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악녀 메이커 3화
그렇게 시작한 돈 많은 백수의 삶은 행복 그 자체였다.
“어느 것을 고를까요―”
나는 책장 앞에 서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새것처럼 반질반질한 책들이 나의 간택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하나같이 진짜 가죽으로 된 고급스러운 양장본.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더니, 요 예쁜 것들은 그저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르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돈과 백년해로를 약속했다>라는 제목의 책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서재에 꽉꽉 채워져 끝도 없이 펼쳐진 책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름만 서재일 뿐, 이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양을 봤을 때…….
‘앞으로 50년은 문제없겠다.’
게다가 소설 속 세계라 그런지 그냥 역사서만 읽어도 재미있었다.
마치 대하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 같달까. 마법에 관련된 책은 말할 것도 없이 굉장히 흥미로웠고, 종교 서적마저 신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색달랐다.
그냥 좋아서 생각 없이 썼던 소설이 이렇게 탄탄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해 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이건 마치, 혼자 알아서 잘 커서 효도하는 자식을 보는 기분?’
평생 책만 읽고 살아도 좋을 것 같다.
아니, 오히려 평생 책만 읽으며 살고 싶었다. 전생에서는 현실에 정신없이 치여 사느라 책을 느긋하게 읽을 시간조차 없었으니까.
나는 책을 품에 안고 서재 밖을 나섰다. 복도를 거닐자 마주치는 사람마다 역병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기겁하며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아, 아가씨!”
“아가씨, 기, 기침하셨습니까!”
“…….”
사시나무처럼 덜덜 떠는 사용인들을 보니 참 만감이 교차했다.
귀찮게 굴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한 것도 없는데 천하의 나쁜 불한당이 된 것 같아 씁쓸하다 해야 할지.
그리고 나는 그간 경험으로 그들에게 살갑게 굴수록 오히려 더욱더 기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돈 많은 백수의 삶을 살기로 한 만큼 악녀 이미지 좀 바꿔 보려고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었는데, 과호흡 증상을 일으키다가 거품을 물고 실신하는 하녀까지 있었다.
‘이 무슨 살인 미소…….’
나는 잠시 시무룩해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내가 저번에…….”
“히익!”
“…….”
내가 말을 걸자, 하녀는 대단한 위협이라도 받은 것처럼 헛숨을 들이켜며 몸을 움츠렸다. 그에 어중간하게 들린 내 손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헉! 제, 제가 그만 무례를!”
“……됐어.”
내가 무슨 야생의 맹수도 아니고. 상처받은 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전에 주문한 링테 작가 한정판 언제 들어오는지 물어보려고…….”
“정말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건 내일 아침에 도착할 거예요!”
이걸 과연 그걸 대화라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하녀는 나와 대화하는 내내 동공을 떨어 대며 제발 벗어나고 싶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뭐, 원한다면 보내 줘야지.
나는 그녀가 기절할 것을 염려해서 최대한 표정을 굳히고자 노력하며 딱딱하게 말했다.
“알았어. 고마워.”
하녀는 못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굳어져 토끼처럼 콧구멍만 벌렁거렸다.
세상이 멸망할 징조라도 본 것 같은 저 표정은 뭔지. 대체 평소에 얼마나 귀신처럼 굴었기에 이런 너무한 취급을 받고 있는 거냐고.
과거의 나도 사교성과 담을 쌓은 사람이긴 하지만 아일라는 정도가 많이 지나친 것 같다.
세상에 사람이란 사람과는 전부 다 척을 지고 살아온 건가? 이 소설을 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상처를 치료해 줄 사람 어디 없나.’
철저히 고립된 나는 밀려오는 고독을 곱씹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기분이 우울할 때는 디저트를 먹어야지. 오늘은 쇼콜라를 달라고 할까. 언제 우울했느냐는 듯 콧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 저택의 요리사는 레테 제국에서 가장 유력한 공작 가문의 요리사라 그런지 실력이 아주 뛰어났다. 현대인의 까다로운 입맛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도 꼭 맞을 정도로.
‘에그 타르트, 밀푀유, 슈크림…….’
