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악녀 메이커 16화
“허억!”
소피아는 뒤늦게 자신이 한 말들이 떠올랐는지 창백하게 질렸다.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덜덜 떠는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였다.
그녀는 헛숨을 들이켜며 입을 틀어막았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다가왔다.
“아, 아니에요, 아가씨. 절대 제가 그런 말을 한 게…… 아니, 뭔가 씐 게 분명해요! 이 소피아가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아가씨? 그럴 리가 없어요!”
정신을 놓기라도 한 것처럼 필사적으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결국 내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매달렸다.
“아…….”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린 나는 그녀의 손을 망설임 없이 떨쳐 냈다. 그러자 소피아는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으로 굳어졌다.
그걸 보면 또 마음이 약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각오하고 한 일이겠지.”
“아, 아가씨!”
“주인 물어뜯는 개는 안 키워.”
킬리안이 내게 가르쳐 준 말을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짜릿한 쾌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원하게 훑고 지나갔다. 사실은 처음부터 계속 이러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니에요! 오해예요, 아가씨!”
이미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까발려진 마당에 아직도 발악하는 소피아를 보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나는 이런 내가 스스로 낯설어 살짝 주저하며 킬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입꼬리는 끌어 올리다니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또박또박 따라 했다.
“……알아들었으면 내가 찾을 때까지 말 잘 듣고 얌전히 기다리렴.”
내 말을 들은 킬리안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우스운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웃음은 전염된다고들 하던가.
나는 그동안 소피아가 아름답다고 수없이 찬사를 퍼부은 얼굴로 슬쩍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나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는 소피아를 서재에서 쫓아냈다. 그리고 지하 감옥에 가두라고 명했다. 물론, 킬리안의 아이디어였다.
그러자 소피아는 정말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모양인지 무릎을 꿇고 울고불고 빌다가 가문의 기사들에 의해 질질 끌려갔다.
“아가씨께서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게,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아가씨를 위해 평생을 다 바쳐 살아왔는데……!”
소피아는 어쩐지 사극에서 들어 본 것 같은 대사를 뱉으며 끝까지 발악했다.
야, 누가 들으면 내가 네 목을 치라고 한 줄 알겠다. 그리고 말은 바로 해야지. 날 위해서가 아니라 내 드레스와 보석을 위해서였잖아. 나는 그녀의 얼굴을 뚱하니 지켜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적은 처음 아닌가. 남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나부터 생각한 거.’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행동하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가? 어쩐지 정말 즐거워져서 실실거리는 웃음이 계속 입술 밖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러자 점점 멀어져 가는 소피아의 이마에 꿈틀거리며 핏대가 서는 것이 보였다. 뭔가 제대로 열 받은 표정이다. 기사들은 나와 소피아를 번갈아 보며 또 아가씨가 패악을 부리는가 보다 하고 혀를 끌끌 찼다.
킬리안의 말마따나 아일라는 애초에 잃을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키는 대로 막무가내로 행동해도 모두가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나는 전생의 설움까지 더불어 후련함과 뿌듯함을 느끼고 크게 숨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두려워 진작부터 이러지 못했던 걸까. 저런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거머리 같은 인간들을 뭐 하러 지금까지 참고 붙이고 다녔는지 모를 일이었다.
막상 해 보면 이토록 쉬운 것을.
자꾸 실실 올라가는 입꼬리를 다잡으며 무심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움찔 놀라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을 얌전히 지켜보고 있던 킬리안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사람들이 떠나자마자 곧바로 핵심을 찔러 왔다.
“우리 아직 할 얘기 남아 있지 않나?”
불행히도 내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신을 욕하던 패기는 어디 가고 이렇게 찌그러져 있어? 나한테 겁을 먹는 건 당연하니 넘어갔다만, 네 담당 시녀한테까지 쩔쩔매는 건 많이 심각해 보이는데.”
“…….”
그건 할 말이 없었다.
“네가 말하는 걸 보면 상식이 좀 엇나가 있고 놀라울 만큼 배우지 못했을 뿐, 들은 만큼 멍청해 보이진 않아. 애초에 귀족 같지도 않고.”
그는 소문에 휘둘리지 않고 내 본질을 꿰뚫어 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소설의 아일라가 아닌, 바로 윤하늘을 말이다. 나는 서서히 그의 통찰력이 무서워질 지경이 이르렀다.
“겁이 많아서 움츠러들어 있는 게 이렇게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다른 인간들 눈이 옹이구멍이라도 되는 건 아닐 테고. 그럼 왜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에 시달리는 거지?”
이제 더는 대답을 미룰 수가 없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그에게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일단 여기가 소설 속이고 내가 작가라는 건 절대 말할 수 없는 거고.
나는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다른 세계에서 왔어요.”
“역시 그랬나.”
킬리안은 이미 거기까지 의심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곧바로 수긍했다.
그에 도리어 내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치가 귀신같다는 건 진작부터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대체, 어떻게……?”
“너야말로 어떻게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할 수가 있는 거지?”
그는 내 어리벙벙한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피식 웃은 뒤 답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족다운 구석이 조금도 없잖아. 귀족이라면 아무리 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도 주어진 환경에서 배워 저절로 몸에 익는 것도 있기 마련일 텐데. 그리고 낯선 세계가 아니고서야 보일 수 없는 반응들도 수두룩하고.”
“그렇게 수상했나요…….”
“응.”
단박에 수긍하는 킬리안을 보니, 내 아일라 행세가 그렇게 어색했나 싶어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애초에 제대로 흉내 내려고 한 적도 없었지만 말이다. 본인 일임에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던 태도 때문에 발목이 잡힌 거겠지.
