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악녀 메이커 26화
“잠깐 폴랑의 거처에 다녀오려고 하는데 안 될까요? 바로 앞에 예술가들이 머무는 궁이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금방이면 돼요. 네?”
“안 됩니다. 위험하니 이곳에 머무시라는 전하의 명이십니다.”
“음…… 그럼 기사님께서 절 데려다주시면 되겠네요. 그렇죠?”
샬럿은 눈가를 예쁘게 접어 내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천진난만한 샬럿의 미소에 처음엔 단호히 거절하던 기사도 점점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결국 백기를 들었고, 샬럿과 함께 옆 건물로 향했다.
“그럼, 볼일만 보시고 바로 돌아오십시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몇 마디 나누지 않았음에도 어느새 샬럿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기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네, 금방 다녀올게요.”
샬럿은 천사처럼 환한 미소로 대꾸하며 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역시 예술가들이 머무는 곳이라 그런지 밤이 깊었는데도 아직 깨어 있는 사람이 많았다. 샬럿은 온몸에 물감을 묻히고 다니는 사람을 붙잡아 폴랑의 방을 알아냈다.
그리고 알아낸 폴랑의 방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방 문고리가 돌아가더니 안쪽에서 키 큰 남자가 유유히 빠져나오는 것 아닌가.
‘헉!’
샬럿은 헛숨을 들이키며 얼른 건물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폴랑이 표면적 휴가를 떠난 지금, 그의 방에서 나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폴랑 본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더 체구가 크고 훤칠한 느낌이었다.
‘……뭐지? 납치범?’
뭐가 됐든 간에 수상하기 짝이 없다. 그녀는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느끼며 치맛자락에 손을 대충 문질렀다.
잠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쉰 샬럿은, 기둥 밖으로 조금씩 고개를 뺐다. 상대의 얼굴이 힘들다면 인상착의라도 확인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만 잘 시간이야.”
“꺄아악!”
샬럿은 냅다 비명을 지르며 벌렁거리는 심장을 움켜쥐었다.
아니, 언제 거기서 여기까지 이동한 거지? 발걸음 소리는커녕 인기척도 못 느꼈기에 정말이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누, 누, 누구세요?”
“네가 잊어야 할 누군가.”
킬리안은 나른하게 대꾸하며 샬럿과 시선을 맞췄다.
“…….”
샬럿은 그와 눈을 마주친 후부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달빛을 그대로 옮겨 담은 듯한 요요한 은회색 눈동자는 감탄이 터져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빠져들 듯 신비로운 색채와 시선이 맞물린 순간,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지고 술에 취한 것처럼 시야가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샬럿은 갑자기 이 모든 게 꿈결처럼 아득히 멀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뭘까 하고 멍하니 굳어져 있던 그때, 그가 말했다.
“지나가는 시녀인 줄 알았더니, 평범한 인물은 아닌 모양이구나.”
곤란하게 됐네. 죽일까. 킬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지나치게 무심했다. 마치 귀찮은데 길가의 개미를 밟아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말투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말에 샬럿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희게 질리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지고 손끝이 달달 떨려 왔다.
살면서 여러 번 크고 작은 위기는 더러 겪어 봤다. 갑자기 어떤 영식이 추근거렸다거나, 불량배에게 붙잡힌다거나, 납치를 당할 뻔했다거나.
하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온몸이 꽁꽁 묶인 듯이 꼼짝도 할 수 없고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극도의 공포는. 남자의 손에 흉기가 들려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죽인다는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진심으로 날 죽일 생각이야.’
샬럿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는 항상 누군가 달려왔다. 언제나 백마 탄 왕자님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에 짠 하고 나타나서…….
그런데.
왜 아무도 오지 않아?
‘구, 구해 줘.’
샬럿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킬리안은 자신을 보고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에 아주 질리도록 익숙했다.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며, 그녀를 따라 쭈그려 앉아 공포에 질린 눈과 시선을 맞췄다.
“네 이름은?”
킬리안은 본인의 입술 사이로 제 엄지손가락을 밀어 넣고 깨물어 피를 내었다. 샬럿은 이게 또 무슨 기행인가 하여 필사적으로 대꾸했다.
“샤, 샬럿, 샬럿 안젤로.”
“아아, 네가.”
그러자, 무심하게 풀어져 있던 킬리안의 눈동자에 살짝 이채가 감돌았다. 그것도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말이다.
“곤란하지. 쉽게 죽일 뻔했잖아.”
몸을 저릿하게 하던 기운이 순식간에 거둬지자, 샬럿은 그제야 기침과 함께 숨을 토해 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이내 뚝뚝 흘리며 애처롭게 덜덜 떨기 시작했다.
“신의 사랑을 받는 것치고는 전혀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서 몰랐네.”
킬리안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엄지를 타고 흐르는 핏물을 핥았다. 마치 고양이가 털을 고르는 듯한 행동에 샬럿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신의 사랑?”
“그래도 가만 보니 알 만하구나. 그동안 얼마나 사랑받으며 편하게 살아왔는지. 그런 건 얼굴에도 표정에도 행동에도 녹아 있기 마련이니.”
정곡을 꿰뚫는 말이었다.
스스로 아주 잘 알고, 사실은 그 호의를 이용한 적도 있는 그런 정곡이었다.
“온실 속 화초는 거친 바람에도 금세 죽어 버릴 텐데. 나 원, 신의 열렬한 사랑이란 악취미이기도 하지.”
