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악녀 메이커 22화
‘그간 아일라에게서 뜯어낸 돈은 어떻게 할까. 갚으라고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이내 그 생각을 접기로 했다. 굳이 돌려받지 않아도 가문엔 돈이 넘쳐 나기도 했고, 어차피 앞으로 소피아는 처세 한 번 잘못하면 죽을 운명이었다.
감히 샬럿을 아일라처럼 속여 먹으려 들었다간 옆에 있는 남자들이 가만두지 않을 거고, 첩자라는 걸 들켜도 마찬가지겠지. 잇속이 밝은 애니까 어련히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만.
‘노잣돈 준 셈 치지, 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감옥 밖을 빠져나와 정원을 따라 쭉 걸었다.
괜히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하는 게 아닌지, 가을을 맞은 요즘은 하루하루 날이 좋았다. 나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는 꽃들을 감상했다.
‘크으…….’
왠지 감성에 취한 나는, 뿌듯한 얼굴로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나, 성장한 것 같아.”
반사적으로 존댓말을 하려다가 근처에 정원사가 있어서 말을 놓았다.
“그러네요.”
그러자 뒤에서 따라 걷던 킬리안이 내 옆으로 다가와 이리저리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가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자, 수려한 얼굴이 코앞에서 보였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매일 씻는 것도, 걸어 다니는 것도, 심지어 숨 쉬는 것조차 귀찮아하시더니.”
“……그 정도는 아니거든.”
“여전히 직접 안아서 욕조까지 옮겨 드려야 일어나시지 않습니까.”
“……딱 한 번 그런 거 가지고.”
그동안 밤낮 바뀐 생활을 했는데 갑자기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하니 아직 적응되지 않는 건 당연했다.
“뭐, 그래도.”
부드러운 비단이 볼과 귓가를 스쳤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가 낀 새하얀 장갑으로 향했다.
그의 손가락에는 아일라의 타오를 듯 붉은 머리카락이 걸려 있었다.
“이제 머리에서 장미향이 나는군요. 열심히 씻긴 보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코 밑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은 입술이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붉은색, 붉은색.
보는 사람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드는 저 요망한 빛깔에 덩달아 나까지 붉어졌다.
“아가씨께서도 다 크셨네요.”
달싹이는 입술에서 천천히 시선을 올리니, 역광에 짙어진 회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바람결을 따라 내 귓가에 부드러운 음성을 흘려보냈다.
“요즘 모시는 보람을 느끼는 중이니, 앞으로 더 정진하시길.”
“……읏!”
나는 귀를 감싸 쥐고 후다닥 몸을 물렸다. 그는 내 짜증 어린 표정과 터질 것처럼 빨개진 얼굴을 장난기 어린 얼굴로 마주하며 웃었다.
다 컸다고 으스대는 어린아이에게 하듯 ‘그래, 다 컸네.’ 하고 농락하다니. 나는 씩씩거리며 간질간질한 감각을 떨쳐 내려고 온몸을 탈탈 털어 낸 뒤, 그의 손까지 털어 냈다.
내가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굴자, 그는 잔잔한 미소로 얌전히 거리를 벌려 주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리 뿌듯해도 다시는 그의 앞에서 잘난 척 자랑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원래 있던 시녀를 쫓아내셨으니, 새로운 시녀를 고용해야겠군요. 따로 생각해 둔 이라도 있으십니까?”
킬리안은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구는 내게,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능숙하게 말을 돌리는 것도 수준급이었다.
안 그래도 그 부분을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지라, 나는 그의 의도대로 하던 짓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시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그보다 먼저 무도회에 참석해야 하니까 드레스를 구해야 하잖아.”
나는 입을 옷이 없는 신데렐라의 심정이 되어 한탄했다.
드레스를 새로 주문해야 하는데, 샬럿이 유행시킨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으면 소설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다고 이미 유행이 지난 드레스를 입을 수도 없고. 그것이야말로 여기저기서 물어뜯기기 딱 좋은 선택이겠지. 그렇다면…….
