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9화 (9/131)

# 9

악녀 메이커 9화

‘아, 맞다. 능력이 안 통했지.’

그러고 보니 모두가 최면에 해롱거릴 때 나 혼자 남자의 원래 모습을 꿰뚫어 봤잖아. 나는 숨을 헐떡이며 조심스럽게 실눈을 떴다.

긴장이 풀리자 뒤늦게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사실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날 죽일 방법은 무수히 넘칠 것이다. 검으로 찌른다거나 목을 조른다거나, 물리적으로 죽일 수 있겠지.

“절, 죽이러 오신 거예요?”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는 어울리지도 않던 존대도 다 때려치우고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내 주술이 통하지 않는 경우는 처음이라, 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 이건 예상 못했으니.”

날 죽일 생각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는, 과연 나라가 정한 범죄자다웠다. 법 없이 사는 사람답게 뻔뻔하기가 아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고민하고 있다는 건 난 여전히 죽을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는 건가. 나는 잘 굴러가지 않는 혀로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왜 절 죽이려고…… 루프 때문에?”

“루프?”

“그러니까, 하루가 돌아갔던 것 때문에 절 죽이러 오신 거예요?”

“뭐, 그렇지. 이토록 절실하게 누군가를 찾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

저 대사가 이렇게까지 무섭게 들릴 줄은 몰랐다.

그는 주저앉은 나를 따라서 한쪽 무릎을 굽히고 몸을 낮췄다. 그리고 귓가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서 부드럽게 속삭였다.

“덕분에 아주 불쾌한 하루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이지. 이토록 상심한 나를 아가씨께서 달래 주셔야겠는데…….”

나는 오싹하고 간질간질한 기분에 어깨를 움츠렸다가 다시 생명의 위기를 느끼고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그, 그쪽 말대로 제가 하루를 되돌린 원인이긴 하지만, 제가 되돌린 건 아닌데요! 제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알고 있어.”

“……알고 계셨습니까.”

알면서도 그냥 문답 무용으로 죽이려 했다니. 할 말이 없다, 내가.

‘악마인 게 틀림없어.’

코앞에 있는 남자의 후드 속에서 살짝 보이는 은회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이채를 띠고 있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어깨가 부르르 떨었다.

“인간은 맞는 듯하고.”

그는 내 턱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 보고 있었다. 거침없는 행동과는 달리, 손길은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듯 아주 조심스러웠다.

마치 생전 처음 보는 희귀한 생물을 다루는 듯한 태도에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좀 기분이 오묘했다.

“흠, 그럼 마법은 통할까?”

그렇게 중얼거린 남자의 손에서 순식간에 화염이 일었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지만, 내게 닿은 불꽃은 나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뭐야, 불이 닿았는데 뜨겁지조차 않다니. 나조차도 처음 안 사실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고 말았다.

“아, 안 통하네요?”

“왜 네가 놀라?”

“처음 봐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귀족이라면 마법을 접할 일이 꽤 많았을 텐데?”

“…….”

할 말이 없어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놈이. 근데, 마법이 통했으면 방금 통구이가 될 뻔한 거 아니야?’

어차피 처음부터 날 죽일 생각이었던 남자니 뭔들 못하겠나 싶긴 했지만, 순간 울컥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보니 희귀 동물이 아니라 실험용 생쥐처럼 다루고 있었어.

‘그건 그렇고, 마법도 쓸 줄 알았어?’

마법과 주술은 비슷한 듯 보여도 빛과 어둠처럼 완전히 정반대의 속성이라 동시에 익히는 건 절대로 불가능했다.

이 남자, 대체 정체가 뭘까.

“신에게 몸이라도 내줬나?”

그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내려 내 목덜미에 코를 대고 짧게 냄새를 맡았다.

그의 숨결이 피부에 닿자, 소름이 온몸을 내달렸다.

그런데 남자는 본인이 더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떼어 냈다.

“아주 단단히 사랑받고 있는 모양이군. 레제르브의 기운이 온몸에 스며 있어 지독할 정도야. 이 정도면 온갖 잡것들을 다 불러 모았을 텐데 어떻게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왔지?”

레제르브라면 레테 제국에서 섬기고 있는 유일신의 이름이었다.

나는 대뜸 신을 언급하는 남자를 두고 대체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신이 있고 신전도 있고 신관도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소설에서 신은 상징적인 거였는데.

“신이 실제로 존재해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로군.”

그러자 그가 어처구니가 없는 것처럼 코웃음을 치면서 답했다.

“그게 네가 할 말인가? 신의 존재를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네가?”

언제 내 몸이 그런 기능도 했어? 나는 별 황당무계한 말을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마주했다. 그런데 실제로 주술이나 마법이 통하지 않으니, 완전 허튼소린 아닌 것 같고.

아일라가 아무리 극악무도한 악역이라지만, 그래 봤자 아무런 능력도 힘도 없는 평범한 영애일 뿐이었다. 그런 아일라에게 신의 흔적이 묻어 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내가 빙의한 다음에 생겨났다는 건데…….

신이라는 게 실존하고, 한국에서 살던 내 영혼을 아일라 몸속에 집어넣고, 루프를 일으킨 게 소설 속 세계의 신이라면 말의 아귀가 맞았다.

