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메이커-25화 (25/131)

# 25

악녀 메이커 25화

납치한 마당에 그게 무슨 쓸데없는 친절이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쪽은 나름대로 절박했다고. 흑흑. 언젠가 링테 작가님을 납치해 오면 감금하려고 꾸며 뒀던 방을 친히 제공하지 않았는가.

물론, 진짜로 납치해 올 생각은 없었다. 그냥 작가님 소설 때문에 밤을 지새울 때마다 계속 생각이 나서 심심풀이로 방만 만들어 뒀던 것뿐이다. ……진짜로.

아무튼, 각설하고.

나는 소파를 뒹굴며 추태를 부리던 것을 그만두고 드레스를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폴랑에게 보여 주기 위해 그려 두었던 시안 외에도 다른 디자인을 머릿속으로 열심히 그렸다.

음, 그리고 원단과 레이스, 세공된 보석을 공수해 올 상단을 수소문해 봐야 하고…….

사실 수소문할 것도 없이 메르텐시아 가문의 이름과 돈만 있으면 순식간에 해결될 일이니까 이쪽은 문제없었다.

디자인은 내가 현대인의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힘닿는 데까지 도와 줄 테니, 패턴과 가봉, 재단은 알아서 해 줄 거라 믿는다, 폴랑! 굳세어라, 폴랑! 그래도 바느질은 하녀들이 도와줄 거야!

그렇게 나는 세계적인 황실 직속 디자이너를 내 드레스 만드는 데에 갈아 넣기로 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악녀 같은 짓을 한 것 같아 양심의 통증이 날 괴롭혔으나, 아무리 그래도 생존 욕구를 이기지는 못했다.

* * *

드레스가 완성될 즈음이 되자, 무도회는 정말 코앞까지 다가왔다.

1년 중 가장 큰 규모의 축제인 수확제 기간이었기 때문에 온 제국이 떠들썩했다.

나는 온통 축제와 무도회 얘기밖에 없는 제국 신문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들어오라고 해.”

결전의 날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니 더는 미룰 수는 없는 일.

나는 비장한 얼굴로 킬리안에게 명령을 내렸고, 그는 문을 열어 누군가를 향해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작은 체구의 소녀가 다람쥐같이 쪼르르 달려와 내 앞에 섰다.

도비엘라였다.

“아가씨!”

수많은 서비스직을 전전하며 온갖 진상들을 상대한 결과, 나름 사람을 대하는 것에 능숙하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그런 나조차도 도비엘라는 어떤 표정으로 마주해야 할지 고뇌하게 된다. 말 한 번 까딱 잘못했다간 또 무슨 상식 밖의 기상천외한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어서.

“어, 음…… 안녕.”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의 단장을 돕게 되다니! 이런 영광스러운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도비엘라는 기다리는 내내 그만 심장이 터져 버리는 줄 알았어요!”

본인의 이름을 3인칭으로 부르는 이상한 말버릇은 여전하구나. 나는 떫은 감이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으로 ‘그러니…….’ 하고 대꾸했다.

처음 봤을 땐 나를 몸서리치게 무서워하더니, 내가 직접 치료해 준 것에 꽤나 감동 받은 모양이었다.

전에 킬리안이 말했던 ‘비 오는 날 양아치와 고양이 효과’라고 할 수 있었다. 성질 머리가 개차반인 아가씨가 친히 나를 직접 치료해 주시다니!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한 거겠지.

“도비엘라가 감히 예술 작품 같은 아가씨의 몸에 손을 대도 될까요?”

“과장하지 말렴.”

“도비엘라는 절대 과장하지 않았어요. 아가씨의 미모는 신께서 빚으신 이 시대 최고의 역작이신걸요!”

확실히 외모로는 아일라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얼굴만큼은 주인공 샬럿보다 예쁘다는 설정이었으니까.

