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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8화 (8/131)

# 8

악녀 메이커 8화

그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바닥을 긁는 것처럼 낮은 음성이었다.

“오늘부터 아가씨를 모시게 된…… 흠, 세바스티안이라고 할까요.”

그 집사의 정석 같은 이름은 대체 뭐야.

나는 어쩐지 급조한 티가 팍팍 나는 자기소개에 미묘한 표정을 했다. 대놓고 실명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저 사람 정말 괜찮은 거야?

“저는 앞으로 아가씨께 예법, 사교술, 예술 등 기본적으로 필요한 여러 교양을 가르쳐 드릴 예정입니다. 아가씨의 가정 교사 겸 개인 집사로 고용되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군요.”

가정 교사 겸 개인 집사? 지금 당장 악마라도 소환할 것처럼 음침하기 짝이 없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어디 하나 지적하지 않을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분명 존대를 듣고 있음에도 이상하게 위압감에 짓눌릴 것 같은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먹이 사슬 최상위 포식자를 마주친 초식 동물의 기분이 이러할까. 저 남자를 보자마자 내게 있는지도 몰랐던 야생의 본능이 깨어나고 있었다.

나는 온몸으로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남자에게 시선을 돌려 황당한 얼굴로 공작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까까지 날 몰아세우던 깐깐함은 다 어디다가 치워 버렸는지, 저 괴상하기 짝이 없는 남자를 보고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농담이지?’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 상황을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건 나 혼자밖에 없는 것 같았다.

“자네는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아게이트 자작 가문의 차남이라 들었으니 기대하고 있는 바가 크네. 날 실망하게 하진 않을 거라 믿지.”

“물론입니다.”

대체 저 수상하기 짝이 없는 후드 덩어리의 뭘 보고 기대하고 뭘 보고 실망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나는 도저히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시만요, 왜 후드를 벗지 않죠?”

가정 교사 겸 개인 집사로 고용된 거라면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정장을 입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얼굴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몸을 후드로 꽁꽁 싸매고 있는데 왜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

그러자 공작은 내 말에 남자를 위아래로 훑은 뒤, 생트집을 잡는 어린아이를 보듯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는 어디로 보나 완벽한 집사이거늘. 꼿꼿한 자세부터 옷매무시까지 어디 하나 흐트러진 구석이 없군.”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져 있는데요. 다들 단체 최면에 걸리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내가 미친 걸까.

당연한 의문을 품었을 뿐인데 환장할 대답만 돌아왔다. 이걸 두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다고 하는 것일까.

그런데 그때.

“호오.”

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었다. 후드 너머로 언뜻 산란하는 두 쌍의 잿빛 눈동자를 본 것 같았다.

“그렇게 보이시는 모양입니다?”

남자는 마치 ‘내가 보여?’ 하고 묻는 귀신처럼 섬뜩하게 말했다.

입꼬리는 살짝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태어나 한 번도 제대로 웃어 본 적 없는 것 같은 고집스러운 미소였다.

“역시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군요.”

“…….”

집사가 수상한 혼잣말을 하는데요. 공작님, 쟤 좀 쫓아내 주세요.

하지만 역시나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맞은편에 앉은 공작을 관찰했다.

‘어어?’

그런데 그의 짙은 녹색 눈동자가 마치 약을 한 사람처럼 동공이 미묘하게 풀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워낙 제정신인 것처럼 또박또박 말하기에 알아차리는 게 늦은 것이다.

‘……진짜 단체 최면에 걸렸어?’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했다.

한 달 동안 조금도 날 신경 쓰지 않던 공작이 사전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서는 다짜고짜 가정 교사 겸 집사를 두겠다니.

그렇게까지 딸을 신경 쓰는 아버지였다면 소설에서 아일라가 철저히 망가질 때까지 방관하지는 않았을 거였다.

‘그럼, 저 남자는 대체 누구야?’

나는 순간 오싹하고 오한이 들어서 팔을 감싸 안으며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내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를 입 밖에 낸 것처럼 말이다.

