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4화 (4/131)

# 4

악녀 메이커 4화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 또한 있는 법이었다. 소설의 설정으로 마법이나 신성력(神聖力)은 신의 힘을 빌린 신성한 힘이었고, 주술은 사악한 악마의 힘을 빌린 마력(魔力)이었다.

주술을 사용하는 것은 금기였다.

애초에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악마 숭배와 맞먹을 정도의 엄청난 중죄였고, 특히 5세기 전 그 사건 이후로 발각되면 곧바로 사형이었다.

소설을 쓸 당시 나는 아일라를 처형시키고 꽤 영향력 있는 공작 가문을 무너트릴 수 있는 명목이 필요했다. 그 모든 건 단순히 악녀를 처리하기 위한 설정에 불과했다.

‘그냥 달그림자가 태양을 가리는 우주의 섭리일 뿐인데 의미 부여하기는. 내가 쓴 거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 읽은 신문에서 하도 불길하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어느새 완전히 암흑으로 물든 세상을 내다보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다.

‘……뭐지? 왜 갑자기 불안해?’

잠깐만.

뭔가 짚이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개기일식…… 뭔가 있었나?”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기 위해 머리를 뒤적거려 보았지만 개뿔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려 10년 전에 쓴 소설이었다.

주요 등장인물 이름이나 중요한 설정, 전체적인 흐름은 흐릿하게 기억하지만 세세한 이야기를 기억할 정도로 천재는 아니었다.

“뭐, 굳이 기억할 필요 없지.”

나는 소설 속이고 나발이고 그냥 내가 누릴 수 있는 전부를 사골까지 우린 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거니까. 철저히 악녀의 삶을 살았던 아일라와는 전혀! 조금도! 관계없네요.

악랄한 악녀는 빠져 줄 테니 주인공들끼리 아무런 갈등 없이 알아서 지지고 볶고 잘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쩐지 자꾸 영문도 모를 오싹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하늘이 서서히 밝아져 올 때까지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다음 날.

나는 커튼을 투과하는 밝은 햇빛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켰다.

“날씨 좋네.”

역시 어제 걱정은 기우였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내 마음이 고생했으니 당분 처방을 내려야겠군. 오늘은 딸기 케이크, 너로 정했다.

“맞다, 링테 작가 한정판 오늘 들어온다고 했지? 침실까지 좀 가져다줄래?”

나는 일어나자마자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흥분했다.

무려 전 세계에서 딱 50권만 뽑는다는 링테 작가님 특별 한정판! 책이 오르골 안에 들어 있어서 책을 꺼낼 때마다 감성적인 멜로디가 들린다는 그거!

원래 지금 시기에는 절대 구할 수 없는 거였지만 세상에는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 내 이름으로 출판사에 직접 문의를 넣었더니 망설임 없이 단박에 오케이를 받았으니까.

‘돈 많은 덕후를 성공한 덕후라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지.’

돈이 없을 때엔 아무리 가지고 싶은 한정판이 나와도 살 수 없었던 설움을 드디어 풀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책이 내 품에 무사히 안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물론, 3세트 주문했다. 독서용, 소장용, 포교용으로. 그러다가 뒤늦게 나는 이 위대한 작가님의 소설을 포교할 친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 이번에 주문한 소설책 말씀이시죠? 내일 아침에 배달될 거예요.”

“……응?”

그런데 내게 오늘 아침 책이 배달된단 말을 전해 주었던 하녀는 왜 그걸 지금 찾느냐는 듯 말했다.

“내일……? 뭐? 그렇지만 분명 들었는걸? 어제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책은 내일 아침에 온다고 그렇게 말했잖아.”

“제가요? 그, 그런 적 없는데.”

띠용. 오늘 아침에 온다고 어제는 그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더니 갑자기 시치미를 떼며 말을 바꾸다니. 심지어 어제는 잘못 알았다는 사과조차 하지 않아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설마 얘네들 아일라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신종 괴롭힘인 것 아냐?’

요즘 하녀들은 무섭구나. 저렇게 순진무구한 얼굴로 아가씨를 막 농락도 하고.

소심한 것으로 둘째가라도 서러운 나는, 차마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하녀가 안절부절못하더니 오늘 자 신문을 건네주었다. 레테 제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읽히는 제국 신문이었다.

……그냥 조용히 닥치고 매일 아침 하는 것처럼 신문이나 읽으라는 걸까? 아무래도 요즘 하녀들의 이중성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나는 온갖 망상을 하면서 신문의 첫 장을 펼쳤다. 그리고 신문 헤드라인에는 ‘팔링게아의 날’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아직 잠이 덜 깼나?’

나는 일단 침착하게 눈을 비볐다가 떠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오늘은 13일, 팔링게아의 날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거, 어제였잖아.

“이거, 어제 자 신문인데?”

“예, 예? 13일 오늘 자 신문이에요. 팔링게아의 날이요.”

그러자 신문을 내민 하녀가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하녀를 살폈다. 왜 계속 날 농락하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는데, 그녀는 내 시선을 집중적으로 받게 되자 숨을 멈추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아가씨. 호, 혹시 제가 무슨 무례를…….”

