을 흘렸다.
“자매님들, 형제님들. 난 아직도 루텔 수도원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건 루텔 수도원 수도사들의 자부심이자 자랑이었으며, 다른 수도원이 루텔 수도원이 속세와 결탁했다 공격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왜 내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것인지 궁금하셨을 겁니다. 이 기회를 빌려 말하자면. 나는 폐하를 쫓아 수도원의 문을 내 발로 걸어 나오기 전, 신께 피의 맹세를 바쳤습니다.”
굳이 비밀로 할 건 아니었으나 굳이 떠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귀찮으니까.
“폐하께서 폭군을 물리치고 도탄에 빠진 세상을 바로 일으킬 수 있도록 함께해 주신다면, 나는 내 첫 아이를 스무 해 동안 신전에 바치고 신께 봉사하도록 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말을 꺼내는 건. 귀찮음을 무릅쓸 만큼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레나, 네가 내 남편을 전쟁까지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미인으로 만들어 남들의 안줏거리로 만들겠다면, 난 내 남편을 신께서 주신 성부(聖夫)로 만들겠어.’
언니 말을 잘 듣는 동생은 있어도, 동생 말을 잘 듣는 언니는 없는 법.
피의 맹세.
그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 이곳에 모인 병사들이었다.
잠시 풀어졌던 그들의 얼굴이 금세 진지해졌다. 루비아나는 그들에게 쐐기를 박듯 말했다.
“저들이 자신들의 왕이랍시고 억지로 납치해 가고, 중혼을 강요한 남자는 신께서 피의 맹세를 지키라고 내게 보내 주신 내 남편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신께서 주신 내 남편을 납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황제에게 반역을 저지르고, 신께 바친 피의 맹세를 비웃었으며, 신성한 결혼 서약을 모독했다.
“그러니 오늘 전투의 목적은, 거창한 반역자 처단 따위가 아닙니다. 세간의 소문대로, 단지 내 남편을 되찾기 위한 것입니다.”
루비아나는 떠도는 소문이 진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고개를 숙여 부탁했다.
“자매님, 그리고 형제님. 신께서 내게 주신 내 남편을 되찾을 수 있도록 날 도와주십시오. 덤으로 감히 내 남편을 훔쳐 간 반란 세력도 때려 부수고 말입니다.”
고개를 든 루비아나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신께선 반드시 우리의 편에 서 계실 겁니다.”
신을 믿지 않는 신실한 공작이 거침없이 신의 가호를 입에 담았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믿을 만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루비아나는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어 펴 보였다.
이것을 얻기 위해 아쉴레앙 공작저에서 루텔 수도원의 본원으로 얼마나 많은 수레가 오갔으며, 그 수레에는 얼마나 많은 금덩이가 실려 있었던가?
“루텔 수도원 300 수도원장의 결의로, 신전에서는 저들에게서 신의 가호가 떠났음을 선포했습니다.”
파문 선고였다.
병사들, 특히나 수도사들의 눈빛이 좀 더 싸늘해졌다.
반란 초기, 신전은 혹시나 반란이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종교는 속세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로 몸을 사렸다.
루텔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루비아나를 따라 참전하자, 그들이 신전 전체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루텔 수도원과 달리 정결하며 오직 신께 신실한 에이멜 수도원 측은 루비아나를 따르는 루텔 수도사들을 비난하며, 그들 모두를 파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했다.
제국이 아무리 강하다 하나, 생긴 지 10년도 안 된 신생 국가였다.
몇백 년 동안 여러 왕국으로 갈라져 살아왔던 백성과 귀족들이 들고 일어서면, 강한 황제와 세 공작이 지키고 선 제국도 갈가리 찢어지고 말리라.
신전의 경계는 타당한 것이었다. 문제는, 제국이 사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단숨에 제압하여 제국의 굳건함을 내보였을 때의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제국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신전은 초조해졌다.
루비아나는 황제와 두 공작이 헤아리지 못할 신전의 생리를 잘 알았다.
그래서 신전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며 문을 닫아걸었을 때는 굳이 건드리지 않고 가만 놔뒀다.
뒤늦게 신전이 눈치를 보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자, 때맞춰 루텔 수도원장들을 움직였다.
황제와 관계가 틀어질까 전전긍긍하던 신전은 기다렸다는 듯 미끼를 물었다.
그 결과가 오늘 새벽에 막 도착한 이 파문 서신이었다.
수도원에 적을 두고 있으나 신실하지 않으며, 신실하지 않으나 신에게 피의 맹세를 바친 아쉴레앙 공작은 그걸 빌미로 이 전투에 신성력을 가미한 정당성을 부여했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의 싸움.
그 소문은 적에겐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말이지만,
아군에게는 오히려 사기를 끌어올리는 말이 되었다.
우와아아아-!
병사들이 신의 가호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적진으로 쇄도했다.
그 선두에 아쉴레앙 공작, 북부에서 피비린내 나는 찬바람을 몰고 온 괴물 공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