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악녀 메이커 24화
혼란스러운 듯 폴랑의 눈동자에 여러 감정이 마구잡이로 휘몰아쳤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킬리안이 아닌지라 통찰력은 쓸 수 없지만, 굳이 쓰지 않아도 그가 여기서 당장 달아나고 싶어 한다는 건 아주 잘 알겠다.
“차가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예, 예에?”
집사의 표본처럼 반듯하게 서 있던 킬리안이 물어 오자, 폴랑은 얼빠진 대답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아뇨. 굉장히 향이 좋군요.”
그는 낭패 어린 표정으로 킬리안을 올려다보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그, 그보다 여기까지 따라와서 굉장히 무례한 말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은 가만히 지켜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폴랑의 입장에서는 정신을 차리니 ‘내가 악명이 자자한 저 마녀의 드레스를 디자인해야 한다고? 그것도 기간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심지어 들키면 사형당할 텐데?’였으니 세상이 무너지는 심정이겠지.
그러나 킬리안은 가증스럽게도 폴랑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는 정말 안타깝다는 듯 조곤조곤 말했다.
“저런, 바로 조금 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신다니 유감이군요. 저는 분명 정중히 허락을 구했을 텐데요.”
“……아뇨. 기억은, 기억은 합니다만 기억이 온전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온전하지 않다고 할까,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리실 거라는 거 알고 있는데…… 그 상황이 아무래도 취한 것 같기도 하고 꿈결 같았어요.”
그는 횡설수설하다가 갑자기 본인의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그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 맞단 말입니까? 제가 이 일을 승인했다고요? 내가 왜 그랬지? 미친 건가?”
폴랑은 얼마나 당황했는지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왠지 점점 죄책감이 심해져서, 그를 그만 괴롭게 하기 위해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킬리안에게 지겹게 배운 대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며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러자 폴랑은 내 존재를 이제야 눈치챘는지 화들짝 놀라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메, 메르텐시아 영애!”
“네, 폴랑. 우리 초면인가요?”
실제로 아일라와 폴랑이 초면인지 구면인지 알 길이 없는 나는, 능청스럽게 물으며 눈가를 접어 웃었다.
그러자 그가 흠칫 떨며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이 꽤 무례하게 굴었으니 소문의 패악질이 시작되는 건 아닌가 염려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직 루프가 일어난 것도 아닌데, 내가 굳이 나서서 그에게 행패를 부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일단, 이걸 봐주시겠어요?”
내가 눈짓을 하자, 킬리안이 깔끔하게 정리된 종이 뭉치를 그에게 내밀었다. 폴랑은 그것을 받으면 빼도 박도 못한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몸을 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황실에 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몸으로서 이 의뢰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폴랑은 아일라의 온갖 추문을 떠올리는 듯 얼굴이 점점 흙빛으로 변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계속 말을 이었다.
“일단 보기라도 해 주세요.”
“거절할 수는 있는 겁니까?”
“글쎄요. 정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거절한다면 유감일 거야. 굉장히 유감이어서 내가 그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네. 나는 그런 뜻이 노골적으로 담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값은 후하게 쳐드리고 익명성은 철저하게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누가 드레스를 만들었는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별 탈 없이 무사히 황궁까지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럼 안심하시겠어요?”
나는 언성을 높이지도, 험악한 말도 쓰지 않고 위협과 살살 달래기를 반복했다.
물론, 이건 말할 것도 없이 킬리안에게서 배운 협박 기술이었다. 그냥 대놓고 널 죽이겠다고 살벌하게 구는 것보다 이게 더 두렵다는 걸 몸소 겪어서 알고 있지.
‘협박한다면 킬리안처럼.’
나는 왠지 내가 진짜 악녀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딘 듯한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원래 나쁜 것은 빨리 배운다고 하더니.
“……어쩔 수 없군요.”
곧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던 폴랑은, 이제 반쯤 해탈한 눈치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돌돌 밀린 종이 뭉치를 받아 들고 묶여 있는 끈을 풀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그린 드레스의 그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나는 겉으로는 태연하게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직접 디자인을 응용해서 그린 허접스러운 그림이 손꼽히는 디자이너에게 평가받을 기회가 살면서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런데 표정을 종잇장 구기듯 구기며 이게 뭐냐고 되물어 올 줄 알았던 폴랑은, 예상외로 진지했다.
“이건…….”
역시 그 분야의 전문가라는 걸까.
그는 애처롭게 덜덜 떨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눈빛이 돌변해서 물었다.
“살면서 이런 디자인은 처음 보는군요. 설마, 직접 고안하신 겁니까?”
“……음, 맞아요.”
사실은 지구의 조상님들이 고안한 거였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 뻔뻔하게 대꾸했다. 전체적인 형태는 슈미즈 드레스를 참고했지만 세부적인 건 내가 고안한 거니까.
“원단은 어떻게 되죠?”
“얇고 가벼운 실크나 모슬린이요.”
“그렇게 하면 몸매의 곡선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겠군요. 고전적이면서 세련됐어요. 하이 웨이스트로 잡아 허리에 화려한 리본을 묶고, 스커트 단은 플라운스로 처리한다면 딱히 보정 기구가 필요도 없을 테고요. 전적으로 여성을 위한 드레스군요.”
“역시 알아보시네요.”
