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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20화 (20/131)

# 20

악녀 메이커 20화

하녀 한 명이 자해 공갈단의 이름을 꺼냈다. 나는 저택 내 기피 대상 1호를 떠올리며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어째 점점 기피 대상들이 늘어나는 것 같은 건 착각이 아니었다.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요…….”

하녀는 막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가 종래에는 시무룩해져서 말끝을 늘였다. 음, 솔직히 아일라의 평소 행실과 평판을 생각하면 안 믿는 게 오히려 당연하지 않나.

“여기 있는 너희는 설마, 그 거짓말 같은 말을 믿는다는 뜻이야?”

내가 도리어 놀라서 묻자, 겁쟁이 트리오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사실은 최근 들어 실연 때문…… 허업! 이건 실언이었습니다!”

그녀는 사색이 되어 입을 틀어막았다가 다시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아, 아무튼, 많이 상냥해지셨다는 생각은 했어요. 하지만 아가씨만 보면 머릿속이 하얗게 질리고 몸이 덜덜 떨려 와서 비겁하게 피하기만 했죠. 세바스티안 님께서 새로 오시지 않으셨다면 용기도 내지 못했을 거예요. 죄송해요, 아가씨.”

하녀 한 명이 그 말을 마치자, 다른 두 명도 고개를 조아리며 연신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딱히 사과할 건 없는데. 쟤네가 날 피했던 건 소피아가 한 짓에 비하면 귀여운 애교인 수준이라 사실 화낼 것도 없었다.

“어, 음, 그래. 용서해 줄게.”

나는 괜히 민망함에 볼을 긁적이며 말했고, 하녀들의 얼굴은 환하게 펴졌다. 그리고 더욱 적극적으로 날 꾸미고자 혈안이 되어 날 피곤하게 했다. 아, 망할. 괜히 용서했어.

드디어 날 편견 없이 솔직하게 봐 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기쁨과 피곤함에 휘둘리다 보니, 겁쟁이 트리오는 내게 이런 조언을 건넸다.

“이런 감각은 저희보다 도비엘라가 더 좋을 거예요. 여기 오기 전까지는 의상실에서 계속 일했대요.”

안 그래도 소피아의 빈자리를 누구로 채워야 할지 골머리를 쌓고 있던 내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조언이긴 했다. 아직 도비엘라를 볼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지만.

나는 한계까지 조여진 코르셋과 치렁치렁한 드레스 차림을 하고서 다시 내 방으로 옮겨졌다. 킬리안은 얌전히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누, 누가 즐거워했다고.”

“입이 귀에 걸리셨습니다만.”

“…….”

“하녀들과 화해는 하셨습니까?”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는지 여상스럽게 물으며 내게 다가왔다.

“이 저택 사용인 중, 가장 네게 호의적인 이들이니 사이좋게 지내.”

“대체 뭔 짓을 한 거예요?”

“내가 뭘?”

“우리 가문 사용인들이 완전 그쪽의 수하가 다 됐던데요? 시키는 일이라면 발까지 핥을 기세던데.”

나는 악당의 완벽한 표본을 자랑하는 그를 질린 얼굴로 보다가 살짝 시선을 옆으로 틀며 중얼거렸다.

“고, 고맙긴 하지만요.”

덕분에 홀로 완전히 고립된 외톨이는 탈출할 수 있었다.

비록 저택의 사용인이긴 했지만, 오랜만에 또래 친구들과 수다를 떤 기분이 들었다.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고 생각하면 어쩌면 친구 엇비슷하기도 하고. 큼, 한 번 대화 좀 섞은 거로 친구라고는 안 하나?

“뭐, 그렇다고요.”

사실 그동안 크게 내색은 안 했지만 외로워서 더 덕질에 몰두한 것도 없잖아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단순히 소설이 좋아서였지만.

내가 볼을 긁적이며 감사 인사를 전하자, 그가 흠, 하고 삐딱하게 웃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뭐라고? 잘 못 들었어.”

“……들었잖아요.”

“나이가 드니 귀가 안 좋아져서.”

