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악녀 메이커 10화
‘게다가 무슨 아주 위대한 대의를 위해서도 아니고, 솔직히 아일라가 악녀가 되어야 할 이유가 주인공들을 이어 주는 것 외에 더 있어?’
남 연애를 위한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하려고 내가 이런 생고생을 하고 있어야 한다니 더 열 받아 죽겠다. 정작 나는 남자와 연애는 무슨 속 터놓을 친구도 없는데!
“역시 너, 마음에 들어.”
그 말이 딱히 가식이나 거짓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남자는 운명론을 대놓고 혐오하는 내 반응에서 속으로 무언가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는 재차 확인하듯 물어 왔다.
“그러니까 너는 신의 사랑…… 저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지?”
“그런 당연한 소리를…….”
“그럼, 바라는 걸 말해 봐.”
“예?”
“뭐든 들어줄 테니.”
그러니까 이 정도까지 호감을 살 일이냐고? 아니, 호감이라기보단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것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데.
“당신이 왜요?”
이런 상황에서 냉큼 원하는 걸 말했다가 약점 붙들릴 함정일 수도 있었다. 나는 역시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검은 후드 덩어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슬슬 몸을 뒤로 물렸다.
“너는 신의 사랑을 받고, 나는 신의 뜻을 혐오하니까. 게다가 레제르브가 네게 단단히 미움을 산 듯하니 우리 꽤 괜찮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랑 안 받는다니까요…….”
“그럼 관심 정도로 해 둘까.”
그는 유혹하듯 고혹적인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턱은 단단하고 굵직한 남자다운 선을 보이는데도 유난히 새하얀 피부와 그와 대비되는 새빨간 입술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네 말대로 네가 받고 있는 게 사랑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네게 주어진 운명을 방해하는 게 신의 뜻을 방해하는 길이라는 것 하나는 확실히 알겠거든.”
“…….”
“계약을 하자는 말이야.”
“계약?”
“같이 신을 배반하자고.”
어쩐지 인간을 타락시키기 위해 선악과나무 위를 기어 다니는 뱀의 은밀한 속삭임을 들은 것 같았다.
“너는 네가 원하는 인생을 되찾고, 나는 오랜 원한을 풀면 되는 그런 간단한 계약이지. 나라면 완벽하게 신의 의지를 망칠 수 있어.”
악마인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어쩜 하는 말도 악마가 따로 없네. 악마가 계약하자는 말을 건넸으니 내 영혼은 이제 담보로 붙들린 건가?
여기서 싫다고 하면 망설임 없이 날 죽이겠지. 애초에 날 죽일 생각으로 온 건데 특별히 다른 선택권을 준 거니까.
그러니까 결국 죽거나 악마와 계약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루프를 멈춰 줄 수도 있어요?”
“그건 어렵겠는걸. 아무리 나라도 신의 고유 권한을 훔칠 순 없으니.”
난 또 막 반말하길래 신이랑 맞먹는 사람인 줄 알았네.
아, 신이랑 맞먹으면 이미 사람이 아닌가. 하긴 그럼 애당초 신을 엿 먹이기 위해 같이 손을 잡자는 말은 꺼내지 않았겠지.
“하지만 근본을 뒤틀 수 있다는 얘기야.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너무 추상적인데요?”
“네가 구체적인 사정을 설명해 줘야 나도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그러네.
“그래서, 할 건가?”
내게는 선택권이 없음에도, 그리고 지금 내게는 악마의 도움이라도 절실하게 필요함에도 나는 선뜻 그러겠다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랑 어떻게 계약을 해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내 안식처에서 나가라 미친놈아, 하고 싶었지만 나는 내 목숨이 소중한 줄 알았다.
혹시라도 심기를 거스를까 봐 호기롭게 외치면서도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내 얼굴이라, 평범한 인간에게 보여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왜 그런 말을…… 설마, 그쪽 얼굴을 보면 막 돌로 변해요?”
평범한 인간 운운하기에 혹시 메두사라도 되는 건가 싶어 물었다.
“비슷하지.”
짧게 웃은 그가 그런 말을 해서 날 기겁하게 하더니, ‘아마 너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하고 덧붙여 말했다. 내게는 아무런 능력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고려한 말인 듯했다.
“지, 진짜 돌이 되는 건 아니죠?”
“정확히 말해 불행해지는 저주를 받게 되지. 모든 주술사가 다 그렇거든. 인간의 행복을 빨아먹는 괴물들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후드 모자를 벗었다. 동시에 후드 속에서 언뜻 보았던 잿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
본인이 대충 자른 듯한 흑단 같은 머리카락은 창가에 비친 햇빛에 하얗게 부서졌다.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얼굴은 숨길 수 없는 권태로 물들어 있었고, 나른하게 뜨인 눈은 유난히 눈가가 짙어 퇴폐미가 흘렀다.
마치 수묵화처럼 흑과 백으로 나누어진 그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형형하게 빛나는 것이 바로 늑대 같은 은회색 눈동자였다. 그의 눈은 밤에 보면 눈동자만 번뜩일 것처럼 짐승의 색을 닮아 있었다.
아마 맹수의 왕이 사람이 된다면 이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이렇게 사내답게 굵직하면서 색기가 흐르는 얼굴은 또 처음이다.
나는 얼빠진 얼굴을 하고서 세상에서 가장 얼간이 같은 질문을 했다.
“지, 진짜 얼굴이에요?”
“그럼 가짜 얼굴도 있나?”
“환상이라거나…….”
그러자 그가 코끝으로 작게 웃더니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완전히 넋을 놓은 나는, 신의 얼굴을 한 악마에게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헉, 손이 닿았어.”
“환상이 아니지?”
“네, 아니네요…….”
