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악녀 메이커 18화
킬리안은 고개를 나른하게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덧붙여 말했다.
“물론, 도망은 선택지에 없어.”
“…….”
“그렇다면 어떻게 할래?”
그렇다.
루프에 농락당하는 한 나는, 더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방구석 폐인의 삶을 보낼 수는 없었다. 이제 방 밖을 나설 때가 된 것이다.
선택지는 애초부터 한 개밖에 없었다.
직접 그들과 부딪치는 것.
악녀가 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네가 주인공이 되어 모든 것을 손에 쥐어라. 그리고 입맛대로 뜯어고쳐라.
세상을 법도 모럴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범죄자다운 조언이었다.
본인 능력이면 신을 능멸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선언했을 때부터 그랬지. 평소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다.
“고작 코르셋? 아니, 네 말 한마디에 모두가 빌빌 기게 될 거야. 왜냐면,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매사에 영 의욕이 없어 보이는 나른한 표정이었으나, 그 말을 하는 그의 눈은 숨길 수 없는 자신감으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세상을 뒤집거나 쥐고 흔들 수 있다고 여기는 오만함도 엿보였다.
“나는 황제를 꿈꾸는 노예가 있다면 기꺼이 황제의 왕관을 빼앗아 노예의 머리 위에 씌워 줄 거다. 그리고 옥좌까지 가는 길을 인도할 거고…….”
그가 악마처럼 달콤한 말들을 나긋한 음성으로 귓가에 흘려 넣었다.
“그래서, 네 대답은?”
유독 목소리가 낮고 깊기 때문일까, 그의 음성은 가슴까지 잔잔히 울리는 듯했다.
‘대답?’
당연히 그처럼 되고 싶었다.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가 마음이 가는 대로 당당하게 행동하고 싶었다.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을까.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하고 싶어.’
왠지 짓궂은 장난을 계획하는 아이라도 된 심정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살짝 누르며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누가 악마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을까. 게다가 혼자서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겠지만, 킬리안과 함께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도박이라 해도 내 전부를 걸어 보고 싶었다.
나는 두려움과 기대, 설렘이 뒤섞인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가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
“……절 악녀로 만들어 주세요.”
그의 미소는 짙어졌다.
“기꺼이.”
* * *
14일.
그날 하루는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겨우 13일의 루프에서 벗어났고, 벗어나기가 무섭게 주술사 킬리안이 날 찾아왔으며, 그에게 목숨을 위협을 받다가 이제는 목숨을 건 협력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미래의 후환이 될지도 모르는 소피아를 쫓아낸 일까지…….
하나같이 소설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뿐이었기에, 나는 잠들기 전까지 계속 걱정을 반복했다. 혹시 깨어나면 다시 하루가 돌아가는 것 아닐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으응, Siri 5분 뒤에 깨워 줘.”
“……누가 Siri입니까? 이미 5분 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5분에서 5분 더…….”
나는 눈도 뜨지 못하고 웅얼거리다가 다시 까무룩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창가에 스며드는 햇빛이 지나치게 눈이 부셔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이불 속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다.
“으으, 햇빛 싫어.”
누군가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러기가 무섭게 한결 더 가까워진 숨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느껴졌다.
“뱀파이어가 아니라면 햇빛 타령은 그만하시고 일어나십시오.”
귀에 대고 속삭이는 건지 귓가에서 음성이 들렸다. 동굴에서 듣는 듯 깊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남자? 웬 남자 목소리가…….’
나는 경계하며 이불을 끌어안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흐리멍덩한 시야 너머로 단정하게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뭐야, 화보 포스터?
‘……가 아니네. 실제 사람이잖아.’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미남이 대체 왜 내 침실에 있지? 머리 위로 의문 부호를 띄우던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몸에 긴장을 풀었다.
“아, 킬리안.”
“쉿, 세바스티안이라고 해야지. 그 이름은 함부로 부르는 게 아니야.”
“맞다. 볼드모트였죠.”
나는 비몽사몽 중얼거렸다.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네. 차를 진하게 우렸으니까 마셔 둬.”
그는 그린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트레이와 함께 내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얼리 모닝 티는 정말 눈앞에 남자가 우린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향기로운 다르질링이었다.
나는 김을 풍기는 찻물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늘 15일이에요?”
“맞아. 걱정한 모양이지?”
“하아, 당연하죠. 또 하루가 멋대로 돌아갈까 봐 어젠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요. 정말 다행이네요.”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킬리안은 그 답을 들려주었다.
“아무리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어. 한정된 시간밖에 돌리지 못하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왜 신이 이제야, 그것도 내가 딱 악녀로 등장하는 부분만 한정해서 루프를 일으켰는지 알 수 있었다.
본인의 능력 범위 내에서 최대한 소설과 틀어지지 않기 위해 신이라는 작자는 나름 노력한 것이다.
“그러니 루프가 일어나지 않는 동안이 기회라는 거지. 그동안 판도가 뒤바뀌면 아무리 하루가 돌아간다고 한들 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루프가 일어나기 전에 움직여서 소설의 일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라는 뜻이겠지. 나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확제 무도회가 시작하기까지 정확히 한 달 전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소설 속 내용이 틀어질 만한 계기를 만들어 수작을 부려야만 했다. 최대한 샬럿의 기사를 자처하는 남자들이 나를 경계하지 않는 방향으로 말이다.