나는 주방으로 향하며 그에게 털어 낼 수 있는 온갖 메뉴의 디저트들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오늘도 디저트들을 한가득 받아 들고 방으로 올라가서 온종일 뒹굴어야지. 책 한 권만 읽어도 하루가 휙 지나 있을 것이다. 아일라로 지낸 한 달간의 삶이 그랬듯 말이다.
‘앗.’
나는 놀고먹을 생각으로 흐물흐물 풀어진 바보같이 미소를 짓다가 뚝 하고 걸음을 멈췄다.
맞은편에서 저택에서 마주치기 불편한 인사 2호가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슬란 메르텐시아.’
메르텐시아 가문의 후계자이자 아일라의 오라버니 되는 몸이시다.
황궁에서 일한다던 놈이 오늘따라 웬일로 빨리 돌아왔는지 대낮부터 멀쩡히 저택을 활보하고 있었다.
‘인사…… 해야 하나.’
하지만 내 솔직한 심정은 웬만하면 아는 척하고 싶지 않다,였다.
내가 책을 품에 안고 떫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아슬란도 나를 발견했는지 순간 허공에서 시선이 맞물렸다.
“…….”
“…….”
아니, 이렇게 데면데면할 수가.
아일라와 전혀 다른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것은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맣고 뱀의 눈처럼 번들거렸다.
그래서인지 한국인인 나에게는 익숙한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색 조합을 가진, 청순한 외모의 보기 드문 미청년인데도 거부감만 강렬했다.
아버지를 닮아 눈매가 날카로운 아일라와 다르게 아슬란은 어머니를 닮아 눈가가 붉고 눈꼬리가 처져서 어딘지 처연한 인상이었다.
물론, 감정이 조금도 비쳐 보이지 않은 서늘한 눈빛만큼은 그의 아버지와 빼다 박았지만 말이다.
나는 왠지 집요하게 느껴지는 그의 시선을 슬쩍 외면하며 벽에 붙었다. 그와 동시에 아슬란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수준하고는.”
그리고 그가 떠나면서 내 귓가에 대고 중얼거린 한마디는 내 혈압을 끌어 올리기에 충분했다. 분명 내가 들고 있는 책 <돈과 백년해로를 약속했다>를 보고 한 말이었다.
‘저런 잡놈이.’
갈 거면 얌전히 갈 것이지, 왜 가만히 있는 사람 시비를 걸어? 자기는 돈 안 밝혀? 재무 대신인 아버지 밑에서 악착같이 긁어모으는 주제에 청렴결백한 듯 말하고 있어.
하지만 그 돈으로 놀고먹는 빈대 같은 입장인 나는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등 뒤를 향해 얌전히 가운뎃손가락을 날릴 뿐.
음, 어떤 남매들은 서로를 소 닭 보듯 무시한다던데, 어떻게 보면 이것도 현실 남매인가. 로맨스 판타지 소설 보면 동생 바보들이 그렇게 넘치던데, 왜 나만 현실이란 말인가.
‘가정 환경도 참 악녀답다.’
어쩐지 한탄이 더 늘고 말았다.
내가 지난 한 달 동안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건 사용인들뿐이었다. 가족들은 날 본 체도 하지 않고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뭐, 가족이라고 해 봐야 아슬란과 아버지뿐이었지만.
그 이유는 아일라가 태어나서부터 계속 그녀의 아버지인 메르텐시아 공작에게 미움받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메르텐시아 가문의 공작 부인이었던 마가렛은 아일라를 낳다가 그만 죽고 말았는데, 그 때문에 공작은 아일라가 어미를 잡아먹고 태어난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공작은 대외적으로 철혈 대신이라고 불리고는 했지만, 아내를 끔찍이 사랑한 희대의 로맨티시스트기도 했다. 지금도 공작과 공작 부인의 운명적인 러브 스토리는 종종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오로지 마가렛에게 한정된 것으로, 그는 자식들에게도 철혈의 잣대를 들이대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머리도 나쁘고 사고만 치는 아일라는, 사랑하는 마가렛에게서 태어난 제 친딸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방치되어 자랐다.
