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악녀 메이커 17화
‘……저런 괴물 같은.’
지금으로서는 더 캐묻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네가 샬럿이라는 여자의 제물 같은 역할이라는 건가?”
제물이라니.
“이왕이면 악녀라 해 주시죠.”
“악녀? 그게 뭐지?”
그는 그 단어 자체를 처음 듣는지 오히려 되물어 왔다.
그런 근본적인 질문부터 하는 건가.
나는 악녀가 뭐의 줄임말인지 떠올려 보다가 알 수 없어서 그냥 아무 말이나 했다.
“악한 여자라는 뜻이죠, 아마?”
“네가 악한 여자라고? 어디가?”
그는 악한 여자가 다 죽었느냐는 듯이 황당한 음성으로 물었다.
저렇게 어이가 없어 하는 걸 보니, 역시 내가 악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니 제가 아니고, 그러니까 원래의 아일라가 악녀라고요.”
“그쪽도 말이 안 된다만. 불쌍할 정도로 당하기만 하지 않나.”
원래 악녀가 대체로 그랬다.
끊임없이 모략을 짜고 온갖 방해 공작을 펼쳐도 시종일관 그저 당하기만 하는 역할이지.
물론 소설의 위기, 절정에서는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마치 여자 주인공에게 큰 위해를 끼칠 것처럼 나오지만 결국 비참하게 죽는다.
음, 이번 수확제 무도회에서 아일라의 악녀 같은 면모라고 한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샬럿의 옷에 와인을 쏟아 버리잖아요?”
“애처롭기 짝이 없던데. 위협당한 작은 짐승이 겁을 먹고 필사적으로 몸을 방어하는 것 같아서. 그런 걸 인간들은 악하다고 하는 건가?”
“…….”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할 말이 없네요.
생각해 보면 내가 글을 쓸 당시에도 샬럿이 몹쓸 짓을 당하는 걸 조금도 참지 못했던 것 같았다.
사실 아일라는 악녀라기보단 사랑의 큐피드였다. 본인은 그럴 의지가 전혀 없고, 그냥 둘 사이를 훼방 놓고 싶었을 뿐이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베르너는 샬럿을 보호해 주면서 둘만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지게 되고, 서로 호감을 느낄 기회도 늘어나 둔한 샬럿도 금세 본인의 감정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둘의 관계를 끈끈하게 만들어 주었으니, 인연의 실을 견고하게 이어 준 은인이 아니고서야 뭐겠는가.
바보 같은 아일라.
샬럿을 그냥 얌전히 놔뒀으면 쟤네가 연인이 될 확률도 급격히 줄어들었을 텐데. 이러니까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 속담이 있는 거다. ……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악녀라는 걸 설득하려다가 그냥 포기하고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아일라는 계속 당하기만 해도 마녀라고 불릴 정도로 모두가 악녀라고 생각해요. 신은 아마도 제가 그런 취급을 받기를 바란다는 거죠.”
“그럼 역시 제물이 맞잖아.”
킬리안은 다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제 더는 부정할 말도 없었다.
아일라가 악녀라 불리는 이유는 솔직히 무식하고 교양 없고 막말하고 깽판 치고 주인공을 건드리려고 해서 그렇지, 뭐. 특히 마지막 이유가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신이 너를 위해 하루를 계속 반복한 줄 알았는데, 그 말을 들으니 신에게 사랑받는 쪽은 오히려 그 샬럿이라는 여자 쪽인지도 모르겠군.”
그는 이제야 겨우 이 세계의 주인공이 샬럿이라는 진실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그래, 처음에 내게 신의 사랑을 받는다고 운운했을 때 내가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을지 이제 알겠지.
“그럼 넌 이용당하는 쪽인가?”
“뭐, 저도 그런 것 같네요. 그래서 실망하셨나요? 정 그러시면 그 샬럿 쪽으로 가셔도 되고요…….”