‘가능하면 그들을 내 편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날 사랑하게 되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적의를 불태우지 않을 정도의 약간의 호감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킬리안은 내 찻잔에 각설탕 하나를 넣은 뒤 티스푼으로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어. 오히려 넌 긴장을 좀 내려놓을 필요가 있는 것 같군. 그래야 열에 한 번이라도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것 같으니까.”
“윽.”
그렇게까지 우유부단하진 않다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사실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기에 한숨으로 답했다.
킬리안은 사람의 속을 너무 정확하게 꿰뚫어 봐서 종종 불편하긴 했지만, 모순되게도 오히려 그게 마음을 더 편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즐기도록 해. 마침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날이잖아.”
그는 창밖에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높고 맑은 하늘을 가리키며 웃었다. 안심하라는 듯 붉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는 커다란 손에 슬슬 익숙해질 것만 같았다.
나는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런데 후드, 못 벗는 거 아니었어요?”
후드를 벗기만 하면 주변에 있던 인간들은 다 저주가 옮아서 불행해지는 것처럼 말하더니, 그는 칙칙한 검은 후드 대신에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연미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대신할 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는 그렇게 대꾸하며 자신의 곧게 뻗은 새하얀 목덜미를 가리켰다. 그가 목 끝까지 단정하게 채웠던 단추를 두어 개 끄르고 나서야 새까만 문양의 끄트머리가 언뜻 비쳤다.
“문신……?”
“주술이야. 후드 대신이지.”
그의 목덜미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검은 문양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기분 탓이 아니잖아!’
나는 기겁하며 몸을 물렸다.
그러자 킬리안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단추를 잠그고 옷매무시를 바로 했다.
“그, 그게 무슨 주술인데요?”
“뱀.”
“……뱀? 살아 있는 건 아니죠?”
아까 분명 문양이 움직이는 걸 본 나는 의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킬리안은 꽤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생명체는 아니다만, 어떤 점에서는 살아 있다고 봐도 좋을지도. 기생 생물과 비슷한 면이 있긴 하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끼고 있던 새하얀 실크 장갑을 벗었다.
뱀이라는 말을 듣고 손등을 뒤덮은 문양을 보니 커다란 뱀의 몸체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다시 장갑을 끼며 말했다.
“주술을 건 시전자가 지워 내기 전까진 마력이 한계까지 빨아들여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주술이다. 마력이 체내에서 사라지면 생명력을 빨아 먹지.”
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잠깐만요. 생명력 같은 게 빨려도 괜찮아요? 안 죽어요?”
“보통이라면 죽겠지. 애초에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주술이니 말이다.”
킬리안은 자신의 몸에 직접 새긴 술식이 공격용, 그것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살상용이라고 덤덤하게 답했다.
그건 결국 몸에 시한 폭탄을 달고 있는 거랑 다를 바 없지 않나? 나는 그렇게 해서까지 신을 엿 먹이고 싶은 건가 싶어 살짝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킬리안은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만하다는 듯 내 이마를 톡 건드리면서 말했다.
“내 마력 때문에 네 주변 인간들을 모조리 폐인으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게 최선이야.”
“그보다, 킬리안은 괜찮아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게 무슨 질문이냐는 듯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왜 내가 그런 말을 꺼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
“…….”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말을 잘못 꺼냈다는 거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나는 민망함에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버무렸다.
“설마 걱정해 준 건가?”
킬리안은 그제야 뒤늦게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으며 되물었다.
‘좀 사람이 걱정할 수도 있지, 아는 사람이 몸에 시한폭탄 매달고 왔는데 그러면 웃으면서 반기리?’
입 밖으로 투덜거릴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으나, 그러지 못했으므로 소심하게 속으로 구시렁댔다.
그러자 킬리안은 자고 일어나 부스스해진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네.”
“…….”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이런 건 내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 못해. 아니, 영향조차 미치지 못하니 쓸데없는 데 마음 쓰지 마.”
“누, 누가 마음을 썼다고.”
하긴, 앞으로 집사인 척 나와 붙어 다녀야 할 텐데 계속 후드를 쓰고 있을 순 없겠지. 드나드는 사람들이 한정된 저택과 달리 밖에서는 불특정 다수와 마주칠 테니까.
그렇다고 이상한 뱀 문양이 온몸을 기어 다니게 두는 건 내 상식 밖의 행동이었지만, 저 얼굴이라면 포대 자루를 입고 다녀도 어울릴 테니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사람을 나른하게 만드는 손길에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뒤늦게 정신을 되찾고 그의 손을 피했다.
“…….”
킬리안은 불만스럽게 눈썹을 까딱이더니, 자신의 손바닥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곤 이내 손을 거뒀다.
나는 괜히 그의 눈치를 살피며 찻잔을 들고 홀짝였다. 짙은 향과 은은한 단맛이 부드럽게 혀에 감겼다.
‘즐기면 된다고?’
과연 목숨이 걸린 이 일을 즐기게 될 날이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전보다 편해진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