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31)

***

그렇게 마음이 통한 상태로, 주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래도록 행복하기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으나.

안타깝게도 현실이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먼저 무너져내린 건 루비아나였다.

루비아나가 크게 휘청였다. 루이먼드는 얼른 그녀를 받쳐 안았다.

“비아?”

“어서 날, 막사로, 내 주치의에게로…….”

루비아나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시야가 흐릿해지고 식은땀이 솟았다. 멈춘 줄 알았던 배의 통증도 심해졌다.

“무슨 일입니까, 역시 아까 절벽에서 떨어질 뻔했을 때-”

그때였다. 쾅. 소리가 나며 문이 활짝 열렸다.

“공작님!”

안즈 부관이 루비아나를 부르짖으며 뛰어 들어왔다.

제게 모든 걸 맡기고 떠난 상관에게 화가 난 건지, 이탈한 상관을 다시 만나 반가워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고함이었다.

무장한 병사들이 줄줄이 뒤따라왔다. 그들은 모두 루이딤을 입고 있었고, 연이은 전투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당장 눈앞에 오딜 후작이 나타난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 수 있을 만한 투지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기가 높은 병사들도, 서로 한 몸처럼 꼭 끌어안고 있는 연인 앞에서는 멈칫하고 말았다.

그 연인이 자신들의 사령관인 아쉴레앙 공작과, 반란군이 추대한 왕이자 피를 뒤집어썼는데도 눈이 부실 정도로 엄청난 미인이라는 건 세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어?”

안즈는 하마터면 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천상 기사인 그녀는 루비아나와 대련하다 실컷 얻어맞고 쓰러져 기절하면서도 제 검을 놓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검을 놓칠 정도였으니, 병사들의 충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챙강, 챙강. 무기가 손에서 떨어져나와 바닥을 뒹구는 소리가 파도 타듯 줄줄이 이어졌다.

굳어버린 그들을 다시 움직이게 만든 건 루이먼드의 다급한 비명이었다.

“어서, 어서 의사를! 비아가, 내 부인이…… 어서 의사를!”

“난 괜찮, 아니, 안 괜찮기는 한데…….”

루비아나가 인상을 찡그리며 루이먼드를 다독였다.

“어, 저…… 제, 제가 보기엔 반란군의 왕이신 분께서, 아니, 공작 부군께서 좀 더 위험해 보이는…….”

안즈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마구마구 흔들렸다.

***

루비아나의 명령으로, 루비아나와 루이먼드는 은밀히 본진으로 돌아왔다.

루이먼드는 커다란 수도사 로브를 뒤집어쓰고, 마찬가지로 수도사 로브를 뒤집어쓴 루비아나를 안고 사령관 막사로 들어갔다.

안즈는 주치의를 데리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데리고 가 치료받게 하라고 했으나, 루이먼드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루비아나가 주치의에게 치료받는 걸 보기 전까지는, 설령 죽는 한이 있다고 해도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했다.

“공작님께서는 배탈이 심하셔서 그런 것 같은데. 저, 공작님 말씀처럼 먼저 치료를 받으시는 게…….”

안즈는 루이먼드를 공작 부군이라고 불러야 할지 반란군의 수괴라 불러야 할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하지만 곧 노선을 제대로 잡았다.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루비아나의 손을 꼭 잡고는 좋다고 방긋 웃는 루이먼드를 보고 있자니, 저걸 의료 막사까지 들고 가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중간에 픽 쓰러져 죽어버리면 어쩐단 말인가.

차라리 의사를 이리로 데리고 오는 게 나을 듯했다.

안즈는 혼자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비아, 배탈이라니. 설마 내내 아팠던 건가요?”

루이먼드는 안즈가 스쳐 지나가듯 말한 귀중한 정보를 놓치지 않고 습득한 뒤, 흔들리는 눈동자로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루비아나는 배에 손을 올리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됐다.

루비아나가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기자, 루이먼드는 기다렸다.

몸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은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온몸의 상처가 쑤시고, 화끈거리고, 너무 아팠다. 당장 푹 쓰러져 눈을 감고 싶었다.

하지만 참았다. 혹시나 이대로 눈을 감고 자 버리면, 다시 곁에는 아무도 없을까 봐. 루비아나와 함께인 이 상황이 꿈일까 봐.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막사 밖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루이먼드가 조심스럽게 루비아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비아?”

