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2화 (2/131)

# 2

악녀 메이커 2화

나, 윤하늘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그러니까……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헐……’

얼빠진 감탄이 절로 나온다.

나는 전혀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얼굴로 희게 질려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빛나는 샹들리에, 화려한 의복, 고상한 몸짓, 귓가를 타고 흐르는 유려한 선율, 그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

나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공간은 그저 가만히 숨만 쉬어도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안겨 주었다.

‘하루아침에 무슨 날벼락이야……’

나는 선천적으로 사람이 많고 복잡한 공간은 질색하며 사교성이라곤 개뿔도 없는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회식도 억지로 끌려가야 겨우 사람들과 어울리는 마당에 내가 왜 이런 이질적인 공간에 있는 것일까. 나는 생리적인 거부감을 느끼며 뒷걸음질 치다가 벽에 찰싹 붙었다.

화려한 의복을 입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시끄러운 소음을 냈다. 누군가는 요란하게 웃어 댔고, 누군가는 애꿎은 사람 하나를 희생자 삼아서 험담했다.

예를 들면, 나 같은 사람을 말이다.

“이것 참 대단한 우연이로군요.”

“어머, 이렇게 비교가 되어서야.”

“같은 옷을 입어도 이렇게 느낌이 다를 수가 있나 봐요. 아무리 옷이 날개라고는 하지만 사람을 가리긴 하나 보죠.”

“가엾기도 하지…….”

내 주위로 몰려 있던 이들이 대놓고 빈정거리며 날 비웃었다.

나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무감각하게 내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온전히 내 차림만 봤을 때, 비웃음을 살 이유는 전혀 없었다.

실크 레이스와 진주가 알알이 박힌 크림색 드레스. 로코코 시대를 대표하는 로브 아 라 프랑세즈 형식으로 좌우로 부풀린 치마와 네모난 목둘레, 크기가 다른 리본으로 장식된 귀여운 스토머커가 눈에 띠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가슴과 허리를 강조한 18세기에나 유행했을 법한 드레스가 현재 이곳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게 틀림없었다. 다른 이들도 하나같이 입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이유는 아마도……’

힐끗.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같이 아름다운 한 쌍의 남녀를 눈에 담았다. 때마침 빛이 그들의 머리 위를 찬연하게 비추었고, 마치 한 폭의 명화처럼 성스러워 보였다.

‘황태자 베르너, 그리고…… 샬럿’

그리고 지금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나는 ‘아일라 메르텐시아’. 이 ‘소설’에 등장하는 희대의 ‘악녀’.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설 <백합 아가씨>에 나오는 악녀의 몸 속에 빙의한 ‘윤하늘’. 이 소설을 직접 쓴 작가 나부랭이였다.

‘보통 꿈이 이리 생생할 수 있어?’

아니지, 이 이상 뭘 부정할까. 꿈이 아니니까 이렇게 생생한 거겠지.

내 처지를 한탄하고 있자니 아일라를 물어뜯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귀족들은 나를 안주 삼아 씹어 댔다.

“메르텐시아 영애께서 황태자 전하께 푹 빠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건 유명하잖아요.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을걸요?”

“오, 분명 정보를 알아내 비슷한 색상의 옷을 맞춰 입고 온 거겠죠.”

“그런데 설마 다른 영애와 이렇게까지 겹칠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세상에, 민망해라. 저라면 창피해서 고개도 못 들겠어요.”

저들의 추리가 맞았다. 이 장면에서 아일라는 황태자와 연인처럼 보이려고 부러 옷을 맞춰 입었으니까.

하지만 나로서는 눈을 뜨자마자 누가 입혀 주는 대로 입었을 뿐이었기에 억울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저 영애는 대체 누구죠?”

“처음 사교계에 데뷔한 듯한데 눈에 띄는군요. 마치 백합꽃 같아요.”

‘미친, 백합…….’

그리고 나는 샬럿이 앞으로 사교계에서 불리게 될 별칭을 듣고 수치심에 떨며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아니, 보통 ‘백합꽃 같아요.’ 하고 실제로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런데 저거 내가 쓴 대사였다.

