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12화 (12/131)

# 12

악녀 메이커 12화

“…….”

“…….”

단둘이 남겨진 그들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잠시 멀뚱히 서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샬럿은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 못하고 결국 먼저 해맑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음, 기사님? 저번에 뵌 적이 있었죠. 이렇게 따로 만나 뵌 건 처음이네요. 전 샬럿 안젤로라고 해요!”

“……레녹스 맥카트.”

“레녹스 경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마음대로.”

샬럿은 냉정하게만 보였던 기사가 그래도 자신의 말에 순순히 대꾸해 주자 긴장이 풀렸는지 작은 종달새처럼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앗, 저 저런 길거리 음식은 처음 봐요! 뭐지? 색이 예쁘다…….”

하늘을 담은 듯한 눈동자를 연신 반짝이던 그녀는, 태양빛 찬란한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레녹스를 이끌었다.

그녀는 서슴없이 레녹스의 팔을 끌어안고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레녹스 경 저기 좀 봐 봐요!”

“…….”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춘 뒤 샬럿의 팔을 떼어 내고 그녀의 작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많이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굳은살이 생겼다가 사라진 흔적이 있었다.

“네 손…….”

“네?”

“검을 배운 손이군.”

“아, 막 배웠다고 할 수준은 아니고요…… 제가 어릴 때 납치를 당한 적이 몇 번 있었거든요. 오라버니들이 호신술로 잠시 가르쳐 주었어요.”

그런데도 잘 늘지 않아서……. 샬럿은 부끄러운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몸을 쓰는 일에 워낙 소질이 없어, 결국 그녀의 오라버니들도 포기하고 대신 과보호가 더 늘었다. 홀로 수도에 올라온다고 했을 때도 얼마나 난리였는지.

“호신술? 그런 걸 배웠는데 왜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지?”

레녹스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슬쩍 미간을 구겼다.

겁에 질려서 몸이 굳은 건가 했는데, 어릴 때부터 자주 당해 온 일이라면 왜 전혀 대비하지 않고 무방비하게 다니는 거지?

물론, 검이 있다고 한들 여인의 몸으로 장정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리도 위협을 당하는데 필사적으로 반항하기라도 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음. 싸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누가 상처 입거나 다치는 건 싫어요.”

“그 상대가 너를 해치려고 했는데도 상처 입히는 게 싫다고?”

“네, 그래도요.”

대체 얼마나 선하기에 악의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까지 걱정할 수가 있지?

레녹스는 설마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착한 영애였다.

‘성녀라는 소문이 자자하더니, 성녀도 이러지는 않겠어.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

불편한 기색만 만연하던 레녹스의 무심한 시선에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채워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될 운명처럼, 그는 작고 연약하며 사랑스러운 샬럿에게 급속도로 빠져들었다.

머지않은 시기에 좀 더 애절하고 질척거리는 감정으로 발전하게 될 금단의 도화선이었다.

* * *

나는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킬리안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그와 많은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될 수 있으면 붙어 다녀야 한다는 뜻이었고, 무엇보다.

그는 내 가정 교사 겸 집사라는 타이틀을 이미 따낸 뒤였다는 것을.

“이, 이 악마…….”

“과찬의 말씀을.”

킬리안은 내 설움과 원망이 섞인 중얼거림을 칭찬으로 받아쳐 버리고 다시 마편으로 턱을 당기게 했다.

“또 자세가 흐트러졌군.”

내가 살다 살다 말채찍으로 자세 교정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새까만 막대기가 내 어깨와 등, 턱 등을 건드릴 때마다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세우며 부들부들 떨었다.

‘주, 죽을 것 같아.’

하지만 그의 가르침에 의해 억지로 반듯하게 교정된 자세를 풀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 머리 위에 링테 작가의 책이 들어 있는 한정판 오르골이 올려져 있었으니까! 심지어 몇 번 떨어트려서 벌써 이음새 부분이 헐거워져 있었다.

산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이걸 독서용, 소장용, 포교용으로 3세트를 사지 않았다면 주술사고 나발이고 그의 멱살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요?”

“그 자세로 고정될 때까지.”

너는 날 인간 조각상으로라도 만들 생각인 거냐. 아무리 내가 속성으로 예법을 배워야 한다지만 스파르타도 이런 스파르타가 없었다.

“아무래 생각해도 그쪽 신보다 더한 사람인 것 같네요…….”

나는 눈썹을 파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킬리안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잠시 눈을 크게 뜨다가 이내 배부른 미소 지었다.

“입은 그렇게 예쁜 말만 하는데.”

그러니까 칭찬 아니라고!

