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악녀 메이커 13화
“아가씨! 역시 새로 오신 분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여기 계셨군요. 어쩜 얼굴도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이제 지적인 면모도 겸비하시게 되셨으니, 우리 아가씨 너무 인기가 많아지셔서 곤란하시겠어요, 호호!”
소피아는 미리 장전해 두기라도 했는지 칭찬을 따발총처럼 줄줄 뱉으며 서재에 들어섰다. 정작 나는 말 한마디도 안 했는데 정신을 쏙 빼놓는 칭찬 세례가 이어졌다.
“어쩜,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탐스러우셔요. 피부도 새하얗고 비단결 같으시고 아가씨의 눈동자는 새벽의 이슬 맺힌 싱그러운 풀잎 같아요. 저는 지금까지 아가씨처럼 환상적인 빛깔의 눈동자를 본 적이 없답니다.”
“…….”
그 말에 나는 내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일단 아침부터 씻지도 않았고, 코르셋을 벗었으니 여전히 슈미즈 차림이었으며, 지금 나는 킬리안에게 시달리느라 땀범벅이었다.
‘세상에 무슨 저런 영혼 없는 칭찬이 다 있어.’
무엇보다 아일라가 죽고 공작 가문이 멸문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게 바로 저 소피아라는 시녀였다.
그녀는 베르너가 자신을 심문해 오자마자 아일라가 샬럿을 저주하기 위해 주술에 관한 자료를 수소문한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내밀었다. 있는 말 없는 말 다 지어내서 말이다.
그녀는 유일한 아일라의 시녀였으므로 누구보다 가까이서 아일라를 지켜봐 왔던 인물이었고, 그녀의 날조 섞인 발언은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금은 이렇게 모든 걸 다 바쳐 충성할 것처럼 구는데 말이다.
“호호, 나 좀 봐. 요즘 제가 전처럼 아가씨와 대화할 기회가 없어서 말이 많아졌네요. 그렇게 아끼시던 드레스도 보석도 전혀 들여다보지 않으시니 제가 챙겨 드릴 틈도 없잖아요.”
“아, 미안.”
나는 섭섭하다는 듯 말꼬리를 늘이는 소피아 때문에 반사적으로 사과하고 말았다. 남의 심기를 필사적으로 살피고 호구처럼 간이고 쓸개고 퍼 주었던 과거의 습관 때문이었다.
“아니면 혹시 이제 제가 필요 없어지신 거예요? 어머, 슬프다아…….”
“아니, 울긴 왜 울어…….”
나는 갑자기 훌쩍이며 울기 시작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쩔쩔맸다. 킬리안에게 제발 구해 달라는 의미의 시선을 보냈으나 그는 그런 나를 그저 관찰하듯 빤히 볼 뿐이었다.
차라리 다른 사용인들처럼 겁에 질려 근처에 다가오지도 않는 게 낫지, 이렇게 친한 척하면서 엉겨 붙는 사람은 어떻게 밀어내기 힘들었다.
내가 호구 윤하늘이었던 시절, 평생을 겪어 왔던 사람들 대부분이 저런 유형이었다. 내가 휩쓸리기 쉽고 마음이 약하며 우유부단한 성격이라는 걸 이용해서 등쳐 먹는 유형.
―하늘아, 부탁이야. 응?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 거 알잖아.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나 죽어 버릴지도 몰라…….
―뭐? 그 돈 그냥 준 거 아니었어? 너 너무한다. 친구가 빚에 시달리는데 지금 돈 갚으란 말이 나오니?
나는 애써 잊고 있었던 윤하늘이었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슬쩍 인상을 썼다.
저런 사람들은 대체로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른 것처럼 수시로 태도를 바꿔 댔으며, 몰염치와 안면몰수는 기본이었다.
나는 계속 과거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소피아를 볼 때마다 아주 질색하고 피해 다녔고, 그녀는 뭔가 바라는 거라도 있는지 그런 나를 아주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전에 그 크림색 드레스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저는 황태자 전하께서 크림색에 금실로 수가 놓인 정장을 맞추셨다는 말을 황궁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전해 듣고 아가씨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그런 건데…….”