아, 제발.

“안젤로 자작 영애일걸요?”

“아, 그렇군요.”

샬럿의 정체를 물어본 영식은 그녀의 계급에 아쉬운 눈치였지만, 이내 다시 그녀에게 흘낏 시선을 보내며 얼굴을 붉혔다. 이상하게 계속 눈길을 사로잡는 샬럿 특유의 분위기에 완전히 매료당한 모습이었다.

그때, 누군가 은밀히 속닥거렸다.

“안젤로 자작 가문이라면…… 영지가 파산하기 직전이라던……. 아, 제가 그만 실례되는 말을 해 버렸군요.”

“그럼 혹시 신랑감을 물색하러? 저 정도 외모와 기품이라면 결혼 시장에서도 단연 주목을 받겠군요.”

“전하와 드레스 코드가 우연히 겹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란히 서 있으니 정말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누구와는 전혀 다르게 말이죠.”

베르너가 입은 크림색 정장, 그리고 샬럿이 입은 크림색 드레스는 오늘 이곳에서 같이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맞춰 입은 웨딩복 같았다. 그만큼 겉보기에도 굉장히 어울렸다.

둘 다 태양같이 빛나는 머리카락은 손을 대면 녹아들 듯했고, 선명한 푸른 눈동자는 마치 창공을 담아낸 것 같았다.

반면, 졸지에 샬럿과 같은 크림색 드레스를 입었다가 봉변을 당한 나는,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아일라는 크림색이 안 받았다. 그녀는 허리까지 굽이쳐 내려오는 불꽃같은 색채의 머리카락에 짙은 녹음 같은 눈동자를 가진 눈에 띄게 화려한 미인이었으니까. 그녀에게는 이런 밝은색보다 어둡고 고혹적인 색이 더 잘 어울렸다.

물론, 이 정도의 뛰어난 외모라면 뭔들 어울리지 않을까 싶지만 샬럿의 앞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샬럿은 아일라처럼 단번에 시선을 확 사로잡는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소설 속 주인공답게 보면 볼수록 점점 시선이 가는 청초하고 수수한 미인이었다.

그녀의 크림색 드레스와 사랑스러운 꽃 자수와 레이스, 틀어 올린 머리와 순결해 보이는 진주 장식은 처음부터 입고 태어난 듯 잘 어울렸다.

뭐, 객관적인 평가도 그런데 무려 이 소설의 주인공님이었으니까. 주인공 버프로 인해 관심 받을 수 있도록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겠지.

나는 내가 입은 드레스를 다시 흘낏 내려다보았다. 같은 의상실에서 맞추기라도 한 건지 색상만으로도 모자라 디자인까지 비슷한 것 같았다.

이렇게 닮은 옷을 입고 있으니까.

“마치, 성녀와 마녀 같아요.”

정확한 비유였는지 누군가의 말에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 *

“아직도 손발이 다 오그라드네.”

연회가 끝나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던 나는, 파장 분위기가 나자마자 곧바로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 방에 도착하자마자 손에 꽉 쥐고 있었던 이브닝 백을 침대 위에 냅다 던지며 몸서리를 쳤다.

“으…… 흑역사가 눈앞에서 막 실시간으로 살아 움직이다니…….”

와, 진짜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빨리 빠져나오길 다행이지, 거기서 내가 썼던 대사 하나라도 더 들었다간 창문을 깨고 뛰어내릴 뻔했다.

나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면서 막막한 심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5성급 호텔에 버금가고도 남을 정도의 고풍스러운 방은 다시 봐도 기가 질렸다. 내가 살던 원룸 십 수 개를 이어 붙인 것 같은 크기에 가구들은 하나같이 금빛으로 번쩍거리지를 않나.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보았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뺨치는 천장화가 시야에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저걸 봤을 땐 내가 드디어 미친 줄 알았지.’

주변을 보고 비명을, 거울을 보고 비명을, 내 비명에 놀라서 달려온 사용인들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야말로 미쳐 발광하던 나는, 사용인들이 부르는 내 이름을 듣고 나서야 파악할 수 있었다.

