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악녀 메이커 21화
말하고 보니까 꽤 좋은 생각 같았다. 그의 말마따나 아무리 소피아가 개똥이라 해도 이대로 버리기엔 약에 쓰일 수도 있을 것 같았으니까.
‘뭐, 효과 없는 약이라면 예정대로 그냥 버리면 될 테고.’
그러자 킬리안은 책을 덮으며 의외라는 듯 시선을 맞춰 왔다. 마치 고양이가 멍멍하고 짖는 것을 목격하기라도 한 듯한 눈빛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네 입에서 먼저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네.”
그는 답지 않게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인지라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남 신경 쓰기엔 제 코가 석 자라는 걸 깨달아 버렸거든요. 그리고 누군가가 계속 세뇌 교육한 덕분에 같이 모럴이 파괴되어 버려서요.”
날 진짜 악녀로 만들어 준다더니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를 만난 이후로 ‘세상에, 그런 짓을 하다니 말도 안 돼!’에서 ‘이래도 되나?’로 서서히 변하다가 요즘은 ‘아무렴 어때. 괜찮겠지’가 되었다.
“아, 생각해 보니 굳이 킬리안의 능력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건 왜지?”
내가 돌연 말을 바꾸자, 그가 흥미 가득한 음성으로 되물어 왔다.
“소피아는 어차피 사치를 누릴 수 있으면 상대가 누구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이잖아요? 그럼 저보다 황태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샬럿 쪽이 더 맛있는 먹잇감일 테죠.”
“그렇지.”
“그리고 저한테는 이미 정체를 들켰으니 반감이 장난 아닐 테죠.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을 수도 있고요.”
“…….”
“소피아는 어차피 절 배신하고 그쪽에 붙을 테니까, 이중 첩자를 제안하는 척하면 덥석 미끼를 물 것 같네요. 그러면 저는 거짓 정보를 미리 흘려 놓는 거죠. 그럼 배신하든 배신하지 않든 전 딱히 손해 볼 것도 없고?”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뭐 더 좋은 방법이 없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풉, 하고 뿜는 소리가 들렸다.
‘응?’
나는 상념을 깨고 천천히 킬리안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숙인 채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넓고 단단해 보이는 그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설마 우는 건 아닐 테고. 지금 얼굴이 한 손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다고 자랑하고 있는 건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의 손이 서서히 밑으로 내려왔다.
평소 창백했던 피부는 생기 있어 보일 정도로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입꼬리는 꿈틀거리며 경련했다.
“크흑, 하, 진짜 미치겠군.”
어깨를 부들부들 떨던 그가 결국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껏 기껏해야 큭, 하고 억눌린 웃음소리나 뱉던 그가 말이다.
나는 마치 소년 같은 그의 명랑한 웃음소리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웃음 코드 진짜 모르겠네.’
만약 킬리안이 웃는다면 마왕처럼 살 떨리고 위엄 있게 웃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저렇게 상큼하게 웃을 줄이야. 듣는 사람의 귀까지 뻥 뚫리는 듯 시원해지는 웃음소리였다.
아니, 웃는 게 쓸데없이 예쁜 건 둘째 치고, 뭔 놈의 집사가 저렇게 저택이 떠나가라 크게 웃어!
나는 혹여 누가 지나가다가 듣기라도 할까 봐 재빨리 검지를 펼쳐 입술 위에 대며 속삭였다.
“쉿! 좀 조용히 웃읍시다!”
하지만 아무리 파닥거려도 그는 허파에 바람 든 듯 웃기만 했다.
“하하, 하……. 예쁘다, 예쁘다 했다니 진짜 이렇게 예쁠 줄은 몰랐네.”
킬리안은 너무 웃어 물기가 어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가 한 말에 쉿 하는 동작 그대로 얼음처럼 쨍하고 굳은 상태였다.
