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7화 (7/131)

# 7

악녀 메이커 7화

“어?”

나는 바보 같은 의문사만 반복하며 건네받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꼼꼼하게 쌓인 포장지를 뜯어보았다. 사실 아직 잠에 덜 깬지라 그냥 무의식적인 행동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드디어 열어 본 상자 속에는 ‘링테 작가 베스트셀러 오르골 리미티드 에디션’이 들어 있었다.

‘뭐, 뭐야. 꿈인가?’

너무 갈망한 나머지 이런 현실적인 꿈을 꾸는 건가? 내가 되찾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써도, 버뮤다 삼각 지대에 빠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책이 왜 여기에?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오르골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러자 핑크빛으로 염색된 영롱한 빛깔의 양장본 가죽 표지가 보였고, 심금을 울리는 멜로디가 내 침실을 가득 채웠다.

‘……와, 진짜 곡 좋다.’

작가님이 소설을 쓰면서 직접 작곡한 거라고 들었는데, 링테 당신이란 사람은 대체. 나는 이 팔방미인을 납치하고 싶다는 욕구에 더욱 불타오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잠깐, 이 책이 내 품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오늘, 14일이야?”

“네.”

“정말!?”

“네? 네!”

“시, 신문! 신문 줘 봐!”

나는 정확하게 다음 날로 넘어갔다는 확인 사살을 받고 싶었기에 하녀에게 재촉하듯 신문을 요구했다.

왠지 하녀가 전보다 더 심각하게 겁에 질려 호흡 곤란마저 일으키려고 했지만,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꾹 누르며 신문을 펼쳤다. 신문은 오늘도 어김없이 제국 신문이었다.

그리고 날짜를 살핀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만세를 부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헐, 대박! 대박!

“오늘이 14일이야!”

“네? 네! 14일이죠!”

“오늘이 14일이다!”

“14일입니다!”

“꺄아아악―!”

나는 감격에 젖어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신문을 허공에 던지며 침대 위에 올라가 콩콩 뛰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일 때도 하지 않던 짓이지만 지금은 누구도 날 막을 순 없지!

“아가씨, 지, 진정해 주세요!”

닥쳐! 진정은 도비엘라한테나 가서 찾아! 나는 평생 갇혀 있을 뻔했던 루프의 공포에서 막 벗어났다고!

잠깐만, 근데 왜 다음 날로 넘어간 거야? 루프가 처음 시작할 때만큼이나 뜬금없이 다음 날로 넘어갔잖아.

나는 그대로 하던 행동을 뚝 멈추며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이다가 뒤늦게 뒤집어진 오르골을 발견했다.

헉, 내 한정판!

나는 재빨리 오르골을 원래 있던 상자에 소중히 담아 내 침실 한구석에 고이 모셔 두었다.

‘……응?’

링테 작가 한정판을 만났다는 기쁨에서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그제야 주위의 공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하녀들의 상태가 평소보다 심각했다.

겁에 질린 정도가 아니라 실시간으로 독이라도 흡입하고 있는 것 같은 끔찍한 얼굴들인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 갑자기 모시던 아가씨가 추태를 부리며 침대를 뛰고 영문 모를 소리를 해 대면 무서울 만도 하지. 생각해 보니 그건 꽤나 공포였다.

제법 그럴듯한 추측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다고 쳐도 뭔가 이상했다. 내가 루프에 갇혀 있는 동안 혼잣말을 한다거나 미쳐 날뛴다거나 온갖 이상한 짓을 다 했을 때도 저 정도로 무서워하지는 않았는데.

그때, 이마에 붕대를 감은 채 바닥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도비엘라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내가 실수로 던진 책에 도비엘라가 맞은 걸 보고 잠잠하던 악녀가 또 깽판을 쳤구나, 한 건가?

본의 아니게 도비엘라의 이마가 찢어지긴 했지만 덧나지 말라고 열심히 치료도 해 줬는데.

‘아니면 도비엘라가 자해한 흔적을 내가 만든 거라고 착각한 건가?’

하긴, 걔가 바닥에 머리 박고 자해하는 광경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저 하녀들은 내가 도비엘라의 머리채를 붙잡고 막 바닥에 내리치든지 해서 이마를 깼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호, 호러블.’

