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비아나는 홀로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홀에 도착했다.
문 앞을 막아선 기사들은 쓸데없이 충성스러웠다. 루비아나를 보자마자 고함을 지르며, 원수를 만난 듯 달려들었다.
루비아나는 자신이 제대로 도착했음을 직감하며, 간단히 기사들을 처리하고 문을 열었다.
온몸에 뒤집어쓴 핏물을 어떻게 할 틈도 없었다. 쓸데없이 설레거나 떨리지도 않았다.
눈물 어린 부부 상봉은 아직 이르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끼익.
녹슨 경첩이 비틀거리며 비명을 지르자, 열린 문 너머로 오딜 후작이 보였다.
그는 단상 중간에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그의 뒤로, 단상 위 의자에 앉아 있는 루이먼드와 그의 옆자리를 꿰차고 있는 리사나가 보였다.
루이먼드가 오늘도 그 공녀는 도망 어쩌고를 재미있게 읽을 동안, 오딜 후작은 파멸하는 악당의 인테리어 시리즈를 감명 깊게 읽었던 걸까?
루이먼드가 앉아 있는 의자의 뒤쪽, 홀의 한 벽면 전체가 거대한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그 창 너머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옛 아덴 왕국의 기록 그림에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경이로운 풍경을 뒤로하고 다정히 붙어 있는 젊고 아름다운 왕과 왕비.
그 앞을 지키는 충성스러운 신하.
그리고 그 평화를 망치러 온 붉은 머리의 반역자.
하지만 은발 흑안의 미인 왕은 그 그림의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비아!”
루이먼드가 루비아나를 알아보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루비아나에게 달려올 수 없었다. 루비아나 역시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전하, 안 돼요!”
리사나가 루이먼드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루이먼드는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욱.”
심하게 헛구역질하며, 제 팔을 붙잡고 있는 리사나를 밀쳤다.
“이렇게 다시 마주하는군.”
오딜 후작이 옆으로 한 발자국 움직여 루이먼드를 가렸다. 루비아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당장 오딜 후작을 상대할 수도, 그를 해치우고 루이먼드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루비아나는 단상 아래에 늘어선 오딜 후작의 부하들을 먼저 상대해야 했다. 군데군데 숨어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몸을 드러내고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젠장.”
루비아나는 급히 큰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화살이 기둥을 부술 듯 쏟아졌다.
기둥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날카로운 돌 조각은 루비아나의 뺨과 팔을 스쳤다.
루비아나는 뺨 위로 흐르는 피를 성의 없이 손등으로 훔치고는 심호흡했다. 그렇게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이번 한 번만, 한 번만 더 버텨 주렴.’
제발.
루비아나는 화살 세례가 멈춘 틈을 노려 기둥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달려오는 기사 둘을 해치우고 기둥 뒤로 몸을 숨기자, 아까보다 더 매서운 화살 세례가 날아들었다.
루비아나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하나, 둘.
“끝이다!”
“죽어라!”
적들이 기둥을 빙 돌아 루비아나를 공격했다.
루비아나는 손에 든 화살을 빠르게 그들의 목에 박았다 뽑았다.
촤악!
뜨거운 피를 뒤집어쓰고, 다시 기둥 밖으로 몸을 내밀어 화살을 날렸다.
잔챙이들을 쓸어버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빈 살통을 벗어 던지고, 활만 손에 쥔 채 모습을 드러냈다.
홀 바닥은 온통 시체로 가득했다.
리사나는 물론이거니와 루이먼드마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건만, 오딜 후작은 제 부하들의 떼죽음을 보고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스럽게 웃어 루비아나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제법이군.”
오딜 후작이 검을 빼 들고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루비아나는 바닥에 쓰러진 기사의 손을 밟아, 쥐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평소 쓰던 것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검을 어깨에 비스듬히 걸치고, 다가오는 오딜 후작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약간의 의문.
‘루단테가 가만 안 있겠지.’
오딜 후작은 자기 거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날뛰던 루단테를 생각하면, 짜증이 밀려왔다. 오딜 후작과 싸운 걸 알면, 왜 자기 걸 건드렸냐고 가만 안 있을 테니까.
전자보다는 후자의 감정이 더 컸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오딜 후작에게 달려들 수 있었다.
챙!
두 개의 검이 맞붙었다. 곧바로 루비아나가 쥐고 있던 검에 금이 갔다.
루비아나는 검을 비스듬히 흘려 빼냈다. 다른 검을 챙기고 자시고 할 틈도 없이 두 검이 맞붙었다.
루비아나가 든 검이 바로 동강 났다.
“비아!”
루이먼드의 비명을 들으며, 루비아나는 바닥을 굴렀다. 방금 루비아나가 서 있던 자리에 오딜 후작의 검이 박혔다.
단단한 대리석이 무른 빵 반죽처럼 갈라졌다.
지켜보던 루이먼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오딜 후작은 검을 쑥 빼냈다.
‘검이 좋은 건지, 실력이 좋은 건지. ……아마 둘 다겠지.’
칫. 루비아나는 혀를 차며, 손에 잡히는 대로 다른 시체가 쥐고 있던 검을 빼냈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채 일어서지 못하고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묵직한 진동에 손목이 부러질 듯 아팠다. 루비아나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엇갈린 두 검 사이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주름진 눈가. 흘러간 세월을 인정하지 않는 노회한 눈빛.
루비아나는 그 속에서 완고한 오만을 발견했다. 그건 지나간 시대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새로운 시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아집이었다.
“그렇게, 아덴 왕국이, 그리우셨나? 반란을 일으킬 만큼?”
“우린, 아덴 왕국의 신하다. 반란자는 너희야.”
기기긱-.
귀청을 찢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렸다. 루비아나의 검에 다시 금이 갔다.