음, 사실 생각해 둔 게 있긴 한데. 그게 좀 황당할 정도로 터무니없는 일이라 말을 꺼내기 망설여졌다.
나는 입술을 여닫기를 반복했다. 자신감에 넘치다가도 문득 ‘내 주제에 무슨’ 하는 생각에 말문이 막혔다.
“성장하셨다면서요?”
킬리안은 우물쭈물하는 날 내려다보며 삐딱하게 물었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입꼬리가 ‘네가 말하는 성장이 거기까지인가 보지?’ 하고 말하는 듯해서 순간 울컥하고 말았다.
나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실패할 게 뻔한 망상인데.”
“그렇게 실패를 두려워하시면 영원히 성장하실 수 없으십니다. 현재에 안주하셔야 점점 더 고립될 뿐이지요. 무모하더라도 덤벼드는 쪽이 더 멋있으니, 뭐든 말씀하십시오.”
“…….”
저런 말까지 들었으니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지금까지 배운 예법도 다 잊어버리고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냥 대충 얼버무릴 생각이었는데.
“……비웃지 않을 거야?”
“절대.”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확답했다. 나는 시원시원한 대답에 그를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응시했다.
처음 봤을 땐 뭐 저런 악마 같은 놈이 다 있느냐고 한탄했는데, 보면 볼수록 꽤 괜찮은 사람 같았다. 도덕성이 심각하게 결여된 점만 빼면.
“킬리…… 아니, 세바스티안이 그랬잖아. 무도회에 가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주목 받아야 한다고.”
“그랬죠.”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겁나 튈 만한 방법이 하나 떠올랐는데…….”
나는 뒷목을 문지르며 민망해하다가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답답해서 뭐! 하고 언성 한 번 높일 만도 하건만, 킬리안은 내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되도록 ‘겁나’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표현은 지양하십시오.”
물론, 한마디 사족을 붙였지만.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겨우 그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슈미즈 드레스를 입고 싶어.”
나는 긴장과 약간의 기대를 담아 말했다. 보이진 않지만 아마 내 양 볼은 홍조로 물들어 있지 않을까.
“…….”
킬리안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아무런 대꾸 없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절대 비웃지 않겠다는 본인의 약속을 떠올렸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대꾸했다.
“확실히 잠옷을 입고 무도회를 가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겠군요.”
“그게 아냐!”
슈미즈 드레스는 드레스지 잠옷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 세계에선 슈미즈를 오로지 잠옷으로만 입어 왔으니 황당하게 들릴 만도 했다.
‘내가 그래서 말하길 꺼린 거라고. 세계관에 아예 없는 의복이니.’
‘슈미즈 아 라 레느’는 원래 18세기 말 프랑스의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가 황실 전속 디자이너를 기용해 만든 의복이었다. 모두가 연극에 열광하던 시절, 여왕이 직접 연극에 출연하여 입은 옷으로도 알려져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물론, 난 여왕이 아니었다.
‘역시 그냥 없던 일로 하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마구 문질렀다.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디자인의 의복을 입고 가겠다는 건 엄청난 도박이었다. 십중팔구 관심 종자 취급받게 되겠지.
“역시 그냥…….”
“아하.”
나는 못들은 걸로 해 달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킬리안이 먼저 선수 쳐 내 말을 막았다.
“그러니까, 새로운 디자인을 고안하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기는 한데 역시 그냥…….”
“지금 의상실에 연락을 넣으시겠습니까? 특별히 선호하는 디자이너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누구라도 즉시 데려올 수 있습니다.”
그가 또 내 말을 뚝 하고 끊으며 물어 왔다. 왠지 데려오겠다는 게 아니라 끌고 오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설마, 납치해 오는 건 아니겠지.