왜 굳이 그런 설정을 넣었느냐 하면, 그래야 ‘최고의 미녀가 유혹해도 절대 넘어가지 않는’ 베르너의 일편단심을 보여 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결국 내가 직접 글로 묘사해서 만든 피조물이었기에 칭찬을 들어도 민망할 따름이었다. 나는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낯을 붉히며 진절머리를 쳤다.

내가 킬리안의 얼굴을 보고 감탄할 때마다 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나는 역지사지를 아주 제대로 느끼며 다시 본론으로 말을 돌렸다.

“그건 됐으니, 새로 맞춘 드레스와 최대한 어울리도록 머리 좀 해 주고 장신구도 골라 줄래? 네가 의상실에서 일했다는 얘기는 들었으니까, 잘하면 널 시녀로 고려해 볼 수도…….”

“허, 허억! 당치도 않아요!”

그런데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도비엘라가 심장을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넙죽 엎드려 빌빌거리는데,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벌써 피로가 몰려왔다.

“제 주제에 시녀라니! 저는 평민인 데다가 아직 많이 어리고 부족해서 그럴 자격이 없어요, 아가씨!”

부담스러울 정도의 찬사를 퍼붓는 건 소피아와 비슷했지만, 아부나 입에 발린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시녀 시켜 준다는데 싫다는 걸 보니.

시녀가 되면 급료도 월등히 오르고 대우도 하녀일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아질 텐데. 그녀는 진심으로 시녀로 승진이라도 시켜 줬다간 심장 마비로 쓰러져 죽을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 그래.”

나는 그녀가 또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자해를 시작할까 봐 재빨리 말했다.

“네가 계속하고 싶으면 하녀 해. 하녀 하면서 내 치장을 도와. 어쨌든 실력이 없으면 시녀든 하녀든 다른 사람을 따로 고용할 테니까.”

“네!”

도비엘라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씩씩하게 외쳤다. 그리고 뭐든 시켜 달라는 듯 반짝거리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진짜 이상한 애라니까.’

하지만, 과연 듣던 대로 도비엘라의 감각은 탁월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전체적인 조화를 맞춰 어우러지도록 꾸며 주었으니까.

‘급료는 올려 줘야겠다.’

그렇게 내 치장의 전반을 담당하는, 귀엽고 무서운 하녀가 생겼다.

* * *

“어머, 역시. 아가씨께는 이 사랑스러운 다이아몬드 티아라가 어울리실 줄 알았다니까요. 와, 정말 어쩜 이렇게 파스텔 색조를 잘 받으실까. 웬만큼 피부가 맑고 투명하지 않다면 힘든 일인데 말이죠.”

샬럿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피아의 칭찬에 순진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대꾸했다. 황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 새로 배정 받은 시녀는 다 좋은데 말이 많은 게 흠이었다.

“좀 화려하지 않아?”

“전혀요! 오히려 아가씨의 외모에 보석들이 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걸요. 귀걸이를 좀 더 큰 걸로 달아 보시는 건 어떠세요?”

“음, 그럴까.”

그래도 일단 칭찬은 칭찬이었기에 기분 나쁠 리가 없었다.

샬럿은 흥흥,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거울 속에 자신을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물론, 소피아가 장신구에서 떨어져 나간 다이아몬드 조각 하나를 도박사 같은 손놀림으로 재빠르게 주머니에 넣는 것은 보지 못했다.

“드디어 내일이 무도회구나.”

샬럿은 두근거리는 심장 위를 손바닥으로 덮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미약한 흥분에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물론 황궁 무도회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 무도회는 정말 특별한 날이 될 거 같아. 너무 기대된다.”

“오, 물론이죠! 이번에 새로 유행하는 드레스를 아가씨께서 디자인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렇게 치마 뒷부분을 사랑스럽게 부풀릴 생각을 하시다니, 아가씨께선 천재임이 틀림없어요.”

소피아가 끊임없이 찬사를 퍼붓자, 샬럿은 부끄러운지 손사래를 쳤다.

“에이, 별거 아닌걸.”

“세상에 겸손하시네요. 심지어 폴랑의 드레스를 입으시잖아요! 무도회에서 아가씨만큼 주목을 받을 사람은 없을걸요?”

