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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14화 (14/131)

# 14

악녀 메이커 14화

그럼 아직 소설 초반부라고 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샬럿이 본격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기 시작한 시기라고 할까. 나는 소설에서 수확제 날에 벌어질 일을 떠올렸다.

아일라는 다른 영애들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른 채 새로 유행하는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본인이 입은 드레스가 사실 증오해 마지않는 샬럿이 고안한 디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베르너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모멸감과 질투를 이기지 못한 아일라는, 들고 있던 와인을 샬럿이 입고 있던 드레스에 쏟아 버린다.

[피를 닮은 검붉은 액체가 샬럿의 치마폭을 무참히 더럽혔다. 직접 디자인한 드레스를 사교계에 알리고 싶었던 샬럿의 꿈도 함께 젖어 들었다.

순간, 무도회장은 정적에 휩싸였다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영애, 괜찮으십니까!”

“맙소사, 어디 다친 곳은?”

샬럿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빤다고 해도 지워지지 않을 얼룩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가에는 진주 같은 물방울이 맺혔다.

“저, 저는 괜찮아요. 메르텐시아 영애. 실수일 뿐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다시 만들면 되는걸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었지만, 샬럿의 가녀린 음성은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자애로운 성녀의 자비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귀족들은 아일라를 돌아보았다.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뜬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누가 마녀 아니랄까 봐…….”

아무리 자존심이 상했다지만 이런 추악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건 전혀 귀족답지 못했다. 아일라를 응시하는 모두의 시선에는 하나같이 숨길 수 없는 경멸이 어려 있었다.

누군가는 안타깝다는 듯 외쳤다.

“영애, 이건 이 시대 최고의 디자이너 폴랑과 함께 만든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드레스 아닙니까! 게다가 이런 부드럽고 깃털 같은 원단은 저조차도 처음 보는 것인데…….”

“상관없어.”

그때였다.

아일라의 패악으로 그들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을 가르고 베르너가 나타났다.

그는 상처를 입은 새처럼 떨고 있는 샬럿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말을 이었다.

“몇 벌이든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이 일을 가장 적극적으로 후원한 게 바로 나인데 대체 뭐가 걱정이지?”

“전하…….”

베르너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샬럿을 위로하듯 토닥인 뒤 아일라에게 눈길을 돌렸다.

경멸을 넘어선 싸늘한 칼날과 같은 시선이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가.

그 뒤로 아일라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호감을 품고 있던 귀족들도 전부 떨어져 나가고 그녀를 외면하게 된다.

이 내용이 바로 팔링게아 다음으로 아일라가 등장할 장면이었다. 만약 루프가 또 일어난다면 바로 이날 수확제에 일어나지 않을까.

루프를 풀기 위해선 샬럿이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가서 그녀의 옷에 와인을 쏟고 와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모두가 등을 돌릴 테고, 베르너도 날 경계할 테고, 아일라는 명실상부 악녀로 거듭날 테니까.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분명히.

‘죽기 싫어…….’

그래, 죽을 것이다.

그것도 차갑고 싸늘한 감옥 속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다가 홀로 쓸쓸히 죽어 갈 것이다.

“생각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아가씨. 최신 유행이라는 이 드레스가 마음에 차지 않으십니까?”

그때, 갑자기 누군가 귓가에 바짝 붙어서 속삭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여전히 턱과 입술밖에 보이지 않는 킬리안의 옆모습을 돌아보았다.

“어두운 표정을 하고 계십니다만.”

“그냥…… 좀 복잡해서요.”

“말씀 낮추시지요. 집사에게 말을 높이는 아가씨라니 누가 들으면 비웃음을 살 겁니다.”

나는 뒤늦게 내 실수를 깨닫고 입을 탁, 틀어막고 소피아를 살폈다.

그녀는 앞에서 대놓고 수군거리는데도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최신 유행에 대해 떠벌리고 있었다.