갑자기 의문의 아동 학대범이 되어 버린 나는 굉장히 억울했다. 대체 이 억울함을 어디에 호소하고 해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어? 잠깐만. 설마…… 이거…….’

뭔가 감이 잡힐 듯 말 듯했다.

빙의한 이래 한 달 동안이나 아무런 일도 없다가 왜 하필 개기일식 날 루프가 시작되었을까?

‘그날, 뭐가 있었지?’

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려고 머리에 쥐가 나도록 노력했다.

그러다가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한 줄기의 기억이 있었다. 순간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아일라가 샬럿에게 계속 질투심을 느끼다가 결국 악녀로 각성하는 날이잖아! 괜히 저택의 사용인들한테 행패를 부리면서 샬럿을 욕하는!’

그 장면이 왜 하필 개기일식이냐면, 처음 등장하는 악역이 어둠 속에 잠겨 악랄한 짓을 하며 깔깔거리는 건 예로부터 온갖 창작물에서 사용된 낡고 낡은 클리셰 아니겠는가.

아마 그만큼 아일라는 잔혹하고 악랄하며, 그런 악녀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샬럿에게는 앞으로 견디기 힘든 고난이 닥칠 거라는 일종의 예고편 격의 연출이었을 거다.

10년 전의 나는 저걸 쓰고 ‘역시 악녀는 이래야지.’ 하면서 뿌듯해했겠지. 타임머신 발명되자마자 찾아가서 죽여야 할 1순위 같으니.

나는 지금까지 내게 주어진 중구난방으로 흩어진 단서들을 다 종합해서 생각해 보았다.

첫째, 나는 악녀의 몸에 빙의했다.

둘째,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들과 최대한 엮이지 않고자 저택에서 조용히 책만 읽으면서 숨죽여 살았다.

셋째, 빙의 후 한 달 뒤, 개기일식 날에 갑자기 루프가 시작되었다.

넷째, 실수로 도비엘라에게 행패를 부린 꼴이 돼 버렸다. 하녀들 사이에서 어린 애 이마를 깬 천하의 나쁜 불한당이 되었다.

다섯째, 그랬더니 루프가 끝났다?

모든 단서가 내게 딱 한 가지 결론만을 알리고 있었다.

소설의 아일라처럼 악녀 같은 짓을 했더니, 루프가 끝났다는 것.

‘망할…… 그럴 리가 없어.’

나는 탐정도 아니었고 궁예도 아니었다. 관심법 같은 건 쓸 수도 없는데 저 가설이 맞을 리가 없어. 아무렴, 세상이 아무리 엿과 같다지만 내게 그렇게 가혹할 리 없었다.

‘하지만 소설에서 악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또 루프가 일어나면 진짜 빼도 박도 못하겠지.’

한 번 일어난 루프, 두 번이라고 일어나지 말란 법 있나.

나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머리를 쥐어뜯다가 일단 <백합 아가씨> 소설 내용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라는 결론을 내렸다.

손발이 사라질까 봐 애써 외면하고 있던 10년 전 흑역사를 제대로 들춰 봐야 할 때가 오고 만 것이다.

‘언제까지고 모른 척할 수 없으니까 내용을 생각해 봐야…… 하지만, 내가 악녀가 되면 결국 죽잖아. 배드 엔딩도 아니고 데드 엔딩이잖아.’

흑역사도 흑역사였지만 악녀가 되었다간 비참하게 죽으니까 포기한 거였잖아. 잠시 침묵하던 나는 침착하게 현실 도피를 하기 시작했다.

‘후, 안 쓰던 머리를 썼더니 갑자기 현기증이 몰려오네. 몸속에 곧바로 당분을 주입해야 할 것 같아.’

나는 링테 작가 한정판 오르골을 품에 안고 수집품을 전시해 둔 방으로 향했다. 파르페라도 먹으면서 도착한 소설을 읽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 하나 가만히 지켜봤더니, 이건 무슨 짐승이 따로 없군. 눈감아 주는 것도 정도가 있어.”