싱글싱글 웃는 그의 낯을 보니 더 머뭇거렸다간 무서운 꼴을 당할 것 같았다. 내가 아니라 내가 앞으로 지목하게 될 디자이너가 말이다.
나는 사용인들이 계속 지나다니는 정원에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닌 것 같아 그를 데리고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람의 인기척이 없는 방에 이르러서야 다시 말을 꺼냈다.
“슈미즈 드레스는 딱딱한 코르셋이나 스토머커로 몸을 조이지 않고 파니에로 치마를 부자연스럽게 부풀릴 필요도 없는 드레스거든요.”
“슈미즈처럼?”
“네, 슈미즈처럼.”
킬리안이 호응해 주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허리선을 아주 높게 잡으면 굳이 코르셋으로 허리를 졸라맬 필요가 없어요. 원래 슈미즈 드레스가 새하얀색이긴 한데, 하얗기만 해서야 진짜 잠옷처럼 보일 테니까 거부감이 들지 않게 엠파이어 스타일의 슈미즈 가운과 결합해서 얇은 천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라인을…….”
나는 신이 나서 막 떠들다가 중간에 깨닫고 말을 뚝 하고 멈췄다.
이렇게 말해서 그가 알아들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킬리안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즐거워 보이네.”
그는 내 말을 이해하는 대신, 내 입가를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내 안면 근육이 활짝 핀 꽃처럼 만개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크, 크흠…….”
나는 민망함에 작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킬리안은 내 한쪽 볼을 감싸 쥐더니 자연스럽게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시선이 서로 맞물리자, 그는 눈가를 초승달처럼 휘었다. 눈동자가 호수에 드리워진 달빛처럼 반짝였다.
“보기 좋잖아.”
뭐가, 당신 미소가?
나는 사돈 남 말 하는 그를 얼빠진 표정으로 보다가, 미친 듯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킬리안은 소심하고 심약한 내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었다.
“드레스 좋아해?”
나는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뭐…… 어렸을 때 잠깐 디자이너가 꿈이기는 했죠. 먹고 살기 바빠서 꿈 같은 건 잊은 지 오래지만요.”
나는 드레스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 제국에서 완전히 보편화된 로코코 풍 드레스가 매우 불편해서 진절머리 치긴 했지만.
굳이 소설에서 샬럿이 새로운 드레스 디자인을 고안하는 에피소드를 넣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애초에 샬럿이라는 인물 자체가 10년 전의 내가 되고 싶었던 나 자신이었다. 성격은 완벽하게 똑같지만, 환경은 완벽하게 다른.
노력하지 않아도 이유 없이 사랑받는 삶이 부러웠다.
전혀 사랑받을 구석이 없는 나라도 사람들이 호감을 보내고, 지켜 주고, 꿈을 지지해 주는 그런 삶을 살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악녀가 되어 모두의 사랑은커녕 경멸을 사고 곧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원래 인생은 뜻대로 되는 법이 없었지.
나는 우울한 기분을 털어 버리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어요. 꿈은 이룰 수 없으니까 꿈이지.”
“그런가?”
“킬리안도 꿈이 있었어요?”
“존재했는지조차 잊어버렸는데.”
“하하, 그게 뭐예요.”
아직도 500살 콘셉트를 밀고 있는 건가. 나는 그가 영감 같은 소리를 하기에 그냥 웃어 버렸다. 생각해 보니 나도 조금 전까진 꿈 같은 건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으니까.
거참, 나도 영감 다 됐네.
“전에 킬리안이 코르셋이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냥 그 말 듣자마자 바로 생각났어요.”
내가 그냥 별것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웃자, 그가 곧바로 물었다.
“그리고 다음에 한 말은 기억나?”
“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몸에 맞춰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요?”
“그리고?”
“필요 없게 만들라고요? 필요 없으면 할 필요도 없다고 그랬잖아요.”
“그래, 방법을 찾았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잘했다는 듯이 내 머리를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