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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1화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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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메이커 1화

아일라는 속으로 늘 품어 왔던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대체 나와 샬럿이 무엇이 그리 다른 것이지?’

하지만 그 말을 절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모두의 비웃음을 살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아일라 메르텐시아.

그녀는 모두가 악독하기 짝이 없다 손가락질하는 악녀였고, 샬럿은 모두가 사랑해 마지않는 천사였다. 그것은 마치 마녀와 성녀를 비교하라는 것과 다름없는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아일라는 그 의문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내가 샬럿과 무엇이 그리 다르기에 너는 모두의 품에 안겨 위로받고 나는 이리도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가.

“왜 이런 짓을 벌였지?”

베르너가 검 끝으로 주저앉은 아일라의 턱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아일라는 자꾸만 초점이 흐려지는 시야 때문에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핏물과 섞여 눈가를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아일라의 목소리는 원래의 청아함이라곤 조금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갈라져 있었다. 고문을 받느라 계속 비명을 질러 댔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베르너는 그녀의 변명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다시 묻겠다. 왜 이런 짓을 벌였지?”

아일라는 자신을 향한 타오를 듯 격렬한 분노로 일렁이는 베르너의 새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지금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은 듯한데, 대답을 듣기 전까지 최대한 꾹 눌러 참을 모양이었다.

아일라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이런, 내 임은 정말 상냥하기도 하시지.

베르너 칼 모하메드 레테.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태자로 책봉된 그는 인내심이 강했다. 평생을 그렇게 교육 받고 자라 왔기 때문이었다.

베르너는 자신의 차갑고 냉정한 원래의 본성 위에 가면을 덮는 것에 능했다. 필요하다면 넉살 좋은 연기를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거나 이성을 잃는 순간은 전부 샬럿과 관련된 일일 때뿐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아일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샬럿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목에 닿아 있던 검날이 살갗을 파고들어 왔다. 베르너는 더욱 바싹 검을 들이밀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허튼짓할 생각하지 마라.”

마치 제 영역을 침입받은 맹수의 위협 같은 울림이었다.

아무리 간악한 악녀라도 이 거리에서 무슨 짓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건만. 그는 아일라가 샬럿에게 시선을 주는 것조차 경계했고, 불쾌하게 여겼다.

아일라는 다시 베르너의 푸른 눈과 시선을 맞추며 입술을 달싹였다.

“전하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운 색이죠.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 또 그 세 치 혀를 놀려 댈 생각인가. 듣고 싶지 않다!”

“그런데 샬럿, 저년을 보는 전하의 눈빛을 보고 그제야 알았죠. 아, 저렇게 따뜻한 색이었구나. 타오르는 불길 같은 빛이었구나. 그런데 이제야 저를 그런 눈으로 보아 주시는군요. 저는 매우 기쁩니다, 전하.”

비록 그게 살기로 타오르는 빛이라 해도, 자신으로 인해 감정을 드러냈다는 게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야 이렇게 죽어간 저를 조금이라도 기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일라는 그렇게 말하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못 들어 줄 지경이군. 마지막 기회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아일라는 도저히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그것을 몰라서 묻나 싶어서.

모두가 아는 사실을 굳이 왜 확인하려 드시는지. 왜 이런 짓을 벌였느냐고? 전하를 연모하니까요.

“내 삶, 영혼, 송두리째 다 바쳐 전하만을 사랑하니까요.”

“고작 그런 이유로…….”

베르너는 예상했지만 정말 치가 떨린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런 이유로 샬럿이 죽을 뻔했어! 고작 너 따위 때문에!”

그는 씨근덕거리며 아일라의 어깻죽지에 검을 박아 넣었다. 두부를 꿰뚫는 것처럼 손쉽게 검날이 파고들자 피가 콸콸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일라는 이를 부러트릴 듯 악물면서 온몸을 경련했다. 고통에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가 점멸하기를 반복했다.

샬럿이 있던 곳에서 꺅! 하고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에 베르너가 아일라를 향한 분노로 눈을 새파랗게 태우는 와중에도 샬럿에게 염려가 담긴 시선을 보냈다.

왜, 당신의 심약한 연인이 이 잔혹한 살육의 광경을 보고 그만 충격을 받을까 걱정이라도 되는 모양이지.

