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악녀 메이커 27화
“아, 진짜 너무하시네.”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내리다니.
나는 장난스럽게 웃는 그를 잠시 째려본 뒤에, 이번에는 정말로 진지하게 빌었다. 계획대로 일이 풀리고 오늘도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부디 무사하길.”
소설을 뒤틀었으니, 오늘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작가인 나조차도 말이다.
킬리안은 내 기도를 듣고 손을 뻗더니, 이마에 엄지손가락으로 기호 같은 것을 쓱쓱 그리기 시작했다.
‘사제가 성호 긋는 것 같네.’
은은한 황금 빛무리들이 반딧불이처럼 피어오르다가 사라졌다. 그가 방금 주술을 썼다는 증거였다.
나는 그 광경을 잠시 신기하게 지켜보며 아직도 동동 떠다니는 빛을 잡기 위해 허공에 손을 휘저어 보았다. 물론, 곧 신기루처럼 사라졌지만.
“뭐 한 거예요?”
나는 아직도 따스한 감촉이 남아 있는 이마를 문지르며 물었다.
“행운을 부르는 주술.”
“전 주술 안 통하잖아요.”
“원래 행운이라는 게 그런 거지.”
그래서 내게 행운을 빌어 준다는 거야, 아니면 행운 같은 요행은 바라지도 말라는 거야, 뭐야.
‘알다가도 모를 사람 같으니.’
나는 의뭉스럽게 대꾸하는 그를 가늘게 뜬 눈으로 보다가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선문답을 주고받은 꼴이었지만, 덕분에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치맛자락을 털고 일어나 마차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까마득하게 멀리 보였던 황궁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는 잠시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막막하긴 하네요.”
원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게 인생이라지만, 소설 속 악역으로서 앞으로 벌어질 전개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다니. 눈앞이 깜깜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처한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막막해도 할 수밖에 없지.
킬리안은 살짝 흐트러진 내 옷매무시를 다듬어 주며 말했다.
“가서 보란 듯이 예언을 망쳐 버리고 와. 네 인생이 누구 뜻대로 굴러가는지 신에게 똑똑히 보여 줘야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쉰 뒤 몸에 붙은 긴장을 완전히 털어 내듯 어깨를 들었다가 내렸다.
“당연히 그럴 거지만요.”
뻔뻔한 발언이 불쑥 입술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킬리안의 세뇌 교육 덕분에 자신만만한 말투가 완전히 입에 붙어 버린 탓이었다.
“당연히 그럴 거야?”
그러자 킬리안이 눈가를 반달 모양으로 곱게 접으며 되물었다. 기특한 짓을 아이에게 ‘어이구, 그랬어요?’ 하고 귀여워하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팔불출처럼 굴기에 나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킬리안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것처럼, 아무래도 그한테도 내 호구가 옮은 것 같았다.
“그것참…….”
그때였다.
킬리안이 천천히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 내고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갑자기 진지해 보이는 시선이 집요하게 나를 훑었다.
“왜, 왜요.”
말랑말랑했던 분위기가 급작스럽게 돌변해서 절로 긴장했다. 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더듬거리자, 그가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욕심나게.”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연신 눈을 깜빡였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뭔 욕심이 난다는 건지 모르겠다.
얌전히 그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으나, 킬리안은 언제 제가 그런 말을 했느냐는 듯 내게서 자연스레 시선을 거뒀다.
그의 눈동자에 노골적으로 일렁이던 소유욕이 순식간에 갈무리되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나 혼자 혼란 속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 뭐였지. 잘못 들었나?’
순식간에 지나가서 그냥 내 착각일 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했군.”
그 무렵, 아까부터 조금씩 속도를 줄이고 있던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섰다.
어느새 완벽한 집사로 돌아온 킬리안이 마차 문을 열고 나가 내게 정중하게 손을 뻗었다. 매번 보는 거지만 그의 빠른 태세 전환과 능청맞은 연기 실력은 늘 감탄스러웠다.
“발밑 조심하십시오.”
“앗, 네. 아니, 응.”
그가 방금 한 말의 뜻을 생각하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싸움이 될 텐데 넋을 빼고 있을 수는 없지.
나는 자칭 집사의 에스코트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그의 단단한 팔뚝에 팔짱을 꼈다.
수확제.
소소하게 열리는 무도회였다면 초대장과 이름만 대면 통과였지만, 이런 기념일을 기리는 공식적인 무도회에는 파트너가 꼭 필요했다.
소설에서 아일라가 누구를 파트너로 데리고 갔는지는 몰랐다. 거기까지 세세한 설정을 짜진 않았으니.
하지만 소설과 다르게 지금까지 그 누구와도 엮이지 않았으니 따로 정해진 파트너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니 파트너는 자연스럽게 집사인 킬리안이 되었다. 정체야 어떻든 일단 표면상 아게이트 자작 가문의 차남이었으니, 초대장이 없어도 내 동행으로 무도회에 참석할 자격이 충분했다.
“메르텐시아 영애. 신원이 확인되셨습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본궁 앞에서 명단을 확인하고 있는 시종장에게 초대장을 내밀자 그가 내게 아는 척을 해 왔다.
물론, 반가워하는 기색은 절대 아니었다. 힘이 들어간 턱과 경련하는 눈가가 ‘그동안 네가 잠잠해서 살 만했는데 왜 또 왔니’ 하고 묻는 듯했다.
대놓고 날 꺼리네.
하긴, 황태자를 짝사랑하는 아일라가 황궁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소란을 피웠을 테니 얼굴만 봐도 진절머리 나겠지.