“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지만 여기로 온 게 제 의도는 아니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뜨니까 뜬금없이 아일라가 되어 있었거든요.”
“빙의의 형태라는 건가?”
“네, 그런 느낌이죠.”
“과연, 그래서 레제르브의 기운이 온몸에 묻어 있었던 거군. 그럼 원래 몸의 주인은 어딜 간 거지?”
“어……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아일라의 영혼은 어딜 간 거지? 신이라는 작자가 멀쩡히 잘 있는 영혼을 쫓아내고 내 영혼을 밀어 넣을 리는 없고?
이제야 드는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왜 신은 본인도 귀찮을 텐데 굳이 날 아일라의 몸속에 집어넣어서 이 사달이 나게 한 걸까?
뭔가 이거 꽤 중요한 단서가 아닌가 하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킬리안이 말을 이었다.
“하긴, 네가 알 리가 없겠군. 원래 있던 영혼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긴 하다만, 일단 그보다 네 얘기를 먼저 들어 보지.”
그는 뭐든 말해도 들어 주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가장 고비라고 생각했던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말이 생각보다 쉽게 먹혔기 때문에, 나는 전보다 편하게 말을 꺼낼 수가 있었다.
“원래 이 몸 주인이었던 아일라의 성격이 바로 그 소문의 개차반 같은 성격이고, 제 성격은 그쪽 말마따나 호구죠……. 아무래도 굳이 호구 같은 절 집어넣은 걸 보니, 킬리안의 말대로 아일라의 원래 영혼에 문제라도 생긴 모양이에요.”
왠지 스스로 인정하다 보니 슬퍼졌으나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하려다 보니 우울해져서 말끝이 처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는 아일라가 겪어야 할 운명을 그대로 따라야 하나 봐요. 킬리안이 그랬잖아요. 신이 원하는 선택을 할 때까지 계속 루프가 일어날 거라고. 신이 원하는 선택이란 원래의 아일라가 겪었어야 할 운명이라는 거죠.”
“흠.”
눈치가 빠른 듯한 그의 앞에서 되도록 거짓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나는 최대한 교묘하게 진실을 감춘 채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까 표정이 좋지 않다고 물으셨잖아요. 그때 사실 예지를 봤어요.”
“예지? 전에는 그런 거 본 적 없다고 딱 잘라 답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예지인 줄 몰랐죠.”
“흐응. 레제르브가 그런 친절도 베풀 줄 아는 신인 줄은 몰랐군.”
“하지만 인간의 운명을 멋대로 휘두르고 싶어 하는 신이기도 하죠.”
물론, 나는 레제르브를 직접 만들기는 했지만 레제르브에 관해 아는 바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냥 킬리안이 듣고 싶어 할 것 같은 말을 아부하듯이 콕 짚어서 말했다.
거짓말을 한다면 듣기 좋은 말에 섞는 편이 좋겠지. 이러다가 진짜 신이 있으면 신성 모독으로 지옥에라도 떨어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계속 숨기고 있었지만, 사실 팔링게아의 날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신이 제게 보낸 전언이더라고요. 마치 보여 준 그대로 행동하라는 듯이…….”
나는 내가 팍 하고 신이 보낸 예지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수확제 날에 있을 일의 자초지종을 읊었다. 뭐, 소피아 덕분에 아까 팍 하고 기억났으니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 무도회에서 벌어질 일과 샬럿이 사교계에서 추앙받고, 반면 아일라는 완전히 외면당한다는 말까지 전부 해 주었다.
킬리안은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가 드물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 말대로라면 그 루프라는 게 또 시작될 모양인데…….”
즐거움이 가득한 음성이라 그런지 마치 내 귀에는 ‘드디어 신을 능멸할 때가 왔군’ 하고 들리는 듯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유난히 뾰족한 새하얀 송곳니가 반짝거렸다.
“그래서, 신은 네가 그렇게 철저하게 짓밟히기를 바란다는 거지? 그게 원래 아일라의 운명이고 말이야.”
믿는 건지 날 떠보는 건지 알 수 없는 말투였다.
그는 식은땀으로 떡 진 내 머리를 토닥이면서 말했다.
“그런데 원래 몸처럼 행동하길 바랐다면 왜 많고 많은 영혼 중에 하필 다른 세계의 영혼을, 그것도 성격이 정반대의 영혼을 넣었을까.”
같은 세계에 비슷한 성격의 영혼을 넣는 편이 더 순조롭게 원하는 바를 이룰 텐데 말이야. 킬리안은 아주 예리하게 허점을 찔러 왔다.
“…….”
하여튼, 쓸데없이 감이 좋아선.
그거야 아마도 내가 이 소설 작가라서 데려온 거겠지. 신이 바보도 아닌데 번거롭게 굳이 다른 세계의 호구인 내 영혼을 악녀의 몸에 집어넣을 이유가 그거 말고 또 뭐가 있겠어.
나는 죽어도 말할 수 없는 그 말을 꿀꺽 삼키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난들 알겠느냐는 듯 결백 어린 표정으로 말이다.
“전 이 세계에 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고 아는 게 거의 없는 백지 상태예요.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로 계속 책만 읽은 건 그런 이유도 있다고요. 그런데 제가 레제르브의 깊은 뜻까지 어떻게 알겠어요.”
“뭐, 지금은 속아 주지.”
그는 이미 내 거짓말을 꿰뚫어 본 듯 관대하게 넘어가 주겠다는 태도로 대꾸했다.
저 귀신같은 남자는 내가 했던 말이 전부 다 사실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