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131)

***

완벽한 승리는 완벽한 뒤처리가 뒤따라야 가능한 것이었다.

루비아나는 리사나와 절벽 아래에서 찾은 오딜 후작의 시신을 수도로 올려보내고, 물살이 휩쓸고 지나간 땅 위에 멍하니 서 있는 동부의 백성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건 앞으로의 생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물에 쓸려나간 땅에서 당장은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몇 년 후엔 지력이 회복되겠지만, 평범한 백성들은 그 몇 년을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루비아나는 백성들에게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동부 치수 사업에 일꾼으로 참여하는 것.

두 번째는 아쉴레앙 공작가와 계약하여, 반란군이 점거했던 산을 돌로 뒤덮어,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돌산으로 만들어버릴 것.

어느 쪽을 선택하든 월급을 후하게 줄 뿐 아니라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때까지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물살에 쓸려 온 크고 작은 돌들이 농토를 뒤덮고 있는 터라, 어차피 농사를 짓기 위해선 돌을 골라내야 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곧 산 중턱에 있는 거대한 은광은 폐쇄되었고, 산은 시뻘건 불길에 뒤덮였다.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마법사들이 보조해 준 덕분에, 불은 인근 마을로 번지지 않았다.

불이 사그라들자 병사들은 까맣게 탄 단 위에 소금을 뿌렸다.

백성들은 그 위에 돌을 얹으며, 감히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아쉴레앙 공작의 남편을 훔쳤던 반란자들이 어떻게 망해버렸는지 자식과 손자들에게 말해주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러는 동안 동부 치수 사업을 담당한 관리들은 르니에 강 상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설마 물줄기를 털어서, 댐처럼 물을 모아 놨다가 터뜨릴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 바람에 그동안 작업해 놓은 게 다 파. 괴. 되어버렸잖아?”

“결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네.”

“젠장, 월급만 주면 다냐. 한 번 한 일 망가뜨린 다음에 또 시키지 말란 말이야.”

그들의 슬픔은 당연한 것이었다.

루비아나는 매우 미안해하며, 마탑의 마법사들을 상류로 올려보냈다.

“큼큼, 여기에 삐져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 관리놈들, 아니, 관리 분들이 있다고 하여 구경 왔는데.”

“위대한 마법의 힘으로 도와주고는 싶은데, 8서클에 도달한 자가 아직 없어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구나.”

“우나? 정말 우는 건가? 우는 거면 달래주고. 어이구, 불쌍해라. 했던 일이 다 수포로 돌아가셨어요? 그럼 서류 작업부터 다시 하셔야 되나요? 한 서류 팔백 장 정도 다시 쓰면 되나아?”

마법사들은 지난날에 당한 수모를 잊지 않고 있었다.

장소도 하필이면 이곳, 르니에 강 상류였던지라 더더욱 불타올랐다.

“크아아아악! 이 나쁜 마법사놈들!”

“수도로 돌아가기만 해봐! 앞으로 예산 신청할 때 서류 하자 있는 거, 예전엔 불쌍해서 그냥 넘어갔던 거 절대로 그냥 안 봐줄 줄 알아!”

“누가 운다는 거야. 한 번 했던 일인데, 또 못해낼 거 같아? 저번에 한 건 그냥 연습한 거였어. 이번에야말로 천 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완벽한 수로를 만들고야 말겠다!”

“그래! 그럽시다! 그 천 년 동안 마탑에선 8서클 마법사를 여전히 못 배출해내겠지만!”

관리들 중 가장 어린 피오니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옳소! 옳소오! 다른 관리들이 박수치며 호응했다.

“아니, 뭐야?”

“뭐긴, 뭐야. 8서클도 아니면서, 어디서 감히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에게 삿대질이야, 삿대질이!”

그렇게 관리들은 금세 기력을 되찾았다.

루비아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군대가 동부를 떠날 준비를 모두 마쳤을 때.

루비아나는 군대를 따라온 장인 중 제일 실력이 좋다는 자를 찾아가 부러진 활을 맡겼다.

고쳐서, 아이가 자라나 활을 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주고 싶었다.

장인은 동강 난 활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으나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넙죽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요.”

루비아나 말고, 옆에 서 있는 루이먼드에게.

루비아나를 부축하겠다며 따라나선 루이먼드는, 벽에 가득 걸린 활과 화살을 신기해하며 구경하고 있었다.

“예? 나?”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 장인을 돌아보았다.

“우리 같은 놈들을 제대로 대접해주신다죠. 그놈들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장인은 고급 식기를 만드는 장인과 신발을 만드는 장인의 이름을 말했다.

루이먼드가 아쉴레앙 공작저에서 쓸 식기 세트와 루비아나가 신을 신발을 맡겼던 그 장인들이었다.

“그들과 아는 사이입니까?”

“알다마다요.”

장인이 씩 웃으며, 같은 길드에 소속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들이 속한 길드 내에서는 이미 루이먼드에 대한 이야기가 휩쓸고 지나간 지 오래라고 했다.

“저희 길드는 아쉴레앙 공작 부군을 언제나 존경하고 따를 것입니다. 공작 부군께서 불쾌하지만 않으시다면, ‘울드 길드의 영원한 친구’라는 호칭을 바쳐도 될깝쇼?”

장인이 품속에서 손바닥만한 금패를 꺼내 루이먼드에게 내밀었다.

언젠가 루이먼드를 만나면 줄려고, 동부로 따라올 때 가슴 속에 품고 온 것이었다.

“어, 어…….”

루이먼드는 당황하여 장인과 루비아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 길드 소속 장인들이 흔쾌히 출정을 따라나선 거였군.’

돈을 후하게 주긴 했지만, 길드의 장인들이 고분고분 따라나섰던 게 의아했다.

혹시 오딜 후작과 내통하여 후방을 교란시키려 그러는 건가 의심되어, 병사들에게 장인들을 감시하라 명령을 내리기도 했었건만.

루비아나는 약간의 허탈함을 느끼며 웃음을 흘렸다.

“받아 두십시오, 루이. 당신이 원한다면요.”

“음, 네. 비아.”

루이먼드는 황금패를 받아들었다.

장인은 영광이라며 또 넙죽 고개를 숙였고, 루이먼드는 황금패를 슬쩍 루비아나의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잉? 공작님 아니고 부군께 드린 건데.”

“아직 미혼인가 보지?”

장인이 뜨악한 표정을 짓자 루이먼드가 웃으며 물었다.

“예? 에에, 뭐. 어쩌다 보니 인연이 닿지 않아서요.”

장인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루이먼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중에 결혼하고 나면 다 알게 된다는 두루뭉술한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가죠, 비아. 조심조심. 못 걷겠으면 말해요. 내가-”

“루이. 괜찮습니다. 요즘 너무 과해요, 당신.”

“과하다니요! 비아, 당신이 싫다고 질색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안고 다니는 게-”

“그만. 그만.”

도란도란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장인은 다시 한번 머리를 긁적였다.

“……공작님이 배탈이 심하다더니, 정말이었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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