몇 번 부딪치자 검이 부서졌다. 루비아나는 몸을 일으키며, 바닥에 내려놓았던 활을 들어 오딜 후작의 발을 후려쳤다.
“큭.”
오딜 후작이 휘청였다. 루비아나는 그 틈을 노려 허리춤의 단검을 빼 들어 내리찍었다.
오딜 후작은 뒤로 물러서며 공격을 피했다. 루비아나의 자세가 살짝 무너졌다.
‘늦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상대는 오딜 후작. 이 틈을 놓치지 않으리라.
루비아나는 반격으로 팔 하나쯤은 내줄 생각으로 몸을 틀었다.
예상과 달리, 오딜 후작은 바로 반격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방어 자세를 잡았다.
전혀 오딜 후작답지 않은 방식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몸은 착실히 움직였다.
몸에 익은 동작으로, 오딜 후작의 공격을 피하고, 아래에서 품을 파고들듯 단검을 찔러 올리는데.
루비아나의 목을 노리고 검을 내려찍으려던 오딜 후작이 잠깐 멈칫했다.
그 순간.
루비아나는 이상한 느낌의 정체를 깨달았다.
“젠장.”
검 끝이 오딜 후작에게 닿기 직전, 방향을 틀었다. 빗겨나간 단검이 벽에 퍽, 박혔다.
루비아나는 빈손으로 오딜 후작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오딜 후작이 뒤늦게 검을 들어 올렸으나, 루비아나가 그를 집어 던지는 게 먼저였다.
오딜 후작이 단검처럼 벽에 부딪혔다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크윽.”
신음하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사의 위엄은 느껴지지 않았다.
“감히 날 상대로 개수작을 부리다니.”
루비아나는 가차 없이 오딜 후작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큭!”
“고작 이 정도로 신음할 거면서, 날 봐줘? 내 손에 죽고 싶었나?”
“아버지!”
리사나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오지 마십시오. 전 상관 말고, 전하를 지키십시오. 최후의 순간에도, 왕비 전하는 국왕 전하의 곁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 상황에서조차 오딜 후작은 차분하고 우아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이쪽으로 달려오려던 리사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루이먼드의 팔을 움켜쥐었다.
루이먼드는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인 사람처럼 온몸을 꿈틀댔다. 루비아나는 그런 루이먼드를 한 번 힐끔, 바라보고는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늙은이, 뭐 하는 짓이야?”
입에 고인 핏물을 뱉으며 이를 갈았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날 죽여라.”
“죽여라?”
“아덴 왕국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지 않은가?”
오딜 후작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숭고한 순교자라도 된 듯 말하는 태도였다.
“우리?”
그 우리에 리사나는 물론이거니와 루이먼드까지 포함되어 있을 거라는 것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역시 내게 죽을 생각이었군.”
루비아나는 전투 중 느꼈던 기분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확인받았다.
오딜 후작은 루단테가 나타나기 전까지, 아덴 왕국 최고의 기사로 명성을 떨치던 자였다.
그 이름이 다른 왕국에까지 널리 퍼져, 사람들은 아덴 왕국을 지켜주는 게 300년 전 잠든 드래곤과 오딜 후작이라고 말하곤 했다.
세월이 그의 얼굴에 주름을 만들고 손끝을 무디게 만들었다 하나, 그는 여전히 강한 기사였다.
독약을 먹은 상태였다 하나, 드래곤을 때려잡은 루단테를 몰아붙였지 않던가?
그런 그가 루비아나에게 여러 번 빈틈을 보였고, 오래 지나지 않아 이렇게 죽을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이 자리에서 오딜 후작을 짓누르고 있는 게 루단테였다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신나서 오딜 후작을 죽여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비아나는 그러지 않았다.
루비아나는 오딜 후작의 속셈을 눈치채고 이를 갈았다.
“반란이 성공하기는 글렀으니, 이대로 장렬히 죽어 아덴 왕국 최후의 충신으로 남겠다는 건가?”
어쩌면 그는 반란의 실패마저 염두에 두고 자신의 계획 안에 넣어 놓았을지 모른다.
반란이 성공하면 성공한 대로, 실패하면 또 실패한 대로 아덴 왕국의 충신으로 살고 죽겠노라는 갸륵한 이기심.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루비아나는 구역질이 치밀었다.
배 속의 아이 때문은 아니었다. 오딜 후작이, 그의 생각이 역겨워서. 그래서였다.
“당신의 추악한 자기만족에 내 남편을 끌어들이지 마.”
루비아나는 오딜 후작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과거가 그립다면 혼자 방구석에 처박혀서 지나간 세월을 그리는 마음에 뜨거운 눈물이라도 흘리며 폭군을 추모하면 될 일을.
남의 가정을 깨고 남의 나라를 뒤흔들어 일을 벌이고서는.
실패마저 자신의 계획 중 하나라는 듯, 혼자 죽음을 각오하고는 고고한 척하다니.
“왜 당신은, 왜 당신들은 그 빌어먹을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지?”
루비아나는 분노했다.
“그때가 그렇게 좋은 시절이었나? 되돌리고 싶을 만큼?”
억울한 사람들이 죽고 또 죽고, 힘없는 아이들이 밤마다 숨죽여 울며 강해지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던 그 시절이?
마음껏 울 수조차 없었던 아이들은 자라나, 원하던 대로 힘센 어른이 되었고. 그 끔찍한 유년 시절의 원흉인 폭군을 쳐부수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어쩌면, 자신들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또 생겨나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래서 더 결벽적으로, 도덕적으로 굴었고, 혹은 그런 것 따위 개의치 않는다는 듯 가볍게 굴었다.
어쩌면 폭군을 잊지 못하고, 폭군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아마 사는 평생, 폭군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기고 잃어버린 유년 시절의 참혹함을 잊지 못하겠지.