코르셋 조이다가 내장 구조가 바뀌거나, 갈비뼈가 나가고 싶지 않아서. 그러니까, 내가 살기 위한 디자인이라는 걸 알아봐 줘서 기쁘구나.
내가 허허 웃자, 폴랑은 식은땀을 흘리며 나를 보고, 종이를 보고, 나를 보고, 종이를 보길 반복했다.
“맙소사…….”
그는 무식하고 교양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그 마녀 아일라가 이런 옷을 디자인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사자가 풀을 뜯어 먹어도 이렇게 놀라워하진 않을 것 같군.
“대체 왜 이런 재능을 지금껏 썩히신 겁니까? 믿을 수가 없군요.”
“저는 제가 필요할 때, 제가 입고 싶은 옷만 디자인할 거거든요.”
그렇지?
나는 칭찬을 바라는 시선으로 킬리안을 흘끔거리며 말했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말없이 나른한 고양이처럼 웃어 주었다.
“당연하신 말씀을.”
폴랑은 나와 킬리안의 대화를 듣고 잠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듯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확실히 혁신적이긴 하지만, 이대로 만들면 지금 유행과는 동떨어지게 될 겁니다. 아무래도 무도회에 입기엔 적절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그걸 왜 당신이 정하죠?”
“……예?”
내가 반사적으로 되묻자, 그는 당황한 눈치였다. 왜 그런 당연한 것에 의문을 품느냐는 듯 말이다.
“제가 정한 게 아니라,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저야 디자이너니까 이 드레스의 가치를 단박에 알아봤지만, 사교계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반발하기 마련이니…….”
사실 폴랑이 하는 말은 나도 내심 줄곧 걱정하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나는 내가 처음 이 세계에 뚝 떨어져 곧바로 무도회로 끌려갔던 그날을 떠올렸다.
날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흘끔거리며 수군대는 귀족들. 경멸하기도, 멸시하기도, 호기심을 보내기도, 그리고 화려하고 요염한 내 외모에 노골적으로 성적인 의도가 담긴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진절머리가 나고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부질없이 느껴졌다.
만약 내가 아일라가 아닌 샬럿이 되어 모두의 찬사를 받는다고 해도, 사람들의 기준대로 행동하고 그들의 비위를 하나하나 맞춰 줘야 한다면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지?
‘거기에 나는 어디에 있는데?’
우유부단한 것도 이만하면 되었다.
평생 남을 위해 살아왔으니 난 충분히했다. 이제는 남들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해질 때였다.
나를 위해 살아갈 때였다.
“입고 싶으면 입을 거예요.”
나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이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맘대로 반발하라고 해요. 그런데 당신의 눈으로 봤을 땐 어떤데요? 그 어떤 유행이라고 해도 이 옷만큼 제게 어울리지 않을 거잖아요.”
타인에게 가장 매력을 느낄 때가 언제였더라.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노라면 당당한 사람은 매력적이었다. 특히 자신감이 만용이 아니라 실력에서 기인했을 때는 더욱더.
“오직 저만을 위한 드레스를 만들어 주세요. 제게 최고로 어울리는 드레스를요. 물론, 세계적인 디자이너 폴랑이라면 할 수 있겠죠?”
나는 오만하게 명령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쩌면 무례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말에 폴랑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웬만하면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하더니.
“……하겠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듯 이를 악물고 말했다.
마녀의 허물을 쓰고 있는 나를 향해 희미하게 얼굴을 붉히면서.
* * *
‘으아…….’
나는 폴랑이 배정된 방으로 이동하고 난 뒤에야 긴장을 풀고 소파에 풀썩 엎드렸다.
그러자 폴랑에게 아무렇게나 막 뱉었던 말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견디기 괴로웠다.
나름 미리 대사를 짜 두고 혼자서 중얼중얼 연습까지 했는데, 내가 예상했던 말들과 미묘하게 빗나갔다.
덕분에 끝에 가서는 결국 킬리안의 말을 인용하거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재벌가 아가씨 같은 말투로 아무 말이나 막 뱉었는데, 그게 너무 창피했다.
‘자존감 높은 인간들 대단하다…….’
대표적으로 바로 내 곁에 있는 킬리안을 들 수가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 있지.
중간중간 내 양심과 소시민의 영혼이 불쑥 튀어나와 ‘헐, 아니에요. 그냥 기존에 있던 디자인 따온 것뿐인데요, 저 같은 게 천재는 무슨……’ 같은 말이 턱 끝까지 치솟는 걸 참느라 아주 고역이었다. 이게 바로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는 그건가 보다.
나는 소파를 주먹으로 쾅쾅 내려치며 한동안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겨우 진정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창피함에 허우적거리는 나를 재밌다는 듯 응시하고 있는 킬리안에게 물었다.
“어, 어땠어요?”
“나쁘지는 않았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를 토닥였다. 어째 위로하는 손길이었다.
……뭐, 그래. 소피아 때처럼 그가 대놓고 날 비웃지 않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쾌적한 감금 생활을 위해 폴랑을 통조림 해 둘 방을 따로 만들어 두었다.
안쪽에 욕실과 화장실도 딸려 있고, 킬리안의 능력으로 입막음해 둔 하녀들도 붙여 두었으니, 폴랑이 원하는 건 뭐든 제공해 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