아니, 나이를 먹었으면 얼마나 먹었다고! 날 놀려먹으려는 반응을 보니 제대로 들은 게 분명해서 나는 뚱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몇 살이시길래?”

“흠, 500은 넘었나.”

“말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요.”

500은 무슨. 아무리 많이 쳐줘도 서른 전후였다. 나는 하나도 재미없다고 툴툴거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뭐, 감사 인사는 제대로 받으마.”

그러자 그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내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개 취급에 이어서 이제는 애 취급인가. 그나마 금수에서 인간으로 신분이 상승했으니 얌전히 기뻐하기로 했다. 조상뻘인 자칭 500살의 눈엔 내 재롱이 귀엽게 보였나 보지, 뭐.

“내게 그들이 충성을 바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내가 그들의 갈망을 충족시켜 줬으니까.”

“갈망이 대체 뭐길래?”

“널 휘어잡을 누군가.”

“…….”

저 집사를 가장한 범죄자는 정중한 척 구는 폭군이 따로 없었는데, 그것에 불만을 품는 건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드디어 아가씨께서 방구석에서 나오게 되었다며 기뻐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놓고 핍박받는 아가씨를 보고 환호하다니, 새삼 내 두텁기 짝이 없는 인망에 눈물이 다 난다. 흑흑.

“제 삶은 게을러서 완벽했는데.”

“그저 여름밤의 꿈일 뿐이지. 겨울이 오기 전에 깨어나도록 해.”

킬리안은 내 천국을 단박에 꿈으로 치부하며 의자를 뒤로 빼낸 뒤 나를 앉혔다. 아침 식사는 이미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다.

그걸 보니까 부지런해지기 싫다고 투덜거리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하긴, 지난 삶에 비하면 이쪽은 생각할 것도 없이 천국이었다. 목욕 시중도 들어 주고, 식사도 준비해 주고. 돈 걱정할 것도 전혀 없고.

‘그동안 놀 만큼 놀긴 했어.’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킬리안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원한다면 계속 꿈을 꿔도 좋아. 나는 신처럼 네게 강요하진 않아.”

그 말이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렸으나,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킬리안은 지금까지 내게 계속 선택권을 줬으니까. 악마처럼 달콤하게 속삭이며 유혹하면서도, 내가 거절하면 쉽게 물러날 것처럼 굴고는 했다. 물론,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고도 저러는 것 같기는 하지만.

“널 내 뜻대로 휘두르는 시시한 짓이나 하려고 여기에 남은 게 아니야. 내 능력도 주술도 마법도 통하지 않는 유일한 인간을 만났는데, 그걸 망칠 정도로 멍청하지 않거든.”

나는 맛있는 냄새를 풀풀 풍기는 식사에 시선을 고정하다가 잠시 멈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의외였다.

신이 멋대로 내 운명을 악녀로 낙인찍은 것처럼, 그가 악녀의 낙인을 단순히 주인공으로 바꿔 준다는 건 줄 알았는데.

“나는 그 길을 제시해 줄 뿐이고.”

그는 느릿하게 내 손등 위로 새하얀 장갑을 낀 자신의 손을 겹쳤다. 담백하면서도 야릇하기도 한 모순된 감촉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포크는 머리 부분이 볼록하게 왼손, 나이프는 날카로운 면이 아래로 향하도록 오른손.

그는 식기를 정확히 쥐도록 교정해 준 뒤, 무릎에 새하얀 천을 깔아 주며 말을 이었다.

“모든 결정은 네가 해.”

“……그래도 돼요?”

투덜거리긴 했지만, 사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그의 지시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건 게임도 소설도 아닌 현실이었으니까.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될 줄 알고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설마, 그만큼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

“내가 끼어든 이상, 어떤 선택을 하든 결과는 비슷비슷할 테니까.”

……일 리가 없지.

그만큼 본인을 믿고 있는 대단한 자신감이었군.

“뭐든 네가 원한다면 명령해. 언제나 도망가고 피하고 숨기 바쁜 네 명령이라면 기꺼이 들어줄 테니.”