자신의 사랑은 그리 중요하면서 내 사랑은 이리도 비참히 짓밟는가.

아일라는 조소하며 고통이 사그라질 때를 기다렸다가 꿋꿋하게 말했다.

“제가, 그러지 않았어요.”

그러자 베르너는 어깨에 박혀 있는 검날을 비틀었다. 살갗이 핏물에 저미며 뒤틀리는 생생한 감각에 아일라는 결국 참고 있던 비명을 터트렸다.

“아악……! 아아아악……!”

“널 누구보다 비참하게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샬럿이 이유를 듣고 싶다고 하더군. 그녀는 네가 이 일의 주모자인 걸 알게 된 순간조차 네 걱정부터 했어. 그래도 넌 뚫린 입이라고 그딴 말이나 지껄이고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아으윽, 읏. 하하…… 하하하…….”

아일라는 피에 흠뻑 젖어 드레스가 새빨갛게 물들어도 계속 실실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눈동자를 굴려 호위기사 곁에 붙어서 덜덜 떠는 샬럿에게 시선을 옮겼다.

샬럿 엔젤로.

한 떨기 백합꽃처럼 가녀리고 청초한 그녀는 아일라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호위기사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황태자의 호위기사 레녹스.

샬럿을 보호하듯 감싸고 선 그는 지독한 짝사랑에 빠진 수컷의 눈빛을 하고 있다. 아일라는 그것을 첫눈에 알아차렸다. 저토록 애정을 갈구하는 눈을 하고 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샬럿에게 푹 빠진 남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아니, 남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남녀노소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샬럿과 몇 마디 섞기만 하면 모두 그녀에게 매혹되었다. 심지어 야생 동물들까지도 금세 경계를 풀고 스스럼없이 다가올 정도로 이 세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외모만 보면 샬럿 역시 미인 축에 속하긴 하지만 아일라보다 특출 나게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뒷배가 탄탄한 것도 아니었다.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하물며 학식이 뛰어나거나 현명한 것도 아니었다.

대체 어째서? 뭐가 다른 건데?

그럼에도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다.

아일라가 평생을 갈구하며 살아왔음에도 누구 한 명에게도 얻을 수 없었던 애정을 너무도 손쉽게.

그러면 샬럿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이들의 등 뒤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침묵했다. 할 수만 있다면 억지로 끌어내 저 얼굴에 손톱을 박아 넣고 싶었다.

제 손은 절대 더럽히지 않고 할 줄 아는 거라곤 애처롭게 눈물을 짜내는 것밖에 없는 착하고 연약한 샬럿.

누구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거니? 보호받지 않고서는 스스로 네 몸 하나 지킬 수 없는 거니?

이리 와. 와서 내 얼굴에 침을 뱉던가. 이건 너와 나의 싸움이잖아.

아일라는 도저히 샬럿을 사랑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마치 천적을 만난 것처럼 소름이 돋고 온몸에 털이 곤두설 뿐이었다.

그녀는 손톱이 다 뽑혀 흉한 손으로 어깨에 박힌 검날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해 눈을 부릅뜨고 베르너를 올려다보았다.

“저주를 걸었습니다.”

“네가 마녀라 시인하는 건가.”

“죽어 가는 와중에 무엇을 숨길까.”

“……하.”

베르너는 아일라의 말을 정신 오락가락하는 여자의 헛소리로 치부했다.

그리고 그게 사실 맞았다. 이건 죽어 가는 악독한 악녀의 마지막 소원일 뿐이었다.

신이 있다면.

아니, 악마일지라도 좋아.

영혼을 팔게. 어떻게 쓰이든 상관없어. 영혼을 뜯어내 통째로 삼켜진다 해도 좋아. 지금 내 말이 들린다면 저 피도 눈물도 없는 그에게 저주를 걸어 줘.

베르너는 모든 감정을 갈무리하고 무심하게 통보를 내렸다.

“아일라 메르텐시아. 메르텐시아 가문은 완전히 멸문했다. 그대 하나 때문에. 그들의 원망을 듣느라 그대는 죽어서도 편하지 못할 테지.”

“걸었어요, 저주를…….”

