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악녀 메이커 11화
“사실 킬리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현실이 너무 막막해서 도망치려고 했었거든요. 확실히 제 삶을 멋대로 휘두르는 게 신 같은 절대자라면 전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그런 나의 사정을 단박에 알아보고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었다. 그가 주술사든 악마든, 나는 살기 위해서는 그의 손을 붙잡을 방법밖에 없었다.
“해요, 계약. 우리 같이 그 빌어먹을 신한테 한 방 먹여 주자고요.”
“예쁜 말만 하기는.”
신의 욕을 들을 때마다 더욱 환하게 미소 짓는 그의 등 뒤로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후광이 번쩍였다.
웃을 땐 또 천사 같네.
순간 시력에 큰 타격을 입은 나는,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역시 후드를 다시 씌워 놓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얼굴을 가려 놓았던 건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맘만 먹으면 온 세상 사람들 다 후려치고 다닐 수도 있을 것 같네.
“그럼 자초지종을 들어 볼까.”
보통은 그게 먼저 아닙니까.
사정은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죽이려고 하다가, 능력이 통하지 않고 흥미가 당기니까 이제야 사정을 물어보다니 인성 한번 끝내줬다.
이런 걸 두고 얼굴값 한다고 하는 건가. 잘생긴 건 알겠지만 그건 오로지 눈 정화를 위한 관상용이지 개인적으로 엮이기는 싫었다.
“아, 잠시만요. 그 전에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요.”
“말해 봐.”
“절 죽이러 찾아왔다는 건 알겠는데, 왜 하필 가정 교사 겸 집사예요?”
그냥 주술사라면 뿅 하고 내 앞에 나타나서 목을 베어 버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 왜 굳이 그런 귀찮고 번거로운 방법을 썼는지 의아했다.
“딱히 집사로 가려고 한 건 아니고, 그냥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갔을 뿐이야. 나머지는 알아서 착각해 준 거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말로 설명하긴 힘든데…….”
확실히 직접 보여 주는 게 최고지만 능력이 통하질 않으니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내 앞으로 다가와 노골적일 정도로 빤히 나와 시선을 맞췄다.
“이렇게 눈을 맞추고 말을 걸면 모든 걸 털어놓고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전부 믿게 되거든. 나는 그저 거기에 장단을 맞춰 줬을 뿐이고.”
“……외모로 홀렸어요?”
“아니야.”
그는 혼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이마를 가볍게 톡 치면서 말했다.
“내 고유 능력이지.”
왠지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내 눈을 바라봐 넌 행복해지고…….
“최면 마법 같은 거예요?”
나는 멀쩡한 듯 제대로 말을 하고 있음에도 어딘가 눈빛이 몽롱하게 풀려 공허해 보였던 저택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러자 킬리안이 답했다.
“매혹 마법에 더 가까워. 최면은 세뇌하고 조종할 뿐이지만, 내 능력은 내면 깊이 숨긴 욕망을 끄집어내고 충족시켜 주는 거거든.”
“……악마 같은 능력이네요.”
저런 게 고유 능력이라니, 원한다면 세계 정복도 꿈이 아닐 것 같았다. 역시 처음 봤을 때부터 어찌도 위험한 냄새가 나던지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이 턱턱 막힌다 했다.
‘아니, 잠깐만.’
내면 깊이 숨겨진 욕망을 파고드는 게 그의 능력이라면, 이곳 저택의 식구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내게 가정 교사 겸 집사가 있기를 바란 것인가?
심지어 내게 전혀 관심이 없었던 공작까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면 내 상태가 어지간히 심각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영 찝찝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킬리안이 말했다.
“그럼 이제 네 얘기를 해 보도록 할까. 여간 수상한 게 아닌데.”
“…….”
외모 감상 타임과 질문 타임이 끝나니까 갑자기 취조 모드가 되어 버리다니. 수상쩍다는 듯 눈 사이를 좁히는 그를 피해 고개를 창밖 저 산 너머로 돌렸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관리는커녕…….”
