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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메이커-23화 (23/131)

# 23

악녀 메이커 23화

그가 쓰다듬는 대로 시야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 얼빠진 표정을 했다. 아니, 정말 이걸로 괜찮단 말이야? 무리한 계획 아닌가?

이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는 드레스를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어서 패션에 민감한 사교계 귀족들이 다 모이는 황실 무도회에 입고 가라니!

“분명 욕먹을 텐데요…….”

“뭘 해도 욕먹잖아. 그럴 바엔 욕먹을 이유나 만들어 두도록 하지.”

와, 너무 논리적이라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설득력 있는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러게. 뭘 입어도 어차피 욕만 먹을 거라면 내가 입고 싶은 거 입으면 되지.

킬리안은 순식간에 설득당해 크게 동요하는 나를 보고 그래도 전보다는 말이 통한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넌 정말 우선순위가 잘못됐네.”

“네?”

“여기에 새겨 둬. 네가 먼저라고.”

그는 어리둥절해서 되묻는 내 이마를 검지로 콕 짚으며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일, 네가 소유하고 싶은 것, 네가 해야 하는 일, 네가 이득 볼 일, 널 즐겁게 하는 일을 먼저 생각해야지. 그 밖에 것들은 네 일을 전부 해결하고 나서 정 할 일 없고 심심하거든 생각해.”

다시 가정 교사로 돌아온 그가 내 흐트러진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대답.”

스스로 자처해서 악당 중의 대악당을 스승으로 모시기로 했으니,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법.

나는 꽤 이기적으로 들리는 그의 가르침에 떨떠름해하며 대꾸했다.

“네, 알았어요.”

“누가 이걸 이기적이라고 한다면, 평생 남 눈치나 보며 살라고 하고.”

“아니 자꾸 독심술 하지 마요.”

“통찰력이다.”

“통찰력이요? 그게 뭔데요?”

“억겁의 세월을 살면서 많이 보고 많이 겪다 보면 그냥 알게 되는 거.”

이삼십 년 가지고 억겁의 세월이라고 하지는 않는데. 나는 그냥 표정을 잘 읽는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괜히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난 표정 숨기는 것엔 꽤 익숙한 편이었는데 신기하네.

“그래서, 원하는 디자이너는?”

“진짜 누구든 데려와요?”

내가 되묻자, 그는 당연한 걸 굳이 왜 묻느냐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이름만 말해.”

저 말을 다른 사람이 했다면 그건 또 무슨 허세냐고 차게 식은 눈빛을 했을 텐데. 킬리안이라면 상대를 진짜 겁박해서라도 데려올 사람인지라 좀 두려웠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를 부를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누구든 데려올 수 있는 거라면 생각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제국 황실 전속 디자이너요. 이 시대의 최고의 디자이너, 폴랑.”

“하.”

“참고로 이건 제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 소유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고, 제가 이득 볼 일이기도 해요. 그렇죠? 와, 꼭 해야겠네.”

곧바로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늘 태연자약한 남자의 허를 찔렀다는 생각에 해맑은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왕 하기로 한 거, 확실하게 해야죠. 꿈이라는 거창한 말까지 꺼냈는데 대충 하면 창피하니까요.”

그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아이처럼 웃는 나를 따라 헛웃음을 지었다.

“황실 전속을 왜 황실 전속이라고 하는지 알고는 있어?”

“그래도 하실 수 있잖아요?”

“그야 뭐든.”

킬리안은 내 가벼운 도발에 귀엽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내게 예를 갖추는 시늉을 하며 느릿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가씨 명이라면, 기꺼이.”

그리고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간만에 마왕을 떠올리는 흉흉한 웃음이 입가에 걸려 있었다.

* * *

“네가 지낼 거처를 마련해 뒀다. 네 짐은 조만간 사람을 보내 옮길 테니, 오늘부터 황궁에 머물도록 해.”

베르너는 한동안 꽤 고민했던 화제를 입에 담았다.

샬럿이 신세 지고 있는 가문이 그녀와 혈연관계로 엮인 것도 아닌 생면부지의 남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었다.

“네?”

그러자 샬럿은 황태자가 왜 그런 호의를 베푸는지 모르겠다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는 벌써 많이 폐를 끼쳤는걸요. 그동안 제게 베풀어 주신 것만 해도 이미 충분해요.”

치마 뒷부분에 개더 주름을 잡은 샬럿의 디자인이 수도에서 내로라하는 수많은 살롱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황실 전속 디자이너 폴랑과 함께 드레스를 디자인해 만들기도 했다. 샬럿이 이번 무도회에서 직접 입게 될 드레스였다.

세상에 그런 영광이 어디 있을까.

샬럿은 아직도 그 드레스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려 남몰래 꺼내 보고 홀로 기뻐하고는 했다.

어디 그것뿐일까.

아무리 집안에서 사랑받았을지언정, 가난한 자작 영애 신분으로는 엄두도 못 낼 수많은 보석도 전부 베르너에게 받았다.

“그만. 내가 좋아서 했을 뿐이니까 베풀었다는 말은 하지 마. 내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베르너는 샬럿이 부담스러워 하든 말든 딱 잘라 말했다. 거기서 또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어찌 알고.

베르너는 모든 남자, 심지어 그의 충실한 기사, 레녹스마저 샬럿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최근 들어 그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처신했기에 틈만 나면 남자가 꼬이는 건지. 전혀 그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조차 샬럿만 보면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당장에 레녹스만 봐도 그랬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가.’

이렇게까지 날 신경 쓰이게 하는 여자가 있을 줄이야.