‘물에 빠트리면 입만 동동 뜨겠네.’

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킬리안이 다시 속삭였다.

“저와 한배를 탄 사이란 걸 잊으신 모양이군요. 좋을 말할 때 고민을 다 털어놓으시지요. 어차피 저 아니면 말할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

방금 말 한마디에 뼈를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맞는 말을 해서 할 말 없게 만드는 남자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사실 찔리는 게 있는 건 사실이었다. 계약하자고 말만 해 놓고 나는 정작 혼자 담아 둔 채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으니까. 이해관계가 맞아서 같이 손을 잡기로 했는데 배려 없는 행동이기도 했다.

내 정체를 전부 까발릴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말은 해 둬야겠지.

“소피아, 잠시만 좀 나가 있을래?”

나는 여전히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이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네? 아…… 제가 그만 아가씨를 또 불편하게 해 드렸군요.”

그랬더니 소피아는 갑자기 세상의 모든 시련은 전부 짊어진 듯한 고통스럽고 아련한 표정으로 다시 눈가를 촉촉하게 적시기 시작했다.

“왜 또 울어…….”

소피아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다시 내 손에 카탈로그를 꼭 쥐여 주었다. 원래 이 정도까지 집요하진 않았는데 내가 하도 도망가고 밀어내니까 오늘 아주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전 전부 아가씨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아가씨는 뭘 입으시든 모두의 주목을 받으시겠지만, 최신 유행을 따르지 않아 아가씨께서 창피를 당하실 생각만 하면 제 억장이 다 무너진답니다.”

넌 심지어 연기도 잘하는구나. 그냥 연극배우를 하지 왜 시녀를 해서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니. 나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를 착잡하게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주문하면 되는데?”

내 말에 소피아가 숙였던 고개를 황급히 들어 올렸다. 그녀의 짙은 갈색 눈동자에 노골적인 탐욕이 스쳤다가 사라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제가 표시한 것 전부 다 주문하시면 되잖아요? 항상 그랬던 것처럼요.”

항상 그렇게 주문해 왔다고?

나는 경악하며 카탈로그에 표시된 드레스 수를 세어 보았다. 어림잡아도 서른 벌은 넘는 것 같았다.

“이걸, 다……?”

드레스는 해가 지날 때마다 유행이 달라지기 때문에 보통 시즌에 맞춰 종류별로 새로 장만해야 한다.

드레스 한 번에 평민들의 1년 생활비에 가까운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간다고 설정했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이건 광기에 가까운 사치였다.

아일라의 부유한 집안을 고려하더라도 많이 심한 것 같은데. 이 정도면 한 번 입은 옷은 두 번 다시 거들떠보지도 않을 수준이다.

소피아가 이런 사치를 종용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내가 침묵한 채 말이 없자, 초조해진 모양인지 그녀는 나를 열심히 설득하기 시작했다.

“제가 누구인가요. 5년간 아가씨의 밑에서 치장은 물론, 의상과 장신구 전반을 관리해 온 소피아잖아요. 당연히 아가씨께 어울리는 드레스를 귀신같이 알아맞힐 수 있답니다.”

이 꽃 자수가 가득한 프릴 덩어리들이 진정 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런 눈썰미라면 역시 시녀는 때려치우고 연극배우를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내가 아무리 금수저가 된 이후로 돈을 흥청망청 쓰기로 했다지만, 이런 쓸데없는 것에 쓰는 건 내 소시민의 영혼이 용납하질 못했다.

나는 몹시 곤혹스러워하며 다시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소피아.”

“아가씨…… 역시 제가 싫어지신 거죠?”

또 눈물 쏟을 준비를 하는 소피아 때문에 한숨이 목 끝까지 차오를 무렵, 우리를 잠자코 응시하던 킬리안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모르는 사이 마녀와 호구가 동의어라도 된 모양입니다.”

“…….”

“아무리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지만 이건 당황스러울 정도로군요.”