내가 창조한 소설 세계 속 신이 어떻게 작가인 나를 능멸하는 게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

‘그런데 내 가설이 맞았다면 루프를 멈추려면 소설 스토리를 따라 아일라처럼 악녀로 살다가 죽어야 한다는 건데, 그건 누가 봐도 저주잖아. 신의 사랑을 받고 있기는 개뿔이.’

나는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와중에도 이 말만은 꼭 해야겠다 싶었다.

“설마, 루프도 그 신 때문이에요?”

“시간을 관장하는 건 신의 고유 권한이니까 오직 신만이 가능한 일이지. 신조차 시간의 흐름을 깨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야.”

“그럼, 하루를 반복하는 일은요?”

“수도 없이 하루를 반복한 건, 굉장히 무리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와…… 그렇게까지 절 엿 먹이고 싶은 걸까요? 진짜 나쁜 놈이네.”

“뭐?”

권태로이 대꾸하던 남자는 내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을 보였는지 드물게 놀라는 기색이었다.

나는 순간 분노에 눈이 멀어 내 눈앞에 상대가 누군지도 잊고 마구 한탄을 했다.

“하루가 돌아가게 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고 제 의지도 아니라고요. 저는 그냥 누릴 거 누리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었는데 그런 성가신 짓을 하다니,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저한테 저주를 내린 게 틀림없죠. 아니면 단순히 괴롭히고 싶어 한다거나.”

물론, 내가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사실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이지만 루프를 일으킨 건 남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 욕하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속으로 삭이고 있던 불만들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툭툭 튀어나왔다.

그는 잠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저건 아무리 봐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러 참는 모양새였다.

“저주……. 푸흡, 저주라…….”

내 말의 대체 어디가 그의 웃음 코드를 자극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아주 웃긴 소리를 들었다는 듯 한참을 웃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런, 그 말을 들으면 레제르브가 가엾어지는데.”

신씩이나 되어서 짝사랑인가, 하고 중얼거린 남자는 안타깝다는 음성과는 달리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레테 제국에서 신앙이란 선택이 아니라 강제였다. 무신론자, 이단, 악마 숭배는 반역에 맞먹는 죄목이었다. 그런데 신을 믿지 않으면 곧바로 죽임을 당하는 광신도들이 판치는 세계에서 신을 욕하는 데 좋아하다니.

‘신한테 뭐 데인 거라도 있나.’

하긴, 생각해 보니 주술사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인간들은 신의 축복을 의미하는 ‘신성력’과 반대되는 ‘마력’은 무조건 배척했다. 신성력과 마력은 서로 거부 반응이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한쪽을 ‘선’으로 인식했으니, 다른 한쪽은 ‘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마력을 쓰는 주술은 악이 되었고, 세상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리고 주술은 신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탄압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종교 재판에 끌려가면 아주 끔찍한 고문을 받는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했던 말을 되새겨 보면 신과 친분이 있나? 하는 황당한 생각이 들 정도로 신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것도 굉장히 악감정이 있어 보이는데…….’

“주술을 보고도 별다른 내색 없이 멀쩡했을 때부터 이상하긴 했지만, 역시 평범한 인간은 아닌 것 같군.”

내, 내색했었어야 하나.

“생각이 바뀌었어.”

신을 거침없이 욕한 게 그의 호감을 산 모양이었다.

그는 날 살려 둘 생각이 들었는지 굽혔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내게 손을 뻗었다.

“꽤 마음에 드네.”

이렇게까지 단박에 호감을 살 일인가? 대체 신한테 쌓인 게 얼마나 많은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신의 음성은 들었어?”

“네?”

“직접 계시를 받았느냐는 말이야.”

“아, 안 받았는데요.”

“이렇게 노골적으로 흔적을 남긴 인간에게도 목소리 한 번 들려주지 않았다니. 단 한 번도 인간의 부름에 답한 적이 없는 레제르브답네.”

신의 음성이니 계시니 뭐니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튀어나와 당황하자, 그가 빈정거리듯 중얼거렸다. 신의 존재를 저렇게 확신하면서도 무신론자 같기도 한 이상한 발언이었다.

“레제르브가 나는 일단 저질러 놓고 볼 테니, 네가 알아서 내 뜻을 해석해 달라고 또 응석을 부리는구나.”

“……진짜 무책임하네요, 그거.”

“언제나 있는 일이지.”

그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대꾸해 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내 추측을 말하자면, 계속 시간을 되돌린다는 건 앞으로의 네 운명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싶다는 뜻일 거다. 네가 신이 원하는 선택을 하게 될 때까지 계속. 그건 너도 짐작하고 있을 것 같다만, 그렇지?”

그는 내가 생각했던 가설과 비슷한 소리를 했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하자면 내 인생이 하나의 게임이라고 친다면, 나는 게임 캐릭터고 신은 플레이어가 되어 원하는 엔딩을 보고 싶어 한다는 뜻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열 받네.

“운명론 진짜 싫어하는데.”

나는 힘들고 괴로워 죽겠는데 ‘넌 그런 운명이었다’, 혹은 ‘모든 것은 신의 뜻이었다’, 같은 한마디로 끝내 버리는 편협한 사상이었으니까.

그 말을 들으면 참 비참해졌다.

마치 내가 쓰다 버릴 하나의 부품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