베르너가 검을 뽑아내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검날을 붙잡고 있던 아일라의 손까지 통째로 베어 버렸다. 그녀의 발악은 조금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검은 망설임 없이 아일라의 살을 가르고 늑골을 부서트렸다. 그리고 최대한 고통을 주고 싶은 모양인지 뱀처럼 느리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베르너의 바람대로 아일라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울컥 피를 토하며 몸을 서서히 무너트렸다.

모든 게 끝났다.

끈질기게 이어 가던 생명도, 그녀의 사랑도.

“……걸었어요. 당신이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는…… 그런 저주를…….”

아일라는 피 끓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베르너는 그녀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크게 뜨인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이내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헛소리.”

그는 더러운 것이라도 묻었다는 양 검을 적신 피를 떨쳐 내고 등을 돌려 샬럿에게 향했다.

샬럿은 눈물을 글썽이며 제게 다가온 베르너에게 매달렸다.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는 고운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베르너, 그녀를 고통 없이 보내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녀가 너무 가엾어요.”

“저게 최대한 베풀 수 있는 자비였어.”

“하지만……!”

“샬럿, 네가 조금도 신경 쓸 거 없는 일이었어.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잖아. 이렇게 몸을 떨고 있으면서 대체 누굴 신경 쓰는 거야.”

베르너가 계속 뒤를 흘끔거리는 샬럿의 어깨를 끌어안아 데리고 나가고, 그 뒤를 레녹스가 쫓았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지하 감옥은 이내 침묵으로 에워싸이고, 아일라에게 마지막 종말을 알렸다. 위태롭던 생명의 불씨는 꺼져만 갔다.

하지만, 아일라는 이것이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날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야…….”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으으…….”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이불 속을 더욱 파고들었다. 컹컹 시끄럽게 짖어 대는 주인집 개소리는 오늘도 자명종이 따로 없었다.

“……뭔가 개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개소리를 들으니까 개꿈을 꾸지. 앞집에 사는 아저씨가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하고 울분에 찬 고함을 질렀다. 나는 속으로 소심하게 아저씨를 응원했다.

아침 여섯 시.

개 짖는 소리가 월월하고 월요일을 알리는 구질구질한 반지하 단칸방에서 언제나처럼 눈을 떴다.

‘아, 퇴사하고 싶다.’

나는 머리맡에 둔 휴대 전화로 시간을 확인한 뒤,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기어가다시피 욕실로 향했다.

반쯤 정신을 놓은 채 이를 닦다 보니 아주 조금이었지만 꿈속의 내용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머리는 떡졌고 얼굴에 땟국물이 흐르며 피로 칠갑을 해도 끝장나게 예쁜 외국인 여자가 나왔었다. 와, 닮은 연예인도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진짜 눈 튀어나오게 예뻤다.

머리는 염색으로도 내기 힘들 정도로 선명한 붉은빛이었고, 눈동자는 렌즈를 낀 것보다 크고 또렷했던 풀잎 같은 녹색……. 아, 그래. 사람이 아니라 마치 ‘장미꽃이 사람이 되면 이러지 않았을까?’ 싶은, 그냥 경이롭고 독보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던 게 심금을 울렸던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다른 놈들이 다 잘못했네. 어떻게 그렇게 예쁜 사람을 괴롭힐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눈물을 닦아 주면서 ‘오, 세뇨라. 부디 아름다운 보석을 떨어트리지 마요.’ 하고 이탈리아 남자 빙의해서 개수작을 부렸을 텐데.

꿈속에서 다른 사람들도 본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았다.

누가 더 있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왜 그 예쁜 여자는 죽어 가고 있었는지.

계속 예쁜 언니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던 모양이다. 하하, 꿈에서도 얼빠 기질은 사라지지 않는구나.

언니라고 하기엔 갓 성인이 되었을까 말까 한 앳된 얼굴이었으나, 예쁘면 다 언니라고 누가 그랬다.

나는 그 꿈속의 예쁜 언니가 부디 이승에 대한 미련을 다 이루고 죽었기를 바랐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언니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렇게 씻고 대충 찍어 바르듯 화장을 마치고 출근길에 오른 나는, 곧 꿈 같은 건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런 사소한 것까지 담아두기엔 일상이 너무도 고단했으니까.

그게 어떤 후환으로 돌아오게 될지는 꿈에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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