나는 침묵했고 소피아는 한참 입술을 달싹이다가 뒤늦게 ‘아가씨께 그게 무슨 경망이십니까!’ 하고 외쳤다. 하지만 킬리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역시 잡고 흔들면 이리저리 휘둘릴 것 같은 이쪽이 본모습입니까?”

그는 나를 무슨 물렁물렁한 푸딩처럼 비유하면서 빤히 쳐다봤다. 아니 소피아가 듣고 있는데 그런 말을 대놓고 하면 어떡하자는 겁니까!

‘정확히 파악하긴 했지만…….’

날 지그시 쳐다보는 게 부담스러워 식은땀을 뻘뻘 흘릴 때쯤, 그는 아까부터 계속 눈물 짤 준비를 하는 소피아 쪽으로 턱짓한 뒤 말했다.

“저런 것도 그냥 놔두고.”

저런 거라니.

그 말을 들은 소피아가 울컥했는지 우는 시늉을 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킬리안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세바스티안 님, 아무리 아가씨의 개인 집사로 오셨다지만 이건 저와 아가씨의 일이라고요. 아가씨의 치장을 담당하는 건 시녀인 제 일이에요. 집사님이 제 권리마저 침해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킬리안은 방긋 웃으며 날카로운 외침을 나긋하게 받아쳤다.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엔 시녀님이야말로 아가씨의 심기를 어지럽히면서까지 권리를 주장하고 계십니다만. 싫어하시지 않습니까.”

“맙소사, 그럴 리가 없어요! 저는 우리 아가씨께서 가장 총애하는 소피아인걸요. 그렇죠, 아가씨?”

소피아는 무슨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했다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만해라, 좀.’

그래도 저렇게 절실하게 내가 드레스를 주문하길 바라는데 먹고 떨어지라는 의미로 이번만 말을 들어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다른 세계에 떨어져도 호구 기질은 사라지지 않아 더는 거절하는 게 힘들었다.

그냥 원하는 걸 들어주는 쪽에 생각이 기울 무렵, 킬리안이 소피아 쪽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같은 말을 또 반복하게 하시는군요. 제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뭘 혼자 해결하려고 끙끙대시다가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시는 겁니까?”

“…….”

“이리 믿음이 없으시다니…….”

뭐? 대체 뭘 하려고.

의아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을 때쯤, 그는 소피아를 향해 후드 끝을 살짝 들어 올려 시선을 정확히 맞췄다.

“네 이름은?”

짜증과 성가심으로 가득했던 소피아의 갈색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더니 순식간에 혼탁하게 풀어졌다.

그녀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순순히 입을 열었다.

“……소피아 베릴.”

“소피아. 지혜라는 뜻이군.”

“맞아요.”

“의미 있는 이름이겠어, 그렇지?”

“아버지께서 언제나 지혜로우라는 뜻에서 지어 주신 이름이죠.”

“좋은 이름이야. 하지만 어쩐지 그 이름에 불만이 있어 보이는군.”

킬리안은 부드럽게 속삭이며 달빛 같은 눈동자를 반달처럼 접었다.

그러자, 반쯤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고 있던 소피아가 갑자기 피를 토할 것처럼 큰소리로 분노를 터트렸다.

“지혜? 돈이나 주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던가! 아버지라는 작자는 귀족의 의무니 뭐니 하면서 그 많던 재산을 남김없이 거지 비렁뱅이들에게 퍼 나르기 바빴죠. 정작 난 귀족의 권리는 누려 보지도 못했어!”

갑작스러운 소피아의 외침에 놀란 나는 귀를 틀어막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킬리안은 입가를 비틀며 조소를 머금었다.

“그것참 안타까운 일이야.”

설마 이게 전에 킬리안이 말했던 그의 고유 능력이라는 걸까?

소피아는 계속 꽁꽁 감추어 왔을 추악한 일면을 스스럼없이 내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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