그는 웃음소리를 흘리다가 흐음, 하고 콧소리로 말꼬리를 잇더니 곧 사르르 눈가를 접어 웃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은색 눈동자가 마치 별 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였다. 그저 바라만 봐도 휘핑크림처럼 달콤하게 녹아들 것 같은 미소였다.
“그래.”
그리고 그는 나를 따라 제 붉은 입술에 유려한 손가락을 얹으며.
“쉿.”
―하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미친, 심장아 나대지 마라.’
너무 시끄러워서 머리까지 쿵쾅쿵쾅 울려 대는 것 같았다.
나는 혼자 유세를 떠는 심장을 속으로 열심히 나무랐다. 물론, 심장이 내 말을 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의미 부여할 것 없어. 그냥 본인 말 잘 들어서 예쁘다는 뜻이야.’
속으로 열심히 평정을 되찾으려고 했으나, 맹수보다 흉흉하다고 생각했던 남자는 별빛을 뿌린 케이크처럼 달콤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저건 아무리 봐도 사랑스럽다는 미소였다.
누가? 내가.
아니, 저런 표정으로 보면 누구라도 이상한 감정이 들만도 하지. 비록 그게 잘 훈련된 애완견을 보는 듯한 시선이라고 해도 말이다.
‘번뇌야 사라져라.’
나는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킬리안을 경계하듯 몸을 뒤로 물렸다.
그는 입술 위에 있던 손가락을 내리며 나를 칭찬했다.
“더 속 썩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 습득이 빠르구나. 착하기도 하지.”
사람을 개똥 운운하며 이용하고 버릴 거라는 말을 했는데 착하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지금까지 내가 믿어 왔던 상식이 송두리째 와장창 무너진 기분이라고 할까.
하지만 칭찬은 칭찬인지라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나는 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생존 본능이라 해 주시죠.”
“지하 감옥까지 바래다줄까?”
“벌써요? 행동력 한번 빠르시네요.”
“결심했으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게 좋을 거다. 생각이 길어지면 망설이게 되고, 망설이기 시작하면 끝도 없어. 시간만 낭비할 뿐이지.”
이 남자는 나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내 우유부단함은 결국 거기서 시작됐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만약 실패했을 경우 벌어질 수만 가지 변수까지 고려하게 되고, 결국 두려움에 포기로 이어지고는 했다.
“뭐, 뭐라고 하죠? 대사라도 적어 가야 하나.”
“길게 말할 것도 없어. 가서 사탕발림이라도 몇 마디 해 주고 와.”
킬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쳤고, 그는 입매를 둥글게 휘며 나를 에스코트하듯 이끌었다.
* * *
저택 내부의 지하 감옥은 생각보다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돌 틈마다 이끼가 끼어 있긴 했지만, 벌레나 쥐 같은 건 보이지 않았으니까.
“발밑 조심하십시오.”
감옥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을 지나치자 급격히 사위가 어두워졌다. 나는 영화 세트장 같은 감옥 내부를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감상하며 천천히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왔다.
“아가씨!”
감옥 벽에 무기력하게 기대앉아 있던 소피아는, 내 치맛자락이 보이자마자 달려와 쇠창살에 매달렸다.
그간 갖은 마음고생을 한 건지 전보다 뺨이 홀쭉해져 있었다. 그리고 한풀 꺾여 독기가 빠진 상태였다. 더는 날 노려볼 기운도 없어 보였다. 아니면 그러는 척하는 건지.
“아가씨 부디 용서해 주세요. 제가,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나는 무릎을 꿇은 소피아를 별말 없이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만약 소피아를 쫓아내지 않았더라면 훗날 저 감옥에 갇히는 건 내가 될 거라는 생각에 어쩐지 헛웃음이 나왔다.
귀족의 사유 재산을 건드리고도 이렇게 될 거라는 각오조차 하지 않은 건가? 아니면 멍청한 아일라는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여긴 건가.