“아.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리고…….”

루비아나는 루이먼드를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잠깐만, 치료받는 걸 미루고 내 옆에 있어 줘요.”

설사 아이가 잘못되었다 해도, 루이먼드가 알아야 한다. 루비아나는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루비아나는 안즈가 루이먼드를 위해 데려온 다른 의사를 밖에 두고, 주치의만을 안으로 들였다.

루이먼드와 의사는 바로 서로를 알아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반가움은 잠깐이었다. 의사는 루비아나의 몰골을 보고는, 충격을 받고 의료 도구가 든 가방을 놓쳤다.

털썩. 의료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루비아나는 쓰게 웃었다.

“고, 공작님…….”

주치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루이먼드는 본능적으로, 이상한 분위기를 읽어냈다.

“비아?”

루이먼드가 루비아나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의 손등을 다독여주고는 주치의에게 손짓했다.

주치의가 허둥지둥, 의료 가방을 들고 다가와 루비아나를 진찰했다.

루이먼드는 의사가 독침이라도 손에 든 것 마냥,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의사는 의사대로, 루비아나는 루비아나대로. 긴장하여 그를 배려해주지 못했다.

잠시 뒤.

“공작님!”

의사가 바닥에 털썩 엎드렸다. 루비아나는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다행히 이번에도 무사하십니다.”

“……어?”

루비아나가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제발, 이 이상은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젠 말을 타는 것도 안 됩니다. 공작님, 제발,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의사는 이제 두 손을 모아 싹싹 빌기까지 했다.

진짜 위험할 뻔했다. 산모는 물론 아이까지 많이 약해져 있다.

심한 충격을 받은 거 같은데, 이 이상 모체에 충격이 가해지면 정말 이후를 장담할 수 없다.

솔직히 지금 공작님 상황은 의료 학계에 보고해야 할 만큼 기적적인 상황이다. 잔소리인지 애원인지 모를 말들이 쏟아졌다.

평소라면 귀찮아하며 가 보라고 손사래를 쳤을 루비아나지만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알았네. 이제 일이 다 끝났으니까, 무조건 자네 말대로 하지.”

“정말입니까? 말은 탔지만 뛰어내리지는 않았으니 괜찮은 거 아니냐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젠 정말 말도 타시면 안 된단 말입니다!”

“알았다니까. 자네가 그간 날 위해 고생해준 것도 잊지 않고 있어. 내 후에 크게 사례할 테니 지금은 일단 물러가고. 아, 혹시 괜찮으면 루이, 내 남편을 좀 봐줬으면 하는데.”

굳이 딴 의사를 불러올 거 뭐 있을까. 루비아나는 그냥 그에게 루이먼드의 치료도 맡겼다.

의사는 루이먼드가 뒤집어쓰고 있던 수도사 로브를 벗긴 뒤, 루이먼드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쩍 벌렸다.

“아니, 두 분은! 어떻게! 쌍으로!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감히 아쉴레앙 공작 부부의 면전에 대고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귀족불경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을 짓이었다.

의사는 뒤늦게 헙, 하고 제 입을 틀어막고는 루비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루비아나는 ‘부부가 쌍으로’라는 구절이 마음에 들어 문제 삼지 않았다. 어서 내 남편을 치료하라고 손만 까딱일 뿐이었다.

의사는 밖에 대기하고 있던 의사에게 붕대와 파상풍 예방약, 소독제, 연고 등을 건네받아 루이먼드를 치료했다.

루이먼드는 제 몸이 반 이상 붕대로 덮일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치료가 거의 끝날 즈음에야,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멍하니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비아, 저, 그러니까. 비아?”

“일단 상처를 다 치료하고 이야기하죠, 루이.”

루비아나가 의사에게 눈짓했다.

의사는 눈치 빠르게 분위기를 읽고는, 더욱 빠르게 붕대를 감았다.

“두 분께서 각각 드실 약을 만들어오겠습니다.”

의사가 지친 얼굴로 물러나자, 막사에는 루비아나와 루이먼드,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비아, 혹시…… 어…….”

루이먼드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크게 뜬 채로 루비아나를 바라보았다.