10년 전, 인터넷 소설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에 내가 푹 빠져서 썼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 하나 있었다.

제목은 <백합 아가씨>.

내가 처음 쓴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로 고등학생의 풋풋함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그러니까 여러모로 오그라드는 소설이었다. 지금은 그저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내 과거이기도 했다.

‘10년 전에 쓴 소설이니, 애초에 까맣게 잊고 있기도 했고.’

그런데 내가 그곳에 빙의한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소설에서 가장 비중이 큰 악역이자 악녀, 아일라 메르텐시아 공작 영애의 몸속에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0년 전 흑역사 속에 던져 넣다니, 너무하지 않나? 누군진 모르겠지만 양심 있어?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지금 중요한 건…….’

[“날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야…….”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소설 <백합 아가씨>에서 악녀 아일라는 황태자 베르너를 사랑했다.

그녀는 눈엣가시 같은 샬럿을 늘 괴롭혔고, 결말 즈음엔 질투심에 사로잡혀 저주를 내릴 생각으로 은밀하게 금서를 구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연히 그 사실은 곧 발각되었고, 저주도 한 번 제대로 못해 보고 갖은 고문은 당한 끝에 베르너의 검에 꿰뚫려 차디찬 감옥에서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대부분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 그렇듯이, 아일라 또한 악녀답게 아주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한다.

‘이건 뭐, 수치를 견디다 못해 죽거나, 아니면 소설대로 남자 주인공 손에 죽거나…….’

나는 화장을 지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연신 눈치를 보고 있는 하녀들을 내보내고 침대 위로 엎어졌다.

‘왜 하필 ‘악녀’ 아일라일까.’

나랑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데.

소심하고, 내가 상처받아도 남에게 상처 입힐 생각일랑 조금도 하지 못하고, 무리한 부탁이라도 어쩔 수 없이 들어주고 마는 호구.

그게 바로 나 윤하늘이었다.

평생 기억을 전부 돌이켜 봐도 내가 직접 뭔가를 원해서, 바라서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딱 한 번 10년 전에 처음으로 부모님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백합 아가씨>를 썼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맞아. 지금은 오장육부가 오그라들지 모르겠지만, 그 시절에는 순수하게 즐겁고 재밌게 썼었지.’

나는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이 세계는 내가 처음으로 의지를 담아 직접 창조한 소중한 추억이 담긴 의미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이렇게 죽을 순 없었다.

학자금이며, 방세며, 동생들 학비며, 밑 빠진 독에 평생 물 붓는 삶을 살다가 드디어 벗어났잖아. 매일 같이 쳇바퀴 도는 지옥 같은 삶에서.

그런데 아깝게 내가 죽긴 왜 죽어?

아일라가 소설 속 악역답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샬럿을 괴롭히고 저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악녀만 아니면 되는 것 아냐?”

악녀 아일라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죽을 일도, 베르너 손에 메르텐시아 가문이 철저하게 짓밟힐 일도 없을 것이다.

“아일라에게 주어진 것만 누리면서 평생 살면 되잖아……?”

돈, 권력, 명예, 미모 모든 것을.

그녀는 금수저, 아니 금도 아닌 무려 다이아몬드 수저였으니까.

‘오오, 미련한 중생아. 정말 바보 같고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였구나.’

샬럿과 베르너만 필사적으로 피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였다. 그러면 일단 최소한 목숨은 건지게 될 테고, 내가 쓴 흑역사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고통에 몸부림칠 일도 없겠지.

‘애초에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놀고먹는 방구석 폐인이나 되면 되는 거잖아?’

하늘에서 한 가닥 광명이 비치는 것 같았다. 이것은 10년 전의 내가 나에게 준 선물인 게 틀림없다.

돈이 최고야.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랑보다는 돈을 믿는 썩어 빠진 어른이 되어 버린 나는, 악녀의 몸속에 들어와도 행복해질 수 있었다.

나는 내가 평생 꿈꾸었던 돈 많은 백수의 삶을 실천하기로 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