내가 남한테 싫은 소리를 조금도 못하는 호구라는 게 이렇게 서러울 때가 없었다.

“코르셋이라도 좀 빼게 해 줘요.”

폐부가 짓눌려서 숨도 못 쉬고 자세도 잡아야 하고, 죽겠다고요. 아침에 먹은 게 다 올라오게 생겼네.

“10분만 더 버티면 네 머리 위에 있는 그 책, 읽게 해 주지.”

그는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킬리안은 나와 손을 잡자마자 곧바로 가정 교사 겸 집사로 빙의하더니 내 나태한 생활을 뿌리째 뽑아 버릴 작정인지 아주 탈탈 털어 댔다.

그의 도움을 얻자고 결심하자마자 바로 결심이 흐려지게 하다니, 여러모로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힘들어서 다 때려치우고 싶어질 때마다 당근과 채찍을 때에 맞춰 적절히 주는 게 가장 열 받았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을 듣게 되어 버리지 않는가.

킬리안은 노련한 조련사였고 그에게 있어서 나는 아마 직접 길들여 키울 예정인 금수인 게 아닐까.

‘취급이 너무한 거 아니냐…….’

그가 날 대하는 태도로 봤을 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적어도 귀족 영애로서 날 존중해 주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굴 수는 없었을 테니까.

무엇보다 가장 소름 돋는 건 내가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게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봤다는 것이다.

“대체 제가 덕후…… 아니, 이런 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안 거예요?”

“방 하나 전체를 진열장으로 가득 꾸며 뒀더군. 그렇게 소중히 모셔 두면 누구라고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이상한 능력을 써서 사용인들한테 캐물은 건 아니고요?”

“부정은 하지 않으마. 그러니 지킬 자신이 없다면 빤히 보이는 곳에 두지 않는 편이 좋아. 한 번에 전부를 잃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와, 진짜 악당 같은 대사.

킬리안은 내 수많은 한정판 컬렉션을 전부 약점으로 잡고서는 생긋하고 웃었다. 현재의 나는 물론이고 소설 속 아일라보다 더 악역에 어울리는 미소였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내게 당연하다는 듯 존댓말을 쓰고 있는 거지?”

갑자기 그가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발언으로 훅 치고 들어왔다.

왜 존대를 쓰느냐고? 그야…….

“그쪽이 연상으로 보이니까요.”

“그것참 귀족 영애다운 대답이군.”

“…….”

28년간 유교 사상에 찌들어 살아오느라 반사적으로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해 버렸다.

그래, 나를 이루는 모든 게 전혀 귀족답지 않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니까 빈정거리지 말아 줄래.

나는 재빨리 변명했다.

“보통 다짜고짜 죽이려고 하면 알아서 저자세로 나오는 법이거든요?”

“그건 꽤 그럴듯하다만.”

역시 이 말은 먹힌 건가 싶어 기대할 뻔했는데,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내 표정은 아주 와장창 무너졌다.

“아무리 세상 물정을 몰라도 이 땅 위에 태어난 인간이라면 주술의 ‘주’ 자만 들어도 덜덜 떨며 신의 자비를 울부짖는 게 정상이지. 하지만 너는 오로지 내가 널 죽이려고 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을 두려워하는 듯하더군.”

듣고 보니 나는 온몸으로 이쪽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나 보다.

나름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열심히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지식을 쌓으려고 노력했건만, 역시 한 달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던 건가.

솔직히 레테 제국에서 주술사들이 그냥 존재 자체로 죽어 마땅한 범죄자 같은 취급을 당한다는 걸 머리론 알겠는데, 그게 딱히 와 닿지는 않았다. 마법사나 주술사나 판타지 속 환상의 존재 같기는 매한가지라서.

오히려 마법사나 신관 같이 선민사상에 미쳐 있는 광신도들한테 마녀 사냥을 당하는 주술사 쪽이 더 짠하고 불쌍해서 애정이 가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조금의 동요도 없이 내 이름을 넘겼다는 게 가장 수상해.”

“엥,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니 그 부분에서는 많이 억울한데요!”

그때 나는 예상치도 못한 희대의 대형 살인마의 이름을 들어서 꽤 놀랐단 말이야.

“킬리안이 500년 전에 왕국 하나를 날려 먹었다는 악의 주술사 이름인 건 알아요. 그런데 그 이름 듣는다고 뭐 벌벌 떨어야 하나요? 어차피 당신과는 동명이인일 뿐인데.”

“흠…….”

그런데 날 밀어붙일 생각인 듯 보였던 그는 잠시 입을 일자로 다문 채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던 것도 잠시, 다시 입술을 천천히 달싹였다.