“아, 아뇨. 지금 다시 보니 고, 공께서는 정말 타의 모범이 되는 분 같네요. 역시 아게이트 가문의 명성은 어디 가지 않나 봐요. 하, 하하…….”

원래 남들이 다 못 보는 게 혼자 보이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 공포물의 생존법이거늘, 바보 같은 윤하늘!

하지만 설마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서 갑작스럽게 장르 변경이 일어날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나는 머릿속이 하얘져 아무 말이나 뱉었다.

“그런데…… 지나치게 완벽해서 제가 감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할까요…….”

“무슨 실없는 소리를 하는 거냐.”

빨리 저 정체불명의 귀신을 쫓아내 달라는 실없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내 발언은 그의 관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아까부터 나를 노골적으로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얼굴이 꿰뚫릴 것만 같았으니까. 망할.

‘아게이트 가문의 차남인지 뭔지는 절대 아닐 거야. 위조 신분이 분명해.’

나는 있는 기억 없는 기억을 쥐어짜 저 새까만 후드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법사?’

확실히 샬럿의 어장 속 물고기 중에서 대마법사가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그런 사람이 갑자기 메르텐시아 공작가 저택에서 집사 노릇을 할 리가 없다.

무엇보다 서재에 있던 책에서 읽었는데, 최면 마법은 대마법사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도록 법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했다. 하물며 황제라고 해도 각국의 정상들과 수차례 상의해야 할 정도였다.

애초에 아무나 쓸 수 없을 뿐더러, 악용할 경우 세계를 쥐고 흔드는 것도 가능할 만큼 위험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특별히 관리되는 것이다.

‘그리고 불법으로 최면 마법을 사용했다가 추적 마법에라도 걸리면 마법부에서 검거하러 온다고 했는데.’

수도 중심가에 있는 메르텐시아 저택에서 그런 대담한 짓을 하면 현장에서 바로 붙잡힐 거다.

그렇다면 최면 마법은 아닌 건가. 그럼 뭐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마약이라도 태웠어? 왜 나한테는 전혀 통하지 않는 거지? 그리고 저 남자는 왜 내가 최면에 걸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자 ‘제대로’ 찾아왔다고 말한 걸까.

나는 과부하에 걸린 머리를 감싸 쥐며 고뇌에 빠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강렬한 생존 욕구 하나는 확실했다.

“이번 돌아오는 수확제에 열리는 황궁 무도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예의범절을 가르쳐 줬으면 좋겠군.”

“맡겨 주시지요.”

또 그의 입꼬리가 묘한 호선을 그렸다. 미소라기에는 어딘가 어색하지만 분명 순수하게 즐거워 보였다.

입매부터 성격이 나빠 보이는 그는 숨을 들이쉬어 크게 흉부를 들썩이다가 담배 연기 같은 숨소리를 입술 사이로 뱉어 내며 중얼거렸다.

“시간은 충분합니다. 굳이, 하루가 반복되지 않더라도 말이지요.”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심장이 뚝 떨어져 내린다는 게 뭔지 제대로 실감하고 말았다. 철렁한 심장을 부여잡고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돌아보니 남자의 웃음이 짙어져 있었다.

‘방금,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잘못 듣기는 개뿔 노골적으로 나 들으라고 꺼낸 말이 틀림없었다.

루프를 자각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눈물을 흘리며 서로 얼싸안고 같이 이 난관을 헤쳐 나가자, 하고 희망찬 내일을 볼 줄 알았는데. 불행히도 저 남자는 희망찬 내일은커녕 내일이 없게 만들어 줄 것 같다.

‘왜 하필 저런 사람이야…….’

대놓고 널 잡으러 왔다고 선언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나는 머릿속으로 열심히 도주 루트만 그리고 있었다. 물론, 아무리 맷돌을 굴려도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럼 가실까요, 아가씨?”

“하하, 망했네.”

남자는 내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와 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뒤, 에스코트하듯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집사 행세를 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이렇게 막돼먹은 집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 완전히 경직된 날 두고 그가 낮고 섬뜩한 웃음소리를 냈다.