베르너는 샬럿을 아무도 보지 못할 곳에 가둬 두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고 억눌러야만 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가뜩이나 심약한 그녀가 망가질 게 뻔하니까.

“음, 그럼 그렇게 할게요.”

반면, 베르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샬럿은 두 번 거절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샬럿은 아무 대가 없이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과분한 호의에 예의상 한 번 거절하긴 했지만, 그녀의 무의식은 내심 그 배려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게 호감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는걸. 어머니는 내가 신의 축복을 받아 이 세상 모두에게 사랑받을 만큼 사랑스럽다고 했는데, 그게 정말이었나 봐.’

그 사실은 그녀 자신도 살면서 스스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은 물론이고 길가를 지나가는 낯선 이조차 그녀에게 호의적이다. 말만 걸면 금세 누구든지 친구가 될 수 있다. 물론 그러다 험한 꼴을 당한 뻔한 적도 몇 번 있지만 위기에 처하더라도 반드시 극적인 순간에 누군가 구하러 온다. 그게 바로 겁도 없이 저잣거리를 돌아다니게 된 계기였다.

‘모두가 날 사랑해.’

설마, 그게 언젠가 이 제국의 주인이 될 황태자 전하께도 통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샬럿은 그저 사랑받아 기쁜 아이처럼 순수하게 활짝 웃었다. 누구에게도 거부 받은 적도, 거절 받은 적도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었다.

“저야 전하와 가까이서 지낼 수 있으면 더 안심되니까 좋아요.”

그러자 베르너는 훨씬 누그러진 표정으로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혼자 지내기 적적한 거라면, 안젤로 자작과 네 가족들도 전부 수도로 초대하는 게 좋겠군. 함께 지낼 수 있는 거처를 따로 마련해 보마.”

“정말요?!”

떨어졌던 가족들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샬럿은 활짝 함박웃음을 지으며 기뻐했다.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들을 만나게 되면 수도도 우리 영지와 다름없이 즐거웠다고 얘기해 줘야지. 오히려 새로운 사람, 멋있는 사람 더 많이 만나서 좋았다고 하면 아무래도 오라버니들이 질투하려나.’

샬럿은 험악한 도시 괴담을 들먹이며 그녀를 겁주었던 가족들을 떠올리며 장난꾸러기처럼 키득거렸다.

“따로 더 필요한 건 없나?”

베르너는 그런 샬럿에게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은 마음에 물었다.

그녀는 잠시 뭐가 있나 고민하다가, 폴랑과 함께 만든 드레스의 장식을 하나 더 달고 싶었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에 세계적인 황실 디자이너를 오라 가라 할 수는 없는지라 조금 망설이게 되었다.

“뭐든 말해.”

하지만 곧 이 제국의 주인이 될 자의 명을 누가 무시할 수 있을까.

샬럿의 망설임은 짧았고, 그녀는 곧 폴랑을 만나게 될 거라 확신했다.

그런데.

“저, 전하. 그것이…….”

“뭐지? 말해라.”

“폴랑이 휴가를 신청했습니다.”

“……뭐? 휴가?”

베르너는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폴랑이 한시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 엄청난 일벌레라는 건 제국에서도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휴가라니?

“그 일을 내게 알리지도 않고 네 독단으로 허가를 내렸다고?”

“……송구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설마 폴랑이 휴가를 떠나자마자 황태자가 바로 찾을 줄은 몰랐는지, 보좌관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쩔쩔맸다.

본래 황궁 내에 상주하는 화가, 음악가 등의 예술 쪽 인사들의 변덕은 어느 정도 허용해 주는 편이었다. 직업 특성상 형편, 상태에 따라 발휘할 수 있는 역량에 차이가 있다 보니 그들을 배려한 것이었다.

특히 폴랑은 다른 제국들에서조차 한 번만 방문해 주길 손꼽을 정도의 유명한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베르너는 보좌관이 왜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됐다. 더는 그 일을 책하지는 않을 테니, 일단 다시 불러와. 샬럿이 필요로 하고 있으니 되도록 빨리.”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보좌관은 그 명령 또한 수행할 수 없었다.

폴랑이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휴가가 허가 나자마자 증발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흔적이 남지 않을 리가 없는데, 심지어 수색대까지 보냈음에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제국 밖까지 수색 범위를 넓혀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차표나 배표를 끊거나 텔레포트 센터를 이용한 기록도 없습니다. 심지어 목격한 사람조차 없으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예, 바로 그겁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요.”

보좌관의 말에 베르너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명령 한마디만 떨어지면, 당연한 것처럼 뭐든 바라는 대로 이룰 수 있었다. 일생을 통틀어 일이 제 뜻대로 풀리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샬럿 또한 매한가지라, 그녀는 정말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 * *

황실 전속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오로지 황실에만 속한다는 것. 즉, 황실의 소유물이라는 뜻이었다.

황족도 아니고 고작 공작 영애일 뿐인 내가 황실 전속 디자이너를 개인 디자이너로 불러온다는 건 황실 직속 기사단을 개인 호위로 쓰겠다는 말만큼이나 황당한 소리였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

그러니 의문의 납치를 당한 폴랑의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황실 모독죄로 목이 달랑 잘릴 위기에 처했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내, 내가 대체 왜 여기에…….”

킬리안의 능력에 취해서 제 발로 순순히 메르텐시아 저택까지 온 폴랑은 동공을 상하좌우로 덜덜 떨어 댔다.

그의 손에는 강압적인 어떤 집사에 의해 억지로 들린 찻잔이 계속 덜그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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