신을 제대로 열 받게 하려면 아무래도 나보다는 진짜 신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쪽을 건드리는 게 나을 것이다. 그게 그의 목적에도 더 걸맞을 테고 말이다.
내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리자, 킬리안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마저 이어 말했다.
“역시 세계의 사랑을 받는 건 시시하지. 이용당하는 쪽이 마음에 들어. 더 재미있어 보이니까.”
“악취미잖아요…….”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그래도 내심 안심하고 말았다. 이 상황을 혼자서 헤쳐 나갈 생각만 해도 눈앞이 깜깜하기만 했으니까.
킬리안은 내 땀에 젖은 머리가 찝찝하고 불쾌하지도 않은지, 강아지 머리 쓰다듬듯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신이 네게 바라는 게 네가 말한 ‘악녀’ 취급을 당하는 희생양이고, 그 샬럿이라는 여자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고 싶은 거라면…….”
그의 웃음이 서서히 짙어졌다. 뭔지 모르겠지만 저 잘생긴 얼굴을 보고도 등골이 섬뜩한 게 굉장히 무서운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진짜 악녀가 되면 되잖아?”
“……엥?”
“널 이유 없이 싫어한다면, 그럴만한 이유를 만들어 주면 되는 거야.”
“……에엥?”
킬리안은 나를 이용해 어떻게 신의 의지를 뒤틀어 버릴지 결정을 내린 듯했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후드 너머로 형형한 이채를 번뜩이더니 내 양손을 꼭 마주 잡고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네가 바라는 건 뭐지?”
“그냥…… 루프가 멈추는 거요?”
“쯧, 그러고 보니 네게는 능력이 통하지 않던가. 네가 다른 세계에서 온 영혼이라면 능력이 통하지 않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군.”
“……방금 저한테 능력 썼어요?”
그는 노골적으로 혀를 차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다가 뒤늦게 날 회유할 방법이 떠올랐는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후드를 벗어 그 찬란한 미모를 다시 세상 밖에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앗, 망할. 이 인간 벌써 내 약점을 파악했어!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한단다.”
“미인계나 치우고 얘기하시죠.”
“일단 듣기나 하라는 거다.”
선택권을 주는 척 협박하지 마라.
나는 거만하게 웃는 그가 쓸데없이 잘생겨서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팔링게아의 날에 예언과 정확히 똑같이 행동하지 않았는데 네가 하녀에게 패악을 부렸다고 오해를 받았더니 다음 날로 넘어갔다고 했지?”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일단 사람들이 널 악녀라고 인식하면 루프가 끝난다는 소리잖아. 그러면 여기서 네가 선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어. 진짜 악녀가 되는 것뿐이지.”
“진짜 악녀가 뭔데요?”
“아무도 감히 널 제물이나 희생양으로 여기지 못하도록 강해져야지.”
“……아무도?”
“신조차도.”
“음, 그렇게 되면 아마도 제 존재 가치가 사라지지 않을까요?”
“하.”
내가 주저하며 대답하자, 그가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재밌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눈가를 휘며 말했다.
“아아, 네 존재 가치를 신이 정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 샬럿이란 여자의 모든 걸 빼앗아 오면 되겠네.”
“네? 모든 걸요?”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부, 권력, 명예, 남자, 뭐든 전부. 그럼 너 대신 샬럿이라는 여자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겠지. 안 그래?”
지극히 악당 같은 발언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와, 저런 발상의 전환이라니 나는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거다.
보통 소설 속 악녀는 저런 게 아니었다.
옛날이야기에서도 항상 결말은 권선징악이 기본이었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못된 새엄마와 새언니들은 하나같이 벌을 받고 죄를 뉘우친다. 그게 바로 악녀의 결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정 관념에 세뇌당한 나머지, 악녀가 주인공을 이겨 먹는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나는 밑바닥에서부터 아득바득 기어오르는 독기 어린 인간이 좋거든.”
“그, 그러십니까…….”