놀리는 건지 진담인지 모를 말이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포크를 들고 있는 내 손으로 포도 알을 콕 찍어 본인의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모든 조건이 갖춰졌을 때, 백지에 가까운 네가 어떤 색으로 물들지 굉장히 궁금하거든.”

살짝 나른하게 감긴 눈꺼풀과 빽빽하게 채워진 새까만 속눈썹 사이로 옅은 달빛이 반짝였다.

킬리안은 붉은 입술을 혀로 훑으며 속삭였다.

“부디 날 즐겁게 해 주겠어?”

* * *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는 말이 있다.

말마따나 삶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었고, 무엇을 선택하든 다소 후회는 따르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최선이었다고 했다고 해도 말이다.

‘샬럿을 제치고 이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등극하겠다’는 거창하고 황당하기까지 한 일생일대의 선택. 그것에 대한 후회라면, 내가 다시 윤하늘 시절 때처럼 성실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태한 삶에 완전히 찌들어 있었기에 몸을 비틀며 괴로워하긴 했지만,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서서히 적응해 나가는 중이었다.

“귀족으로서 갖춰야 할 아주 기본적인 자질은 좋은 예의범절이지.”

킬리안의 손에는 <쉽게 가르치는 우리 아이 교육>이라는 책이 들려 있었다. 저 망할 애 취급에 완전히 해탈한 나는, 필기하던 펜의 깃털 끝을 입에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살도 아니고 뭐든 입에 집어넣는 버릇은 좀 고치도록 해.”

물론, 곧 제지당했지만.

그는 내 양 볼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억지로 깃털을 뱉어 내게 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소심하고 수줍음을 잘 타는 건 잘못된 예절이다. 무례하고 무신경한 것 또한 잘못된 예절이지. 이 두 가지는 단 한 가지 규칙만 잘 지키면 돼. 자기 자신을 비하하거나 다른 사람을 멸시하지 않는 거지.”

귀족들이 이런 예절 교육을 어릴 때부터 받는 줄은 몰랐네.

그런데 왜 그렇게 무례한 사람이 많은 거람.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나 같은 경우는 전적으로 전자에 해당하려나.

“멸시하지 말라는 것은, 선의와 존경의 마음으로 상대의 가치를 빠르게 파악하라는 거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인간일지라도 주의 깊게 살펴 둘 필요가 있어. 개똥이 약에 쓰일 일도 있는 거고, 또 네 목숨을 노릴 후환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음, 그렇군.

나는 펜 끝에 잉크를 찍어 양피지에 이렇게 적었다.

[하찮은 인간 = 개똥 약 or 후환]

그런데 선의와 존경의 마음으로 상대의 가치를 빠르게 파악하라는 건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걸까. 말만 그럴듯하지 결국 예의범절을 지키며 기만하라는 뜻 아니야, 저거?

“특히 자기를 비하하는 것을 겸손으로 이해해서는 안 돼. 겸손이란 자신의 가치를 알고 합당한 몫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지. 확실한 건, 메르텐시아 영애가 절대 지금 같은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거야.”

“……제가 겸손하질 못했네요.”

“그렇지. 더 겸손해지도록 해.”

뭔가 계속 잘못된 지식이 주입되는 것 같은데 이대로 괜찮은 건가. 왠지 굉장히 찝찝했으나, 들은 대로 열심히 필기하니 킬리안이 잘했다고 내 입에 사탕을 넣어 주었다.

‘딸기 맛.’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콤한 사탕을 입 안에 굴리고 있자니, 뭐 아무렴 어떠냐는 태평한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인간 하니까 말인데요.”

나는 습관적으로 깃털을 입에 물 뻔하다가 가까스로 자제하고 운을 뗐다.

그에게 어딘가 심하게 왜곡된 예절 교육을 받고 있자니 갑자기 드는 생각이 있었다.

“소피아를 샬럿에게 보내면 어떨까요? 그냥 보내면 후환이 있을 것 같으니까, 킬리안의 능력으로 홀려 놓은 뒤에 보내면 어떨까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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