침이 바짝 마를 정도로 긴장하고 왔는데, 막상 상황이 눈앞에 닥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감옥에 갇힌 저 여자가, 날 배신하고 황태자 앞에 바칠 여자가 이젠 내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는 게 이제야 확실하게 실감이 났다.
“소피아.”
나는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그러자 소피아는 넙죽 숙이고 있던 갈색 머리통을 번쩍 들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직도 연기로 눈물을 짜낼 여유는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래야 너답지.’
부디 샬럿 앞에서도 지금과 정확히 똑같이 행동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널 가문에서 내보낼 거야.”
“아, 아가씨!”
“하지만, 그간 정을 생각해서 아버지께 직접 추천서를 부탁할게.”
“……네?”
제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눈물을 쥐어짜고 있던 소피아가 멍하니 풀어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상식적으로 제 주인을 속여 드레스와 보석을 훔쳤다고 본인 입으로 자백한 시녀를 쫓아내면서 친절하게 추천서까지 써 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얼마나 솔깃한 제안이었는지, 소피아는 단박에 의심 어린 눈빛을 했다. 하지만 뭐, 나는 명실상부 호구니까 자비를 베풀 생각이었다.
“조만간 널 황궁 시녀로 추천할 생각이야. 그때까지 불편하겠지만 여기서 자숙하고 있어. 지금처럼 꼬박꼬박 식사도 챙겨 줄 테니까.”
“자, 잠깐만요. 절 대체 왜……?”
심지어 황궁 시녀로 추천한다는 말에 소피아는 내 장기라도 팔아넘길 생각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거기서 할 일이 있어.”
샬럿이 아무리 나중에 황태자비가 된다지만, 지금은 시골 변방의 가난한 자작 영애일 뿐이었다.
지금쯤 샬럿은 친구의 집에서 잠시 머물고 있을 텐데, 아마 조만간 황태자가 황궁에 샬럿의 거처를 마련해 줄 거다. 그때 소피아를 황궁 시녀로 추천해서 샬럿에 눈에 띄게 하면 좋겠지.
“아무래도 곧 황궁에 샬럿, 그년이 갈 것 같으니까.”
“안젤로 영애가요?”
“가난해서 수도에 저택 하나 없어 남의 집에 얻어 지내는 게 뭐 자랑이라고 어찌나 불쌍한 척을 해 대던지, 정 많은 전하께서 그것을 황궁으로 데려가실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그녀의 의심을 단박에 잠재울 만한 말을 꺼냈다. 국어책 읽듯 또박또박 말이다. 그러자 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아일라 연기를 보고 옆에서 킬리안이 작게 웃었다.
‘우, 웃지 마요!’
나는 붉어진 얼굴로 휙 뒤를 돌아보며 입 모양을 달싹였다. 기껏 처음으로 마음먹고 악녀 연기 좀 해보려고 하는데 응원하지는 못할망정!
나는 소피아가 보지 못하도록 각도를 조절해서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자, 그가 나른하게 눈가를 접으며 눈썹을 까딱였다.
마치 범이 하룻강아지를 보며 어쭈?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음, 나대지 말자.’
나는 단박에 꼬리를 말며 다시 소피아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름대로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가 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으신 거죠? 뭐든 맡겨만 주세요!”
이내 소피아는 각오를 다진 듯 빠르게 태세를 전환하며 웃었다. 막막함이 어느 정도 풀렸는지 다시 기운을 찾은 모양이었다.
어쩜 한결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하긴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지.
“가끔 내 부탁 들어주고 그년이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을 전해 주면 돼.”
그리고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말도 있었다.
나는 딱히 소피아에게 바라는 건 없었다. 이중 첩자 노릇을 해도 좋고, 그냥 샬럿한테 붙어서 등쳐 먹어도 되는 거고.
“가서 샬럿의 시중을 들도록 해.”
“네, 아가씨! 그렇게 할게요!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소피아는 환골탈태라도 한 것 같은 활짝 피어난 얼굴로 연신 내게 절을 했다.
더는 볼일이 없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