그 시절의 절망은 늘, 그림자처럼 발끝에 달라붙겠지.
가벼운 대화와 농담은 매번 허공의 먼지처럼 의미 없이 흩어질 테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공허함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으리라.
‘혹시나 우리도 폭군처럼, 폭군에게 빌붙어 있던 당신들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신을 더욱 옥죄고 제국에 자신을 매어 놓을지도 몰라.’
제국을 세운 건, 당신들처럼은 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또 다른 루비아나와 칼레나를, 카드릭과 루단테를 만들지 않겠다는 오기인 것을.
‘우리는 당신들과 달라.’
‘당신들처럼은 되지 않을 거야.’
우는 것조차 마음껏 할 수 없었던 아이들이 자라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쌓아 올린 높은 성벽을 뛰어넘고, 백성을 진정 지킬 수 있는 길을 찾았고, 지켜야 하는 동생을 오히려 앞세워 폭군과 맞섰고.
똑똑한 동생에게 가문만이 아니라 제국을 바쳤다.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다시는 우리 같은 아이들을 만들지 않을 거야. 더는 숨기만 하고, 당하기만 하고, 도망치기만 하는 삶 따윈 살지 않아.’
그 피 맺힌 다짐이야말로 신께 바친 피의 맹세 이상의 것.
그리고 그 염원을 받아 길을 만들어 낸 건 찬란한 금발에 짙은 녹색 눈을 가진 젊고 강한 황제였다.
찬란한 그녀의 시대를 앞에 두고, 이제 와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자고?
사실 그때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웃기지 마. 이젠, 우리의 시대야. 당신들의 시대는 끝났어. 영원히.”
죽어서도 살아서도,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 주리라.
“죽고 싶나? 죽여 주지.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렇게는 아니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죽여 주진 않아.”
루비아나는 가차 없이 오딜 후작을 발로 찼다.
뼈가 부러지는 감촉이 발끝에 느껴졌다. 오딜 후작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죽이진 않았으니 루단테도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
루비아나는 그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고 돌아섰다.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단상 위에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말 눈에 들어온 건 한 사람뿐이었다. 창백한 얼굴의 루이먼드.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오딜 후작 때문에 격해졌던 마음은 놀랍도록 빠르게 진정했다.
루이먼드가 먼저 입술을 달싹이며 손을 뻗었다.
루비아나는 단상을 오르다 말고,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꾹꾹 눌러 놓았던 감정들이 더는 참을 수 없다며 솟구쳐 나왔다.
기쁨.
미안함.
안도.
어째서인지 모를 슬픔. 억울함.
결국에는 미안함.
짧은 순간에 수많은 감정이 치솟았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이내 그것들은 하나로 합쳐져 큰 물줄기가 되었다. 루비아나는 속수무책으로 휘말려 들었다.
울고 싶다.
참 오랜만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날, 그렇게 보는 거지?’
함께 살며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졌다. 이젠 그의 눈빛만 봐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높은 망루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루이먼드를 볼 때만 해도,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내가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나?’
의구심이 들었다.
‘아까 구르다 머리를 다쳤나?’
그런 게 아니고서야 어찌 감히 바랄 수 있을까? 루이먼드가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왜 날 원망하지 않는 거야?’
어린아이가 부모의 손을 놓쳐 헤어졌다 다시 만나도 원망 어린 울음을 터뜨리는데. 그 작은 손으로 주먹을 쥐어 토닥토닥, 어미와 아비를 때리며 왜 날 놓친 거냐고 원망하는데.
눈앞에서 절 버리고 동생을 택했던 가짜 아내와 재회한 남자의 눈엔 그리움뿐이었다. 반가움뿐이었다.
감히 바란 적 없는 대접이었다.
원망도 비난도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화를 내도 좋으니 떠나겠다는 말만 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정 안 되면 아이를 빌미로 삼아, 곁에 억지로 앉혀 놓을 생각이었다.
내가 아이를 가졌는데, 내가 싫어서 떠나겠다고? 내가 미워도 아이는 미워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떼라도 쓸 생각이었는데. 루이먼드의 눈은 루비아나의 그런 생각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비아, 비아, 괜찮아요? 괜찮은 거예요?”
루이먼드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다급히 물었다.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내내 음식은 입에도 못 댄 사람처럼 휘청. 술 취한 사람처럼 또 휘청. 나쁜 약이라도 먹고 몸이 마비된 사람처럼 기우뚱.
그런데도 두 눈만은 다정하고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루비아나는 그 눈을 마주하며, 아득해졌던 현실감을 되찾았다.
차근차근 심장을 감싸는 건 안도감.
그 감정은 구원을 닮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루비아나는 뒤집어쓴 피를 깨끗이 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바랐던, 눈물겨운 부부 상봉의 순간이었다.
루비아나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너무 따뜻하고 말랑말랑해서 정말 눈물이 날 것 같아 문제였지만.
‘드디어.’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손길을 쫓아 단상에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야말로 피를 뒤집어쓴 괴물 공작의 모습 그 자체였지만. 루비아나도, 루이먼드도, 둘 중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이제야 다시 닿을 수 있게 됐는데.
“루……”
“안 돼!”
신경 쓰지 않았던 방해물이 앞을 가로막았다.
리사나. 반란이 성공했다면 루이먼드 복권왕, 혹은 루이먼드 미인왕으로 불렸을 새 아덴 왕의 왕비라고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리사나가 허리에 찬 레이피어를 뽑아 들고 루비아나를 겨눴다.
“가, 가까이 다가오지 말아요. 아덴 왕국은, 루이 전하는 내가, 내가 지켜요. 내가 그의 적법한, 진짜 아내예요.”
눈물이 그렁한 눈은 피를 뒤집어쓴 적을 앞에 두고도 온건히 그 적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힐끔힐끔, 어깨 너머를 넘겨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 오딜 후작을 보는 것이었다.
