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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15화 (15/131)

# 15

악녀 메이커 15화

나는 소피아를 조마조마하게 응시했다. 정작 그 말을 꺼내는 그녀의 얼굴은 굉장히 속이 시원해 보였다.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지?”

“당연히 돈! 드레스! 보석! 뭐든!”

“돈을 쓰는 건 즐거운 일이지.”

“맞아요. 그래서 내가 그 구질구질한 집구석을 떠나서 여기 온 거죠.”

“네게 잘된 일이겠군.”

그러자 의기양양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있던 소피아가 갑자기 인상을 팍 구겼다. 불쾌한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를 갈면서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저 망할 년.”

그리고 나는 다짜고짜 욕을 들어먹었다.

“내가 저 멍청한 년 비위 맞춰 준다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데.”

소피아는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상태로 계속 말을 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하늘에 닿았다가 땅에 곤두박질치지를 않나, 황태자 전하께서 자기를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나한테 뭐라 하지를 않나. 네가 얼굴만 예쁜 돌이라 싫어하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

뭐야, 그렇게 찬양하기 바쁘더니 사실은 알고는 있는 모양이지?

“그래도 네년이 쉽게 속아 준 덕분에 내가 원하던 걸 충족시켜 줬으니 고맙긴 해. 바보 같기는.”

주인만 따르는 개처럼 살갑게 꼬리를 흔들더니 역시 속으로는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그래서 그렇게 쉽게 베르너에게 붙어 배신할 수 있었던 거겠지.

그때, 킬리안이 물었다.

“그녀를 어떻게 속였지?”

“한 번 입은 드레스를 어떻게 또 입을 수 있느냐고 했어요. 아가씨는 다른 영애들과 급이 다르니까 매번 새로운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고.”

“흐음.”

말 대신 콧소리로 대꾸한 그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빤히 응시하는 눈빛이 정말 저런 어처구니없는 말에 속았느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그럴 리가. 나는 내가 황태자를 좋아해서 방구석 폐인이 됐다는 누명을 썼을 때만큼이나 억울해졌다.

“웃기지도 않는 사탕발림에 넘어가서 정말 한 번 입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요? 그래서 전부 다 제가 가졌죠. 저한테 어울리지 않는 건 팔아서 돈으로 바꿨고, 어울리는 건 수선해서 제가 입었어요.”

그녀는 아주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럼 많은 돈을 벌었겠어.”

“아직 턱도 없죠. 멍청한 아일라는 상관없지만, 모두의 눈을 피해 빼돌리는 건 어려운 일이거든요. 보석은 기껏해야 1년에 한 번 정도밖에 건들지 못했죠. 그런데 요즘은 그 좋아하던 드레스도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화가 안 나겠나요?”

씩씩대며 말하는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허영심과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소피아는 마치 저주라도 읊는 것처럼 이번 시즌 드레스를 빨리 주문해야 한다고 음울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킬리안은 슬슬 무료해졌는지 눈가를 느슨하게 풀었다.

“하찮기는.”

그렇게 중얼거린 그는 나른한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아가씨에게 말하면 네가 원하는 보석을 모두 다 준다는군.”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자 그 말에 소피아는 눈을 번쩍 떴다.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뒤, 황홀경에 젖은 눈빛으로 내게 다가왔다.

무슨 좀비가 따로 없었다. 욕망에 눈이 뒤집힌 그녀는 내 피와 살을 뜯어먹기 위해 달려드는 좀비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드러진 목소리로 살랑거렸다.

“저는 아가씨께서 저번에 하셨던 사파이어 목걸이가 그렇게 예쁘더라고요. 그걸 목에 걸고 샹들리에 밑에 선 아가씨는 마치 공주님 같았죠.”

소피아는 쓱 침이 흐르는 입가를 닦은 뒤, 양손을 모으며 꿈꾸는 듯한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이 탐욕에 잡아먹히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주는 아주 단적인 예였다.

“그 귀부인처럼 우아했던 흑진주 귀걸이는 어떻고요. 지난 연회 때 하셨던 다이아몬드 머리 장식은 화룡점정이었죠. 제가 직접 보진 못했지만 분명 아가씨만큼 아름다운 영애는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은반지 장식의 레이스 장갑은 또…….”

소피아의 수다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나를 칭찬하는 척 제가 가지고 싶은 보석을 어필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속내가 빤히 보였다.

킬리안의 능력에 휘둘리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아부를 잃지 않는 간신배 정신이라니. 그 집요함에 이제는 존경심마저 일 정도였다.

“그래서 어쩌실 건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올리고 있던 그가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이며 물어 왔다.

말투는 어느새 다시 고압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표정을 보니 상황 자체는 따분할 지경이지만,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호기심이 든 눈치였다.

“뭘 어째요…….”

“처분은 전부 네게 달렸으니까.”

선택을 회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 단호한 말투였다.

“저는…….”

사실 소피아는 절대 상종도 하고 싶지 않긴 하지만, 그녀가 속여 먹은 건 내가 아닌 소설 속 아일라였다. 그녀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기에 섣불리 처분을 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그 아일라였다.

악녀처럼 행동해야 하는 마당에 더는 외면하고 방구석에서 노닥거릴 수 없었다. 그랬다간 소설처럼 소피아의 증언으로 죽게 될 테니.

하지만 그럼에도 난 여전히 윤하늘이었다. ‘나’라는 한계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시키는 대로 따르며, 정해진 틀에 필사적으로 나를 맞추며 살아왔던 삶을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어쩐지 입맛이 썼다.