“보통은 이름조차 입에 못 담아.”

젠장, 볼드모트였던 거냐!

악몽 혹은 괴담 정도로 통한다길래 호랑이 내지는 망태 할아버지 같은 취급인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그 사람이었다니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신을 비판하는 언사를 입에 담는 예쁜 짓은 마음에 들지만, 그 역시 이상하다는 건 스스로 알고 있겠지.”

“…….”

의심하든지 칭찬하든지 하나만 해라. 신을 욕하는 게 그렇게 예쁘면 하루에 한 번씩 욕해 줄 수 있으니까 의심의 눈길은 그만 거둬 줄래.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애써 피하자, 그는 시선을 시계에 고정했다.

“10분 다 됐군.”

“허어어으어…….”

나는 좀비 같은 소리를 뱉으며 머리 위에 오르골을 품속에 사수한 뒤 자세를 순식간에 무너트렸다.

“그래서, 넌 대체 누구지?”

아, 역시 이 질문으로 이어질 줄 알았다. 최대한 시치미를 뗐지만 이렇게까지 파고드는데 모른 척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한숨이 나왔다.

사실은 내가 다른 차원에서 온 작가고 아일라의 몸속에 빙의했다는 말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게다가, 내가 이 소설 작가라는 걸 들키는 순간 분명 죽는다. 백 퍼센트의 확률로 살해당하고 말 거야.’

신에게 굉장히 유감이 많아 보이던데, 작가라면 어떤 의미에선 내가 이 세계를 창조한 신이 아닌가.

나는 내가 본의 아니게 주술사들에게 어떤 운명을 만들어 주었는지를 떠올렸다. 그냥 그 건에 대해선 영원히 침묵하고 있는 편이 좋겠다.

“…….”

“묵비권을 행사하는 건가.”

그렇다면 어쩔 건데. 나는 살짝 도전적으로, 하지만 명백히 겁을 먹은 심정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말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결국은 직접 알아낼 테니까 결과는 같을 테지. 하지만 내 방식은 빈말로도 온화하다고 할 수 없다만 과연 네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

“확인하고 싶어?”

킬리안은 험악한 표현은 지양하고 무슨 말을 해도 어린애 타이르듯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그게 그냥 죽이겠다는 협박보다 더 살 떨리게 무섭다고!

“제 정체보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신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요? 계약을 한 건 그것 하나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맞는 말이야. 하지만 아무래도 네 정체부터 파악해야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거든.”

“그,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알아요?”

“감.”

필사적으로 논점을 흐리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개뿔 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눈치가 보통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거의 귀신인 모양이다.

‘역시 괜히 엮인 거 아니야?’

그래, 솔직해지자면 사실 반쯤 저 취향인 얼굴에 홀려서 그랬다.

내가 왜 그랬을까. 이렇게 될 줄 알고 외모에 휘둘리는 건 어디까지나 창작물로 한정했던 건데. 인간의 범주를 한참 벗어난 저 신의 외모 때문에 망할…….

그때였다. 갑자기 킬리안이 움직임을 멈추더니 서재의 문가 쪽을 빤히 바라보는 것 아닌가.

그 모습을 의아하게 보고 있었더니, 그가 벗고 있던 후드 모자를 다시 뒤집어썼다. 저걸 쓰지 않을 때 인간이 곁에 다가오면 불행이 옮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가씨, 여기 계세요?”

그때, 타이밍 좋게 누가 똑똑하고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나는 곤란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어 반가워하다가 목소리를 듣고 인상을 팍 구겼다.

‘아, 쟤 또 왔네.’

메르텐시아 가에는 전반적으로 두 가지 유형의 사용인들이 있었다.

첫 번째로는 아일라가 가만히 숨만 쉬어도 ‘허억! 악녀다! 무서워!’ 하고 경직되는 대부분의 부류.

두 번째로는 아주 극소수이긴 하지만 본인에게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하고 다가와 아첨하는 부류였다.

아일라는 멍청했다.

공부를 멀리했기에 교양이 없어 입을 열면 머리가 텅텅 빈 게 다 티가 났다. 예절도 배우다 말아서 무례했으며, 감정에 충실해서 머리보다 먼저 몸과 입이 움직이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지 못해 칭찬을 들으면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아마 그녀의 막강한 가문과 아름다운 외모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사교계에서 밀려나 도태되었을 것이다.

그런 단순하고 무식하고 솔직하며 성질 나쁜 아일라의 주위에는 자연스럽게 콩고물을 기대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몰려들었는데, 내 담당 시녀 소피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