루비아나는 루이먼드가 제게 그랬듯 인내심 있게 그를 기다려주고 싶었으나, 금방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루비아나는 곧바로 그의 손을 자신의 배에 가져다 댔다.

“여기에 당신과 나의 아이가 있습니다.”

“……!”

루이먼드는 화들짝 놀라 손을 뺐다가 다시, 루비아나의 배에 손을 올렸다.

닿는 즉시 깨져버릴지도 모를 무언가를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루비아나는 괜찮다는 듯 루이먼드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

루이먼드는 몇 번이고,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어, 언제부터…….”

눈가에 눈물이 그렁해서는, 겨우 꺼낸 말이 고작 이것이었다.

“당신이 납치당하고 얼마 안 되어 알게 됐습니다.”

“왜…… 왜 말을 안 했던, 아…….”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루이먼드는 멍해 보였다.

“루이?”

너무 놀라 눈을 뜬 채로 기절해버린 걸까? 루비아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담아 루이먼드를 불렀다.

루이먼드는 마법 시동어를 들은 것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몸으로, 전쟁터에, 그것도 그 위험한 곳에!”

루이먼드는 절벽에 매달렸던 루비아나를, 아니, 그 전에 오딜 후작과 싸웠던 루비아나를, 아니, 아니. 훨씬 전에. 이 몸으로 말을 타고 적진으로 유유히 다가왔던 루비아나를 떠올리며 기겁했다.

“후방에, 아니, 안전한 곳에 있어야지. 왜 여기까지 온 겁니까!”

“당신을 구해야 하니까.”

루비아나는 당연한 것을 물어본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어…….”

루이먼드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나보단 아이를…… 아이가!”

훨씬 중요하지 않습니까.

뒷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애초부터 아이를 갖기 위한 계약 결혼이었다.

결혼 상대자로 적합한지 따져봐야겠다면서 한밤중에 침실로 찾아오라고 말한 사람은 루비아나였다.

그런데 이제야 겨우 찾아온 소중한 아이를 품고 이 험난한 전쟁터를 휘젓고 다녔다니. 싸우고, 절벽에 떨어져 죽을 뻔했다니.

“루이. 내 말뜻 모르겠습니까?”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만. 비아.”

“아이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는 아이보다 당신을 구하는 게 더 중요했습니다.”

“…….”

루이먼드의 눈이 커졌다.

“뭐, 나와 당신의 아이라면 잘 버텨 줄 거라 믿고 싶기도 했고.”

“……비아.”

루이먼드는 루비아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로 울음을 터뜨렸다.

원치 않았지만, 폭군의 사생아로 태어났고, 일곱 번의 생을 살고 죽는 동안 늘 무력감을 느꼈다. 이제 여덟 번째의 삶.

루이먼드는 지난 일곱 번의 삶을 통틀어 느꼈던 무력감보다 더 큰 무력감을 느꼈다.

언제나 삶을 후회했지만, 이번만큼 극심하게 지난 삶이 후회된 적이 없었다.

도망칠 생각만 하지 말고. 강해지려고 노력할 수는 없었던 걸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때문에 아이를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을 만큼 강해질 수는 없었던 걸까?

검술을 익히고, 그랬더라면.

이 사람을. 내 아내와 아이를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위험에 몰아넣지 않았을 텐데.

“쓸데없는 생각 말아요.”

무력감에 갇혀 익사하기 직전. 머리를 헤집는 부드러운 손길이 그를 끌어올렸다.

이젠 그의 눈을 보지 않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그를 지켜보고, 그에 대해 생각했으면 이렇게 된 걸까.

‘레나 말고 이랬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루비아나는 다시 한번, 루이먼드를 향한 제 마음의 크기를 실감하며 그의 빛나는 은발에 입을 맞췄다.

피에 젖었어도, 그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달빛처럼 빛났다.

“루이.”

“…….”

“당신도, 이 아이도. 내가 지킬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냥 내 옆에서, 날 사랑하기만 해요.”

“……비아?”

“그러면 되는 겁니다.”

루비아나가 토닥토닥,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루이먼드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에 젖은 얼굴은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이젠 그 눈물 한 방울마저 온전히 자신의 것임을 알기에, 루비아나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입을 맞췄다.

드디어 둘에서 셋이 되었다. 루비아나는 자신을 안아오는 따듯한 온기를 느끼며, 긴장을 풀었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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