얼굴은 환상인데.
정신이 없는 나머지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었던가. 어쩐지 남자의 웃음소리가 더 깊어진 것 같았다.
‘와, 동굴 성대 미쳤다.’
음침한 검은 후드 밑에 저런 얼굴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숨 쉬어.”
그가 말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숨을 멈추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헉, 죽을 뻔했네.
나는 쿵 떨어졌던 심장을 손으로 짚었다. 잠시 파업을 선언하며 멈춰 서 있던 심장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이 뛰어 대기 시작했다.
설마 저 악마 같은 자가 내 스트라이크 존을 제대로 강타하는 취향의 얼굴일 줄이야. 예고도 없이 훅 치고 들어와서 심장 멎을 뻔했다.
아니 저 얼굴로 왜 남자 주인공이 아닌 거지? 왜 소설에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조차 흐릿한 엑스트라야?
확실히 내가 10년 전에는 백마 타고 뒤에 꽃 배경을 매달고 나타날 것 같은 왕자님 타입을 좋아하기는 했다. 저런 피가 담긴 와인 잔이 어울릴 것 같은 색기가 넘치는 퇴폐 미남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
하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취향은 진작에 바뀌고도 남았다. 게다가 저 정도 얼굴이면 모두의 이상형을 다 깨부수고 심장을 치여 버리고도 남을 미모 아닌가.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나는 사랑에 빠져 버린 수줍은 소녀…… 라기보다는 제대로 치여 버린 덕후의 얼굴을 하고서 물었다.
얼굴로 봐서는 보통 인물이 아닌 것 같은데. 소설에선 잘생길수록 영향력 있는 인물일 가능성이 크니까 말이다. 특히 얼빠 기질이 다분한 내 소설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러자 그가 나를 가뿐히 일으켜 세워 주며 툭, 하고 가볍게 뱉었다.
“킬리안.”
킬리안.
어쩐지 익숙한 이름을 입 안에 굴려 보았다. 뒤늦게 섬광 같은 깨달음이 내 무의식에 잠겨 있던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악의 주술사?’
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지금도 어린아이에게 ‘킬리안이 잡아간다’ 하고 겁을 줄 정도로 제국에서 악몽으로 통한다는 괴담 같은 실존 인물.
설마 왕국 하나를 지도에서 지워 버렸다는 그 무시무시한 대형 살인마인 줄 알고 기절할 뻔했다가 뒤늦게 이성을 되찾았다.
5세기 전 인간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잖아. 이미 땅에 묻혀 백골이 흙이 되다 못해 자연 일부가 되어 순환하고 있겠구만.
내가 주술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생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능력이 아닌 건 확실했다. 그런 게 있으면 불로불사를 꿈꾸는 황제나 왕 등의 권력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
‘그렇다면 동명이인인가?’
주술 업계에서도 유명한 사람 이름을 물려받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킬리안이 이름이라니, 지구로 치면 히틀러가 본명인 격이잖아.’
참 사회생활 하기 힘들 것 같은 이름이었다. 일단 주술사인 이상, 사회생활은 평생 포기하고 살아왔을 것 같긴 하지만.
좋아, 킬리안. 그 세 글자를 지금부터 영혼에 새기도록 하자.
지금껏 한 번도 아이돌이나 배우를 덕질한 적은 없었는데 10년 전 흑역사의 대명사인 소설 속 인물에게 치여 버렸다니 세상은 말세였다.
‘이런 수치가 어디 있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나는 킬리안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자존심 같은 게 나에게 있을 리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가 있어.
“사람 맞아요?”
“뭐 같은데?”
“인큐버스? 뱀파이어?”
그는 내 말에 소리 내어 웃으며 나른하게 눈가를 접어 내렸다.
그러자 촘촘하게 박힌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이 세상 미모가 아니었다.
“이 얼굴이 마음에 든 모양이지?”
마음에 들지 않아 할 사람이 있긴 해? 그냥 존재 자체가 치명적인데?
킬리안은 아까부터 빠져들 듯 몽롱하게 쳐다보는 내 반응이 영 어색한지 본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듯이 만지작거렸다. 저건 또 무슨 심장에 해로운 습관인지 모르겠다.
“대체 이 얼굴을 왜 숨겨요?”
“모르나? 흠, 하긴. 주술에 관한 건 철저히 배제한 지 오래니 요즘 세대 아이들은 전혀 배우지 않았겠구나.”
저 얼굴로 말하는 건 아재 같았다. 얼굴로 봐선 20대 중 후반쯤 돼 보이는데, 막 성인식을 치른 날 앞두고 요즘 세대 아이들이라니. 대체 몇 살이시길래.
“마력을 타고난 이들은 필연적으로 불행이 따라. 곁에 가는 것만으로 마치 저주처럼 불행이 옮거든.”
“헉, 그럼 아무도 곁에 못 와요?”
“같은 주술사가 아니고서야 보통 그렇지. 외출할 땐 마력을 억제하는 후드로 온몸을 감싸야 하고.”
이런 미남에게 그런 안타까운 사연이. 저 미모는 최대한 세상에 널리 알려 인간을 이롭게 해야 하거늘.
나는 주술 자체를 악의 힘이라고 설정한 게 나 자신이라는 걸 잊은 채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래서, 대답은?”
킬리안은 내가 아직 그의 외모에 아직 반의반도 감탄하지 못했는데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계약에 대한 얘긴 완전히 무의식 저편으로 날려 버린 내가 뒤늦게 말했다.
“좋아요.”
“……너무 쉽게 대답하는데.”
아니야. 얼굴에 정신 팔려서 아무 말이나 하는 것 같지만 분명 제대로 생각하고 한 말이라고. 애초에 나에게는 별 선택권도 없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