한눈파는 리사나는 루비아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루비아나는 손을 들어 리사나의 레이피어의 검신을 움켜잡았다. 주륵, 피가 흘러내려 리사나의 손등에 닿았다.
“물러나.”
이잇. 리사나가 이를 악물고 검을 빼내려 손에 힘을 줄 때였다.
“……!”
루비아나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기척이 느껴졌다.
‘아직 움직일 수 있는 건가?’
루비아나는 당연히 오딜 후작이 자신을 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녀의 오산이었다.
“루이먼드 국왕 전하, 만세! 아덴이여, 영원하라!”
오딜 후작은, 그의 검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
루비아나의 눈이, 돌아갔다.
“안 돼!”
이미 한 번, 눈앞에서 그를 놓쳤던 적이 있었다.
두 번째.
또 그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절대로.
루비아나는 손을 뻗어 루이먼드를 밀쳤다. 루이먼드는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런 그를 염려하며 일어서라 손을 내밀어 줄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루비아나는 검을 찌르는 오딜 후작의 손목을 쳐 냈고, 오딜 후작은 몸으로 루비아나를 밀었다.
“날 끝까지 방해하는 건가!”
“내 남편, 끌어들이지 말랬지!”
두 사람은 한 덩이가 되어 창문 쪽으로 날아갔다.
와장창. 창문이 깨졌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루비아나와 오딜 후작은 깎아지른 듯한 계곡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고개를 든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보이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눈을 깜박이지조차 못했다.
쿵.
보지 않아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밖에 없는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아악!”
리사나의 비명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아, 안 돼. 말도, 말도 안 돼…… 이, 이렇게, 이렇게…… 이럴 순, 이럴 수 없어!”
루이먼드는 절규하며 기어가듯 창가로 다가갔다.
막상 그 앞에 도착해서는, 감히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그럴 리…… 비아가 나보다 먼저, 먼저 죽을 리…….”
지난 일곱 번의 삶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 아쉴레앙 공작이, 루비아나가 자신보다 먼저 죽다니.
루이먼드는 목을 움켜쥐었다. 목을 감싼 크라바트를 찢어발기듯 목을 쥐어뜯으며 짐승의 울음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긴 지금 당장 그의 목을 베어 줄 두 공작이 없었다.
루이먼드는 비틀거리다 아직도 유리 조각이 남아 있는 창틀을 붙잡았다.
끼익.
아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루이먼드의 눈이 절로 아래로 향했다. 뒤늦게 자신이 지옥을 내려다보려 했음을 깨닫고 눈을 질끈 감으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루이먼드는 오히려 눈을 부릅떴다.
“아, 신이여, 감사합니다.”
믿어 본 적 없는 신을 향한 믿음이 샘솟았다.
“비아.”
루이먼드는 그의 인생에서 단 하나의 신,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윽…….”
대답 같은 신음이 들렸다. 신음 같은 대답일지도 몰랐다.
무엇이든 좋았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루비아나가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마지막까지 들고 있던 활이 삐죽 튀어나온 돌에 걸려 있었다. 아버지의 낡은 활이 그녀를 살린 것이었다.
루비아나는 다른 손은 배를 움켜잡고,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있었다. 온몸이 산산이 조각나고 찢어져도 배만은 보호하겠다는 듯이, 필사적이었다.
하악, 하악. 숨이 거칠어졌다.
귓가에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렸다. 두근. 두근. 두근. 터질 듯 뛰는 이 심장이 누구의 것인지, 루비아나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제발, 배 속 아이의 것이길.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비아, 내 손을 잡아요. 어서!”
루이먼드는 유리 조각이 가득 깔린 바닥에 엎드려,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유리 조각이 살갗을 찢고 몸에 박혀도 아픈 줄 몰랐다.
“크, 윽.”
루비아나 역시 손을 뻗었으나, 손이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았다.
“윽.”
설상가상, 루비아나는 배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뻗었던 손으로 다시 배를 움켜쥐었다.
다리 사이에서 뜨거운 뭔가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라면, 피일 게 분명했다.
‘안돼. 가면 안 돼, 아가야.’
루비아나는 핏발 서린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반으로 동강 나고 있는 아버지의 활.
“비아, 어서! 제발!”
그리고 필사적으로 손을 뻗고 있는 루이먼드.
‘아버지, 어머니, 도와주세요.’
루비아나는 부모님을 떠올렸다.
부모님이 처참한 시체가 되어 돌아온 날 이후, 루비아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부모님을 찾지 않았다.
이미 죽어 땅속에 묻힌 분들을 찾아 무엇 하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찾아온 칼레나를 따라나설 때에도, 차라리 신께 피의 맹세를 올릴지언정 부모님을 찾지는 않았다.
부모님을 향한 원망 때문이었다.
폭군에게 죽임을 당한 불쌍한 분들이다. 그 죽음에 분노하고, 그 짧은 생을 추모해야 마땅하건만.
때때로, 까닭 모를 분노가 치솟았다.
원망이 아니라고, 원망하면 안 된다고, 외면하고 또 외면했지만. 언제까지나 외면할 수는 없었다.
평범한 하루의 시작. 피로 얼룩진 전투의 끝. 추운 겨울의 어느 날. 비가 내리는 정오. 해 가지는 저녁 시간. 서재에서 일하다가, 식당에서 홀로 식사를 하다가.
날이 좋아서, 날이 나빠서. 기쁜 일이 있어서.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좋은 활을 발견해서, 감기 기운에 어깨가 으슬으슬 떨려서.
때때로, 아니, 언제나.
‘나는 당신들이 원망스러워.’
왜 당신들은, 죽을 줄 알았으면서 거길 간 거지?
폭군이 자신들을 해칠 거라는 걸 알면서, 왜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순순히 수도로 올라간 거냐고.