두 분께서는 하늘에서 정해 준 연인처럼 정말 잘 어울리실 테니까요. 아련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어깨를 애처롭게 떨다가 말을 이었다.
“그 샬럿인지 뭔지 안젤로라는 듣도 보도 못한 보잘것없는 자작 가문 영애 때문에 아가씨께서 창피를 당하시다니! 이게 다 그 샬럿 때문이에요. 그 여자만 없어지면 우리 아가씨께서 다시 주목받을 수 있을 거라고요.”
이야, 역시 끼리끼리 논다더니 극단적인 사고의 흐름 좀 봐라. 어떻게 드레스 색 겹쳤다가 창피 좀 당했다고 그쪽으로 생각이 튈 수가 있어? 아일라는 그냥 평소 행실 때문에 발목 잡혀서 욕먹었을 뿐이잖아.
비위 맞춰 주는 것도 아주 수준급이었다. 확실히 내가 아일라 본인이었다면 지금 상황에서 저 말을 가장 듣고 싶어 했을 것 같긴 해.
악녀와 간신배는 환상의 짝꿍이다. 나는 어쩐지 아일라와 손발이 아주 척척 잘 맞은 것 같은 소피아를 피해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결국 킬리안의 등 뒤로 숨어 버렸다. 그는 약간 놀란 기색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말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 지금 내 태도가 더없이 의심스럽다는 거 안다.
“안젤로 자작 영애께서 아가씨께 큰 결례라도 저지르신 모양입니다.”
잠자코 있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자, 소피아는 킬리안을 올려다보며 살짝 미간을 구겼다가 마치 착각이었던 것처럼 발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집사님도 물론 아시겠지만, 우리 아가씨께서는 황태자 전하께 마음에 두고 계시니까요.”
아일라는 베르너를 사랑한다.
사실 이건 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야 끊임없이 베르너의 근처에 알짱거리며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붉히는데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데 주술사인 관계로 아마 인간 세계와 동떨어져 살아왔을 킬리안은 처음 듣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그는 나를 흘끔거린 뒤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셨습니까.”
그거 나 아니거든. 베르너를 사랑하기는커녕 두려워하는 처지이거늘.
“사실 우리 아가씨만큼 전하의 곁에 어울리는 영애도 없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 여자가 끼어들어서 다 엉망이 되었다고요. 우리 아가씨도 실연의 상처로 그만 이렇게…….”
소피아는 말을 잇다가 그만 울컥했는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뭐? 실연? 이 사태를 방관하고 있었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벌렸다.
다시 킬리안과 제대로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그는 붉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아주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아아, 그러시군요. 그래서 아무도 만나지 않으시고 이렇게 폐인처럼 책만 읽으시며 방구석에서 눈물로 세월을 지새우고 계셨군요.”
억울함도 이 정도면 복장이 터져 그만 죽어 버릴 지경이다.
필사적으로 피하느라 말 한 번 제대로 안 섞어 본 사람한테 실연은 무슨 실연! 실연의 상처가 아니라 돈 많은 방구석 폐인이 내 평생 꿈이었을 뿐이라고!
잠깐, 설마 사용인 모두 내가 실연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어쩐지 내가 이상하게 변한 것에 대해 아무도 의심을 품지 않더라!
“아가씨도 그만 기운 내세요. 어차피 그건 일시적인 관심에 지나지 않아요. 우리 아가씨처럼 완벽하고 화려한 장미꽃 같은 사람만 보다가 길가에 핀 잡초 같은 여자를 보니 잠시 호기심에 동한 것뿐이라고요. 금방 아가씨께 돌아오실 거예요.”
애당초 전부 아일라의 짝사랑이었을 뿐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는데 돌아오긴 뭘 돌아와. 샬럿과 베르너는 그냥 운명처럼 이어질 사이라고.
내가 답답함을 못 이겨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소피아는 아주 집요하게 날 쫓아오더니 내 손을 덥석 붙잡으면서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걱정하실 것 하나 없답니다. 제가 이번 시즌에 어디를 가시든 주목 받을 수 있을 만한 최신 유행으로 드레스를 골라 왔으니까요.”