“계속 거짓말을 했잖아.”

“저,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두려움을 억누르기가 힘든지 흉부를 들썩이며 말했다.

결백을 호소하는 눈빛은 매우 필사적이었다. 만약 저게 연기라면 하녀를 때려치우고 연극배우를 해도 될 수준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녀가 나를 놀리거나 장난치는,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행동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건…….”

설마.

“……하루를, 되돌아왔어?”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어제라니.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반쯤 혼이 빠진 상태로 중얼거렸다.

“그럼 링테 작가 베스트셀러 오르골 리미티드 에디션은……?”

“그, 그건 내일 아침에 도착할 거예요. 분명히 그렇게 들었는걸요.”

“에이, 말이 돼?”

나는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침대에 풀썩 누웠다.

하루가 돌아오다니, 아무래도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봐. 꿈에서 깨어나려면 자살이 최고라지만 꿈속에서라도 아픈 게 싫은 나는 평화적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잘 자.”

“네? 하지만 아가씨. 바, 방금 일어나셨는걸요? 여기서 더 주무시면…….”

하녀는 내 말에 ‘나무늘보 같은 걸로 진화할지도 모른다고요’ 같은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차마 말을 잇지는 못했다. 나는 그녀를 무시한 채 그대로 눈을 감고 이불을 덮었다.

거참 생생한 꿈이네. 나는 이불 속을 파고든 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를 기다리는 것은, 링테 작가님의 한정판이 아니었다.

다시, 13일이 되돌아왔다.

* * *

“이런 미친! 말이 돼!?”

나는 평생 입에 담지도 않았던 욕설을 꽥 뱉으며 손에 쥔 신문을 던졌다.

그러자 주변에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기립하고 있던 하녀들이 뭔지도 모르고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아가씨 죄송해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아가씨. 흐, 흐윽! 저희가 주, 죽을죄를 지었어요!”

“허어엉,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부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십시오! 아가씨, 살려 주세요! 저에게는 하나뿐인 동생이!”

누가 한 번 살려 달라 말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덜덜 떨면서 너도나도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묻지도 않은 가정사를 읊으며 울고불고 곡하고 아주 난리가 났다.

“…….”

나는 그들을 착잡하게 응시했다.

주변에서 호들갑을 떨면 오히려 이쪽은 침착해지게 되더라. 냉정함을 되찾게 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 난리 통 속에서 일단 침착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어’

나는 생선 동태 눈깔처럼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신문의 날짜를 바라봤다.

[13일, 팔랑게아의 날.]

하루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닌 현실이었고, 내가 기다리던 링테 작가 한정판은 영원한 버뮤다 삼각 지대에 빠져 버렸다.

“하하…….”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비현실을 따지는 것도 웃겼다. 그러려면 내가 쓴 소설 속 세계에 빙의한 순간부터 태클을 걸었어야지.

‘내 머리로 창조한 세계에 직접 들어오는 기적도 일어났는데, 뭐 갑자기 하루가 돌아가는 것쯤이야.’

그래, 사실 별거 아닌 일이지. 받아들이는 건 빨랐다. 문제는 대체 왜냐는 것이다. 대체 왜인 거죠? 예?

왜 하루가 반복되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내가 갑자기 미친 게 아니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있을 텐데, 그렇다면 뭐 신의 계시라도 좀 내려 주던가.

나는 머리를 싸매며 침대 위를 뒹굴었다. 하녀들이 나를 공포에 질린 시선으로 보면서 슬슬 뒷걸음질 치는 것 같았지만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하루가 돌아갈 테니까!

‘아냐, 그래 봤자 아직 고작 두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잖아? 계속 하루가 돌아갈지 어떻게 장담해?’

이건 그러니까 세계가 오류를 일으킨 거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것처럼 세계도 굴러가다 보면 실수를 할 수 있는 거지.

‘후…… 그래, 진정하자’

나는 흥분을 삼키며 심호흡을 했다.

그래, 까짓것 책 속에 빙의도 했는데 잠깐 하루가 돌아갈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지, 안 그래?

분명 일시적인 현상일 거다. 컴퓨터 게임도 틈만 나면 막 버그 생기고, 렉 걸리고 막 그러잖아.

‘일단 침착하게 평소처럼 살자’

세상이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라고 했다. 나는 하루가 돌아가도 꾸준히 백수처럼 살겠다.

결국, 나는 그날도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폐인의 삶을 보냈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 책을 읽으며 과자를 와삭거리다가 더없이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잠이 들었다.

하지만 내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 *

“으아아! 버그 좀 고쳐 달라고!”

운영자! 운영자, 일 안 해?

나는 또 신문을 냅다 던지며 발광을 했다. 그러자 하녀들이 바닥에 냉큼 엎드리며 빌빌거렸다.

“아가씨 죄송해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아가씨. 흐, 흐윽! 저희가 주, 죽을죄를 지었어요!”

“허어엉,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부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십시오! 아가씨, 살려 주세요! 저에게는 하나뿐인 동생이!”

어쩜 어제와 대사 하나 안 틀리고 똑같구나.

나는 눈가를 파르르 떨며 무려 아홉 번째, 똑같은 13일의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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