‘그 멸시와 경멸 어린 시선들을 또 받아 내야 한다고? 싫어. 무서워.’

내면 깊은 곳에 꼭꼭 숨겨 왔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평생을 호구처럼 당하고만 살아왔던 이유였다.

나는 겁쟁이였다.

이용당하는 것보다 타인에게 미움을 사는 게 더 두려웠다.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워 거절 자체를 하지 못했고 알면서도 평생을 당해 왔다.

속으로 나를 무시하고 경멸하더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웃어 주길 바랐다. 그만큼 미움받는 게 두려웠다.

사실 지금도 전혀 발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배신할 게 뻔한 시녀에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그래서 킬리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현실에서 도망갈 생각만 했던 거다.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괜히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지금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냥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킬리안은 길 잃은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보더니 물어 왔다.

“저런, 겁을 먹은 건가?”

독심술 좀 하지 마라.

그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손쉽게 내 생각을 읽어 냈고, 나는 창피함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가 고구마 같고 답답하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도무지 변할 수가 없는걸. 애초에 이렇게 생겨 먹었다고.

“두려워할 것 없어.”

그는 내가 무엇에 겁을 내는지 이미 파악한 듯 이렇게 말했다.

“넌 가진 게 없잖아. 가족의 관심과 사랑도, 친구도 그 무엇도.”

“…….”

갑자기 왜 엄청난 악담을 하는 거지? 팩트로 얻어맞은 심장을 움켜쥐며 울상을 짓자 그가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잃을 게 없으니 굳이 영양가 없는 규칙에 얽매여 있을 필요 없다는 뜻이다. 넌 그냥 거리낄 것 없이 행동해도 돼.”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고 있는 주술사가 세상에서 가장 겁이 많은 아일라에게 직접 해 준 조언이었다.

‘그건 그러네. 생각해보니 난 이미 외톨이인걸. 혼자가 될 걸 두려워할 것도 없잖아. 지금도 혼자인데.’

나는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도는 말을 되새겼다.

“얘, 좋아? 싫어?”

그때 킬리안이 물어 왔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좋다, 싫다로 나누는 것은 어린애나 할 법한 이분법적 사고였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물으니 오히려 답은 쉽게 나왔다.

“당연히 싫죠.”

“왜 싫어?”

“그야 절 이용하려고 하니까…….”

“그렇다면 그것에 대한 해답은 둘뿐이지. 첫째, 몇 배로 돌려줘서 다시는 엄두도 못 내게 길들인다. 둘째, 개선의 여지가 없으면 영원히 이승에서 떠나보낸다.”

“……그거 확실해요?”

“응. 객관식이야. 골라.”

미친, 고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냥 아까 쫓아낸다고 할걸. 왠지 전보다 더 괴로워진 나는 이마를 짚었고 킬리안은 어서 대답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이며 팔짱을 꼈다.

“처, 첫째.”

나는 집게손가락을 펴서 꺼내 보이며 더듬거렸다. 소피아가 내게 위험 분자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살인을 조장할 수는 없었으니까.

“좋아. 어떤 죗값을 치르게 할지는 나중에 결정하기로 하고, 그 전에.”

그는 내 얼굴 양옆을 부드럽게 붙잡고 소피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보석을 받아 낼 생각으로 눈을 반짝거리는 시녀와 정면에서 시선이 얽혔다.

킬리안이 말했다.

“다시는 주인 물어뜯는 개 따위는 키우지 않는다.”

“…….”

“어서 따라 해야지.”

“…….”

그게 뭐야. 당황한 내가 전혀 따라 할 생각을 하지 않자, 그는 등 너머로 내 볼을 꼬집었다.

주저하던 나는 웅얼거리며 킬리안의 말을 따라 했다.

“다, 다시는 주인 물어뜯는 개 따위는 키우지 않는다.”

“알았지? 절대 키우지 마. 혼나.”

그는 잘못한 어린아이 타이르듯이 말한 뒤 내 볼을 놓아주었다. 나는 얼얼한 볼을 문지르며 여전히 눈빛이 풀린 소피아를 흘끔거렸다.

‘주인 물어뜯는 개라…….’

하긴, 유일한 시녀로서 백치와 다름없을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의 신뢰를 이용해 지금껏 알량한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살아왔겠지.

남을 속여 도둑질한 주제에 당당히 제 권리인 양 말하는 철면피를 보니 정말 내가 알던 사람들과 닮다 못해 똑같았다. 어쩜 저리 뻔뻔할까.

‘속은 쪽이 잘못이다, 이거지?’

외모, 권력, 재력만 보고 개떼들처럼 달려드는 종속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뭐든 하는 간사한 이들은 아일라가 바닥까지 추락한 순간 누구보다 먼저 물어뜯기 위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것이다. 내게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연을 끊고자 했던 가족들처럼…….

나는 왜 내가 하필 많고 많은 등장인물 중에 아일라의 몸속에 빙의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호구와 악녀라는 정말 다른 방향의 길을 걸어왔지만, 그녀가 살아온 환경은 굉장히 나를 닮아 있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주변에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

깜짝이야.

킬리안이 갑자기 얼굴을 불쑥 들이밀면서 말을 걸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보고 작게 웃은 그는, 대체 뭘 망설이느냐는 듯 말했다.

“해.”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소피아의 눈앞에 대고 몇 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녀는 소리 나는 쪽으로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어어?”

초점을 잡지 못하던 연갈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맑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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