메르텐시아 공작은 아일라가 어디서 뭘 하든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 정도의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눈곱만큼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내가 아일라의 몸에 빙의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만 봐도 알 만하지 않은가.
어차피 그에게는 이미 가문을 이을 똑똑하고 유능한 후계자가 있으니까 그럴 필요성도 없었을 것이다.
‘아일라가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악랄하게 행동하게 된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한 설정이었지……. 음, 직접 당해 보니 외로워 말라 죽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 설정 덕분에 돈 많은 백수라는 꿈을 이루었으니 크게 보면 이득이었다.
‘그래, 차라리 무시해서 다행이지 내게 사사건건 간섭했어 봐. 당장 가정 교사를 부르고 날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귀찮게 굴었을걸. 그랬으면 필연적으로 악녀가 되었을 테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나는 빠르게 자기 합리화를 마치며 수긍했다. 작가로서 아일라에게 조금 미안하면서도, 덕분에 이런 방구석 폐인의 삶을 보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것에 만족했다.
* * *
‘후…… 여기가 천국인가’
입에서 살살 녹는 디저트들을 한껏 먹고,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며 책을 읽다가 행복한 기분이 들어 몸을 뒹굴 눕혔다.
이런 나태하기 짝이 없는 잉여의 생활이라니, 50년은 더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맞다! 드디어 내일 링테 작가님 한정판을 영접하는 건가!”
링테.
그는 내가 쓴 창작물 속에 존재하는 게 경이로울 정도로 천재였다. 내가 그분 로맨스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마치 새로운 세상이 열린 듯했지.
유려한 문체도 문체였지만 특히 남자 주인공의 그 패왕 색기는 얼어 버린 내 심장을 다시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역시 남친은 종이 남친이라는 진리를 일깨워 주신 위대하신 분.
“……납치할까.”
나는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눈을 빛냈다. 가둬 놓고 황궁 출신 요리사의 음식을 삼시 세끼 꼬박 챙겨 드리면서 글만 쓰게 해 드리고 싶다.
전생이라면 절대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가 누구인가. 메르텐시아 공작가의 막내딸 아닌가. 납치는 당연히 범죄였지만 적어도 베일에 싸인 그 양반의 정체를 찾아내는 건 문제도 아닐 터였다.
‘응……?’
그렇게 말 못할 은밀한 야심을 품고 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순간 너무 위험한 생각을 한 나머지 내 내면의 세계가 그만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줄 알았다.
나는 잠시 놀라 멈칫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서서히 새까만 어둠에 먹히고 있었다.
‘아, 오늘 개기일식 일어난댔지.’
어쩐지 공작 아들놈이 오늘따라 일찍 집에 돌아온다 했다. 개기일식이 일어날 때 밖에 돌아다니는 건 제국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니까.
잠시 그 광경을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뒤늦게 눈을 질끈 감았다. 악! 개기일식은 맨눈으로 보면 실명할 위험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시선을 최대한 아래로 떨어트린 뒤 오늘 아침 제국 신문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이 <백합 아가씨> 소설 속 세계에서는 개기일식을 ‘팔링게아’라고 불렀다. 아마 고등학생 시절의 내가 그냥 개기일식이라고 하면 없어 보일 것 같으니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 거겠지…….
아무튼, 개기일식은 어느 세계에서나 역사적으로 불길함으로 통했고 그것은 이 소설 속 세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 소설의 배경인 레테 제국은 지난 1세기 동안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황권을 자랑했고, 침략 전쟁으로 영토를 끝없이 넓혀 왔다.
그리고 태평성대를 이루는 현재는 영원히 밤이 오지 않는다고 하여 ‘찬란한 태양의 땅’이라고도 불리는 대제국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제국 국민들은 황제의 상징인 태양을 가리고, 또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개기일식 팔링게아를 굉장히 두렵게 여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백성들이 팔링게아를 두려워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5세기 전 개기일식이 있었던 날에 일어난 ‘그 사건’ 때문이었다.
사상 최고 최악의 ‘악의 주술사 킬리안’으로 인해 왕국 하나가 통째로 하루아침에 증발해 버린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