예상치도 못했던 인물로 인해 그 즉시 현장에서 검거되어 방 밖으로 질질 끌려 나왔다.

* * *

저택에서 마주치기 불편한 인사 2호는 이미 소개해 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1호가 지금 내 바로 앞, 손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돌연 질질 끌려와 식당에 앉혀진 나는, 반대편에 앉아 있는 메르텐시아 공작의 눈치를 살폈다.

빈센트 메르텐시아.

아일라를 그대로 남자로 바꾼 뒤 20년쯤 지나면 저렇게 생겼을 것 같은 붉은 머리의 미중년이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귀족이라는 두 글자를 사람으로 만들면 저런 모습을 하고 있겠지. 메르텐시아 공작은 아일라의 아버지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행동 하나하나에 품위가 넘쳤다.

그리고 빈틈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단정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꾹 다문 입매와 굳은 표정에서는 숨길 수 없는 아집이 엿보였다.

“왜 그러고 보는 거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내게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아니, 그쪽이 날 불렀으니 보지.’

그는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여태 슈미즈 차림을 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나는 불편한 분위기에 눈동자를 굴리며 몸을 이리저리 꼬다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최근 네 행실은 전해 들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 같더군. 그 좋아하던 사교 모임에 아프다는 웃기지도 않는 꾀병을 대 가며 전부 거절하지 않나, 한 줄도 제대로 읽지 못하던 책을 사들이지 않나.”

딸에게 개미 뒷다리만큼의 관심도 없을 줄 알았던 공작이 생각보다 날카롭게 파고들어 왔다.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죽죽 흐르는 것을 느끼며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본론을 꺼냈다.

“널 가르칠 사람을 두기로 했다.”

“……네?”

청천벽력 같은 일방적인 통보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벌렸다. 그런데 그는 그런 내 얼빠진 반응마저 못마땅한지 콧잔등을 찌푸렸다.

“갑자기 목과 허리가 왜 그렇게 굽은 거지? 못 본 사이 몹쓸 병이라도 걸린 건가?”

“아, 아니. 자세의 문제 아닐까요.”

습관처럼 구부정하게 앉아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얼른 허리를 폈다.

“믿을 수가 없군. 발전은 하지 못할망정 퇴화를 하고 있으니. 거기서 더 밑바닥이 있는 모양이야.”

그게 딸에게 할 소리입니까!

그는 상대를 모욕하는 게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해 보였다. 그런데 저 신랄한 말투가 어딘지 익숙했다.

그것도 굉장히.

‘부전자전.’

나는 공작과 외모는 전혀 달라도 하는 행동과 눈빛, 말투가 한 치도 다름없이 똑같은 그의 아들 아슬란을 떠올리곤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저 두 인간은 살갗 밑으로 파란 피가 흐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경박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은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어. 대체 그간 배운 예법은 어디로 간 거지?”

그런 건 제게 애초에 없었는데요.

예법이 다 뭐람. 대한민국을 살아가던 흙수저 중 한 명이었던 나는, 예법이란 걸 배우기 전에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뛰어다녀야 했다. 그런 게 귀족 몸에 빙의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게 아니지.

그런 면에서는 차라리 아일라의 몸속에 빙의한 게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악녀 역할을 하느라 교양도 없고 무례했으니까.

“들여보내.”

그때, 공작이 찻잔을 다시 들어 올리며 고상하게 말했다. 이미 내 쪽에는 완전히 관심을 끊은 태도였다.

그러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발렛의 안내를 받은 누군가가 응접실 내부에 들어섰다. 큰 키를 봐서는 남자인 듯한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후드를 덮어쓰고 있어서 어디로 보나 수상쩍은 인물이었다.

‘웬 후드?’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홀로 완전히 동떨어져 고요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나는 본능적인 이질감을 느끼며 남자를 살폈다. 유일하게 보이는 건 조각상처럼 매끈한 턱선과 모양 좋게 자리 잡은 붉은 입술뿐이었다.

남자는 보는 사람 기운도 다 빠질 것 같은 의욕 없는 몸짓으로 어둠을 끌고 한 발짝씩 가까워졌다. 어딘가 나른하게 늘어진 동작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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