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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19화 (19/131)

# 19

악녀 메이커 19화

이번 수확제 무도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샬럿이 새로 고안한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어찌 보면 고작 드레스였고, 젊은 영애들 사이의 새로운 유행일 뿐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 모든 사건의 발단과 다름없으니 지금부터 방향을 틀어 버리는 게 나았다.

여기서 루프가 일어날 여지 자체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샬럿에게 향할 주목을 다른 곳으로 돌릴 만한 일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과연 여자 주인공이 받아야 할 관심을 돌릴 만한 사건을 일으키는 게 가능하긴 한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정확하게 말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네게’ 주목을 돌려야지.”

킬리안은 그렇게 대꾸하며 쌀쌀한 탓에 조금씩 떨리고 있던 내 어깨에 숄을 걸쳐 주었다. 나는 어제 이후로 계속 집사 행세를 하는 그의 시중을 어색하게 받으며 옷깃을 여몄다.

‘그건 그렇죠.’ 하고 우물쭈물 대꾸하면서도 조금도 확신이 없었다. 아무리 각오를 다져도 그 방법이란 게 감도 잡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전에도 말했듯이 악명도 결국 관심이야. 모두가 네 행동 하나에 민감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주목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네가 변했다는 것만 알려도 꽤 관심 받겠지.”

물론, 관심이야 어딜 가든 받겠지.

그런데 그 관심이라는 게 내 행동에 의미를 부여해서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겠다는 관심이었다. 뭘 해도 욕을 먹어서야 소설과 조금도 달라질 게 없지 않은가.

“애초에 루프 때문에 크게 다르게 행동하지는 못할 거예요. 아무리 사전에 공작한다고 해도 악녀라는 틀을 벗어나진 못할 텐데.”

“누가 악녀를 벗어나래?”

나는 네가 진정한 악녀가 되게 해 준다고 했는데. 킬리안은 피식하고 웃더니 또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조곤조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성인(聖人)인 교황과 누가 봐도 악당인 내가 있다고 가정해 봐.”

“음, 네.”

본인이 누가 봐도 악당으로 보인다는 자각은 있구나. 내가 단박에 수긍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나쁜 짓을 하면 모두 그러려니 하겠지. 그런데 교황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나쁜 짓을 했어.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야 실망하겠죠?”

“그래. 반면에 교황은 선행을 베풀어도 사람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일 거야. 그런데 내가 예상 밖의 좋은 일을 하면? 아니, 좋은 일까지 갈 필요도 없지. 자비를 베풀면?”

“아! 저 그거 알아요.”

순정 만화에서도 전형적으로 나오는 패턴 중 하나였다.

평소에 무섭다고 피해 다녔던 양아치가, 비가 오는 날 고양이에게 우산을 씌워 주며 다정하게 웃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는 패턴. 의외의 면을 발견한 여자 주인공은 양아치를 다시 보게 되지.

“네가 대충 아일라 흉내만 내도 돼. 넌 악녀인 척 굴어도 결국 숨길 수 없는 호구일 테고, 아무리 다른 사람들의 눈이 옹이구멍이라도 충분히 전과 다르게 보일 테니까.”

“말 참 예쁘게 하시네요…….”

빈정거리듯 투덜거리긴 했지만, 킬리안의 말을 듣고 나니 막막할 정도로 복잡했던 일이 생각보다 단순하게 들려와서 놀라웠다.

물론, 그렇게 쉽게 풀릴 일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마음이 편해진다는 효과 하나만은 톡톡히 했다. 그의 말은 직접 행동에 옮기기까지 고구마처럼 답답하게 구는 내게는 가장 부담 없이 다가왔다.

새삼 그가 나한테 얼마나 많이 맞춰 주고 있는지 깨달았다.

‘귀찮을 텐데.’

나는 킬리안을 빤히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는 아무리 단정하게 차려입고, 또 머리를 깔끔하게 했어도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왕이라도 해도 믿을 정도의 흉흉함이었다.