킬리안은 마디가 큼직하니 반듯하고 유려한 손으로 내 엉킨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이제야 눈치챈 건데 그의 움직임에는 마치 귀족과 같은 우아한 기품이 녹아들어 있었다.
“인간의 삶을 포기하기라도 했는지 금수와 같은 생활 습관에…….”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씻지도 않고 아직도 슈미즈 차림인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숨 쉬듯 몸에 배어 있어야 할 예법은커녕 자세는 평민만 하고…….”
그는 구부정하게 굽혀져 있는 양어깨를 붙잡고 펴 주었다.
얼떨결에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자 그가 튀어나온 내 고개를 살짝 뒤로 밀었다.
“혼자 속세를 떠나 살아온 것처럼 초점이 엇나간 반응도, 특이한 언동도 그렇고…….”
킬리안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으면서 매혹적으로 입가를 휘었다.
“아무래도 제가 가르칠 게 한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가씨?”
* * *
“아가씨, 혼자서 이런 위험한 곳을 돌아다니면 안 되지. 그러다 위험한 아저씨가 잡아가면 어쩌려고 그래?”
낄낄거리는 저열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흘려듣기에도 여러 불량배가 아녀자를 희롱하는 듯한 음성과 움직임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 들리지 않을 거리였지만, 베르너의 귓가에는 아주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는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최근 기(氣)를 발현하고, 소드 마스터가 되어 감각이 전보다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리고 모든 오감이 갑자기 초인적으로 깨어난 것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채였기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어쩔까요.”
베르너의 상태를 알아챈 호위기사 레녹스가 물어 왔다. 그의 명이 떨어지기만 하면 바로 처리하고 오겠다는 뜻이었다.
베르너는 충성심이 느껴지는 그의 물음에 차가운 음성으로 대꾸했다.
“됐다. 무시해.”
아무리 이곳이 수도 한복판이라고 해도, 인적이 없는 골목은 치안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베르너는 후드를 더욱 깊숙이 눌러쓰고 그 자리를 지나치려고 했다. 갑자기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든, 그 여자의 음성만 아니라면 말이다.
“이, 이거 놓으세요!”
그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또 저 여자인가.
샬럿의 목소리였다.
몸을 타고 부드럽게 흐르는 황금빛 머리카락과 바다처럼 깊은 눈동자가 잔상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새하얀 피부와 세상의 더러움 하나 모르는 듯한 순수한 미소가 잠시 눈가를 아른거렸다.
“전하!”
머리로 인식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베르너는 놀라 자신을 붙잡는 레녹스를 뿌리치고 무작정 달렸다. 잠시 이성이 날아가기라도 했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 희게 질려 있는 샬럿의 얼굴이 보였다.
갑자기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 이 여자는 왜 볼 때마다 위협을 당하고 있단 말인가.
“이 정도면 의심이 드는군. 이런 더러운 거리에서 저런 미천한 것들에게 당하고 싶은 네 취미를 내가 방해하기라도 한 건가?”
베르너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반사적으로 빈정거렸다. 이런 식으로 그녀를 구한 게 벌써 세 번째였다.
한 번은 연회장에서, 한 번은 황궁 정원에서, 그리고 또 지금.
그는 한 번은 우연, 두 번은 인연, 세 번은 운명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참 웃기는 생각이라고 속으로 비웃었다.
베르너는 손에 쥐고 있는 검에 시선을 돌렸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단박에 급소가 꿰뚫려 여전히 피를 뿜어내고 있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아마 샬럿에게 시비를 건 불량배들이겠지. 베르너는 뒤늦게 이게 이렇게 화가 날 일인 건가? 하고 의문을 품었지만, 생각을 길게 이어 가지 못했다. 옆에서 덜덜 떨리는 가녀린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저, 전하? 왜 이런 곳에…….”
베르너는 후드를 깊게 눌러썼음에도 샬럿이 자신을 한눈에 알아본 것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샬럿을 질책했다.
“내가 할 말을 하는군. 너는 왜 이런 곳을 호위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거지? 하, 설마 이런 일이 없을 거라는 안이한 생각이라도 했나?”