우릴 위해서라도, 가지 말지.
차라리 도망가지, 다른 나라로. 아니면 남부에서 반란이라도 일으키지.
당신 딸들은 너무 어렸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기엔 너무 어렸다고.
고작 열여섯. 고작 열넷. 두 딸을 두고, 어떻게 죽으러 갈 수 있었어?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가 눈에 밟히지 않았어?
‘……왜 그렇게 죽어 버린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 말 좀 해봐요. 꿈에서라도, 한 번만이라도 나타나서 말해 보란 말이에요.’
어쩔 수 없었단 걸 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것도 안다.
살아서 두 딸에게 돌아오겠다고, 자존심을 버리고 그레이움 백작에게 몰래 뇌물을 바쳤다는 것도 나중에 외삼촌에게 들어서 알게 됐다.
그때 반란을 일으켜 봤자 가망이 없었고, 이미 폭군이 기사들을 보내 길을 막고 있어 다른 나라로 도망갈 수도 없었다는 것 또한, 이제는 안다.
아는데. 알고는 있는데.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업었던 건지. 머리로는 아는데.
그래도 원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잖아. 그래도 아빠니까. 그러지 말았어야지. 우리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남몰래, 마음속으로 원망하기만 했었는데.
이제야, 그때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위험할 걸 알아. 하지만 내 자식을 살리기 위해선 가야 해. 해야 해.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이제는 알 것 같아서.
‘살려야 해. 반드시 살려야 해.’
살아야 한다, 가 아니라 살려야 한다.
루비아나는 이를 악물고, 발로 절벽을 박찼다.
우지끈.
활이 부러졌다. 루비아나는 활을 놓고, 루이먼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스쳤다.
끝인가 싶은 순간.
“비아!”
루이먼드가 팔을 뻗어 루비아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루비아나는 눈을 질끈 감고, 배를 끌어안고 몸을 틀었다.
퍽.
절벽에 등이 부딪쳤다.
“비아!”
“난, 괜찮…….”
무심코 루이먼드를 달래려던 루비아나는 말을 하다 말았다.
지금 괜찮은 건 자신이어서는 안 됐다.
루비아나는 이를 악물고, 한 손으로 절벽을 붙잡았다. 발로는 절벽의 틈을 디뎠다.
루이먼드는 놓치느니 차라리 같이 떨어지겠다는 각오로 루비아나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소설에서 보면, 이럴 때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던데. 그러지 못하는 게 원통할 따름이었다.
‘안 먹혀도 식사를 제대로 할걸. 토하는 한이 있어도, 토해도 꾸역꾸역 그냥 먹을걸.’
루이먼드는 한 손으로 유리 박힌 창살을 움켜잡고, 다른 한 손으로 루비아나를 붙잡은 자세로 뒤늦게 후회했다.
그때는 헛구역질을 참아내는 게 고통이었지만, 지금 루비아나를 잃을지도 모를 상황에 처하니 엄살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물론 루비아나의 생각은 루이먼드와 달랐다.
일전에 루이먼드가 뼈가 굵고 악력이 센 걸 감탄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기본적인 근력과 근골이 어딜 가지 않은 듯했다.
루비아나는 갑옷을 입은 자신을 놓치지 않고 버티는 루이먼드가 걱정될 따름이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팔과 창백한 얼굴밖에 볼 수 없었다.
팔과 얼굴은 루이먼드의 몸에서 그나마 성한 곳이었다. 목 아래, 유리 조각 가득한 바닥에 엎드린 몸과 깨진 창문틀을 붙잡고 있는 손이 어떤지는 알지 못했다.
그 처참한 모습을 보게 된 건, 루이먼드의 손을 잡고 절벽을 기어오른 다음이었다.
루비아나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배를 움켜잡고, 루이먼드에게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은 부하들을 찾아 이리로 데리고 와달라고 부탁하려 했다. 어서 빨리 의사에게로 가 진찰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
“…….”
하지만 루이먼드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비아나는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린 그대로 굳어버렸다.
크라바트가 풀어져, 목에 난 상처를 봤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이긴 했으나, 루이먼드의 몸 상태가 그보다 더 처참했다.
루이먼드는 루비아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피범벅 상태였다.
그런 루이먼드의 모습 위로, 애써 잊고 있던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이 겹쳐졌다.
하필이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시체로 돌아왔던 그 모습이.
또 지키지 못했다.
절망감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심장을 찢었다.
“비아, 괜찮은 거예요? 어쩌자고, 나 같은 걸 대신해 그런 겁니까? 대체 왜!”
루이먼드가 루비아나의 팔을 잡고 더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며 소리쳤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걸까. 루비아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겉보기에 더 심각해 보이는 건 루이먼드였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루비아나를 걱정하느라 야단이었다.
“아니, 난, 내가, 나는, 화를 내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당신이, 당신이 내 눈앞에서 절벽으로, 떨어져 버려서, 그래서…….”
루이먼드는 멍하니 서 있는 루비아나의 모습을 제멋대로 오해하고는, 두 손으로 루비아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이렇게 다치다니. 내 눈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그렇게…….”
손이 따뜻했다. 부모님처럼 차갑지 않았다. 아직은.
안심이 됐다.
하지만 안심은 잠깐이었다. 루이먼드 위에 겹쳐진, 부모님의 잔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비아.”
루이먼드는 허리를 굽혀 루비아나의 얼굴을 보고는, 묻은 피를 닦아주겠다며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왜, 왜 안 닦이지? 이상하다, 이상해…….”
루이먼드의 손은 살갖이 찢겨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 닦일 리가 없었다. 피를 더 칠하면 칠했지.
“루이. 잠시만.”
루비아나는 소매를 뜯어 루이먼드의 손바닥을 꾹 눌러주었다.