킬리안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샬럿은 그 말의 정확한 뜻은 알지 못했으나, 그녀 자신을 화초에 비유하며 모욕한 소리라는 것은 알아듣고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다,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샬럿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더듬으며 쏘아붙였다. 조금 전까지 그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긴 했지만, 지금은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물론, 신의 편애를 받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엄두도 못 낼 대담한 행동이기도 했다.
킬리안은 입술을 비스듬히 끌어 올리며 대꾸했다.
“아니, 네가 예상대로라서.”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역시 예상했던 대로 시시하고 조금도 재미없어 보이는군.”
“뭐, 뭐라고요?”
샬럿은 기가 막혀 말을 더듬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시시하다든지 재미없다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대다수 사람에게, 특히 남자들에게 작고 사랑스러워 지켜 주고 싶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지만. 가끔 시기와 질투를 하는 이들은 있어도,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업신여겨지며 무시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 앞에 서 있는 지금, 샬럿은 자신이 마치 허공을 떠도는 미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연약한 화초보다는 뽑혀도 그러려니 하는 잡초 쪽이 더 취향이라서.”
잡초고 화초고 왜 갑자기 나타나서 취향을 운운하는 건지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것보다 대체 누구란 말인가? 뭐 하는 사람이길래 이토록 무례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제가 잡초보다 못하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응. 귀엽잖아, 잡초.”
“허.”
이 인간 제정신인가.
샬럿이 뱁새 눈을 뜨며 그를 위아래로 살피는 사이, 킬리안은 망설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당연히 그녀에게 손을 뻗어 일으켜 세워 준다거나 하는 친절은 일절 없었다.
“잘 시간 지났다, 아가.”
그러고는 그대로 그녀를 스쳐 지나가 유유히 궁 밖을 빠져나갔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샬럿이 어처구니에 뒷골을 잡는 것도 잠시, 사라진 그 남자의 얼굴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을 느꼈다.
‘……잘생기긴 잘생겼지.’
내로라하는 온갖 종류의 미남들을 봐 온 샬럿조차 잠시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신과 조각상에 비유해도 모자랄 정도의 완벽한 외모였지만, 그것에 정확하게 반비례하는 인성은 독보적이었다. 개차반이 따로 없었다.
‘다신 만나고 싶지 않아.’
샬럿은 훌쩍거리면서 킬리안이 입고 있었던 옷을 떠올렸다.
어느 귀족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까만 연미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었지. 그건 누가 봐도 집사복이었다.
‘은방울꽃처럼 생긴 푸른 꽃이 그려진 문장이었는데, 어디 가문이지?’
아무래도 누군가의 심부름으로 황궁까지 온 것 같은데, 황태자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무례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샬럿은 이 불쾌한 기억을 빨리 털어 내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까지 찾아온 목적을 잊어버리고 사라진 킬리안을 따라 궁 밖을 나와 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기사만이 반길 뿐, 그는 보이지 않았다.
샬럿이 다급하게 물었다.
“혹시, 연미복을 입은 남자 못 봤어요? 분명 여기로 나왔을 텐데?”
“아니요? 영애 말고는 누구도 드나들지 않았습니다.”
“네? 그럴 리가 분명…….”
샬럿이 반박하기 위해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갑자기 휴가를 내고 사라진 폴랑의 방에서 나온 것도 그렇고, 또 그도 폴랑처럼 순식간에 사라진 것으로 봤을 때, 무언가 연관이 있었다.
마법사인 걸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황궁에서 무단으로 마법을 썼다간 바로 추적 마법에 걸렸을 테니까.
‘뭔가…… 다른 사람.’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샬럿은 아까까지의 불쾌함이 서서히 호기심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 남자의 존재를 목격하고 알아차린 건 자신밖에 없었다. 샬럿은 왠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특별한 비밀이라도 생긴 기분이었다.
‘어느 가문의 집사라면, 내일 무도회에서 만날 수 있을까?’
내일, 샬럿은 누구보다 가장 빛날 자신이 있었다. 예정된 일이었다.
만약 내일 그 남자와 운명처럼 다시 마주친다면, 자신을 이렇게 무시했던 그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수 있으리라. 다시는 시시하고 재미없다는 말은 입에 담을 수도 없겠지.
‘물론, 마주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에 뜬 보름달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은은한 달빛은, 어둡게 물든 세상을 품에 안 듯 비추고 있었다.
* * *
그동안 킬리안과 준비한 것들이 어떤 효과를 불러올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본다.
나는 덜컹거리는 마차 위에 앉아 제발 루프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양손을 모아 기도했다.
“누구한테 기도하는데?”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자타가 공인하는 신 혐오자 킬리안에게 바로 지적을 당했다.
사실 나도 무신론자라 딱히 기도할 신이 없기는 했다. 그냥 오늘도 제발 무사하길 비는 것이지. 나는 그런 의미를 담아 어깨를 으쓱였다.
“흐음, 나한테 빌면 축복해 주지.”
주술사의 축복이라니, 왠지 무시무시해서 받기 두렵다.
하지만 킬리안은 내 은인이었으니, 나는 얌전히 그의 앞에 두 손을 모았다.
“킬리안 님, 이 모든 일이 끝나면 다시 방구석 폐인이자 행복한 쓰레기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가 계시했다.
“다음 생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