원래는 범죄자였던, 치명적이게 잘생긴 남자가 연미복을 입고 내 시중을 든다니. 그것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다정하게 어르고 달래면서.

조금? 아니 미치게 설렌다. 이거 모든 덕후들의 판타지 아니냐.

‘잠깐만.’

그때, 갑자기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저 남자 지금 ‘비 오는 날 양아치와 고양이 효과’를 나한테 쓰고 있는 거 아니야?

물론, 킬리안의 섬세한 배려와 다정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돌연 내게 유려한 글씨체로 무언가 빼곡하게 적힌 양피지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오늘의 일정.”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오늘의 일정을 눈으로 쭉 훑어보았다.

“……?”

그리고 내 눈을 의심했다.

대체 이 향수마저 느끼게 하는 일정표는 뭐란 말인가. 킬리안이 입맛대로 짠 것처럼 보이는 공부 일정이 새벽까지 꽉꽉 채워져 있었다.

‘수험생이냐?’

어쩐지 내가 한 달간 누렸던 방구석 폐인의 삶이 꿈결같이 아련하게 느껴져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어째서 네 몸의 원래 주인이 악녀가 아니라 제물이었는지 아나?”

“왜 그런데요?”

“여기가 청순해서.”

킬리안은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거만하게 말했다.

“전부를 감당할 만큼의 힘이 있는 게 아니라면, 발톱을 숨기고 영리하게 굴어야지. 그러지 못하면 비열한 자들의 먹이가 될 뿐이야.”

그건 그렇지. 나는 판타지 소설에서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악당들을 떠올렸다.

대부분 머리가 좋고, 실력도 있고, 통솔력 또한 좋으며, 수하들을 수없이 부릴 정도의 카리스마도 있고, 대공이라든지 공작이라든지 하는 높은 작위를 가지고 있지.

주인공에게 결국 발리긴 하지만, 조건만 봤을 때 대체로 주인공들보다 더 뛰어난 경우가 많았다.

그 정도의 조건을 가지고도 발릴 정도인데, 가진 건 가문과 얼굴, 그리고 돈밖에 없는 아일라가 주인공을 이길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지금 가장 큰 문제가 예법이니, 일단 그것부터 전부 머리에 새겨 둬. 그리고 앞으로는 같은 시간에 깨우고 재울 테니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그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이왕 집사 행세를 하기로 한 김에 확실하게 맞춘 모양인지, 도금된 시계에는 메르텐시아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기상은 다섯 시. 지금은 11분이군.”

“아직 그것밖에 안 됐어요?”

꼭두새벽이잖아. 나는 불만스럽게 말했으나,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귀족 대부분이 일어나 활동할 시간이지. 계획을 지키려면 촉박하게 움직여야 할 거야.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으니, 원망하려거든 어느덧 너와 한 몸이 되어 버린 게으름을 탓하도록 하고 차나 마시는 게 좋겠군.”

갑자기 폭풍처럼 몰아치는 스트레스에 나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즐기면서 하라면서!”

“곧 고통도 즐기게 될 거야.”

“…….”

달콤한 당근은 끝났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채찍 타임이라는 건가.

“혹시, 저 조련해요?”

나는 계속 미심쩍게 여기고 있었던 부분을 지적했다.

그러자 킬리안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입매를 끌어 올려 예쁘게 방긋 웃었다.

“단장을 마치시면 신문은 조식과 함께 내오겠습니다. 감옥에 가둔 시녀를 대신해서 단장을 도울 하녀들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불러오지요. 그러니 부디, 아가씨답게 존대는 지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 어제도 씻었는데요. ……아니, 어제도 씻었는데 왜 또 씻어?”

“어제는 도저히 인간의 몰골이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었지요.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싶으시다면 지금 씻는 편이 좋으실 겁니다, 아가씨.”

그는 빙긋 웃으며 내 머리를 꾹꾹 누르듯이 쓰다듬었다.