“난 괜찮아요. 비아, 그보다 당신이, 당신이 다쳤잖습니까.”
루이먼드는 손을 누르는 천조각을 뺏어 루비아나의 뺨을 닦으려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루비아나가 막아서가 아니었다.
“왜, 왜 이러지? 이거, 이게…….”
루이먼드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주먹을 제대로 쥐지도 못했다. 상처 때문이겠으나 정신적인 이유가 더 커 보였다.
오늘 겪은 일만 해도, 보통의 사람이 평생토록 한 번이나 겪어볼 수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루비아나는 그런 루이먼드를 가만히 바라보며, 배에 손을 올렸다.
아이는 무사할까. 루이먼드는 괜찮을까.
오직 두 사람만을 걱정했다.
그 결과. 아이는 괜찮은지 알 수 없고, 루이먼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렇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저 동그란 머리통 속엔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 건가 신기했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식상해지기는커녕 더 소중해졌다. 무슨 부탁을 하듯
들어주고 싶을 만큼. 무슨 일을 벌여도 다 귀엽게 보일 정도로.
사람을 꽃으로도 때리면 안 된다는 말은, 이 사람을 위해 생긴 말이 아닐까 싶었다.
이처럼 무해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곁에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이 사람 정도는, 내가 지킬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욕심을 품은 대가가 이것인 걸까?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루이.”
루비아나는 무심코 루이먼드에게 손을 뻗었다가, 손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꽉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의 상처는 이제 겨우 피딱지가 얹었건만. 손톱은 다시 한번 그 상처를 헤집었다.
사과해야지. 미안하다고 말해야지. 그리고 아무튼 우리의 계약은 여전히 기한이 남아 있고 당신은 내게 두 아이를 주기로 했으니, 그 계약을 지켜야 한다고 달래어 수도로 데리고 가야지.
그렇게 계획했다.
더는 못하겠다고, 떠나야겠다고 말한다면 협박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동부에서 전투를 치르는 내내, 강 상류에서 물길을 틀어 산 아래를 쓸어버릴 준비를 할 때마저,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루이먼드가 다치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어서도, 절 버린 주인을 다시 만나 행복하다며 꼬리를 흔들고 달려오지만 않았더라도.
그 이기적인 마음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그럴 생각을 했을까. 이런 사람한테.’
이제 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우는 방법을 잊어버린 지 너무 오래라, 울 수 없었다.
흐르지 못한 눈물은 고스란히 몸속으로 흘러내려 심장을 두들겼다.
‘갖고 싶어. 이 사람을 가지고 싶어.’
원래도 가지고 싶었고, 빼앗기자 정신 못 차리고 달려와 되찾으려 이 난리를 벌였건만. 그런데도 새삼, 가지고 싶어졌다.
“비아?”
다정한 목소리가 그 마음을 부채질했다.
계속 내 옆에 있어.
몇 번이든, 몇 번이든 나 때문에 위험에 처하겠지만. 내가 이렇게 구하러 올게. 매번 구해줄 테니까.
계속 내 옆에서, 날 이렇게 걱정해줘.
지옥에서 막 기어 나온 악마가 진저리칠 만큼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안 돼.’
다행히도 그 음습한 속마음을 드러내기 전, 정신이 들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루비아나의 이성을 붙든 건, 피투성이가 된 루이먼드의 모습 그 자체였다.
‘내 옆에 놔두면 안 돼. 또 이렇게 될지도 몰라.’
덜컥, 겁이 났다.
“놓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하지만 완전히 충동적이지만은 않은 말을 내뱉었다.
“비아?”
“도망가려면 지금뿐입니다.”
말하고 나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여기, 이곳엔 지금 황제도 도미넨트 공작도 없다. 하지만 피오니는 있다.
루이먼드와 피오니를 도망 보내기에 완벽한 상황 아닌가. 루비아나는 마음을 굳혔다.
“미안합니다, 급해서 준비를 제대로 하지는 못했습니다.”
사실은 안 했다. 되찾을 생각만 했으니까.
“비아. 잠깐만.”
“이대로 수도로 가면, 당신은 평생 폐하와 나에게 묶여 치욕스러운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만들지 않으려고 루텔 수도원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루텔 수도원과의 인맥을,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일단, 남들 눈에 안 띄는 곳에 숨어 있으면.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와 함께 남부의 국경 근처에 위치한 루텔 수도원에 가 있으십시오. 그 이후의 준비는 내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루비아나는 더는 루이먼드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런 일을 당하게 만들어, 미안합니다. 떠나면, 지금까지의 일은 다 잊고 편안히 사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놓아주려고 했는데. 마음은 그랬는데.
오히려 루이먼드를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루비아나는 자신이 얼마나 세게, 루이먼드의 팔을 붙잡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떠나라고?’
루이먼드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루비아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루비아나가 친절히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해주었으나,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길가를 떠도는 개새끼에게도 이러지 않는다. 구해주고서는 대뜸 가버리라고 밀어내다니.
‘내가 당신에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황제보다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기대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날, 그 순간. 눈앞을 가리웠던 건 분명 실망과 절망이니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하루하루 쌓아 올린 함께 했던 시간이 결코 짧지 않건만.
‘나는. 내 존재는 당신한테 아무것도 아닌 거야?’
그럼 왜 구하러 온 거야? 그냥 죽게 놔두지. 다른 공작을 보내지. 차라리 그들 손에 죽어 목이라도 잘리면, 그러면.
다음번에는, 좀 더 잘해서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됐을지도 모르는데.
‘비아, 당신은 날,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려는 겁니까.’
하하, 루이먼드는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처지가 참으로 처량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폭군의 사생아라는 그늘에서 도망칠 수가 없었다. 결국 반란에 휘말려 반란군의 왕까지 되어버렸다.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변명 따윈 통하지 않겠지. 황제의 하나뿐인 언니에게, 그런 짐을 짊어진 남편이 부담스럽겠지. 고작 3년의 계약 결혼마저도.’
