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악녀 메이커 6화
루프는 창작물에서도 흔한 현상이 아니었다. 물론, <백합 아가씨> 소설에서도 등장한 적 없었고 말이다.
심지어 하루가 돌아가는 걸 자각하고 있는 건 주위에서 나 한 명뿐인 것 같았다. 공작도, 그 아들도, 사용인들도 의문을 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충실히 오늘을 살아갈 뿐이었다.
‘게다가 초 단위로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계속 반복하고 있고…….’
나는 일단 침착하게 내 처지를 파악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상황이냐 하면은,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홀로 고립된 상황이라고 한단다.
“하하, 거지 같네.”
나는 공허한 웃음을 터트렸다.
가뜩이나 개똥벌레처럼 친구도 없고 가족도 있으나 마나 한데 루프에 갇혀 홀로 고립되기나 하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내가 바로 이 구역의 외톨이, 아웃사이더 신이었다.
‘빙의도 모자라서 동시에 루프라니,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고!’
내가 아무리 덕질 인생 28년 차라지만 순순히 받아들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대체 세상은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걸까? 10년 전 흑역사 속에, 그것도 가장 비참하게 죽는 악녀 몸속에 집어넣질 않나, 금수저가 된 김에 평생 맘 편히 누리지 못했던 취미 생활이나 즐기겠다는데 루프를 일으키지 않나.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데, 보상 받을 시간은 좀 더 줘야 하는 것 아니냐, 이 망할 것들아.’
새삼 서러워서 눈물이 다 난다.
벌써 열 번이나 하루가 반복됐으니 백 일이라도, 천 일이라도 끝도 없이 반복될 것이다.
그래, 그건 어떻게든 참는다고 치자. 사실상 백수가 뭐 하루가 열 번이나 반복되든 백 번이나 반복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가장 큰 문제는, 내가 핥는 작가님의 신작을 볼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런 건 나에게 있을 수 없어!’
내가 뭣 때문에 이런 살아 숨 쉬는 흑역사 속에서 버텨 낼 수 있었는데? 다 링테 작가님 덕분인데? 시리즈 소설 다음 권을 보지 못하면 나는 말라 죽어 버리고 말 거다.
‘이대로 13일에 죽을 순 없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날 이렇게 만든 놈 얼굴에 죽빵을 날리기 전까지는 억울해서라도 못 죽는다, 내가.’
어떻게든 다음 날로 넘어가야 했다. 나는 링테 오르골 한정판을 무슨 일이 있어도 받아 봐야겠어!
하지만 어떻게 해서?
루프를 자각하는 건 나뿐이니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달라지는 게 없을 것 아닌가.
결국 계속 이런 도돌이표였다.
나는 지난 열흘간 계속해 왔던 번뇌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탁자 위에 있던 책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12일에 다음 날 읽으려고 침대맡에 두었던 책이었다.
‘이젠 표지 보는 것도 짜증 난다.’
물론 내가 열흘 동안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설마 집구석에만 있는 게 문제인가 싶어서 개기일식이 일어나기 전에 마차 타고 밖에 나가 보기도 하고, 길거리를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보다시피 전혀 효과는 없었다. 아무래도 가장 먼저 이 루프 현상의 원인부터 알아야 할 것 같은데, 10년 전 소설이라 소설 내용도 가물가물해서 잘 기억나지도 않고.
‘서, 설마 내 흑역사, 아니, 주인공들이랑 만나야 하는 거라든지…….’
아, 제일 생각하기 싫은 가설이 생각나 버리고 말았다. 여러 의미로 주인공들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침대 위로 던지면서 꽥 소리를 질렀다.
“아, 진짜 미치겠네!”
그런데 그때였다.
“꺅!”
“……!”
분명 책을 침대 위로 던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너무 흥분한 탓인지 조준이 엇나가서 책이 옆으로 날아갔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비명에 당황해서 설마 하고 옆을 돌아보았다. 하녀 하나가 이마를 붙잡고 자리에 주저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헉.”
내가 사람을 꽃도 아니고 책으로 때리다니. 아무리 실수라지만 처음으로 겪는 일에 너무 놀라서 헛숨을 삼키며 뻣뻣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아, 아가씨…….”
그런데 내 굳은 얼굴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이마를 맞은 하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리더니, 푸르죽죽하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 저승사자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덜덜 떨면서 큰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마치 치와와 같았다. 마침 눈도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색이고 머리카락도 연한 갈색이라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가녀리고 연약한 작은 동물 같은 이미지랄까.
그래서 왠지 더 죄책감에 짓눌리고 있는데, 어쩐지 저 얼굴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 잠깐만. 쟤 저번에 내가 다정하게 웃으면서 얘기했다고 거품 물고 실신한 애 아니야?’
걔 맞잖아!
나는 하필 걸려도 저렇게 심약한 애가 걸렸나 싶어 눈앞이 다 깜깜해졌다. 사과라도 했다간 아주 돌연사를 할지도 모르겠는걸.
순간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왠지 괜찮으냐고 물어보기도, 그렇다고 사과를 하기도 어려운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에 식은땀이 다 흘렀다.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누가 치료할 것 좀 가져와 봐.”
“……!”
하녀들은 제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다친 사람을 치료한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도 가지고 있었어?’ 하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반응이라 단호하게 덧붙여 말했다.
“빨리.”
그러자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들 재빨리 움직였다.
악녀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는 공포 때문인지,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하녀들은 지목당한 하녀를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보듯 하더니 조금도 미련 없이 떠나갔다.
‘그렇다고 다 나가 버리다니…….’
