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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하라! 항복하면 살려 주겠다!”
“도망쳐라. 도망치면 쫓지 않겠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외침에,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던 병사들이 무기를 집어 던졌다.
진흙탕을 뒹굴며, 오히려 제국군에게 도와 달라 손을 내미는 병사들이 한가득이었다.
산 아래 전투는 루이딤을 입고, 장화를 신은 제국군이 물난리에 정신이 나간 반란군을 구해 주는 모습으로 진행되었다.
병사들이 수해를 입은 반란군 병사들을 돕는 동안, 기사들은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진짜 반란 세력, 귀족들을 죽이고 다녔다.
신의 가호를 받은 듯 너무 손쉬운 전투였다.
루비아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칼레나는 이곳을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라고 했다. 반란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그들의 자식을, 그들이 가진 말과 돼지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여 버리라고.
하지만 루비아나는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도망칠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스스로 결정한 귀족들 말고.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왔을 대부분의 병사들에게.
불태우지 않고 물로 쓸어버리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모두가 살아남고 도망치지는 못하겠으나, 그 희생에 대한 죄는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쟁은 언제나 희생을 부르고. 그 희생의 값을 짊어지는 것은 사령관의 몫이니까.
물에 휩쓸려 나간 토지 역시 죽음의 땅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몇 년간은 농사짓기 힘들겠지만, 결국 다시 지력을 회복할 것이다.
물론 반란 세력이 마지막까지 점거하고 있던 저 산만큼은, 칼레나가 말한 대로 만들 것이다.
감히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자들의 말로가 어땠는지, 그 증거는 남아야 할 테니까.
이렇듯 황제의 잔혹한 명령을 적당히 걸러 듣는 것이 충신의 미덕인 법.
폭군의 시대를 거쳐 온 루비아나는 그 미덕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한 신하라면 황제의 분노가 두려워 용기를 내지 못할 수도 있겠으나, 루비아나는 평범한 신하가 아니었다.
‘나는 괜찮아.’
황제의 하나뿐인 언니니까.
역사상, 권력을 쥔 지배자가 자신의 자매와 형제를 숙청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누구보다 몸을 사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누군가는 충고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런 말을 들어도 생각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았다.
루비아나는 정예병을 이끌고 산 위로 올라갔다.
산 위의 전투는 산 아래에서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병사들을 버리고 급히 산 위로 도망친 귀족들과 기사들은 수치와 분노를 아쉴레앙 공작에 대한 분노로 바꾸어 달려들었다.
루비아나는 그런 그들이 고마웠다. 덕분에 이쪽도 가차 없이 죽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나 고맙지는 않았다.
적들의 저항이 거세질수록, 성안으로 진입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여기에서 루비아나와 아군의 지향점이 달라졌다.
부관들은 감히 신과 황제에게 대항한 반란 세력을 확실히 처단하며 전진하자는 입장이었고,
루비아나는 그들을 처단하는 것보다 그들이 자신에게서 빼앗아 간 것을 되찾는 게 우선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루비아나는 조급해졌다.
처음 얼마간은 본인도 본인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적을 해치우는 손길만 거칠어질 뿐이었으나.
여기서 우르르, 저기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적들과 다섯 번 이상의 소모전을 벌일 즈음.
머릿속에서 끈이 뚝, 끊어졌다. 그 끈이 겨우 붙들고 있던 이성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이렇게 아덴 왕국을 사랑했으면, 진작에 나서서 폭군을 말리고 빌어먹을 아덴 왕국을 지킬 것이지. 왜 이제 와서!”
루비아나는 여섯 번째로 몰려나온 적들 중 제일 신분이 높아 보이는 자를 붙잡았다.
아군이 나머지를 상대하는 동안, 루비아나는 그 한 사람만을 붙잡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차라리 죽여 달라며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빌었지만. 루비아나는 그가 흐느끼며 싹싹 손을 비는 순간마저 조급함을 느꼈다.
루비아나는 그 짓을 두어 번 반복하고서야, 루이먼드가 이 성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알게 되었다.
“안즈 부관, 나 대신 경이 지휘를 맡는다. 이 성을 점거하는 게 경의 최우선 목표다.”
내 목표 말고 네 목표.
루비아나는 뒤따르던 부관에게 자신의 검을 던지듯 맡기며 대열을 이탈했다.
아군의 아우성이 등 뒤에서 울려 퍼졌지만 무엇 하나도, 루비아나의 머리카락 한 올 붙잡지 못했다.
전장에서의 이탈은 중죄.
사안에 따라 사령관은 참수형으로까지 다스릴 수 있다.
하지만 군령을 집행할 의무가 있는 사령관이 대열을 이탈한다면? 전투 결과에 따라 처우가 달라질 것이다.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황제에게 처벌을 받을 것이요,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멋대로 전투 상황에서 이탈한 것이 신묘한 전법으로 포장되어 상을 받게 될 것이다.
제 상관을 죽일지 살릴지는, 지휘관의 검을 넘겨받은 부관의 몫이 되었다.
“공작님!”
안즈가 절 배신하고 떠나는 연인을 부르듯 처절하게 불렀지만, 루비아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렇게 혼자 떨어져 나오는 건 옳지 않다.
아군과 함께 움직이며,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적들을 차근차근 물리치는 게 옳다.
그걸 모르지 않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루비아나는 저를 향해 달려드는 적들을, 뒤따라오는 아군에게 떠넘기고 앞으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비아!”
환청처럼, 그날 이후로 한순간도 그녀를 떠나지 않고 내내 맴도는 외침.
그 외침에 답하고 싶었다.
“루이.”
높은 성루 위에서, 딴 여자의 팔에 붙들려 있으면서, 하염없이 울던 사람.
내가 잃어버린 내 남편.
반드시 되찾아야 하는 내 사람.
루비아나는 심장이 가리키는 대로 달리고 또 달렸다.
참혹하게 죽어 버린 부모님의 시체를 본 날 이후로, 이렇게 정신없이 달렸던 적이 있었던가?
주변을 살피지 않고, 아무것도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하나만을 위해 빠져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답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