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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5화 (5/131)

# 5

악녀 메이커 5화

톡, 톡, 톡…….

유려한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남자는 어둠에 잠겨 그 행동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의 심기가 불편할 때 보이는 습관이었다.

하지만 그의 분위기가 평소의 배는 흉악했기 때문에, 손톱과 유리가 맞부딪칠 때마다 그의 측근 루이스의 고뇌도 깊어져만 갔다.

‘저렇게 화가 나신 건 또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나? 어제까지만 해도 평소 같으셨는데.’

루이스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남자의 눈치만 살피며 죽은 것처럼 숨을 죽이고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한 명 한 명이 전부 악명 높은 이들이었으나, 주군 앞에서는 꼬리나 흔들며 비위 맞추는 충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이스.”

“예.”

“기시감이라고 아나?”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그의 앞에 허리를 깊숙이 숙였던 루이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물론이죠. 최초의 경험임에도 어디선가 본 적 있거나 겪어 본 적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 아닙니까?”

뭐, 심리학자들은 기억 오류의 일종이라고들 하던데. 레제르브 신관 무지렁이들은 예지 능력이다, 신의 계시다 헛소리를 떠들어 대곤 하죠.

루이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물어보지도 않은 신관들의 욕을 덧붙여서 말했다. 그러자 그 말을 잠자코 듣던 남자가 살기를 담아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그 기시감이 아주 불쾌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느껴지는군.”

“허억! 예지 능력 아니십니까?”

루이스는 방금 자신이 신랄하게 까던 무지렁이와 똑같은 발언을 하며 눈을 반짝 빛냈다. 그리고 무한한 신뢰를 담은 목소리로 감탄했다.

“역시 대단하신 우리 군주님이셔!”

“예지 능력은 없어. 통찰은 있지만.”

“통찰력이라면 그게 그거 아닙니까. 크게 다를 것도 없는걸요! 오늘 일어날 일을 알 것 같으십니까? 뭔가 특별한 게 일어나나요?”

“널 죽이려 했었던 것 같아.”

“…….”

루이스는 알아서 입 다물고 찌그러졌다. 말 걸어 놓고 본전도 찾지 못한 꼴이었다. 그는 연신 주군의 눈치를 살피며 꼬리 만 개처럼 끙끙거렸다.

망자들의 땅, 로툴로의 왕.

그들의 군주는 대체로 영 무기력하고 얌전히 권태와 침묵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때 피에 미쳐 날뛰던 그의 본성이 악마보다 더 잔혹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건 전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뼈에 새겨진, 마치 각인과도 같은 공포였다. 그의 백성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분위기에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있던 측근들은 말없이 서로 격렬한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희생양으로 지목된 건 가장 먼저 경솔한 입을 놀린 바보 같은 루이스였다. 결국, 그는 모두의 살기 섞인 따가운 시선을 견뎌 내다 못해 결국 양팔을 걷어붙이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얼른 미리 준비되어 있던 포트를 주술로 뜨겁게 달군 뒤, 찻잔에 찻물을 따라 붓고 몰래 알약 형태로 된 수면제를 넣었다.

코끼리도 한 방에 잠재운다는 강력한 약이었으나, 주군에게는 그저 진정제 정도의 효과밖에 보지 못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전혀 효과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이스는 주군이 제발 진정이라도 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약이 뜨거운 찻물에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것을 착잡하게 응시했다.

“주군!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 데에는 차 만한 게 없지 않겠습니까!”

그는 김이 풀풀 풍기는 찻잔을 들고 옮기려고 했다. 그러자 남자는 전에 없이 흉흉한 살기를 내뿜으며 찻잔을 빤히 응시했다.

왜일까.

왜 이렇게 저 찻잔을 당장에 부숴 버리고 싶은 걸까.

“왜…….”

“예?”

“왜 널 진심으로 죽이고 싶은 걸까…….”

“아니, 제가 뭘 했다고!”

마침 주군이 마실 차에 수면제를 타고 난 뒤라 루이스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재빨리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렇게 루이스가 한 걸음 내딛는 그때.

“어억!”

그는 장애물이라곤 하나 없는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서 거짓말처럼 발을 헛디뎠다.

옛날부터 한결같은 바보짓으로 유명했던 루이스였다. 그가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는 사이에 접시 위에 있던 찻잔이 허공을 날았다.

루이스는 경악하며 얼른 팔을 뻗어 찻잔을 붙잡았다. 하지만 중력의 작용을 받은 찻물은 여전히 주군을 향해 맹렬히 달려들 뿐이었다.

촤아악―

“…….”

“…….”

“…….”

“…….”

책상을 톡톡 두들기고 있던 남자의 손가락이 뚝, 하고 멈췄다.

쏟아진 찻물을 모두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주군의 은밀한 곳으로 향했다.

미친, 쏟아도 저기에 쏟다니.

그것도 펄펄 끓는 뜨거운 찻물을.

고간 위에 떨어진 찻물을 보는 이들의 머릿속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어, 얼음! 얼음을 내와!”

“갈아입을 속옷과 바지를!”

“아니, 그 전에 닦을 수건!”

“주술로 말리면 되잖아, 바보냐!”

굳어 있던 그들은 순식간에 정신을 되찾고 왁왁 소리를 질러 댔다. 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동시에 이미 무덤에 들어간 고인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루이스를 돌아보았다.