나는 홀로 남은 사슴 같은 순진한 눈망울의 어린 하녀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미안, 하고 말을 꺼내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미…….”
곧 죽을 것처럼 경련하던 그녀는 갑자기 바닥에 넙죽 엎드리더니 땅에 머리를 쾅쾅 박기 시작했다.
……잠깐만.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살려 주세요! 아가씨 저, 정말 죄송합니다!”
“…….”
“제가, 제가 도비엘라가 나쁩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허엉엉!”
“자, 잠깐.”
뭐야, 자해 공갈단이야?
도비엘라가 쾅쾅 머리를 박을 때마다 이마가 찢어지더니 바닥에 피가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손쓸 새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돌발 행동도 정도가 있지, 설마 갑자기 이마를 박고 자해할 줄이야. 나는 하도 당황스러워서 할 말을 잃었다.
거품 물고 기절할 때부터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너는 여기서 하녀 할 게 아니라 어디 가서 심신의 안정을 취해야 하는 거 아니니. 솔직히 당황스럽다 못해 무서웠다. 무서워서 뭐라고 말도 안 나왔다.
“아, 아가야 좀 진정…….”
공포가 따로 없었다. 나는 돌처럼 굳어 버린 채 입술만 달싹이다가 저러다가 죽겠다 싶어서 일단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꺄아아악―!”
그러자 도비엘라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 질렀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처절한 비명에 내 귀청은 그대로 터져 버리고 말았다.
아아, 그는 좋은 고막이었습니다. 나는 테러당한 귀를 움켜쥐며 잠시 비틀거렸다.
“조용히 안 하면 잡아먹는다!”
도저히 도비엘라를 진정시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아무 말이나 필사적으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린단 말도 때려 버린단 말도 너무 심한 말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합, 하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눈에서는 닭똥 같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도비엘라는 자, 잘 모르겠지만 아가씨께 죽을죄를 지었어요! 아, 아! 알겠어요! 가만히 서 있다가 책을 맞았어요! 둔한 도비엘라가 나빠요! 하, 하지만 죽고 싶지 않아요, 아가씨. 제발 잡아먹지 말아 주세요!”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정신없이 쏟아지는 대로 말을 뱉었다. 눈이 풀린 걸로 보아 본인이 뭐라 하는지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본인의 이름을 3인칭으로 부르는 거지.’
악녀의 저택에 이런 개성 넘치는 캐릭터가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옷소매로 그녀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 주었다.
‘어휴, 흉지겠다.’
그렇게 무서웠던 건가.
하긴, 기껏해야 열셋, 열넷 정도로 보이는데. 하녀 중에서 가장 어린 듯한 그녀에겐 지금 상황이 이성을 잃을 정도의 극한 공포로 느껴졌을지도 몰랐다.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네. 왠지 남 일 같지도 않고. 나도 어릴 때부터 갖은 고생은 다 하고 자랐으니까.
왠지 안쓰러워서 괜찮다고 토닥여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쟤가 너무 놀라서 심장 마비로 죽어 버릴 것 같았다. 진짜 그럴 가능성 있어…….
나는 일단 그녀가 자해를 멈출 만한 말을 했다.
“바닥에 피가 묻잖니.”
“허어억! 도비엘라는 정말 멍청해요! 아가씨의 방바닥을 더럽히다니!”
“그래, 방바닥이 지저분해졌잖아. 그러니까 다시는 하지 마.”
“흐윽, 아가씨. 정말 잘못했어요. 얼른 치울게요.”
그러면서 도비엘라는 옷소매가 걸레라도 되는 것처럼 막 바닥을 훔쳤다.
……제발 그러지 좀 말아 줄래!
도비엘라는 정말 하염없이 울었다. 저러다가 탈진해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말이다. 나는 대체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멍청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평범한 어린애라면 뚝 그쳐, 하면서 사탕이라도 쥐어 주든가 하지 쟤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폭탄 수준이라. 누가 내 담당 하녀로 저런 폭탄을 던져 준 거냐.
‘인생…….’
나는 우울해졌다. 가뜩이나 루프의 굴레에 갇혔다는 우울함과 더해져 인생 타령을 할 지경에 이르렀다.
대체 나는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나는 왜 사는가. 그야 덕질 하려고.
‘음, 꼭 살아남아야겠군.’
의식의 흐름 끝에 결국 무슨 일이 있어도 루프를 멈춰야겠다는 결론을 얻은 나는, 뒤늦게 현실로 돌아왔다.
여전히 바닥을 박박 닦고 있던 도비엘라는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잡아먹지 말아 주세요. 잡아먹지 말아 주세요.”
안 잡아먹어…….
쟤는 그냥 가만히 놔두는 게 최선일 것 같아.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앞으로 되도록 그녀에겐 말도 걸지 않고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 * *
다음 날 아침.
이른 오후에 눈을 뜬 나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뭐야, 지금 몇 시야…….”
“오후 한 시입니다, 아가씨.”
“오…….”
잠은 잘수록 는다더니, 요즘 내 수면 시간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 같았다.
웬만하면 무서워서 날 가만히 놔두던 하녀들도 한두 마디씩 하는 걸 보면 좀 자제해야 하나.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우중충하고 공기는 꿉꿉했다.
비가 내릴 전조였다.
이상하네, 항상 화창하더니. 루프 중에 날씨가 바뀔 수도 있나?
“신문 좀 가져다줄래?”
나는 일어나자마자 습관처럼 신문을 찾았고, 하녀는 내게 신문 대신 선물 상자를 안겨 주었다.
“……응?”
“주문하신 책이 도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