“…….”
정곡이 찔린 샬럿은, 시선을 내리깔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저는 그저…….”
비록 변방 귀족 출신이었으나, 다정한 가족들 곁에서 넘치는 사랑만 받은 그녀였다. 샬럿은 공주님 못지않게 오냐오냐 자라 왔고,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단 한 번도 겪은 적이 없었기에 그녀는 가족들이 그녀에게 아무리 조심하라 일러도 자신을 향한 악의를 상상도 하지 못하는 순수한 사람이었다.
“시, 신경 쓰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영지 밖을 벗어나 수도로 올라온 건 처음이라 너무 신기해서 구경하다가 이런 골목까지 들어오고 말았어요. 저는 정말 무서워서…….”
샬럿은 지금 막 정조의 위협에서 벗어난 것으로 모자라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광경을 처음으로 보았다. 기절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밀려오는 안도와 두려움에 결국 울먹이고 말았다.
“뭘 잘했다고 울어.”
베르너는 한숨을 삼키며 잠시 샬럿을 내려다보다가 결국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러자 샬럿이 거리낌 없이 그의 품에 안겨 왔다. 뿌리쳤으면 뿌리쳤지 설마 어리광부리듯 망설임 없이 자신의 품속을 파고들 줄 몰랐다.
놀란 베르너는 몸을 뻣뻣하게 굳혔지만, 누구든 위로해 줄 사람이 필요했던 샬럿은 가녀린 어깨를 떨며 계속 울 뿐이었다.
“너는…… 내가 방금 살인을 저질렀다는 자각이 있는 건가?”
“하지만 절 구해 주셨잖아요.”
그 대답에 베르너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샬럿은 그의 품에서 여린 짐승처럼 애처롭게 떨고 있었다.
“언제나 절 도와주셨잖아요.”
“……무섭지도 않나 보지.”
“절 구해 주신 것도, 제 꿈을 이뤄 주신 것도 제대로 보답 드리지도 못했는걸요. 무서울 리가 없잖아요.”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군.”
화려하게 치장하고 지독한 향수를 풍기며 요사스러운 웃음과 교태로 무장한 수많은 귀족 영애들.
그 속에서 샬럿은 한없이 위태로웠다. 바람이 불면 그대로 꺾일 것만 같은 연약함은 단번에 베르너의 시선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그래서 계속 신경이 쓰였다.
“……신선해.”
또 누구에게 시비가 걸리지 않았을까, 끌려가지 않았을까, 멋모르고 아무에게나 웃어 주다가 험한 꼴을 당하진 않았을까.
모두가 입을 모아 샬럿을 백합이라 했지만, 그보다 새하얀 눈에 더 가까웠다.
순결하고 고결한 색을 띠었기에, 손대면 그대로 속절없이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녀의 앞에 서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늘 조심스러웠다.
“수도는 처음이라 했나.”
“네?”
“여기는 그대 같은 연약한 여인이 홀로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치안이 좋지 못하다.”
훌쩍이던 샬럿이 고개를 들었다.
베르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샬럿의 표정을 앞두고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레녹스.”
“하명하십시오.”
“안젤로 영애 곁을 지켜라.”
“……그럴 수 없습니다.”
“누가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수 있을 것 같나? 난 황궁으로 돌아갈 테니, 그녀의 곁을 지켜.”
“하지만 저는 절대 전하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명을 거두어…….”
“레녹스, 명령이다.”
“…….”
레녹스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했으나, 그의 하나뿐인 주군의 명이었다. 당연히 거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잠시 탐탁지 않게 그의 곁에 선 샬럿을 응시하다가 이내 허리를 깊게 숙이며 말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베르너는 레녹스를 샬럿의 동행으로 보내 버리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샬럿과 함께 저잣거리를 떠돌기엔 그날 일정이 빠듯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훗날 불러올 결과를 알았더라면, 베르너는 절대 샬럿과 그의 충성스러운 기사를 단둘이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