“세상의 모든 비참함을 지고서, 더러운 진창을 구르고, 온갖 발악은 다 써서라도 결국 원하는 걸 쟁취하는 인간들은 아주 흥미로워. 평화에 찌들어서 화려하게 반짝이는 것보다 살벌하게 번뜩이는 게 취향이야.”
그런 걸 보통 악취미라 하는데.
‘애초에 여긴 소설 속인데 악녀가 모든 걸 갖는 게 가능할 리가…….’
물론, 그런 소설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악녀가 그 세계의 주인공일 경우였다. 그러니까 킬리안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 권력, 명예, 남자 뭐든 신의 사랑을 받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
“아…….”
나는 그가 왜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날 설득하려고 한 건지 알 것 같았다.
신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자의 자리를, 그저 이용당하는 제물일 뿐인 나에게 빼앗기게 하는 게 신을 엿 먹일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거다.
‘확실히.’
좋은 방법이다.
문제는 호구인 나에게는 전혀 엄두도 내지 못할 방법이라는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왠지 계속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린 듯 통쾌한 기분이 들어 당황스러웠다. 어쩌면 내심 계속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진짜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실제로 나는 킬리안이 그저 내 옆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용기를 내어 시녀를 쫓아냈다. 남들 눈에는 별것 아닐지 몰라도 내게는 큰 모험과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소피아가 없는 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라도, 분명 소설과 달라질 거야. 아주 미묘한 차이라도 말이지. 그렇다면 이런 게 쌓이고 쌓이면 소설의 거대한 흐름을 완전히 틀어 버릴 수 있을지도 몰라.’
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루프를 멈추고 살아남아 지금껏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보다 더 솔직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당당하게 하면서.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나만의 인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호오, 눈빛이 바뀌었는데?”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여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때, 너도 마음에 드는 거지?”
나는 요요한 빛을 띠는 은회색 눈동자가 코앞에 보이자 화들짝 놀라 시선을 밑으로 깔며 말끝을 흐렸다.
“물론, 맘에야 들지만……. 그쪽 말마따나 호구 중의 호구인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내가 머뭇거리며 소심하게 답하자, 그는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내가 도와주마. 모두를 발아래 두고 당당하게 홀로 설 수 있도록.”
그는 귓가에 달콤한 말을 흘리며 날 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등 뒤에 서서 한계까지 꽉 조여져 있던 코르셋의 리본 끈을 당긴 뒤 하나하나 느슨하게 풀어 주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지.”
그는 고래수염으로 만든 코르셋을 완전히 벗겨 내며 말을 이었다.
“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돼.”
“네?”
아니 본인이 하라고 해 놓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귀족 영애들은 코르셋을 일상생활에서도 입어야 하고, 익숙해져야만 하지. 그게 귀족의 관습이고 문화니까. 하지만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옷에 몸에 맞춰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야.”
“무슨…….”
“네 세계에서 필요 없게 만들라고. 필요 없으면 할 필요도 없잖아.”
그야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쉽지만 내가 무슨 권리로 이미 귀족들의 관습으로 굳어진 코르셋을 필요 없게 만든단 말인가.
“제가 그걸 무슨 수로요? 저는 사교계에서 그렇게 막 영향력 있고 그런 사람이 아닌데요. 오히려 너무 악명이 높은 상태라서…….”
나는 마담 드 퐁파두르나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패션 리더도 아니었다. 하물며 샬럿처럼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다들 내 흠을 어떻게든 잡아서 물어뜯을 준비만 하고 있는데 눈에 튀는 행동마저 해 봐라.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날 하이에나처럼 물어뜯을 게 뻔했다. 나는 가능하면 자처해서 그들의 먹이가 될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악명도 어떤 의미에선 관심이지. 그걸 어떻게 이용할지는 전부 네게 달린 거야. 이대로 세계에 휘둘리며 숨든가, 아니면 네가 휘두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