루이스 본인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굳어졌다. 아무래도 눈을 뜬 채 기절한 듯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남자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이거였나.”

“주군! 지, 진정!”

“죽고 싶었던 거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편히 보내 줬을 텐데.”

현실의 악몽이자, 살아 있는 괴담.

웅크린 맹수처럼 얌전하게 지내던 주군의 이명을 떠올린 루이스는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조금씩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는 그는, 마치 신조차 제 발아래에 두고 있다고 믿고 있는 오만한 지배자 같았다.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만이 온통 루이스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평소에 감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주군은 늘 무기력하고 끓는점이 매우 높았다. 애초에 화를 낼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만약 오늘 같은 실수를 다른 날 저질렀다면 주군은 고간에 차를 쏟아도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조심해’ 한마디 하고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자신을 조각조각 능지처참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 아닌가. 무시무시한 살기는 분명 영혼까지 털어 버릴 기세였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주군의 심기가 불편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루이스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제, 제가 그만 죽을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부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주군 일단 깊이 심호흡을 하고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일은 이성을 가지고 침착하게 행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지를 되찾으시는 겁니다!”

“나 원. 편히 보내 준다고 해도 이리 어리광을 부리니, 내가 그동안 너무 응석을 받아 준 모양이구나.”

남자는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에게 할 법한 소리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임 없이 루이스의 등을 짓밟았다.

하지만 그는 속에서 자꾸 뭔가 걸리는 것 같은 위화감이 들어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미간 사이를 좁혔다.

왜 계속 이 상황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걸까. 오늘이 그 어느 때보다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마치 직접 겪은 것 같은…….”

그때, 말끝을 늘이며 잠시 멈칫하던 남자는 눈 사이를 좁히다가 순식간에 무언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온갖 단서들이 한순간에 명료해진 기분이었다.

아아, 그래.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다.

“기시감 따위가 아니군.”

“예?”

“실제로 일어났어. 수도 없이.”

“아 그렇군요…… 예?”

“하루가, 반복되는 건가.”

“예? 예에?”

남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끅끅대며 웃었다. 그런 그에게 짓밟혀 덜덜 떨고 있던 루이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주변에 눈짓을 보냈다.

‘하루가 반복? 저게 뭔 말이래?’

‘난들 알겠느냐고?’

‘주군이 아무래도 미쳤나 봐.’

‘저게 뭐야! 무서워! 무섭다고! 얌전하고 조용했던 주군을 돌려줘!’

지루해, 무료하군, 같은 말을 말버릇처럼 읊어 대던 때가 차라리 그리웠다. 그들은 열심히 서로 텔레파시를 보내다가 주군이 웃음을 뚝 그치자 다시 부동자세를 취했다.

“시간을 다루는 건 온전히 신의 관할일 텐데. ‘그’가 오랜 침묵을 깨고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모양이지?”

그는 봉인에서 막 깨어난 악마 같은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분명, 원인은 따로 있겠군.”

남자는 그렇게 말한 뒤, 루이스를 짓밟던 발을 치우고 이렇게 말했다.

“일단은 살려 주지.”

루이스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그대로 몸을 축 늘어트렸다. 주군은 귀찮고 사소한 건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저 말은 곧 살려 준다는 뜻이었다.

“인과율을 어그러트릴 정도까지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라…….”

삐딱하게 호선을 그린 입술은 분명한 흥미를 담고 있었다.

“재미있네.”

물론, 이 자리에서 그의 말뜻을 알아듣는 자는 없었다. 다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코트 위에 후드를 걸쳐 입기 시작한 그를 숨죽인 채 그저 바라봤다.

“설마, 숲 밖을 나가시려고요?”

그는 말없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자, 그 사이로 드러난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은빛 안광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늑대 같았다.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라면, 직접 목을 비틀어 주는 게 예의겠지.”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 * *

열 번째 13일이었다.

참다못한 나는 지난번 13일에 직접 출판사에 연락을 넣어 보았다.

전화 따윈 없는 아주 미개한 세계관이라 저녁쯤에야 답신이 도착했는데, 파발꾼에게 맡겼으니 출판사 측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 파발꾼 한 명 찾자고 수도 전체를 샅샅이 뒤질 수도 없고. 실제로 사람을 보내 보기도 했는데, 얼굴도 이름도 특정되지 않은 사람을 하루아침에 찾을 수는 없단다.

이래서 물건은 직거래해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출판사에 맡기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가는 건데. 그래서 대체 내 링테 작가 한정판은 어디서 헤매고 있는 거니. 증발했니?

“왜 돈을 줬는데 가져오질 못해!”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밀려오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또 발광했고.

“아가씨 죄송해요!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아가씨. 흐, 흐윽! 저희가 주, 죽을죄를 지었어요!”

“허어엉,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부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십시오! 아가씨, 살려 주세요! 저에게는 하나뿐인 동생이!”

열 번째 똑같은 대사를 들었다.

“후…….”

나는 분명 흡연자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담배가 당기네. 나는 하녀들이 멋대로 작사 작곡한 살려 달라 합창을 들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시간 속에 갇혀 버렸어.’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나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했다. 머리를 싸매니 뒤늦게 그 단어가 떠올랐다.

‘그래, 루프(Loop).’

루프(Loop).

고리처럼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 한정된 시간이 무한으로 반복되는 현상.

쉽게 말하자면, 같은 시간이 끝없이 반복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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