이 자리에서 바로 죽이지 않고, 구해 주고 도망갈 길까지 마련해주는 걸 고마워해야 하나?
오, 자비로운 아쉴레앙 공작님이시여. 도망쳐 외롭게 사는 평생, 감사하고 또 감사하겠나이다. 아쉴레앙 공작 만세. 북쪽의 차가운 바람을 몰고 돌아온 위대한 공작님께 영원한 신의 축복과 은혜가 함께하길.
……이렇게?
예배당에 발도 못 들이는 사생아 주제에, 루이먼드는 멋대로 신의 축복을 들먹여 보였다.
하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속으로만 중얼거려서 그런 걸까?
이제 와 두려운 게 무어 있을까. 기꺼이 소리 내 비꼬아 주지. 그리고, 말해야지.
‘우리의 계약 기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난 못 떠나. 당신이 좋든 싫든, 적어도 3년 동안은 내가 당신의 남편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보고 도망가라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제발 하지 말아줘.’
잠잠해진 척하려던 마음이 결국, 숨길 수 없는 풍랑에 흔들렸다.
루이먼드의 시야에 제 팔을 붙든 루비아나의 손이 잡혔다. 딱히 보려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눈에 들어왔다.
루비아나의 손은 손끝이 하얘질 정도로 세게 루이먼드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떠나라면서 말하고 있으면서. 왜 이렇게 붙잡고 있는 걸까? 떠나는 건 절대 허락해주지 않겠다는 듯이.’
“…….”
루이먼드는 다시 루비아나를 보았다.
짙은 녹색 눈을 보며, 루이먼드는 그때를 떠올랐다.
절 외면하고 황제에게 달려가던 그 순간의 루비아나 말고. 망루 아래에서, 자신에게 담담히 말을 걸던 루비아나를.
그때 루비아나는 말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고. 진짜 속마음을.
그건 루이먼드가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루비아나는 표정 변화가 적은 사람이었다.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루이먼드는 항상 궁금했다. 루비아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기분이 어떤지.
그래서 해바라기가 해를 따르듯 루비아나를 쫓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채롭게 빛나는 그녀의 녹색 눈을 바라보며 울고 웃었다.
이젠, 루비아나의 눈만 봐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다.
루이먼드는 멍하니 녹색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제 눈을 의심했다.
‘......정말?’
정말.
그녀의 눈은 그녀의 입술과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왜? 어째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 가련한 기대심이 피어올랐다.
말을 믿을 수 없을 땐 눈을 보면 된다고 알려준 건, 루비아나 본인이었으니까.
“당신과 체격이 비슷한 시체를 찾아 불태워 당신인 척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 들킬까 봐 걱정하지 말고, 수도원에 숨어 있으십시오. 새 신분을 마련하는 대로 연락을, 아. 피오니 로렌 사무관과 함께 하고 싶다면, 내가 그녀의 의사를 물어 그녀도 원한다면, 젠장. 당연히 그녀도 원하겠지만. 함께 신변을 정리한 뒤에-”
“싫습니다.”
여기서 왜 피오니가 나오는 건지, 루이먼드는 알지 못했다. 궁금했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일단 뒷전으로 미뤄놓았다.
“싫다니, 피오니 로렌 사무관이 싫어할 거란 말입니까?”
“제가 싫다는 말이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그 말은 생각 이상으로 쉽게 툭 튀어나왔다.
‘사랑.’
루이먼드는 마음속으로 그 단어를 한 번 더 되뇌어 보았다.
이상하게 기운이 났다. 좀 더 만용을 부릴 수 있을 만큼.
루이먼드는 루비아나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했다. 그래. 내가, 내가 당신을 사랑해. 어쩔 거야?
뭐, 해봤자 죽이기밖에 더하겠어?
‘아. 비아한테 죽으면 안 되는데.’
살짝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요, 당신이 사랑하는 거 알고 있…… 뭐?”
루비아나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사랑합니다.”
루이먼드는 다시 말했다. 몇백 번이고, 몇천 번이든 말할 자신이 있었다.
‘이 고백마저 거절당하면 이 길로 루비아나의 말대로 떠나자.’
단 목적지는 루비아나가 말하는 남부의 땅끝에 위치한 작은 수도원이 아니었다.
수도로 가 도미넨트 공작이나 펠트하르그 공작에게 목을 내밀고 죽여달라 말할 셈이었다. 상대해주지 않고 무시한다 해도 괜찮았다,
‘내가 아쉴레앙 공작을 사랑합니다.’
이 한마디면 둘 중 누구도 벌컥 성을 내며 목을 베어 줄 테니까.
그러니 루이먼드는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당신을. 비아,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그레이움 백작저에서 날 꺼내줬을 때부터, 당신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내 인생의 구원자. 여덟 번의 삶 만에 겨우 닿은, 사랑하는 사람.
“알잖아요, 내가 얼마나,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끝까지 씩씩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끝에 가서는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눈만 크게 뜨고 루비아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루비아나의 반응이 이상했다.
“……나를?”
루비아나가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당신이? 나를? 나를 사랑한다고?”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말도 안 돼. 당신은 피오니 로렌 사무관을-”
“왜 자꾸 피오니의 이름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루이먼드는 자꾸 자신의 고백이 겉도는 것 같아, 답답한 마음에 쐐기를 박듯 힘주어 말했다.
피오니를 이성으로, 연애나 결혼의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았기에. 루비아나가 자신과 피오니의 관계를 의심하고 있다고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전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루이, 당신. 날 사랑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습니까?”
루비아나는 그가 자신에게 청혼했을 때 비장의 한 수를 내놓듯 던진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그건…….”