“저런, 그렇게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편안하게 모시도록 하지요.”

어, 어디로? 저승으로?

그야말로 질질 끌려갔다.

남자의 무지막지한 힘 때문에 몸을 비틀고 버둥거려도 조금도 소용이 없었다.

* * *

악마 같은 남자가 날 죽이려고 지옥에서 기어올라 왔다.

나는 세바스티안이라는 가명을 쓴 남자의 손에 의해 응접실 밖으로 끌려 나왔고, 곧바로 근처에 있던 빈방에 처넣어졌다.

“귀, 귀신이면 썩 물러가고, 사람이어도 제발 물러가 주세요…….”

나는 최대한 벽 쪽에 찰싹 달라붙으며 중얼거렸다. 귀신이든 사람이든 저 남자라면 무섭긴 매한가지였다.

“우리 아가씨께서는 재밌는 농담도 하실 줄 아시는 모양입니다.”

어, 언제 봤다고 우리 아가씨야.

피차 정체도 대충 까발려진 마당에 아직도 집사인 척 내숭 부리는 그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남자는 맹수가 포위망을 좁히듯 서서히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키는 또 얼마나 큰지, 신장이 큰 편에 속하는 나조차 위협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눈높이가 훌쩍 위에 있었다.

‘내 황금 백수 생활이 이렇게…….’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황금 백수가 뭐야. 그냥 인생 종 치는 소리가 함께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아 진짜 내 인생 왜 이래…….’

그냥 내 인생 자체가 총체적으로 망했다. 나는 불행의 별 밑에서 태어나 불행의 축복을 받고 불행과 평생 함께 살아가는 불행의 결정체.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내가 붙어 있는 벽을 천천히 짚었다. 느릿한 동작은 마치 서서히 숨통을 조여 오는 뱀 같았다.

“잠시 눈을 감아 주시겠습니까.”

배부른 짐승처럼 속삭인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가 핏물이 맺히도록 망설임 없이 깨물었다. 살을 파고드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의 손을 타고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에 내가 희게 질리자, 그는 내 목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설마 내 목을 닭처럼 비틀 생각인가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자연스럽게 목을 지나 턱선을 타고 이마로 향했다. 피가 흐르는 손가락으로 내 이마에 알 수 없는 문양을 그린 그는, 갑자기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뭐, 뭐, 뭔데! 뭐냐고 이거!’

저주라도 읊고 있는 건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한 사람의 입을 타고 나오는 말인데 남자의 목소리가 서서히 둘로 겹쳐 들리기 시작했으니까.

기묘한 소리였다. 얼마나 섬뜩하던지 마치 지옥에서 망자가 부르는 소리로 들려왔다.

나는 점점 파랗게 질려 갔다. 남자의 손이 닿은 내 이마에서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스러운 황금 빛무리가 반짝하고 터졌다가 점멸했다.

피, 술식, 주문, 그리고…… 황금빛.

‘……주술사!’

맙소사. 나는 이제야 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주술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주술에 관해 관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금기인 이 세계에서 주술사란 그냥 존재만으로 범죄자였다.

‘아직도 주술사가 존재했어?’

5세기 전부터 꾸준히 개체 수가 줄어들다가 현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범죄자 양반이 대체 왜 내 앞에 있는 건지 설명해 줄 사람?

범죄자가 저택에 침입해 최면을 걸고, 범죄자가 날 찾아내 루프의 원흉이라는 걸 파악했고, 범죄자가 날 벽 쪽에 밀어붙여 주술을 사용한다.

이보다 완벽한 사망 플래그도 없었다.

내 새로운 삶도 여기서 끝인가 보네. 이런 식으로 죽을 줄 알았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돈을 뿌리고 갑질도 해 보면서 살아 볼 것을.

문득 새로 주문한 링테 작가님의 한정판까지는 읽어 보고 죽고 싶다는 미련도 들었다. 하지만 곧 체념하며 닥쳐올 고통과 죽음을 예감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안 죽나.”

남자는 실망과 다소 흥미가 담긴 음성으로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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