아니, 이미 날 금수 다루듯이 하고 있으면서 무슨 인간의 존엄을 찾아. 게다가 세상천지에 아가씨를 말 안 듣는 개 다루듯 쓰다듬는 집사가 어디 있어!

“씻기 귀찮은데 굳이…….”

“제가 시중을 들기 전에 순순히 하녀들과 같이 욕실로 가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요령이 없는 제가 그만 아가씨를 다치게 할까 두렵군요.”

“…….”

머리를 쓰다듬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기에 나는 홍차를 단번에 마시고 얌전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킬리안의 부름을 받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하녀들은 그 자리에서 손뼉이라도 치고 싶은 표정으로 입가를 꿈틀거렸다.

그녀들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날 욕조에 밀어 넣고 개 목욕시키듯이 열심히 문질러 대기 시작했다. 나만 보면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하고 피하더니, 킬리안이 있으니 용기를 얻은 모양이었다.

“향유를 부을게요.”

“세상에, 피부 거칠어지신 거 봐.”

“관리를 전혀 안 하셨으니 어쩔 수 없지만 심각하네요. 더 늦기 전이라 다행이에요. 세바스티안 님께서 계셔서 이 어찌나 다행인지.”

그 말을 들으니 확신이 들었다. 하녀들은 킬리안을 나라는 미친 말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말고삐 정도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체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하루 만에 저렇게 신뢰 가득한 눈빛을 할 수 있는 건지. 나는 그의 위험성을 새삼 되새기며 부르르 떨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아가씨.”

그때, 부드러운 해면으로 내 팔을 문지르며 계속 주저하던 하녀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너도나도 한마디씩 덧붙이며 날 위로하기 시작했다.

“물론이죠. 상심하실 것 없답니다. 원래 사람마다 인연이란 게 있는 법이거든요. 아가씨는 아직 운명의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에요.”

“맞아요, 아가씨. 아무리 힘들어도 앞으로 나아가셔야죠. 힘내세요. 세상은 남자가 전부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난 차인 게 아니라니까!

차라리 고백이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나는 울컥해서 입을 벌렸다가 크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 실연당한 적 없어.”

“하지만 이미 제국 전체에 쫙 소문이 돌고 있는 걸요. 그렇지 않고선 방에만 계실 이유가 없다고…….”

“뭣!”

함부로 망상을 현실인 것처럼 지껄이고 다닌 건 대체 어떤 놈이야! 나는 흥분해서 씩씩거리다가 하녀들이 겁을 먹자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 되도록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덕분에 억지로 나 싫다는 놈 졸졸 쫓아다니지 않아도 되잖아.

“실연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황태자 전하께 전혀, 조금도 관심이 없어.”

“어머, 정말요?”

“응. 막 소문내도 돼.”

“잘됐네요! 제국에 멋진 남성분이 얼마나 많으신데요. 일등 신랑감으로 손꼽히는 트란디아 공작 각하도 있으시고, 또 대마법사님도 얼마나 멋져요? 물론 겉보기완 다르게 연세가 꽤 있으시지만요. 그밖에 전하의 호위기사이신 레녹스 경도…….”

하녀는 내게 기운을 북돋아 주려는 듯 제국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남자들을 전부 불렀다. 물론, 나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금 놀라긴 했다.

하나같이 전부 소설 속에 등장한 적 있는 샬럿의 어장 속 물고기였으니 말이다. 하긴, 이 세상에 잘난 남자들은 자연스레 여자 주인공의 차지였으니까 당연한 건가.

나는 하녀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그보다.”

“네?”

“나한테 평범하게 말 거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좀 도를 넘었죠? 죽을죄를…….”

“탓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보는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무서워하면서 말도 제대로 못했잖아.”

또 죽을죄 타령을 하려고 하길래 재빨리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자세히 보니 지금 내 목욕 시중을 드는 하녀들은 나만 보면 파랗게 질렸던 대표 겁쟁이 트리오였다.

“사실 도비엘라에게 들었어요. 상처는 본인이 낸 거고, 오히려 아가씨께서는 직접 치료해 주셨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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