루이먼드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루비아나의 녹색 눈에 의혹이 드리워지자, 필사적으로 되었다.
“난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밤새 끌어안고 잠들지 않습니다!”
매일 밤 루비아나와 잠들며, 눈물 나게 행복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몸을 맞대고, 숨을 나누고, 꼭 끌어안고 잠드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경험하고는, 중독되어 헤어날 수 없었다.
새벽에 몰래 일어나 비정하게 훈련하러 나가 버리는 루비아나를 원망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눈을 떴는데, 옆자리가 차게 비어있는 걸 볼 때의 참담함이라니.
그때가 떠올라, 루이먼드는 또다시 울컥 했다. 그래, 이 사람은 그러고 보면 늘 그랬지.
“그러니까 난, 안 떠나요. 안 떠날 겁니다. 당신 옆에 있게 해줘요. 비아.”
‘구했으면 책임져.’
루이먼드는 제 팔을 움켜쥔 루비아나의 손등을 제 손으로 덮으며 꽉 쥐었다. 설령 루비아나가 이 손을 놓더라도, 자신이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날 사랑한다고?’
루비아나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비아?”
“……난 당신을 위해 무엇도 포기할 수 없는데?”
피오니 로렌은? 이란 당연한 질문 대신, 떨리는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사랑한다면서, 피투성이로 만들어버렸다. 구할 수 있었는데, 눈앞에서 놓쳐버렸다.
먼저 지켜야 할 게 있었으니까.
그건 그때 한 번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앞으로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난다면, 그때도 역시, 칼레나를 먼저 선택하게 될 테니까.
아아. 루이먼드는 그걸 물을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가 포기할게요. 비아.”
루이먼드는 루비아나가 물러선 만큼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난 가진 게 없지만요. 내가 가지고 있는 건 너무 하찮아서, 당신이 보기엔 정말 별 볼 일 없겠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내가 다 버릴게요.”
“왜 그렇게까지…….”
“말했잖아요. 당신을 사랑하니까.”
“…….”
“결국, 이렇게 날 구하러 와준 당신을. 내가. 사랑합니다.”
한 번 입에 담으니 더는 주체할 수 없었다. 계속, 계속, 입안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굴러다녔다.
루이먼드는 일곱 번의 삶 동안 미처 말하지 못했던 만큼 말하겠다는 듯 계속, 계속 말했다.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래서 떠나지 않겠다고? 계속, 내 곁에 있겠다는 겁니까?”
“당신이 허락해주든, 안 해주든 저는 그럴 겁니다.”
허락해주지 않으면 아홉 번째 삶을 기대하는 수밖에.
“……난, 그리 좋은 아내가 되지 못할 텐데?”
“내가 좋은 남편이 되겠어요.”
“그럼 난 무얼 하면 됩니까, 당신을 위해?”
루비아나가 물었다.
만일 루이먼드가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말하면, 루이먼드를 기절시켜서라도 남부로 보내버릴 생각이었다.
대가 없는 사랑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 언젠가 식기 마련이니까.
“신께, 했던 맹세를 지켜줘요.”
그래서 루이먼드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을 때, 루비아나는 차라리 안도했다.
“맹세?”
“결혼 서약이요.”
루이먼드가 루비아나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은 쪽은, 아니, 상대편보다 더 절실한 쪽은 이쪽이었다.
“나에게 신실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다른 남자 따위 눈에 담지 마요. 그렇게 나랑 평생 함께해요. 신성한 결혼 서약 또한 신께 한 맹세. 그러니 피의 맹세를 지키듯, 나를 위해 신께 한 맹세도 지켜줘요.”
“당신이 위험해도 난 당신 옆에 없을지 몰라.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당신이 황제를 지키고 난 다음, 언제나 두 번째여도 난 상관없어요. 아니 난 그걸 원합니다.”
비아. 루이먼드가 달콤하게 그녀를 불렀다.
“날 당신의 두 번째로 삼아줘요. 하지만 세 번째는 안 돼요. 나 다음엔, 아무것도 없어야 해.”
그리 말하며 눈을 감았다.
아마 사는 내내, 이 사람 옆에서 끝없이 목말라 할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조금 더 날 사랑해주길 바라며 마음이 타들어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 그 마음을 드러낼 순 없을 것이다. 속이 썩을 대로 썩고 곪아 들어가도, 티 내지 않고 언제나 만족한다는 듯이 웃으며 옆자리를 지켜야겠지.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나 고독할까.
얼마나 목마를까. 얼마나 충만할까.
“저는 당신 곁에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런 날이 온다면. 이 고백, 이 맹세를, 후회하게 될까. 아니면, 그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반드시 후자일 거라고, 루이먼드는 감히 확신했다.
왜 일곱 번이나 죽고 여덟 번이나 살았어야 했을까. 이 여덟 번째의 삶에서 당신에게 버림받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그토록 끔찍했던 죽음을 원했을까.
기어이 아홉 번째를 꿈꾸며, 다시금 당신에게 사랑받을 날을 꿈꾸었을까.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당신이라는 걸 잊지 않는 이상, 후회하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날 사랑해줘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날 사랑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루이먼드는 그대로 루비아나를 끌어안았다.
“루이…….”
루비아나는 바로 그를 안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루이먼드는 끈질기게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루비아나는 한참 뒤, 조심스럽게, 루이먼드의 등을 감싸 안았다.
루비아나가 숨을 내쉬며 어깨에서 힘을 빼냈다.
“……기꺼이. 당신이 괜찮다면.”
“내 아내.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의 비아. 내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예요.”
루이먼드는 오직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속삭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언제나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길. 내 아가.
어머니의 자장가가 귀에 맴돌았다.
그건 마법이었을까 저주였을까.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로 인해 이 사람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을 살 테니까.
루이먼드는 행복감에 몸부림치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