“그럴까?”

샬럿은 소녀처럼 양 볼을 장밋빛으로 발갛게 물들이며 기대 어린 눈빛을 했다. 하긴, 소문대로라면 사교계에서 주목받는 영애들 대부분이 그녀가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고 올 것이다.

샬럿은 내심 생각했다.

‘사실상 주인공이나 다름없지.’

내일이 데뷔탕트 때보다 더 주목을 받게 될 날임은 틀림없었다.

“귀걸이는 좀 더 생각해 볼게. 무도회 날에도 이런 느낌으로 꾸며 주면 될 거 같아. 도와줘서 고마웠어.”

“어머, 뭘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친절하기도 하시지.”

소피아는 살갑게 웃으면서 샬럿의 옷을 슈미즈로 갈아 입혀 준 뒤, 그녀가 빨리 잠들 수 있도록 방 안의 온도를 높이고 물러났다.

“너무 쉬운데.”

그리고 방 밖을 나서자마자, 소피아는 남몰래 입매를 비틀었다.

곁에서 지켜본 결과, 샬럿을 속이는 것은 숨 쉬기보다 더 쉬워 보였다. 세 살배기 어린애도 샬럿보다 의심이 많으리라. 누구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거라고 여기는 건지.

‘하긴, 주변에 저 여자를 끼고 도는 남자들만 해도 한둘이 아니었어. 잘못 건들면 좋지 못한 꼴이 날 거야. 높은 확률로 죽게 되겠지.’

같은 자작가 출신에 곧 파산 나게 생긴 가문의 여식 주제에, 남자 잘 만나 팔자 폈으니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적인 감정은 다 배제해야 할 때였다.

‘성녀와 마녀라…….’

어느 쪽에 걸어 볼까.

물론,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전자에 걸어야 할 테지만, 성급하면 그르칠 우려가 있었다.

소피아는 이 한 번의 선택에 제 인생이 한순간에 뒤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녀는 두 여자 사이를 끊임없이 저울질하면서 복도를 거닐었다.

* * *

한편, 방 안에 홀로 남겨진 샬럿은 방 안을 훈훈하게 덥히는 따뜻한 공기에 작게 하품을 했다.

그러고 보니, 바로 내일이 무도회인데 폴랑은 왜 아직 돌아오지 않는 걸까. 이왕이면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폴랑이 곁에 있어 줘야 더 주목받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아무리 휴가를 냈다지만,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는 없잖아. 이건 납치 사건일지도 몰라. 황궁 내에서도 쉬쉬하며 계속 수색하고 있는 모양이고.’

샬럿은 어설프게 탐정 흉내를 내며 오라버니들이 열심히 떠들었던 흉흉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샬럿, 수도 밤거리를 함부로 돌아다니다가 납치를 당하잖아? 운이 좋아야 노예로 팔려 나가게 될 거다.

―그게 운이 좋은 거야?

―응. 운이 나쁘면 아침이 밝기 전에 온몸이 토막 나고 장기가 전부 털려 제국 곳곳에 팔려 나가게 될 테니까. 무섭지? 그러니까 혼자 밤늦게 돌아다니면 오빠한테 혼난다.

그로서는 샬럿이 제발 호기심에 여기저기 쏘다니지 않고 얌전히 지내길 바라는 마음에 한 소리겠지만, 사실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었다. 민간인을 납치해서 인신매매하는 일은 암암리에 흔히 일어나고는 했으니까.

‘그럼 안 되는데.’

샬럿은 어처구니없는 망상이라 여기면서도 불안에 잠겼다. 그리고 그녀가 머무는 궁에서 폴랑의 거처까지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잠시 다녀오자.’

물론, 자신이 갔다 온다고 해서 큰 해결책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만약 납치라면 폴랑이 제 방에 단서라도 흘려 놨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샬럿의 오지랖이 넓은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잠옷 위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방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의 처소 밖을 지키고 있던 기사 두 명이 곤란하다는 듯 말을 걸었다.

“영애,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