물기 어린 눈을 손등으로 쓱 훔친 소피아는 언제 울었느냐는 듯 품속을 뒤적거려 종이 뭉치를 꺼내서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 여기 루치아나 의상실에서 나온 카탈로그를 보시면 제가 이렇게 표시를 했는데…….”
그녀는 내게 드레스의 그림을 내밀었다. 하나같이 리본, 꽃, 깃털, 러플 레이스가 가득한 밝고 화사하며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드레스들뿐이었다. 나 말고 오히려 소피아 본인이 더 어울릴 법한 옷이었다.
‘시녀가 아니라 장사치였어?’
대체 왜 실연의 상처가 드레스로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돈을 쓰면 스트레스가 풀리긴 하지만 나는 딱히 드레스에 욕심이 없었다.
물론, 과거에는 제법 관심이 있었다. 특히 로코코 시대 드레스를 좋아해서 많이 조사해 보기도 했고. 하지만 바라만 봤을 때는 몰랐는데 직접 입어 본 순간 모든 환상과 로망은 와장창 깨져 버리더라.
어쩌다가 한 번이면 몰라 어떻게 저런 답답하고 무거운 걸 매일 입어. 겨우 코르셋만으로도 죽을 지경인데 여기서 더 잔뜩 껴입었다가는 골병들어 죽고 말 거다.
“딱히 드레스 필요 없지 않아?”
나는 침실 안쪽에서 봤던 드레스룸을 떠올리며 말했다. 끝도 없이 이어진 드레스들이 조명 아래 저마다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었지.
“지금도 많은데…….”
“어머? 또 이러신다. 요즘 아가씨 정말 이상하시네요. 벌써 유행이 지났는걸요. 당연히 처분해야죠.”
유행이 지났다고 하기엔 카탈로그 속 드레스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 건지. 불편한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을 때, 소피아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아, 이런. 제가 아직 이걸 보여 드리지 않았군요. 이번 시즌 유행에서 중요한 건 바로 이 부분인데.”
그녀는 팔랑팔랑 종이를 넘기다가 드레스의 뒷모습이 그려진 종이를 펼쳐서 내밀었다. 치마의 뒷부분에 볼록하게 입체감이 있는 퍼프가 뒤쪽과 양옆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자, 보세요. 와토 가운이 사라졌지요? 누가 요즘 촌스럽게 등에 커튼 같은 주름을 매달고 다니나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내가 한 달 전에 직접 무도회에서 보았던 드레스처럼, 등 가운데에 두 개의 주름이 잡혀 물 흐르듯 떨어져 내렸던 라인의 천이 사라져 있었다.
“이번 시즌에는 치마 뒷부분에 개더 주름이 잡혀 있는 드레스가 유행할 거래요. 마치 장미 몽우리 같은 게 정말 세련되지 않았나요?”
나는 쫑알쫑알 이어지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뭔가 생각날 것도 같은데.
‘개더 주름이라면 로브 아 라 폴로네즈를 말하는 건가. 소설 내용에 저런 게 있었던 것도 같은데…….’
아! 기억났다.
저 치마 주름의 형태는 샬럿이 베르너의 도움으로 사교계에서 새롭게 유행시킨 거였다.
변방의 가난하고 작은 자작 가문에서 태어난 샬럿은, 시골 출신이라 귀족 영애답지 않게 가끔 농사일도 돕고 농장일도 하면서 자라 왔다.
그녀는 일할 때 옷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치마를 걷어 올려 입었는데, 뒤로 볼록 솟은 치마 주름을 굉장히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샬럿은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내어 새로운 디자인의 드레스를 종이에 그리는데, 베르너가 그것을 보고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를 불러 만들라 명한 뒤 사교계에 퍼트린다.
귀족들은 그게 누가 고안한 디자인인지 모른 채 유행에 따라 수확제에 열린 무도회에 너도나도 입고 나온다.
그렇게 샬럿은 모두가 새로운 유행에 열광하고 있을 때, 그들의 앞에서 본인이 만든 디자인의 드레스라는 사실을 밝히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순식간에 사교계의 ‘백합꽃’이라고 불리며 영애들의 중심에 우뚝 서기 시작한다.
‘지금이 딱 그 시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