“동행하신 분의 성함은?”
그는 나를 얼른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다는 듯, 명단에 코를 박을 것처럼 시선을 고정하며 물었다.
“아게이트 자작의 차남, 세바스티안 아게이트.”
“세바스티안 아게이트…….”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응?’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게이트 가문에 그런 이름은 처음 듣습니다. 그리고 차남이라니…… 아게이트 자작에게는 자녀가 하나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시종장의 날카로운 시선이 의심을 가득 담고 가늘어졌다.
그는 근위대를 부를 생각인지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손이 반도 올라가기 전에, 킬리안이 그 손을 감싸 쥐고 그와 시선을 맞추는 게 먼저였다.
“쉬이, 급할 거 없잖아.”
예리한 빛을 띠고 있던 시종장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혼탁하게 풀렸다. 그와 동시에 킬리안이 목소리를 낮춰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원래는 먼 친척이었으나 최근 양자가 되었다, 정도로 해 두지.”
……그건 좀 대놓고 말도 안 되지 않나. 자녀가 없는 집안도 아닌데 갑자기 이렇게 큰 양자를 왜 들여.
“……아, 그러시군요.”
나는 조금의 성의도 들어 있지 않은 급조된 설정에 황당했으나, 시종장은 킬리안이 무슨 헛소리를 하든 순순히 받아들이고 수긍했다.
저 능력은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그럼 된 건가?”
“네, 신원이 확인…… 아니, 잠깐. 자작이 양자를 들였다면 제가 소문을 듣지도 못했을 리가 없는데…….”
생각해 보니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시종장의 눈은 초점이 돌아왔다가 흩어지길 반복했다.
하지만 킬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느긋하게 말을 건넸다.
“네 이름은?”
“……휴버트 킹스톤.”
“깨끗한 마음이라는 뜻이군.”
“그렇다더군요.”
“저런, 본질이 추악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마음이 깨끗하길 강요하다니, 너무들 하는군.”
킬리안은 정말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면서 더욱 은밀히 속삭였다.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멋대로 끝없는 욕망을 주고 시련 운운하며 구속하는 건 미련한 짓이야.”
“평생을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가엾게도.”
“젠장. 어쩔 수…… 어쩔 수 없잖아요. 저 같은 반푼이가 아무리 발악해 봤자 여기가 한계였는데…….”
휴버트는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듯 이를 갈면서 욕설을 읊조렸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깨끗하길 강요받아 온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그래도 꽤 목마른 눈빛을 하고 있군. 네가 지금 원한다면 오아시스까지 가는 길을 안내해 줄 수 있어.”
킬리안은 악마처럼 나지막하게 속삭인 뒤, 매혹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분위기로 봐선 오아시스가 아니라 오아시스라는 이름의 불지옥으로 유인해서 던져 넣을 것 같았다.
“뭘 갈망하고 있지?”
“…….”
“밑바닥까지 토해 내 봐.”
휴버트의 의미 없는 저항도 거기까지였다.
우리는 아무런 의심도, 경계도 없이 본궁의 입구를 통과했다.
* * *
‘저런 능력이 있으니 평범한 사람들이 더 하찮고 만만해 보이겠지.’
킬리안의 능력이 신기하고, 때로 편하겠다 싶기도 했지만 부럽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인간 혐오나 염세주의에 빠질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도 중요한 건.
“능력이 꽤…… 유용해 보이네요.”
“왜, 이제야 욕심이 나?”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며 내가 속삭이듯 말하자, 킬리안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 말하기에는 늦어도 한참 늦은 거 아니냐는 말투였다.
“음.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인간의 탐욕을 날것 그대로 보게 돼서 꺼림칙하긴 한데, 욕심이야 나죠.”
“명하신다면 언제든지 유용하게 이용하실 수 있을 텐데요. 지금이라도 원하시면 사용하시지요.”
“갑자기 그렇게 말하니까 왠지 함정 카드 같은데…….”
선뜻 돌아오는 킬리안의 대답에 나는 망설이듯 말끝을 흐렸다.
유용해 보이기는 하다만 그게 큰 도움이 될까?
킬리안은 언제나 내게 유리한 것만을 권하지는 않았다. 때론 그게 사회 윤리적으로 크게 어긋난 것이기도 했고, 지금 당장은 좋아 보여도 훗날 독이 되는 것도 있었다.
나는 의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저 시험하시는 건가요?”
그러자 그가 ‘눈치가 빨라졌네.’ 하고 속삭이며 그림처럼 빙긋 웃었다.
“홀로 설 수 있게 분별력을 길러 주는 거지. 이용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어디에 어떻게 써먹을지 빨리 파악할 수 있는 게 좋아.”
으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는 복도를 걸으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킬리안의 능력을 옆에서 꾸준히 관찰한 결과, 대충 어떤 원리로 작용하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눈을 마주쳐 원하는 걸 억지로 토해 내게 한다. 그리고 대가를 받든 받지 않든 자신의 욕망을 말한 이상, 그의 말에 속절없이 휘둘린다.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어 하는 그들 내면의 추악한 욕망이 일종의 약점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뒤늦게 제정신을 되찾는다고 해도 그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치명적인 약점은 여전히 붙들린 상태고 욕망은 내면 깊숙이 남아 있으니, 그가 다시 작정하고 흔들면 충분히 휘둘릴 테지.
그의 말마따나 세뇌나 최면이 아닌 매혹에 더 가까운 능력이었다. 한 번 넘어가면 벗어나기 힘든 개미지옥 같은 그런 유혹.